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호치민같은 지도자들이 부재한 대한민국과 인류의 지도자 상

YOROKOBI 2008. 11. 23. 07:55

호치민같은 지도자들이 부재한 대한민국과 인류의 지도자 상

 

베트남 인민의 영웅 호치민은 아시아 피압박 민중들에게 불멸의 전사로 아직도 가슴속에 살아 있다

 

1969년 9월 3일, 호치민은 격정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호치민 그는 죽어서도 아시아 피압박 민중들에게는 희망을, 총칼로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 온 세계 열강들에게는 충격과 좌절을 안겨준 불멸의 상징이다. 색 바랜 노동복에 왜소한 체구. 마른 발엔 언제나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었던 호치민. 그의 남루한 초상 앞에서 베트남인들은 언제나 숙연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멈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호치민은 단 10분, 아니 5분만이라도 인민들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의 영웅 호치민을 방부 처리해 영원히 전시 보관하고 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 보복을 하지 말고, 자신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준 소수민족을 배려하라는 유언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지켜졌다. 적을 용서하고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관용과 통합의 리더십은 오늘날 베트남을 일으켜 세운 힘의 원천이 됐음은 물론이다.

호치민이 작은 체구를 던져 구하고자 했던 베트남의 역사는 외세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였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민족은 역대 중국왕조의 동화정책에 반항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정책에 대한 해방투쟁을 줄기차게 벌여왔다.


성조기를 앞세우고 싸운 전쟁에서 져 본 일이 없다는 미국 군대의 오만은 베트남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미국 군대는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옳은 편'에 서지도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자기네가 하는 일이 무조건 옳고 또 이긴다는 미국인의 대국주의와 맹목적인 자기 과신에 경종을 울렸다.

베트남 민족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들은 세계 최장 미국을 물리쳤다는 긍지를 지녔으며 옛 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혁명 1세대가 집권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아직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찾아볼 수 없으며 국민들의 교육수준과 근로의욕도 매우 높다. 말하자면 장래성이 있는 젊은 나라라고 하겠다. 만약 우리 정부와 국민이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계속해서 외면한다면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를 이 나라와는 결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 베트남은 '우리의 추한 얼굴을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다.

 

호지민은 죽으면서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비롯한 몇권의 책이 유품의 전부였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다른 소지품은 못 챙겨도 지도자와 관리들의 청빈한 공직윤리와 국민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 <목민심서>는 꼭 챙겼을 정도로 그는 이 책을 아꼈고, 다산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덕분에 목민심서는 베트남 공무원들의 지침서로 채택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세계 최강국 미국을 연이어 격퇴시킨 혁명가이자 불멸의 용사 호치민. 베트남군의 수장이자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면서도 그는 이처럼 평생 스스로를 낮추고 검소한 민중의 삶을 살았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호치민의 지도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인격에 대한 베트남 인민들의 신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오랜 투쟁 경력뿐만 아니라 호치민 자신이 보여주는 절제된 권력에 기인한다. 다른 혁명지도자들과는 달리 그는 '권력의 부패'에서 언제나 자유로웠다.

또한 그의 소박함과 친근함은 그가 인민들의 '호 아저씨'로 머물 수 있게 만든 지도력의 원천이었다. 그의 성실한 지도력은 많은 사람들, 특히 베트남 인민 자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토록 강인한 지도자임에도 그의 모습은 언제나 따뜻하고 인자했고, 그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노구를 이끌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병사들과 함께 모래주머니를 나르던 호치민. 그의 품에 안긴 어느 소녀가 그의 수염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는 데도 그저 웃고만 있던 할아버지. 온몸으로 외세에 저항한 혁명가이면서도 베트남 어린이와 농민들로부터 이웃집의 '호 아저씨'로 불렸던 호치민. 그래서 베트남 인민들은 여전히 그의 후덕한 모습을 추억하며 37년이 지난 오늘 이 순간까지도 그를 '박호'(Bac Ho : 호아저씨)라고 부른다. 낡은 외투에 달아 빠진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기꺼이 '인민의 벗'이 되어주었던 것이다.[자료 끝]

 

자신도 밑바닥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으며, 고통과 아픔과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한 시절이 있기에 가장 낮은 자들속에서 약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최우선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지도자. 부정부패비리를 거부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지도자. 어머니의 마음처럼 국민들의 심정과 고통을 일치시키는 지도자.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고 자주적으로 민족통일을 실현하기위해 헌신할 줄 아는 지도자. 기아와 병에 신음하는 인류의 고통에도 마음아파하며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해결하기위해 애쓰는 지도자.패거리주의적이지 않고 편향적이지 않고 진실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 아는 지도자.부정부패한 기득권층들을 대변하지 않고 그들과 손잡지 않는 공의로운 지도자. 누구에게나 친구같은 친근하고 편한 지도자.....우리 대한민국과 세계의 지도자상이여야 한다!

 

[자료]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베트남 민중이 프랑스, 일본, 미국 군대와 싸워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데는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세계 현대사에서 이렇게 셋이나 되는 제국주의 나라와 싸운 예는 달리 없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하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도 베트남 민중은 이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 말못할 고초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베트남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으로 양심적이고 평화애호적인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전쟁은 유럽의 68혁명에, 미국과 일본의 반전운동에, 남미의 변혁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통일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베트남혁명은 러시아나 동유럽 사회주의혁명과 전혀 다른 중국혁명을 닮지도 않았다.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 대외정책을 가진 낡은 봉건국가에서 일어났다. 볼셰비키는 도시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다음 내정을 통해 반대세력을 제거했고, 그 권력을 지키느라 외국군대와 싸웠다. 동유럽은 나치군대를 밀어낸 소련군이 감독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체제로 넘어갔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배경으로 국민당 군대와 내전을 벌인 끝에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베트남혁명은 제국주의 군대를 상대로 해방전쟁을 치렀다.

성조기를 앞세우고 싸운 전쟁에서 져 본 일이 없다는 미국 군대의 오만은 베트남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미국 군대는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옳은 편'에 서지도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자기네가 하는 일이 무조건 옳고 또 이긴다는 미국인의 대국주의와 맹목적인 자기 과신에 경종을 울렸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이 흘렀다.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5천명 가까운 한국의 젊은이들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라에 가서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싸우다 죽었고, 수 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미군 비행기가 뿌린 고엽제 때문에 뒤늦게 병상에 눕거나 유전병에 걸린 참전군인들도 숱하게 많다. 만약 베트남 참전이 잘못이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과 가족들은 가슴이 더욱 아플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베트남 참전의 잘잘못을 덮어두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용맹하기로 이름난 따이한 부대'가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전선 쪽의 피해는 또한 어땠겠는가. 게다가 우리 군대와 기업은 한국남자와 결혼해 살던 베트남 여성들을 모두 버려 두고 황급히 빠져 나왔다. "패전하고 떠난 침략군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자란 그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그 수가 3만을 넘는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다.

 

베트남 근대사와 호치민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의 사고체계부터 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 냉전적 인식과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제3자의 위치에서 베트남의 역사와 호치민을 바라보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 국군의 월남 파병을 '성스러운 반공전쟁인양 착각하며 자랑스러워' 하는 문제도 그렇고, 베트남 전쟁의 결말을 '비극 또는 패망'이라는 표현으로 호들갑을 떨어온 서방 시각도 구린 냄새를 감추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베트남 인민의 역사와 그들이 처한 현실적 입장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베트남 인민의 민족해방과 분단된 민족의 재통일이라는 입장에서 베트남을 바라보고, 호치민을 기억하는 글임을 밝힌다.

혁명의 길, 해방의 길 위에서

호치민(1890~1969)은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 베트남의 60년 투쟁을 이끌었고,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베트남 현대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탁월한 정치적 지도력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유독 한국에서만 '베트남 공산당의 붉은 우두머리'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호치민이 존재했던 20세기의 역사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격동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제1, 2차 세계 대전, 공산주의의 태동과 소련 왕정의 붕괴, 중국의 공산화, 동구 공산당 집합체인 코민테른의 발족, 그리고 인도차이나 1, 2차 전쟁, 한국전쟁 등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그가 살아왔던 생애와 맞닿아 있다.

팽창주의라는 열강의 욕구 분출과 이데올로기의 상호 대립이라는 형태로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고, 그 와중에 호치민은 베트남의 해방과 통일을 위한 중심에 서있게 됨으로써 개인의 삶과 베트남의 현실이 운명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호치민이 작은 체구를 던져 구하고자 했던 베트남의 역사는 외세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였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민족은 역대 중국왕조의 동화정책에 반항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정책에 대한 해방투쟁을 줄기차게 벌여왔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은 호치민과 같은 베트남 지식인들에게 뼈아픈 교훈을 던져 주었다. 1917년 윌슨의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이 그 당시 유럽 백인열강들 사이의 세력 조절과 유럽 안전의 역사적 화근인 발칸지역을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1919년, 28세의 청년지식인 호치민은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원칙에 큰 기대를 품고 식민지민족을 대표한다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종전처리를 위한 베르사유 평화회의장에 들뜬 마음으로 찾아갔다. <베트남 독립을 위한 8개 항목>을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모인 어느 강대국의 지도자도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다른 식민지 민족의 대표들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겨우 스물 여덟 살 먹은 이 청년이 훗날 자기 나라 군대를 궤멸시킬 혁명지도자가 되리라고는 미국 윌슨 대통령도 프랑스 클레망소 수상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호치민에게는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의 본질과 베트남이 처한 현실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베르사유 평화회의는 베트남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파리에서 모스크바와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이후 호치민도 자본주의 열강에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했다. 1920년 일이다. 그리고 모스크바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하여 베트남해방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프랑스공산당을 엄중히 비판했다.

호치민은 1924년 중국 광동으로 가서 국공합작의 국민당을 지도하던 러시아인 고문 보로딘의 비서가 되어 중국혁명을 몸으로 겪었다. 그는 베트남의 노동자·농민 대중을 민족해방투쟁에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지식인들과 청년들을 대중 속으로 보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25년 '베트남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했다. 그는 광동에서 민중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할 청년 학생들을 교육시켜 국내로 들여보내는 한편, 베트남혁명을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타파하는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여 혁명의 진로와 방도를 밝히는 글을 반입시켜 국내의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을 사회주의 혁명사상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1927년 4월 장개석의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붕괴된 후에는 상해를 거쳐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그는 1930년 2월 3일 홍콩에서 혁명청년동지회의 영향력 아래 국내 각지에서 당 결성을 시도하던 여러 공산주의자 그룹을 규합하여 베트남공산당을 정식으로 창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앞길은 결코 평탄하지가 못했다. 대공황이 이 낙후한 나라를 덮친 데다가 가뭄과 홍수마저 매년 계속돼 각지에서 농민 폭동과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베트남공산당은 이 같은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1년 동안 1,500명의 당원과 10만명의 지지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식민지 당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농민 시위와 파업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프랑스 정부는 무자비한 백색테러를 휘둘러 1930~1931년 사이에 1만여 명의 '적색분자'를 체포하고 수백 명을 처형했다.

공산당은 중앙위원을 비롯한 간부들이 잇달아 체포되어 궤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혁명투쟁에 깜짝 놀란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허수아비 황제 바오 다이를 귀국시켜 민중의 불만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공산당이 지도하는 혁명적 민족주의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공산당은 1935년에 당을 재건했지만 여전히 약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1935년 코민테른 제9차대회의 결의에 입각하여 "세계 인민의 가장 위험한 적인 파시스트 제국주의자와 투쟁하기 위해" 사회주의혁명을 잠시 미루고 노동자·농민 이외에도 독립을 바라는 모든 계층과 연합하기로 노선을 바꾸었다. 중국공산당이 그 이전부터 집요하게 추구했던 통일전선전술을 베트남공산당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은 온건한 요구를 내걸고 각계각층의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항불투쟁을 정력적으로 벌여 나갔다. 때마침 유럽에서는 2차대전이 터지고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일본군이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고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했다.

공산당은 즉각 "불·일 제국주의 반대"라는 슬로건을 들고 민중을 궐기시켰으며, 달아나는 프랑스군의 무기를 빼앗아 통킹지방의 밀림에서 최초의 유격대를 조직했다. 서로 싸우는 두 제국주의 국가를 상대로 한 베트남 민중의 무장투쟁은 여기서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베트남의 게릴라부대는 우세한 일본군에게 계속 패배를 맛보았다. 베트남공산당은 중국 홍군의 경험 속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1.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및 일본 파시스트에 의한 이중의 억압 아래 놓여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공산당과 노동자·농민의 당파적·계급적 이익이 민족의 독립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독립과 자유를 찾지 못하면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어 당파적·계급적 이익도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다.
2. 각계각층의 민족혁명 세력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불러모으기 위해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조직한다.
3. "지주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구호를 철회하고 "제국주의자 및 매국노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배분한다"는 구호를 내건다.
4. 각 분야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하여 무장조직의 지도를 강화하고 게릴라 근거지를 건설한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결성한 베트민은 노동자·농민은 물론 민족 부르주아와 애국적 지주도 포함하는 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베트민은 각계각층 속에 '구국회'를 결성하고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면서 무장봉기를 준비해 나갔다. 이 때부터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의 무장투쟁은 1954년 7월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차이나 휴전성립 때까지 피어린 투쟁이 전개됐다.

 

1945년 5월 일본의 패망 직전까지는 프랑스 본국에 들어선 나치독일의 괴뢰수반인 비시 패전 프랑스 식민정권과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점령 일본군부 통치 사이에서, 그리고 그 양 세력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일본은 1945년 3월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바오 다이 황제를 앞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전황은 기울어 패망을 눈앞에 둔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직후인 8월 13일, 공산당은 일제 봉기를 일으켜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 전역을 점령하고 각지에 행정위원회를 설치한 다음 바오 다이를 쫓아내고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1945년 9월 2일의 일이다.

그들은 "인도차이나에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일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고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켜 나라의 주인으로서 연합군을 맞이하기 위해" 제때 '8월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인도차이나 제1차, 2차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서곡이 돼버렸다.

1946년 12월 22일부터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기까지 실로 7년 반의 전투가 이어졌다.(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도화선은 나치 독일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塗地)의 고배를 마시면서 사실상 전후의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한 프랑스가 화려했던 식민주의자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노이·하이퐁 등 대도시에 대한 전면폭격을 감행하면서 불붙었다.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맹위를 떨친 비행기, 장갑차, 대포를 막강 화력을 몰고 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군은 패색이 짙어 갔다. 호치민의 군대가 이미 거의 모든 민중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호치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농민들은 게릴라 부대에게 식량을 가져다 주었고, 도시의 시민들은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프랑스 군대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1954년 베트남군은 총반격을 개시하고 마지막 승부를 벌였다. 그것이 바로 세계 전사에도 기록된 유명한 '디엔 비엔 푸 전투'이다. 디엔 비엔 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면서 궤멸 당했다. 프랑스는 8년 전쟁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 무릎을 꿇었다. 결국 인도차이나전쟁은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휴전협정으로 종결됐다. 패전 당사자로 프랑스가 조인했고, 호치민 대통령의 정부로 되어 있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베트남 인민 전체'를 대표해 승리자로 조인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베트남은 남북이 없었고 전체 베트남은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인정되고 그 정부는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임을 식민통치국인 프랑스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점령하려는 의도로 세워져 1950년 2월 7일 영국과 미국에 의해 독립국가로 승인된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는 협정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제네바 휴전협정에서 합의한 조약 의무는 프랑스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즉 2년 후인 1956년 7월에 베트남 독립.통일을 위한 총선거 실시에 관한 모든 사항을 백지화시켜 버린 것이다. 만약 베트남 전역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할 경우 호치민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지도자로 선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트남 문제가 이후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중요한 원인이 된다. 베트남의 분단은 고착화됐고, 남베트남(월남)의 잦은 내란과 민중 탄압, 미국과 북베트남(월맹)의 개입과 그로 인한 10년간의 전쟁이라는 악순환을 가져온 1차적 책임은 프랑스에 있다.

제국주의를 몰아낸 베트남 영웅, 호치민

호치민은 이제 베트남 민중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그는 베트남을 독립된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던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미국은 1955년 10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프랑스를 섬기고 있던 베트남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 내고, '아시아의 처칠',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추켜세우며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앉혔다. 그에 대한 아이젠하워와 그 후 케네디 정부의 지지는 무조건적이었다. 그러나 고 딘 디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수많은 실정과 부정을 저질러 끊임없는 민중 봉기와 쿠데타를 겪어야 했고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그의 민중에 대한 독재와 폭정, 민중탄압, 경제·사회·문화적 부패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와 너무 닮았다. 이와는 달리 북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의 영도하에 꾸준 전재(戰災) 복구와 경제재건이 진행됐다. 남베트남에 대한 정치·경제·군사적 협상도 끊임없이 제의했으나 남베트남 정권은 그때마다 거부했다.

고 딘 디엠의 친미정권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부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하고 북베트남과 연계 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고 딘 디엠도 두옹 반 민의 군부 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2일 살해당하고 실각했다. 이때부터 베트남의 정국은 쿠데타의 악순환에 휩쓸려 무려 10여 차례의 쿠데타를 겪은 후 1965년 6월에는 장군 구엔 반 티우의 정권이 들어섰다. 티우 정권은 1966년 새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967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통령과 상·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1969년 2월에 공산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됐다.

 

이보다 앞서 1965년 8월 미국은 남베트남의 위기를 북베트남의 침략과 공작으로 규정하고,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의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구축함을 폭파시키고, '베트남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사건을 조작했다. 이같은 사실은 미 국방성 비밀문서(The Pentagon Papers)에서 '34알파작전계획'에 의해 북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하여 미군이 폭격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다.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 측 군대는 10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역을 쉴 사이 없이 폭격해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900만 톤으로 이는 2차 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전체 폭탄의 양보다 많았다.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됐다.(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그러나 호치민이 이끈 베트남군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살육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20년, 혹은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끝내 이길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호치민의 군대는 소련이 지원한 전쟁 무기와 전 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미군을 쉴 사이 없이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와 싸울 때 발휘했던 게릴라 전술은 더욱 빛났다. 호치민의 군대의 무서운 점은 포용력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참으로 놀라운 지도력이었다.

게다가 남베트남에 수립되었던 군사정권이 과연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독립주권국가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가했던 서방국가들도 이번에는 개입을 거절했다. 따라서 미국은 단독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처럼 미국의 대외정책을 무조건 추종하는 나라들만 병력을 파견했다.

50만 미군은 5만 한국군과 뉴질랜드, 호주 군대에다 50만 남베트남 괴뢰군까지 거느리고 북베트남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B52 폭격기로 북 베트남에 융단폭격을 가하여 하노이 정부가 휴전기간 동안 피땀 흘려 건설한 보잘것없는 공업시설마저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하노이를 비롯한 하이퐁, 남딘 등 북 베트남 경제 중심지는 '석기시대'로 돌아갔으며, 민간시설과 학교, 교회, 병원까지도 빠짐없이 공습을 당했다. 미군 비행기는 민간인에게 특히 큰 피해를 입히는 네이팜탄을 대량 투하했으며, 게릴라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살포한 7600만톤의 고엽제와 1760만 갤런의 제초제 때문에 울창한 밀림이 황무지로 변했다. 또한 최루가스탄을 사용하여 부락을 폐허로 만들고 핵심적인 게릴라 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전 세계는 숨을 죽이고 이 전쟁을 지켜보았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위력을 과시했고, 그 이후 발전을 거듭한 최신형 무기를 가진 세계 최강의 군대가 인구 3천만의 약소 민족을 목 졸라 죽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미국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미 백년씩이나 제국주의 군대를 맞아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해 온 베트남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이는 저항전쟁을 필승으로 이끌 원칙과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이겨냈다. 그들은 세 종류의 군대(민병과 게릴라, 지방군, 정규군)와 세 개의 돌팔매(무장투쟁과 정치투쟁, 적군설득공작)로 미국을 쓰러뜨렸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도 폐품이 돼버렸다.

미국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엄청난 비용을 퍼붓고 첨단무기를 들여왔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해방전선의 힘을 제압하지 못했다. 미군은 극도로 적대적인 베트남 민간인과 게릴라에게 24시간 포위되어 있었다. 식수조차 필리핀에서 실어 와야 했으며, 베트남인의 손을 통해 들어온 음식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라고는 통조림뿐이었다.

1968년부터 미국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관을 다수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1971년이 되면 대다수 사병이 교전을 거부하거나 회피했다. 반면 해방전선은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순식간에 복구해 냈다. 수백만의 농민과 노동자, 청년 학생과 지식인, 불교도와 산악 소수민족이 모두 자기편이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마침내 닉슨은 19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고 선언하여 전통적인 정치, 군사 간섭정책에서 한 걸음 물러설 뜻을 비추었다. 그는 전후 30여 년간 고집해 온 냉전체제를 일부 포기하고 데탕트(평화 공존)를 추구하여 1972년 중국과 소련을 방문했다. 그리고 1973년 2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보잘 것 없고 낙후한 약소민족과 협정을 맺고 30년 가까이 욕심을 불태웠던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1975년, 생전에 호치민이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켰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쟁취했다. 4월 30일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30년을 끌어왔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며, 남부 베트남이 해방된 날이며, 분단됐던 조국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 역사적인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