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집단은 힘이 강력해질수록 그들의 이익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을 앞세운다. 촘스키는 언론의 덫을 고발했다. 언론이란 커뮤니케이션의 장(場)에 턱없이 높은 임금을 받는 언론인들 대부분이 공공시장을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의 월급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정보는 무엇보다 상품적 가치를 지닌 것이고, 영향력을 행사해서 부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며, 평범한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익 충돌의 무대라는 사실도 지적했다.
■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 선생님은 오늘날의 권력을 무엇이라 정의하시겠습니까? 권력의 중심은 부자 나라들에게 있습니다. G3, 때로는 G8로 일컫는 최강대국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과 국제기관이 공동의 이익을 이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습니다. 실제로 경제활동이 과점(寡占)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경제적인 힘을 지닌 소수 집단이 초강대국을 등에 업고, 때로는 국가의 정책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면서 일부 경제 분야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특히 세계무역기구(WTO)는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전쟁 무기와 다름없습니다. 세계무역기구의 목표는 기업의 경영자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니까요. 정부를 울타리로 삼겠다는 생각으로 다국적 기업들은 강력한 정부를 원합니다. 기업은 기꺼이 정부의 도구가 되었고, 정부는 기업을 앞세워 목적을 달성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업은 정부를 지배하는 폭군이기도 합니다. 기업이 정부의 정책 결정을 뒤에서 조정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 그렇다면 다국적 기업이 국가보다 막강한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세력의 힘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기준은 없습니다. 기업은 위험과 비용을 사회에 분산시키고, 기업 운영에서 대내외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은 독재적 성격을 띤 기관입니다. 현대의 다국적 기업들은 “유기적 존재가 개인에 앞선 특권을 갖는다.”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됩니다. 볼세비즘과 파시즘도 이런 원칙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요컨대 이 셋은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리를 인정한 전통 자유주의에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국가 정책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파괴하면서까지 다국적 기업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만, 국민 앞에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 권력은 피라미드 구조라는 속설을 믿습니까? 피라미드의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독재주의 체제가 아닙니다. 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민중이 조직화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 선생님은 한 집단의 사회 지배력이 커질수록 그 집단은 정치인과 언론인을 앞세워 권력을 강화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처럼 정교한 전략을 구사한다고 믿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정치 권력자들,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 홍보 관련 기업들에서 어찌 그런 전략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정교하게 꾸며진 전략의 결실이 바로 여론 조작입니다.
▶기업의 자율성이 보장될수록 빌 게이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금융자본의 힘은 정치 권력에서 나옵니다. 빌 게이츠의 힘도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컨대 그의 미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한 연방 정부가 쥐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가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는 한 지금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경제 현상은 독점이 아닌 과점입니다. 거대 기업의 입장에서는 과점 상태가 독점 상태보다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과점 체제인 경우 기업은 치열한 경쟁을 이유로 갖가지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현재 민간항공산업은 에어버스와 보잉이라는 두 거대 회사가 양분하고 있습니다. 두 회사 모두 엄청난 공공자금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두 회사의 비행기로 여행한다면, 십중팔구 민간용으로 개조한 군용 화물기나 폭격기를 타고 여행하는 셈입니다. 다른 경제 분야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글로벌한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언론계가 그렇습니다. 이런 실정에서 진실한 보도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자본주의는 없다 ■ ▶일부에서는 자본 회수라는 위협으로 국가 정책을 좌우할 정도로 금융자본의 힘이 막강하다고 주장합니다. 선생님은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71년에는 국가 간에 거래된 자본의 90퍼센트가 실물 경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금융자본은 문자 그대로 엄청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국가 간에 거래되는 자본의 95퍼센트 이상이 투기적 성격을 띤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략 20억 달러가 매일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투기 자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국민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모델을 대체할 경제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 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거대한 민간 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적 현실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제체제를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입니다. 그래서 연대 국가자본주의(Alliance State Capitalism) 혹은 기업중상주의(Corporate Mercantil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꼭 들어맞는 명칭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애덤 스미스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었던 학자들이 요즘의 자본주의를 본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금융 부문을 제외하면 우리 경제는 자유경쟁체제의 껍데기만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금융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경제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도 시장의 규제 장치가 마비된 결과였습니다. 반면에 생산체제는 금융체제만큼 탈규제화되지 않았습니다. 비교 자체가 어리석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공공분야는 여전히 국가의 주도 하에 있습니다.
▶IMF는 이런 경제 환경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IMF도 세계 경제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간 주역이 아닐까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해낸 주역입니다. 한 나라가 파산 상태에 빠지면 IMF가 재정 지원에 나섭니다. 그러나 그 돈은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와 대금업자, 쉽게 말해서 은행에 넘어갑니다. 위험한 곳에 돈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IMF는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투자자들은 인도네시아와 타일랜드처럼 위험한 나라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문제가 생기면 즉시 해당국의 공공자금이 투여되기 때문입니다. 모럴 헤저드(도덕적 해이) 현상이 심화되는 것이지요. 이런 체제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특별히 우려하시는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현재의 경제체제가 붕괴된다면 그 이유는 금융위기나 생태환경의 재앙일 가능성이 큽니다. 대중의 각성과 경계 이외에 현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경계심도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대중도 삶에 넌더리를 내면서 자포자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증권시장에서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거의 절반의 주식을 상위 1퍼센트의 주주가 보유하고 있으며, 80퍼센트의 주주가 지닌 주식 보유량은 4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경제정책 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가 발간하는 『State of Working America』에서 분명히 확인되는 수치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력이 경제를 지배한다. 마약에 관련된 탈법과 돈은 다른 형태의 탈법, 즉 다국적 기업들이 세금을 벗어나려 동원하는 기법들에 비하면 유치한 수준입니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영국의 버진 군도에 본사를 두는 것은 탈법이라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른바 회계의 최적화라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금이 적은 나라를 찾아다니며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행정적 조치입니다. 합법적 탈세인 셈입니다.
합법적 탈세는 연구해 볼 만한 과제이지만 권력의 핵심까지 건드려야 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달려든 학자는 없습니다. 마약에 관련된 자금의 약 50퍼센트가 미국계 은행을 통해 거래됩니다. 1980년 경, 마이애미 연방검사들이 불법으로 돈을 세탁하는 은행들을 조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마약의 황제’로 등극한 조지 부시 부통령은 이 작전을 서둘러 종결시켰습니다. 제퍼슨 몰리라는 기자가 이 사건을 보도하긴 했지만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경찰은 국경을 넘지 못하지만 마피아 조직에는 국경이란 개념이 없으므로 다국적 기업을 흉내낸다고 표현하면 옳지 않을까요? 강대국들도 국경을 무시합니다. 미국은 안데스 산맥 부근의 국가들에게 압력을 가해 코카(coca) 재배를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콜롬비아는 비행기로 코카나무 밭에 제초제를 뿌렸습니다. 그 와중에 주민들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코카의 재배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마약 문제는 수요가 근본 원인이지 공급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근원은 미국에 있는 것이지 콜롬비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만든 담배 때문에 아시아에서도 매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중국이 노스캐롤라이나의 담배 농장을 폭격할 권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회계 분산을 위한 거점이 확산되면서 회계분산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점들은 지리적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1999년 의회가 중국과 통상을 승인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약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된다면 미국은 중국의 금융시장까지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한국에게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국의 금융시장은 완전히 미국의 지배 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은행들이 연이어 파산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제 미국계 금융기관들이 한국의 은행들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 이제는 거대 기업이 권력의 중심이다 ■ ▶대기업은 자연스레 독재체제로 변하게 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본질적으로 독재체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20세기 초 미국의 연방최고법원은 기업에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런 판결은 독일 철학, 즉 유기적 조직체에 대한 신헤겔 철학의 해석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독재체제들 역시 이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새로운 무역협약이 맺어지면서 기업의 권리는 더욱 확대되고 기업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기업은 법원에 한 나라를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무역협정들이 존재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독재적 조직체, 즉 이미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지경까지 올라간 기업의 권리를 확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기업은 인간의 권리를 훨씬 넘어서 국가의 권리까지 누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 선생님은 참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여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해주는 근간의 하나가 아닐까요? 어느 정도까지는 맞습니다. 그러나 제한적 개념이기 때문에 나라마다 그 범위가 다릅니다. 미국은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체제의 파괴 공작에서 가장 앞선 나라입니다. 2차대전 종전 직후 미국의 여론은 급진적이었고 사회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당시 기업체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기업은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로 자본주의는 모든 미국 국민의 유일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국가와 권력 권력자에게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지배하고 비용과 위험을 국민에게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고안해낸 뛰어난 간계 중 하나가 ‘안보’입니다.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러시아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라고 겁을 줍니다. 이런 위협에 국민이 정말로 겁을 먹으면 국방을 위한 납세를 기꺼이 인정합니다.
국방은 강력한 국가를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강력한 국가를 갖게 되지만, 이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에게 국가는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미국은 의료혜택을 사회보장제도에 포함시키지 않은 유일한 산업국가로 남아 있는 극단적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 하지만 미국의 국내총생산이 놀랍도록 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경제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이 직접 소유한 부의 크기입니다. 경제순환의 마지막 단계에서 1인당 GDP를 계산하면, 유럽과 미국은 거의 같은 수준입니다. 1970년 이후로는 성장률이 눈에 띄게 떨어졌고, 임금도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하락하였습니다. 노동시간은 늘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평균 이상 성장을 기록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상위 1퍼센트는 상당한 이득을 보았으니까요. 특히 상위 0.5퍼센트는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아래 단계의 국민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이런 수치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운 나라입니다. 비교할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유럽에 비해 낮고, 노동시간은 모든 산업국가 중에서 가장 깁니다. 일본의 노동시간마저 추월했습니다. 게다가 유급 휴가가 없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 현실의 민주주의는 가짜다 ■ ▶인간이 가장 덜 나쁜 체제로 찾아낸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주장에 선생님은 동의하십니까?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체제가 아니라 가장 좋은 체제입니다. 서구 문명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 찬란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미국에서 공식화된 이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국민이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입니다.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국민은 투표권을 행사하며, 그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 줄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이런 권리를 행사한 후에는 집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어야 합니다. 국가를 성가시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는데요.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일랑 완전히 씻어내십시오. 정부는 국민의 것도 아니고, 국민에 의한 것도 아니며, 국민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지배계급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예컨대 텔레비전의 범죄물처럼 아주 단순한 수단을 통해서 우리를 그렇게 세뇌시켰습니다. 우리를 수단인과 쿠바인에게서 지켜주고 우리 경제를 지탱해주는 국가 안보는 어떤 비난도 허용하지 않는 철옹성입니다.
정부는 야만적인 무력의 사용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도 국민의 정신 통제까지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이를 위해 더욱 교묘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과 영국에서 홍보산업이 월등히 발전하게 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요즘 세상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이론이라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무조건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드주의처럼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학설은 일종의 종교로 미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설이 그 인물을 신격화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한 개인을 신격화한다면, 그것은 조직화된 종교에 입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도 마르크스를 신으로 떠받들며 숭배하는 일종의 종교였습니다. 마르크스가 19세기를 흥미롭게 분석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부정확하고 적용할 수 없는 생각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아닌 다른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상황이 견디기 힘든 지경이라면 국민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앞장서서 기존 질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할 것입니다. 특권을 누리는 지식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체제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은 법치국가인 우리 사회에서 목숨까지야 잃지 않겠지만 적잖은 고통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전보다 이런 파괴공작 때문에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언론과 지식인은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다 ■ ▶선생님은 인터넷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방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선전 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둘 모두입니다. 인터넷은 체제 밖의 소식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도구입니다. 뜨거운 논란의 주역인 인터넷은 원래 공공자금으로 개발된 것이지만 1995년에 민간 기업에 이전되었습니다. 펜타곤과 국립과학재단의 소유였을 때 인터넷에는 어떤 제약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민간 기업으로 이전되자마자 기업들은 이 유용한 도구에 대한 대중의 접근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거대한 시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인터넷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려 합니다. 인간의 소외를 더욱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말입니다. 결국 대중이 이런 음모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인터넷의 미래가 달라질 것입니다.
▶『조건 동의』에서 선생님은 언론의 글쓰기가 전체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글을 해독해내면 글의 방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언론 보도에는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가령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라는 토론회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열린다면,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갖는다면 주제 자체가 잘못 선정된 것이라고 항의합니다. 달리 말하면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침략자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남베트남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남베트남을 보호한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냐는 식의 토론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미국은 베트남을 ‘보호’했습니다. 따라서 이 ‘보호’가 정당했고 합법적이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 뿐, ‘공격’이 정당했고 합법적이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대다수의 미국인은 베트남 전쟁이 단순한 ‘실수’가 아닌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인 전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베트남인이 희생되었느냐고 물으면 대략 10만 명쯤 죽었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로 30만 명 가량의 유태인이 희생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모두가 독일에 문제가 있다고 선전공작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베트남이 화제로 오르면 희생자의 수는 관심의 대상도 아닙니다.
▶ 커뮤니케이션의 속도 경쟁으로 기억력이 떨어지고 비판정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것이 목표라는 소문도 있는데요. 속도 경쟁 때문이 아닙니다. 깊이가 없는 커뮤니케이션 탓입니다. 신문을 한 달 뒤에 보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이나 한 달 뒤나 똑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신문을 일주일이나 한 달 뒤에 읽더라도 다른 소식들이 그때 놓친 소식을 보충해 주게 마련입니다.
속도는 사건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