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의 반성
김재성 목사
개혁신학의 반성과 과제
오늘의 시대와 세상을 바라볼 때에, 신학은 교회와 말씀의 선포, 선교와 설교를 위해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먼저 대내적으로 네 가지 과제를 지적하여 보고자 한다.
첫째로, 개혁신학의 중요한 과제는 교회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가르침을 제공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진리의 탐구는 항상 인간의 변화무쌍한 속성을 보다 새롭게 파헤치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들은 전통적인 신학의 주제들을 탈피하고 다양한 현대의 문제들을 신학이 해결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교회의 목회활동 영역이 확대되면서 신학의 중심점이 이동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개혁교회는 단 하나의 신앙고백만을 강요하거나 채택한 적이 없다. 개혁신학은 개혁해 나가는 신학 (reformed theology is nothing other than reformatory theology)라는 정신을 염원하게 된 것은, 칼빈이나, 쯔빙글리나, 부써나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강요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끈임없이 갱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황청의 신학적 결정과 교황의 선포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고 있으며, 루터파 교회가 오직 하나의 문서, Book of Concord에 항구적으로 묶여져 있어서 신학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개혁신학은 교회의 진정한 개혁에 관심을 가진 신학이요, 교회 개혁의 과제를 연구하고 개발하여야 한다.
개혁신학의 과제는 그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 “Ecclesia 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해 나가는 교회다).
개혁교회가 개혁에 힘써 노력한다고 하면, 먼저 신학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theologia 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 전통과 갱신은 항상 같이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간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개혁은 영구적인 개혁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재림이 올 때까지 이를 계속할 것이므로, ”theologia 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 usque ad finem"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개혁의 방향은 종말론적으로 규정되어져 있다. 합동신학대학원의 설립 정신도 역시 바로 항상 개혁하는 교회, 개혁을 추구하는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합동신학대학원 20년사」(수원: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2000), p. 135: "합동신학대학원은 한국 교회 정치의 폐단을 체험하는 가운데 그 병폐인 교권주의와 지방색,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교회와 신학의 풍토를 개혁하려는 새로운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개혁하는 신학의 자세를 견지하여 생산적인 가르침을 창출하는 것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개혁주의 신앙 고백은 그저 입술에만 남아있을 뿐이요, 실제는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죽은 정통에 대한 개혁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외치고, 교수들이 건의하였지만, 끝내 대다수의 교계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합동신학대학원 20년사」, p. 146.
둘째로, 개혁신학의 영향력 제고를 위해서는 엘리트주의의 청산, 지식주의자들의 교만을 버려야 한다. 세계는 더 이상 개혁교회의 엘리트적인 신학을 달가와 하지 않고 있다.
개혁신학이 관심을 기울여온 내용이나 특징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갖추려는 노력보다는 실용주의 철학의 영향으로 그 결과와 효과에만 더 집착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개혁신학은 너무나 교만하고 편협하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의 칼빈주의자들은 매우 선별된 우월의식을 가졌고, 특히 예정론을 믿는 자들은 선택에 대해 지나친 과신에 빠진 적도 있었다. 특히 신학적인 우월감은 영적 도덕적 차별 의식을 심화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관용이 부족하고 상호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 (need of tolerance and mutual understanding). 따라서, 지나치게 지성주의적인 경향을 배격해야 하고, 엘리트 중심의 소수 신학 운동으로 흐르지 말아야 하며, 사랑에 인색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James M. Boice,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in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ed., David Wells (Grand Rapids: Eerdmans, 1985), p. 301-2.
셋째로, 교단이나 교회와 신학교 사이에 서로 긴장을 유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신학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개혁 신학이 과연 일반적인 성도들에게도 유익하고 효용성이 있는 것인가? 개혁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종종 개혁신학 무용론으로 치닫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목회자니까 신학은 잘 몰라도 된다, 신학이라는 것은 신학교 교수들만의 몫이 아닌가? 등의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개혁신학은 학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목회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항상 실천신학이 부족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점은, 신학이 교회를 돕는 것이라고 말할 때에, 신학이라는 명칭 하에서 설교를 쉽게 만드는 비법, 혹은 설교의 대지와 요지를 만드는 기술들, 언어를 잘 사용하는 요령들로 구성되어지기를 기대한다면 이는 매우 위험하고도 경박한 생각이다는 점이다.
설교의 기술과 방법이 신학에서 나와야 하지만, 설교 작성법이 신학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신학의 학문성만을 제고하려는 신학자들의 경향에서 긴장과 대립적인 오해가 빚어지고 있다고 본다.
신학이 일반 대학교에서 한 학과로서 가르쳐지고 있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전혀 교회와 교단과는 상관이 없이 제 나름의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에큐메니칼을 지향한다는 소위 현대 신학자들이 여러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의 교단을 지배하게 되면서, 신앙고백과 사도적 신조를 고수하려는 입장은 편협한 신학이요 미개한 신학이라고 일방적인 비난과 경멸을 일삼고 있다.
이런 일방적인 비판으로 인해서, 소위 복음적이라는 신학자들마저도, 개혁신학과 칼빈주의 신학을 외면하고 타협주의 혹은 협상적인 태도에 동조하고 있다.
물론, 수량 개념으로 진리의 정당성 여부를 저울질하려는 현대인들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으면서 현대 사회를 주도하는 영향력의 회복이 필요하다.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항은 교회 출석교인의 양적인 증가에 있다.
교회사역에서 능력체험이나, 권능을 받는 데 열심을 내는 교회들이 바른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상당부분을 이런 문제의 극복에 진력해야할 때이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가 잃어버린 모든 특성을 되살리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목회철학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과연 개혁신학에 입각한 목회를 한다면 소위 성공할 수 있는가? 의문이 많은 정도를 넘어서 아예 개혁신학에는 실천신학이 미약하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공개적으로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목회를 하는 교회 중에 부흥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고 도전한다. 아예 단정적으로 목회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신학교에서 배운 개혁신학을 가지고는 목회현장에 별로 도움이 안 되니, 우선 필요한 성경 각 권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교라야 효율적인 목회자로 준비시키며 좋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개혁신학은 표준문서들이 아직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좀 더 개발하고 밝혀주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신조들은 보충되고 개정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 조직신학이 발전되어야만 한다. 대부분 신조는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간명하게 진술되고 만다.
그리고 신조들은 대부분 교회의 회의를 거친 것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내포되어있다. 특히, ‘종말론 신학’ ‘정치신학’ ‘환경신학’ ‘하나님 나라의 신학’ 등이 확장되고 발전되어야 할 주제들이다.
Jürgen Moltmann, "Theologia 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 in in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Tasks, Topics, Traditions (Grand Rapids: Eerdmans, 1999), p. 135. 교회에는 초대 교부들의 시대부터 신앙고백, 신조, 교리문답의 형식으로 간단한 신앙의 원리들이 만들어져 왔다.
신학은 성경의 교훈들, 교리들, 교의들을 다루는 것인데, 이들이 모두 성경적인 진리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의학 (dogmatics)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떤 이는 조직신학이라고 한다.
교의란 ”교회의 진리들“, 교회가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고백한 것으로 좀 더 권위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의미다. 성경 가운데 주어진 진리의 체계를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조직신학자들은 주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서 해설하고 싶어지는 것이며, 성경의 맥락에서 이를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지 좀 더 주제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한다. B. B. Warfield, "Apologetics," in Studies in Theology (N.Y.:1932), p. 78.
그러나 개악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1925년의 미국 연합장로회 신조, 1967년 신앙고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한 대외적으로 개혁신학이 감당해야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이를 요약하여서 세 가지만 제시해 보고자 한다.
대외적인 첫 번째 과제는 변화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이단들에 대항하여 교회의 교리들을 더 정확하게 진술하고 성경적 진리를 더 온전히 진술해야 할 막중한 책무를 안고 있다.
성경 전체의 경륜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 이단에 쉽게 사로잡히고 만다. 오늘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구절만을 가지고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영성 운동의 혼돈이 점점 가중되고 있다.
목사의 임무는 양을 이리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날마다 헛된 신화와 끝없는 철학을 마주 대하여 이겨낼 수 있으려면 진리에 대한 확고한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사단과의 전쟁에서 적이 대포로 공격하면, 원자탄으로 투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단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제지하고, 초토화하는 공격을 가해서 막아야한다.
오늘날 이런 신령한 전투과제가 개혁신학의 과제로 산적해 있다. 두 번째로, 개혁신학은 포스트모더니즘, 탈현대주의로 가득 차 있는 학문의 시대, 즉 신학의 혼돈을 초래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전하는 과제를 이루어야 한다.
Cf. Thomas Oden, "The Death of Modernity and Postmodern Evangelical Spirituality," in The Challenge of Postmodernism: An Evangelical Engagement, ed. David S. Dockery (Grand Rapids: Baker, 1995), 19-33.
특히 오락문화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매스컴, 스포츠, 마약, 영화, 그리고 놀이 등 현대 문화 속의 오락에 대처해야 한다. Michael Welker, "Travail and Mission: Theology Reformed according to God' Word at the Beginning of the Third Millenium," in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Tasks, Topics, Traditions (Grand Rapids: Eerdmans, 1999), 136-152.
각종 현대 문명은 자극을 좋아하는 인간의 심리에 맞춰서 폭력과 도덕의 파괴를 부추기고 있다. 개혁신학은 무비판적으로 이성과 세속의 정신으로 혼돈하는 시대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불신사상의 도전 속에서 새로운 실재적 신학이 요청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도 부흥운동의 시대가 지나갔고, 감정의 시대가 지나가고, 고학력과 고소득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전통 교회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무수한 사상이 혼합되어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고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개혁신학은 말씀에 근거한 개혁과 갱신을 추구하는 까닭에, 신실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능력 있게 감화시키는 설교는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여러가지 세상의 재미와 오락에 빠지지 아니하고, 남들이 보고 듣는 것들에 따라가지 아니하게 만드는 설교야말로 매우 요긴한 것인데, 이를 효과적으로 어떻게 재보충 하느냐의 과제가 주어져 있다.
필자는 한국 개혁신학의 과제를 마지막으로 첨가하여 보고자 한다. 한국 개혁교회는 보다 더 ‘개혁신학의 본질이해’에 힘써야 하며, ‘교회연합의 신학’을 건전하게 추진해야 하고, ‘통일비전의 신학’을 개발하면서도, ‘세속화의 극복과제“를 안고 있다.
김재성, “개혁신학과 한국교회의 과제,” 「신학정론」제15권 1호 (1997):46-75. 그리고, 다시 세속화의 극복에 대해서, 한국 신학이 감당해야 할 더 구제척이요, 실천적 과제를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김재성, “21세기 한국복음주의 신학의 과제,” 세속화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대처해야할 사조는 과학적 실용주의, 상업주의, 현세적 물질주의와 기복신앙, 개인주의와 쾌락주의, 헬레니즘화한 현대 인본주의 신학이다.
첫째는 부흥운동으로 발전된 교회에 양적 성장에 상응하는 신앙의 성숙화 과제가 급선무이다.
둘째는 신비주의와 잘못된 성령론의 교정이다. 셋째는 국민의 소망을 헤아리면서도 정치와 사회 전반에 비전을 제시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결론
왜 신학을 해야만 하는가? 왜 신학이라는 과목이 존재해야만 하는가?
우리 개혁신학의 전통과 유산 속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분명하게 들어있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바른 도전과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확신한다.
신학은,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은,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존재해 왔다.
요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신학의 지망생들에게 성경을 쉽게 그 내용을 파악하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 책이다. 신학 지망생들이 개혁교회의 회중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꼭 알아야할 사실을 모아서 기술해 놓은 것이다.
첫째로, 신학은, 좁은 의미의 조직신학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알게 하신 것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 때, 복음은 우리가 명상하고 생각하는 것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신학은 항상 계시 의존적이다.
What is God? [quid sit Deus?] Men who pose this question are merely
toying with idel speculations. It is more import!!!ant for us to know of
what sort his is and what is consistent with his nature[qualis sit Deus].
What good is it to profess with Epicurus some sort of God who has
cast aside the care of the world only to amuse himself in idleness?
What help is it, in short, to know a God with who we have nothing to
do [negotii]. Rather, our knowledge should serve first to teach us fear
and reverence; secondly, with it as our guide and teacher, we should
learn to seek every good from him, and having received it, to credit it
to his account. Institutes, I.ii.1.
둘째로, 신학은, 개혁신학의 전통 속에서, 개인의 선호에 따라서 마음대로 자기만족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학자 개개인의 관심이나, 흥미나, 몰입되는 주제나 연구는 결코 신학의 기준에서 볼 때 건설적인, 긍정적인 호응을 얻을 수 없다.
신학이 추구하는 이해와 설명들은 모두 다 교회에 의해서 선포되고 고백되는 것이라야만 한다.
신학은 교회가 지켜온 믿음을 연구하며, 받아들여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만 한다.
셋째로, 신학은 설교를 강화시켜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개혁신학은 그저 교회가 지니고 있어야할 건전한 교리들을 모아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교회란 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남은 사역의 수행하는 도구로서 존재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교회는 이 사명을 설교를 통해서 수행하고 있다. 교회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들을 바르게 설교하고, 빠짐없이, 온전하게 선포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관성 있고, 설득력 있는 형식이 요청된다.
성경만 읽고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부 남녀 사역자들에게서 흔히 복음을 일부만 선택해서 전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상당수는 복음을 개인의 기복신앙이나, 현세에서의 행복으로만, 혹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차단하라’는 식으로 치우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양성의 해석에서, 삼위일체의 설명에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단들이 주장하는 가르침으로 양들을 호도하기도 한다.
한국의 대성교회 박윤식, 이명법의 레마 성경연구원은 대표적인 예이다. 신학의 연구는 복음을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선포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항상 그들의 사역의 중심이 되도록 가르친다.
능력 있게, 시의 적절하게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리 모두에게는 사람의 마음, 시대정신, 문화, 역사적 상황 등을 잘 파악하도록 요청된다.
신학은 바로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고백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게 하기 위해서 중대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전통이나 남의 이야기들을 무조건 되 뇌이지 아니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개혁하여 왔다.
설교에는 그 선포자의 신학이 담겨야 하며, 개혁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 선포에 촛점을 맞추어 오고 있다.
이 신학이 들어있는 설교, 그리고 설교자들을 위하여 부단히 개혁해나가는 신학이 우리의 과제이다.
넷째로, 신학은 믿음을 전제로 하며,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삼는다.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공허한 논리요, 수사학적 언어에 그치고 만다.
오늘의 많은 신학자들이 믿음이 없이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과목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더구나 신학을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윤리적 귀결이 없다면 이는 사람의 업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항상 크리소스톰이 준수하던 원칙, 즉 우리 철학의 기초는 겸손이다는 말을 극도로 좋아하여 왔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것도 역시 좋아하고 있다: 그는 “수사학자로서 웅변기술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첫째 되는 것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발음’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와 별개로 무엇이 두 번 째, 세 번 째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을 받을 때에, 역시 동일하게 대답하였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이 기독교 종교의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역시 ‘겸손’이라고 항상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John Calvin, Institutes, II.ii.11.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시100:5). 진리란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를 향하신 신실하심, 또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돌보시는 진실하심 속에 있다. 사람에게 있지 않으며, 자연에게 있지 않다.
개혁신학은 객관성과 주관성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관계를 중시한다.
개혁신학은 성경적이어야하고, 경험적이거나, 이념적이어서는 안된다.
신학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고백하는데서 이탈해 있으면서도 신학과목으로서, 교수들의 연구과제로서만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신학으로서 존재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정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심정에서 날마다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신학을 입으로, 논리로, 간단한 말쟁이가 되려는 연습으로 일정한 신학연구 과정을 거쳐가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결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요한 칼빈의 신명기 5:23-27의 설교에 보면 다음과 같은 호소가 있다. 만일 최일류 학자가 되지 못하면 (혹은 훌륭한 학생이 아니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없다.
“No one will ever be a good minister of the word of God
if he is not a first-rate scholar (or perhaps, a competent student)"
신학은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학문으로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학은 그 열매로서 결과를 입증 받는다.
따라서 단순한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생명의 학문이다. 또한 전인격적인 학문이 되어야 한다.
지식, 감정, 의지가 다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봉사이자, 이웃에 사는 사람에 대한 봉사의 학문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가 든든히 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신이 주어지게 한다.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똑같은.. 그러나 너무 다른 두 목사 → 김진홍 VS 허병섭 (0) | 2009.02.28 |
---|---|
어느 H교회의 목사의 글... (0) | 2009.02.14 |
잘못된 목사들의 이야기 (0) | 2009.02.06 |
여신도 성폭행 혐의 정명석 항소심 (0) | 2009.01.29 |
현대 교회를 향한 열 가지 기소장 - 폴 워셔 (0) | 2009.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