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저수지의 둑과 같습니다. 그 저수지는 제일 낮은 둑만큼밖에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한쪽 둑은 목회자입니다. 목회자가 자기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물이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기 성장과 개발에 부단한 힘을 써야 합니다. 다른 하나의 둑은 평신도입니다. 평신도를 잘 성장시켜 주지 않으면 평신도들 때문에 교인들이 또 빠져나갑니다. 그 다음 둑은 공간입니다. 예배 공간, 친교 공간, 교육 공간 등이 한계에 부딪히면 어느 정도 자라다가 성장이 멈추어 섭니다. 건축 비용 아낀다고 공간을 확대하는 일을 게을리하게 되면 공간의 한계가 오면서 그 교회의 양적 성장이 멈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이 부분에서도 타이밍조절을 잘해야만 합니다. 한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같이 성장시키는 일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도 언젠가부터 피부로 느낄 만큼 공간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때문에 생각 같아서는 당장 새 교회당이라도 건축하여 더 크게 도약해 보고 싶지만 주변 형편이나 교인들의 처지를 바라볼 때 결단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교인들이 너무 힘들어 할 것 같아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지금쯤 건축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간간이 있습니다만, 저의 믿음도 용기도 그것을 뒤따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생각다 못해 요즈음에는 있는 공간을 최대한 확장하고 허술한 부분을 보수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있는 교회당도 수리해서 쓸 실력이 없는 교회가 어찌 큰 새 교회당을 지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대부분의 교우는 “목사님, 잘 결단하셨습니다. 멋진 예배당 모습이 기대돼요.”라고 격려하며 건축헌금도 해주시고 일꾼들의 간식비를 보내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무엇이 못마땅한지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교회를 헐뜯고 비난하는 분들도 있다는 마음 아픈 소리도 들립니다. 교회나 당회가 결정한 일이 모든 교우들의 마음에 쏙 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한 번 결정하고 밀고 나가는 일에는 드러내는 불평 소리보다는 축복하고 조용히 기도해 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복음 전파입니다. 88올림픽 이후 한국 교회가 1천만 성도를 자랑하던 시절,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를 비난하고 목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교회 안팎에서 높아지더니 결국에는 전도의 열기가 식어 버렸습니다. 그 당시 매스컴마다 마치 의도라도 한 듯이 목사들의 비리와 교회의 부도덕한 모습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만심이 생기는가 싶더니 올림픽 한국 유치와 일만 달러 국민소득 덕택에 영적 관심도 극도로 퇴조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자랑스럽지 못하다면 전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하는 것이 복음전파의 또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합니다. 불평하는 무리가 많은 교회가 성장하는 예가 없습니다. 교회를 자랑하는 무리가 많은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예도 없습니다.
한번은 신도시 버스 종점에서 추운 겨울날 고등학생이 등교하기 위해서 버스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시동은 걸어 놓았는데 버스 운전사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직 버스 출발 시각이 안 된 것이겠죠. 시동을 켜 놓은 버스는 덜덜덜 떨고 있고 날씨는 춥고 출발은 안 하니까, 뒤에 앉아있던 학생이 화가 나서 한마디 했습니다. “아저씨 이 똥차 언제 가요?” 그때 아저씨가 돌아보며 하는 말씀이 “똥이 차야 가지!” 하더랍니다. 자기가 탄 차가 똥차면 자기는 똥이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를 보고 “개똥 같은 교회 다 있네…” 그러면 그 교회 안에 있는 자기가 개똥이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비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없습니다. 교인들이 자기 교회를 자랑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자꾸 자랑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됩니다. 자랑하려고 하다 보면 자랑거리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판하려고 하면 비판할 것이 한도 끝도 없이 보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비판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비판 투성이가 예수님이셨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비판받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비판하도록 내버려 두면 하나님의 교회의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비판할 입술의 에너지가 있으면 차라리 그것으로 예수님을 자랑하는데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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