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령의 은사와 진정한 영적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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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 내용 요약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영적생활은 은사체험을 통해서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 속에 모셔들인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도달된다는 사실을 때닫게 해줄 것이다. 이적적 은사들에 대한 바른 경해와 체험 중심의 신앙이 갖는 약점과 위험성을 명백하게 제시해준다.
제1장 당신도 은사 체험이 없는 자인가 '제2의 축복'으로도 불리우는 이와 같은 '더 이상의 체험'을 자기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충만함과 이적적인 능력을 알기 원한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요건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특별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은사 체험을 추구하는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보다 깊은 인식을 가지며 보다 완전한 찬송생활을 하며 저도를 향한 보다 강력한 욕구를 가지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보다 경거한 헌신의 자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점과 또한 은사 체험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망각한 자들이거나 하나님의 관심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자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그들이 걱정과낙담을 하며 심지어는 두려움 가운데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은사체험을 추구하는 자들이 예수님과 성경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침례'를 받은 체험은 일반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체험이다. 은사운동의 모든 긍정적인 면들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결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은사운동을 성서에 비추어 진단해 보는데 있다.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적인 원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날 부가적으로 더해주시는 계시를 "증거해 주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같다. 성서는 성령께서 오늘날 신자들을 감동시키시는 내용의 한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 영감의 의미 감동은 테오프뉴스토스로서 '하나님께서 숨쉬신'이라는 뜻을 갖는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에다 신성한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숨쉬신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벧후 1:21)의 의미는 선령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성서의 기자들도 완전히 성령의 통제와 방향제시를 받으면서 성서의 기록을 수행했다. 단번에 주어진 믿음의 도(유 1:3)의 정관사(the)가 오직 하나뿐인 믿음의 도라는 의미를 부여해 준다. 갈라디아서 1:23과 딤전 4:1의 '믿음'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단번에는 헬라어로 하팍스로서 모든 시대를 위해 행해진 어떤 일로서 지속적인 결과를 가지므로 결콘 반복될 필요가 없는 어떤 일을 의미한다. 믿음의 도에 관하여 세로운 교리가 나타난다면 아무리 그것이 논리적이고 그럴듯하다 할지라고 그러한 모든 새로운 교리는 거짓 교훈에 불과하다. '주신'은 제1단순과거 수동태 분사로서 과거에 완전히 끝난 행위가 더 이상 계속되는 요소를 갖고 있지 않는다는의미를 나타낸다. 믿음의 도가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서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자기 아들에 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교리 체례를 주셨다. 어떠한 새로운 교리나 새 계시도 필요치 않다.
2. 영감에 대한 현대적 견해 계속적인 영감이나 계속적인 계시를 인정하려드는 듀이 비글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이 있다. 찬송가는 다만 그것이 성서에 기초한 것일 때, 그리고 명확하게 성서를 보강해 줄 때 가치를 지닌다.
3. 계속적 계시를 주장하는 은사운동 로드만 윌리암스는 은사운동의 여러 현상이 발전적 또는 계속적 계시를 위한 논증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위험성은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조심스러운 고려와 영적인 분별이 진위를 가릴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은 언급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은사운동에서 나타나는 예언의 실예들이 성서와 동등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과 같은 내용의 주장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과거에 증거를 기록한 성서를 통하여 그리고 성서를 넘어서 말씀하신다고 논술한다. 어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들에 비해 덜 권위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의 유일한 기초가 된다는 원리 '오직 성서' 라는 모퉁이 돌을 포기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귀신의 침략까지도 당하게 될 수 있다. 사단의 속임수를 초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멜빈 핫지스는 예언의 소리는 무오하다는 개념은 많은 사람들을 혼한 속에 빠트렸으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것을 죄로 느낀다고 하며 새로운 계시에 대한 강력한 제한을 표명했다.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인식했다. 어떠한 해결 방법도 없는 것이다.
4. 종결된 정경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끝났다.
5. 정경의 선택과 종결 외경들은 역사적, 지리적, 신학적 오류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서의 수준에 이른느 어떠한 책도 발견된 일이 없다-한권도 없다. 모든 신약성서는 사도에 의해서, 또는 사도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것이 사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그 책이 교회에서 읽혀지는가? 초기 교회 다음 세?-교회의 교부들-가 그 모든 책들을 인정했는가의 문제였다. 성서가 마치 불완전한 것처럼 무엇을 더 첨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또 다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들은 언제나 사교와 이단으로 변했거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약화시켰다. 성서에다 무엇을 첨가시킬 때 그들은 사실상 무심결에 성서의 권위와 독특성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성서를 명백히 하기와 그것과 평행시킨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성서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명백하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그것을 주의깊게 근면히 연구할 때 그 의미가 이해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들을 돌로 쳤다. 신약성서에서도 역시 신자들은 영들을 분별하고 예언들을 분별하도록 권면받고 있다. 누구라도 아무말이라도 하고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논박할 권리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은사운동 추구자는 성령의 사역이 오늘날 교회에서 식어져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반대할 것이다. 그들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능력을부여할 수 잇는 기회가 없게 될 것이라고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이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 속에서 놀랍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도하심을 영감이라든지 계시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시와 찬미로 서로 화답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성서를 기록하는 것과 같은 상태는 아니다.
제3장 계시의 문제2 또 다른 계시가 이끌어 가는 곳은 어디인가? 주후 2세기의 몬타누스의 가르침에 따라 이 무리들은 모든 신자가 특별한 계시의 수단이라고 믿었었다. 몬타니스트들이 오늘날의 은사운동과 공통적으로 갖는 주된 교리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계속적으로 주신다고 믿는 점이다.
1. 로마 카톨릭의 계시관 카톨릭학자 가브리엘 모란은 교의적 전통과 교훈적 전통이 있다고 제시했다. 교의적 전통은 성서를 통하여 계시하신 진리를 말한다. 교훈적 전통은 성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서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성서 그 자체도 아니었다. '또 다른 성서' 였다. 카스퍼 쉬츠게이어(1463-1527)는 성령으로부터 친밀한 계시를 받는 일은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며, 일단 의심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려지면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온 가르침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성서와 전통의 동등성에 관해 진리는 부분적으로는 기록된 책에 기르고 부분적으로는 불문 전통 속에 포함되었다고 요약된 진술을 작성했다. 교회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교사와 목사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말을 할 때는 무오한 사도적 절대 권위로 말하는 것이다. 교훈적 전통과 제2의 계시로서 성서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이고 로마카톨릭 신자들에게는 의심없이 그 내용들을 믿도록 권고하고 있다. 은사운동 추구자들은 성령 안에서 죽음(Slain in the spirit)라는 말에 익숙하다. 성령 안에서 죽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의 전달자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건드릴 때 뻗어버리는 현상을 가르킨다.
2. 이성을 넘어선 신비주의 노르만 게이슬러와 윌리암 닉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온전하신 말씀과 인간이 만나도록 이 불완전한 매체(성서)를 사용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규정한다. 성서란 사람에게 어떤 체험을 갖게 할 때 영감된 책이라는 것이다. 에밀 브루너 등 신정통주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명제적으로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찰스 파라는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방법을 성령의 이해력이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이해력을 능가하는 이해력이요, 모든 인식을 능가하는 인식이요, 모든 확실성을 능가하는 확실성이요,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지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비주의 또는 20세기의 영지주의를 변호하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가 성서를 이성과 체험 이상의 것을 가져야 하는가? 지식을 넘어선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다. 성서는 확실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이해력을 가져다 준다. 왜 이해력 이상의 것을 가져야 하는가? 성서의 말씀이면 충분하다. 성령으로 충분하다.
3. 이단들과 성서 이외의 계시 몰몬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여호와의 증인, 암스트롱교, 통일교, 하나님의 자녀들도 오늘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를 대신하고 성서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4. 설명하기 어려운 계시의 방법 강신술자 에드가 캐이스로부터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 엘론 허바드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신다고 생각하는 많은 살인자들은 자기들이 일종의 신성한 계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5. 비올라 양의 계시 "그렇지만 그것은 성서의 내용과 부합되지 않는군요." "아니오, 그것은 다만 당신이 잘못해석한 때문이오." 하나님께서 이 부자로부터 많은 돈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자기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계시에 근거하여 성서의 내용과 모순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결론은 그녀의 능력이 귀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이었다.
6. '오직 성서'와 '성서 이외의 그 무엇' 은사주의자들의 신비주의와 주관주의는 너무도 귀중한 것을 상실하고 있다. 성서의 독특하고 중심적인 권위가 상실되므로 종국적으로는 아무런 실제적 내용이나 본질도 갖지 못하는 신비주의적 기독교로 전락해 버리게 될 위험성이 있다. 성서와 교리와 신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체험을 다룬 책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성서를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께서 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서를 외침으로써 기독교를 초성서적 오류로부터 구출했다.
제4장 해석의 문제1 성서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서에다 더 이상의 계시를 첨가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성서가 결코 의미한 바가 아닌 내용으로 잘못해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성경 구절은 우리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째, 성서의 내용을 적당히 해석해 버리려 하지 말 것. 자기가 얻고자 하는 반응을 위해 그것을 맞게 해석하기 쉽다. 둘째, 피상적인 연구를 피할 것. "이 말씀은 내게 이런 의미이고.."라거나 "..라고 말한다고 생각한다"라는 식은 통상적인 해석이라기 보다 적용에 가깝다 할 것이다.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근면해야 한다. 은사주의자들이 성서의 바른 해석을 위해 수년동안 연구한 훌륭한 신학자들과 해석학자들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흥적인 접근은 많은 경우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 셋째, 성서에 대한 영해나 우화적 해석은 어떻게 해서라도 피할 것. 성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기 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성서에다 집어넣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들은 결혼이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의 결혼은 저 나라에서 있을 결혼의 상징적인 것이며 따라서 대수롭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느혜미야는 인간성의 성벽을 재건하러 오시는 성령을 의미하며 왕의 못은 성령의 침례를 의미한다고 말하며 방언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성서가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바를 대신하여 우리의 생각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격하시키는 처사이다(고후 2:17). 예수님이 모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는 말은 허메뉴스오라는 단어인데 적절하고 질서있게 해석하셨다.
1. 건전한 성서 해석의 다섯가지 원리 첫째, 문자적 원리. 본질적이고 정상적 의미대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에 사용된 단어의 문자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스가랴, 다니엘, 에스겔, 이사야,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적 문단들을 대할 때 그것들 가운데 나오는 상징들과 숫자들이 문자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연구해야만 한다. 둘째, 역사적 원리. 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셋째, 문법적 원리. 사용된 용어와 문법적 구조로부터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헬라어 원전으로 공부한다. 만약 당신이 헬라어를 모른다면 좋은 성구사전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귀납적 성서 연구방법도 배우도록 하자. 넷째, 종합의 원리. 성서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개념에 기초한다. 다섯째 실천적 원리. 성서를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나로 무엇하기를 요구하는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교훈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성서가 가르치는 어떤 면에 관한 원리이고, 책망은 죄가 드러나며, 바르게 함은 죄로부터 변화를 갖는 것이고, 의로 교육하는 일은 새로운 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2. 더 필요한 한가지 성령의 조명없이는 그 모든 것들이 쓸모없게 된다. 성서의 기자들에게 영감을 준 성령 바로 그분께서 믿는 자들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조명자가 되실 뿐 더 이상 연구할 대상이 아닌 '새롭고 독득한 해석'을 우리에게 퍼부어 주는 어떤 매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는 일에 있어서 어떠한 선생이나 지도자도 필요치 않다고 말해주고 있는가? 우리가 성령을 모셨기 때문에 이단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진리의 차이점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준다(요일2:22). 성경의 모든 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절대적 보증을 해주지 않고 있다.
은사운동 추구자들은 "성서를 바르게 쪼개고 있는가?" 1. 성령 훼방죄의 의미 찰스와 프란시스 헌터 형제는 은사운동에 대한 비판은 성령을 모독하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를 범하는 것과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이적적인 역사, 곧 성령에 의해 행하신 것들을 사실상은 사단에 의해 행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할 상태에 처해 있다. 독특한 한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은사운동의 어떤 면들에 의문을 품는 다면 우리가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인가? 입증해 주지 않는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기꺼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면 어떠한 죄도 사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2. 히브리서 13:8이 은사운동을 증거하는 본문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아니 동일하시니라." 방언을 말하게 했다면 오늘도 같은 일을 하시며 또한 미래에도 그러한 일을 계속 하실 것이라고 논리를 전개한다. 문자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는 불변하시다는 것이다. 분명히 방언이 예수님의 어제의 사역의 한 부분은 아니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는다(고전 13:8).
3. 마가복음 16장의 약속된 능력 헌터 형제는 독사로부터 보호받는 것은 어떤 사람이 우연히 물렸을 때만 해당된다는 말이다. "모든 시대를 걸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나오는 다섯가지 표적을 모두 행할 수 있었는가?" 유일한 조건은 믿는 것 뿐이다. 그 표적들은 사도시대에 복음과 복음 전도자를 확인시켜 주는데 사용된 것들이다.
4.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음-무엇이 나아졌나? 의를 향하여 살았지 건강을 얻게된 것을 말하지 않고 있으며(벧전 2:24), 인간의 죄로 병든 영혼이 나음을 입었던 것이다. 이사야 53:4에서 육체적 치유에 대하여 말했던가? 영적 치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분이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고통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다. 그가 병든자를 고쳤을 때 그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의 질병으로 앓으셨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 그는 깊은 동정심 또는 애정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다. 그가 구해주려는 사람의 슬픔에 완전히 인격적으로 동참함으로써 그의 슬픔을 위로하셨다. (2) 죄를 위해 대신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했는데 죄-그는 이것을 매우 깊숙히 느꼈었는데-는 모든 악의 뿌리이며 하나님 아버지를 슬프시게 만든다. 주께서 우리의 질병을 지시고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셨다는 말의 이중적 의미는 이상과 같다. 우리의 육체적 재난은 그것의 원인인 죄가 우리를 떠나지 않는 한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사야 53:4,5이 이 두가지 의미를 연결시킨 모습을 주목하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라는 말 바로 다음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5. 말씀을 옳게 분변함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딤후 2:15)의 문자적 의미는 그것을 바르게 자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바르게 잘라야만 하는 것이다.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가? 체험이 더 중요한 근거가 되는가 아니면 성서가 말하는 내용이 더 중요한 근거가 되는가?
1. 논란의 출발점 : 성령의 침례 은사운동 추구자들의 신앙의 주요 특색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열심히 성령의 침례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력있는 기독교는 계속적인 체험에 있다고 믿게 하는 수문을 여는 것이다.
2. 에비 박사의 천국 여행 리차드 에비 박사가 죽었는데 천국에 갔다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천국의 향기는 특별히 제사의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제사의 주된 형태는 짐슴을 죽이는 것이지 고기를 불태운 냄새가 아니었다(히 9:22).
3. 기독교에로의 두가지 기본적 접근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계시에 의존하기 보다는 근거없는 체험을 모은 종교로 바뀌어 간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객관적 접근 방법과 개인적 주관적 접근 방법이 그것이다. 직관, 체험, 신비주의 등은 언제나 로마카톨릭 신학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진리로 여기고 주장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진리란 자신에게 발생한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1901년 1월 1일 방언을 하고 성령의 침례를 받았다고 믿은 아그네스 오그맨의 체험을 입증하는데 성서가 사용되었고 오순절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 주의 교회가 오랫동안 소홀히 다루었던 성서의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그네스 오즈맨이 체험을 가짐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4. 베드로가 은사주의자였던가?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변화산 상에서의 체험은 놀라운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입증함에 있어서는 그가 보다 신뢰할만한 것-성령의 감동을 받은 예언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하나님의 계시-을 가졌다는 것이다. 모든 체험은 반드시 보다 확실한 성경말씀으로써 확인되어져야만 한다. 많은 은사추구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 보다 더 많고 보다 더 나은 다른 체험을 갖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정서적 체험이나 다른 감각또는 다른 감정적 체험을 추구해야만 한다. 헨리 포로스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주님되심을 이적적인 표적들을 통하여 강력히 나타내실 것이라는 사실은 확신?게 예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전개한다. 그들은 사실상 성경에서 자신을 충분하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제자들은 체험을 했다. 이 모든 축복의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오는 것이지 이미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을 초월한 더 이상의 어떤 것을 추구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다.
5. 기초없는 열심 존 스코트는 그들은 열열하지만 기초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표현했다(롬 10:2). 공공연한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사고와 이해력의 활용없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니의 계시 전체는 사고와 지식과 이해력과 잘 조화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을 정서적 체험에 의존하라든지 체험을 갖고 그 체험들 가운데서 진리를 유출해 내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을 발견치 못한다.
6. 체험적 신학과 그 성장 방법 1) 실존주의 실존주의자에게 주된 관심거리는 그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자신에 대한 권위일 뿐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에게 진리가 된다. 체험적 신학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유산물이 아니다. 클라크 피노크는 사람의 두뇌 속에서 발생한 단순한 심리학적 사건이 복음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2) 인본주의 인간에게 충분한 시간과 교육을 제공하면 어떠한 문제도 인간이 해결할 수 있다는 철학이다. 실존주의와 이복자매격인 이 인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어떤 인물이라는 '자기확증'을 갖고 자기의 이름을 어디에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남겨두도록 권한다. 종국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며 절대관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간주한다. 3) 이교사상 앵거스는 "열광적인 상태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거나 하나님으로 충만해진다. 초대 교인들이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스스로 믿는다"고 서술한다. 유진 피터슨은 체험적 신앙이 가나안족의 종교였던 바알 사상의 핵심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알 신앙은 숭배자의 영적 능력의 수준으로 저락된 숭배사상이었다. 경전은 흥미롭고 특출하고 재미있는 것이어야만 했다. 애훼 사상에 있어서는 말씀이 있었다." 주관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체험은 장티브스처럼 전염되고 있다.
7. 바울이 체험을 의지했던가? 바울이 설교를 하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할 때 그가 자기의 체험을 설교나 교육의 중심으로 삼았엇던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을 권하더라(행 28:23). 신정통주의 학자들이 주장해온 내용은 성경은 그것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특정한 방법으로 했다면 "성경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딤후 3:15).
8. 성서를 위한 치열한 투쟁 "오늘날 점차적으로 보다 많은 시도되고 있는 것은 개혁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접근했던 것과 정반대가 된다. 복음적인 사람들은 신학이 성령으로부터 성서로 옮겨가야 하며 선서로부터 성령께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로드만 윌리암스는 무언가 발생했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생각해 버린다. 기독교 신앙의 여러 교리들과 관련시키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래리 크리스텐슨은 기독교 신앙이 체험에 근거한 것이며 신학은 다만 그 체험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만일 역사적인 기독교가 없었더라면 어떠한 확실한 체험도 없었다는 것이다. 체험이 역사적 기독교를 확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이적들이 오늘날의 신앙의 규범인가? "신약성서는 한 세대에 발생했던 것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세대에 발생할 것에 대한 청사진인 것이다"고 은사운동의 지도자 데이빗 듀플레시스는 말했다. 오순절 교파의 사람들과 은사운동 추구자들 모두는 하나님이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초대교회 이후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형식적이고 의식적으로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믿는다. 교회가 그렇게 되었을 때 성령의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거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오순절 교파와 은사운동 추구자들에 의해 다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주장을 부인하는 것은 죽은 정통성에 대한 의식적 표현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 하니님께서 이적을 사용하는 이유와 시기 1) 이적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를 전개시켰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 시대, 그리고 신약성서의 사도 시대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근본적인 계시를 주셨던 시대였다. 2) 이적 계시의 전언자를 확증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며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확증해 줄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행 14:3)." 3) 이적은 새로운 계시를 듣는 자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자와 안믿는 자 모두에게 확증시켜 주는데 유용했다.
2. 우리에게 매일 이적이 필요한가? 율법과 예언자와 신약서서가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는 끝났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삶과 마음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여전히 일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행해지던 표적과 기사와 신유 등의 일과 동일한가? 신자와 성령과 관계되어 오직 다섯가지 명령만 있다. (1)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2)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3)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4)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1:20), (5)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 이적을 구하라는 언급은 없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나(고전 14:22). 방언이 결코 믿는 사람들의 성장을 위한 은사가 아니라 그것은 언제나 복음의 진실성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적적인 표현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표적과 기사와 이적과 은사들을 통해 확증하신다. 신자들을 계도하기 보다는 말씀의 증거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특별한 이적적 은사들도 있었다.
3. 하나님은 바로 당신을 위해 특별한 이적을 베푸시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 어디에서도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이적와 표적을 나타내 주시도록 구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단순하게 성령으로 행하라거나 또는 다른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골 3:16)고 말했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적이 아니라 성서가 필요한 것이다.
4. 사도들이 독특한 이유 만일 그와 같은 일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인 것이라면 바울이 그런 식으로 자기의 사도직을 입증하려 한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사도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이유룰 들 수 있다.
1) 교회가 사도들 위에 세워졌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엡 2:19)은 사도 예언자일 것이라고 믿는다. 계속 기초 놓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2) 사도들은 부활의 목격자였다 3)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신 자들이다 히브리어로 어떤 사람이 사도를 뜻하는 살리아는 그 사람 자신과 동일한 것이다. 주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도가 되는 것과 주님의 몸인 교회에 의해 보냄을 받은 교회의 사도가 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목회 서신서들은 사도에 관한 언급을 결토 하지 않는다. 4) 사도들은 이적적인 표적으로 확증되었다 5) 사도들은 절대적 권위를 지녔다 사도들은 측별한 종류의 사람들이었으며 계승자가 있을 수 없다. 6) 사도들은 영원하고 독특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다 사도시대는 독특한 것이며 그 시대는 이미 끝났다.
바울은 자시 즉 어떤 육체적 질병을 치유할 수 없었다(고후 12:7-10). 포도주를 디모데의 위장병을 위해 사용토록 권고했다(딤전 5:23).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병 때문에 밀레도에 남겨두어야만 했다(띰후 4:20). 은사운동 추구자인 러셀 빅슬러는 "2천년 동안 어떤 의미있는 일을 전혀 행하지 않은 시시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자들이다"라고 말했다.
사도행전 2,8,10,19장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진상은 무엇인가? 1. 은사운동 추구자의 후차적 체험교리 그리스도인들이 개종할 때에 성령을 제한된 상태로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후차적인 체험으로써 "성령으로써,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의" 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독특성은 성령의 침례로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방언을 말하는 것이 근본적인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주었으나 성령 안으로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성령의 침례는 후차적인 체험일 뿐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1) 성령의 침례는 통상적으로 중생의 체험과는 다른 것으로서 후차적인 체험이다. (2) 근본적으로 방언이 그 표가 된다. (3) 진지하게 구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때와 다른 어느 시점에 성령의 침례를 후차적인 체험으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사도행전으로부터 조차도 완전하게 입증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존 스토트는 오순절 이후부터는 죄의 용서함과 은사 혹은 성령의 침례를 함께 받게 되었다고 추론한다.
2. 사도행전 2장에 대한 고찰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숨을 내시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은사운동 추구자들은 제자들이 오순절 날이 되기 오래 전에 이미 성려을 받았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오순절날에 성취될 약속 또는 언질이었다. 사도행전 1장에 성령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성령을 받았다면 능력을 이미 이미 그들이 받았을 것이며 그들이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성령이 오실 수 없다는 사실과 예수께서는 그가 승천하기 전까지는 영광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요 7:39, 16:7). 그 어떤 구절도 그들이 성령을 구했다는 언질은 주지 않고 있다. 단순히 약속의 성취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볼 때 성령(의 침례)을 구한 사람에 대한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사람이 믿는 그 순간에 임하셨다(롬 8:9). 바람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헬라어는 성령과 같은 단어이다. 강하고 급한 성령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들이 말한 방언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3000명이 구원을 받았다. 3000명의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했다는 기록이 없다. 메릴 엉거는 "오순절날의 사건은 단 한번 발생한 것으로 재차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새 질서를 일단 보여준 그와 같은 사건을 계속 발생하거나 다시 발생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고 기록한다. 은사운동 추구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방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기들이 말하는 방언은 경건의 생활을 위한 목적을 지닌 것이므로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면서 교묘히 빠져 나간다.
3. 사도행전 8장에 대한 고찰 만일 사마이라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교회를 유대인의 그것과는 별개로 시작했었다면 그토록 오래동안 지속된 경쟁적인 적대감은 영구화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로 하여금 사도들의 권능과 권위를 이해시키는 일 역시 중요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사마리아인도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아직 없고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포인데 이는 반드시 발생했어야 할 어떤 일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에서의 성령의 역사하심은 사마리아의 오순절 역사로 불리워질 수 없다. 사마리아의 사건은 성장을 의미했을 뿐 출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 사도행전 10장에 대한 고찰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방언이 일차적으로는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표적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것을 믿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 임한 동일한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부가적으로 사용하셨다. 베드로의 설명하는 모습은 매우 우스광스럽기도 하다. "형제들아, 미안하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로서 금할 수 없었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구원과 성령을 받는 일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5. 사도행전 19장에 대한 고찰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했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방언과 예언을 망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믿은 이후가 아니라 믿을 때라는 정확한 번역이 보여주듯이 제2의 축복의 흔적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이 성령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사실을 주목하라. 바울은 오순절날의 사건은 이미 지나갔고 교회가 이제는 든든하게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바로 그 순간 성령을 동시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베소에 있던 이 사람들의 경우 떨어진 교리가 성령의 침례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었음을 깨달았다. 왜 안수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그들에게 이제 마땅히 따라야 할 교훈이 요한의 교훈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이란느 사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했던 것 같다.
6. 규범이 아니라 사건 기록인 사도행전 죠셉 딜로우는 "사도들이 체험한 바는 사도행전이라는 과도기적인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서신서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안내서가 된다"고 제시했다.
7. 능력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활용할 것인가? 시몬은 능력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방법으로 그것을 구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능력을 원한다. 능력을 원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능력을 구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인간적인 노력으로서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범죄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령을 소유하지 못하면 결코 어떠한 능력도 얻을 수 없고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계속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계신다고 말을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침례를 받기 전까지는 그의 삶에 있어서 실제적인 능력을 받을 수 없다고 교묘하게 말한다. 미첼 그린은 "자기 능력을 자랑치 말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라. 모욕과 고난에의 인내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십자가와 그것의 부끄러움을 새로이 배워야만 한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을 산출하는 것이다(고전 1:18)"고 언급한다. 능력을 구하는 대신 자기들이 이미 받은 능력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기를 구해야 한다.
진정한 은사와 거짓된 은사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존 맥케이는 오순절 계통의 모임에서 나타나는 고도의 정서상태와 명백한 혼란 상태를 이상한 생명이라고 변호했다. 도날드 기는 영적 은사에 대한 강조를 오순절 체험의 원천으로 삼는다. 영적 은사와 그것의 사용에 관한 문제는 교회의 생명에 위기를 던지고 있다. 교회는 그 구성원 개개인에게 성령께서 내주하심을 믿는다.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은 성령께로부터 어떤 영적 은사들을 받았다. 이러한 은사들을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세상에 대한 강력한 증인이 될 때까지 그 몸된 교회를 세우고 개발시키는 일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엡 4:11-15).
1. 영적 은사에 관한 질문들 영적 은사들을 추구해야만 하는가?
2. 성령의 은사를 더럽힌 고린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시에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머무르면서 교회를 세우며 보호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라고 했으나 성령의 역사와 황홀경의 열정적인 활동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가졌었다.
3. 영적인 은사의 이교도적인 오용 영적인 조재로 보이려는 욕망 때문에 방언의 은사가 사사로이 이용되고 크게 악용되었다. 어떤 신자들은 황홀경에 빠져 떠들어대는 소리를 마치 그것이 참된 방언의 은사인체 ?다. 그들이 행하는 것들을 정상적인 인간의 능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신령한 은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4. 밀교의 생산지였던 고린도 바벨탑은 참된 종교를 인간이 처음으로 교묘하게 조직한 위조의 종교였다. 노아의 증손자인 니므롯이 바벨탑 건축을 계획하고 지휘한 우두머리 배교자였다. 밀교들도 침례를 통한 갱생 죄를 위한 희생제사, 축제, 금식 등을 포함하는 교묘한 의식과 예식을 갖고 있다. 밀교를 믿는 자들은 또한 자기 훼손과 매질을 행했다. 그들은 또한 순례, 공적인 신앙고백, 헌납, 경건한 세정식,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한 참회 따위의 종교 행습을 믿고 행했다. "나는 매우 행복했다... 전에 그러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가?
5. 고린도 교회의 진면목 유익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롭다고 고린도전서 11:17에서 기록했던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말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환각적으로 중얼거리는 능력이 아니다. 그렇나 현상은 발생하고 있는 모든 신비한 것을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정하에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6. 어떻게 성령의 은사를 구별할 수 있는가? 은사주의자들의 고린도 교인들의 경우처럼 육신적인 방탕함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신령한이란 말인 프뉴마티콘의 의미는 "성령으로 특징되다, 도는 성령으로 통제되다"가 된다. 성령에 의해 통제되거나 성령으로 특징되는 어떤 것에 대해서라면 바울은 그 형제들이 무지한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교회가 영?인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서는 성숙해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린도전서 12:2을 의역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이교도들이 행하는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곤 했으며 귀신에 의해 그들의 밀교에서 행하는 황홀경에서 끌려갔었다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황홀한 경지에서 여러가지 활동 가운데로 끌려 다녔지만 그러한 것은 전혀 진정으로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스스로의 자제력을 상실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믿는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의 회중 가운데서 일어서서 성령의 은사를 나타낸다고 하면서 예수를 저주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고전12:3).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에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를 떠났기 때문에 예수는 저주받은 죄인으로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리 부활에 관하여 이와 같은 혼란을 가졌던 이유는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영과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각각 분리되었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라는 말의 희랍어 단어는 큐리오스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는 주시다"라고 말을 할 경우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된다.
7. 귀중한 것이 위조 당한다. 성서를 그르게 해석하고 잘못되거나 약한 신학 위에 신앙행습의 기반을 둘 경우 쉽게 문제 가운데로-영적 은사에 대한 위조와 환상적이고 황홀한 체험을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이는-빠져들게 된다.
성령의 침례가 사건인가 감정인가? 많은 변호자들은 순종, 기도, 회개, 겸손, 무죄함, 자기정결, 헌신, 자기겸양, 모든 것을 떠남, 완전한 헌신함, 포기, 기다림, 믿음 등과 같은 행위들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 은사를 받으려면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브루너는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 은사를 하나님께 간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기억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라는 조언을 기억하게 된다"고 기술한다.
1.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인 교회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반면 이제 또 다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모두의 몸에 자신의 성육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가능하다.
2.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룸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몸을 이룬다는 사실이며 또 다른 한가지는 우리 모두가 한 성령을 마시로독 만드는 그 몸의 내적 생명에 관한 생각이다. 보다 정확하고 신약성거 전체의 문맥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번역은 by 또는 with 이다. 즉 우리는 성령에 의해 또는 성령으로써 침례를 받는다는 뜻이 된다. 이 구절의 문맥으로 비추어 볼 때 적절한 번역으로 볼수 없는 단어 중의 하나가 of, 즉 성령의 침례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인 성령의 침례라는 말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과 불로(마3:!1-12)." 은사주의자들은 불이란 오순절날에 나타난 혀 같이 갈라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심판의 불, 곧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오순절날에 임했던 불의 혀 같이 갈라진 것이 겨와 같은 것을 태우는 그런 종류의 불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즉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될 사람과 ?디 않을 사람이 있게 되는데 그들은 지옥 불에 들어가도록 정죄된 자들이다.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명백하게 침례를 베푸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요1:33). 성서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침례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침례를 베푸시는 분은 결코 성령이 아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사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자기들의 메시아를 바라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개와 자신의 침례를 동일시 하셨기 때문에 확실하게 이해된다. 성령의 침례는 사건이지 우리의 정서적 감정과 관계되는 체험이 아니다.
3. 성령의 침례의 의미 영적 침례를 언급하는 것으로 사용된 희랍어 단어이다(롬 6:3-4, 갈 3:27). 제2의 체험이있다고 주장할 경우, 구원이란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그 모든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되며 우리가 아직도 무언가 좀 더 필요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생수의 강을 얻기 위해 별도로 성령의 침례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생수의 강은 우리가 믿는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그 순간 이미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다. 성령의 침례를 받는다거나 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되는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성서 어디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또는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성서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권면하는 장면을 찾아 볼 수 없다(요20:22은 명령이 아닌 약속). 바울은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침례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과거시제를 사용했다.
4.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침례 성령께서 오순절날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분께서 계속 새롭게 임하셔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매주 또는 격주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순절의 성령감림 사건이 계속적으로 발생해야할 필요가 없다.
5. 성령의 침례와 충만의 차이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그 다음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입었다. 오순절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다. 그런 다음 성령께서 그 신자들로 하여금 능력있는 증거를 할 수 있도록 충만케 하셨다. 성서 어디에서도 성령의 침례가 늦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성서 어디에서도 방언을 말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무리들과 어울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을 알 수 있는 한가지 단순한 방법은 주님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자원이 하나님의 생명 속에 있다.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충만하고 완전하게 받았다. 성서가 성령의 침례를 받는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는 오직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으로 이미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구하라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행해지고 있는가? 네 가지 일시적인 표적의 은사들은 이적, 신유,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이었다. 이 네가지 표적의 은사는 사도들의 신빙성을 높여주며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알도록 해주는 독특한 목적을 지녔었다.
1. 성서적인 이적의 은사란? 이 기적들은 모두 계속적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신 것의 사실성을 드러내 주는 표적이었다. 예수께서 열두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와필드는 이러한 이적의 은사들은 "사도들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사역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증거 중의 하나였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권능의 은사란 마땅히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으로 불리어져야 함이 명백하다.
2. 질병- 인류의 가장 큰 숙제 병원 복도에서 신유의 은사가 행해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유의 은사를 가진 자들이 인도나 방글라데쉬 같은 곳에서 그들의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립되었을 때 신유의 은사는 끝났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시긴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 대하여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심을 알려준다(마 10:28). 구원은 결코 질병을 고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3. 치유하는 사람과 치유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 의학박사 윌리암 놀른은 '신유:의사가 본 이적'에서 "그의 치유는 흥분한 상태에서 있었던 것에 불과하긴 했으나 매우 잠시 동안의 일이었다."고 기술했다. 적극적인 사고는 많은 능력을 나타내는데 특히 기능적인 질병의 경우 더욱 그렇다. 기능적 질병이란 완전하게 건강한 신체기관이 건강하게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환자를 추적하여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면 언제나 그 치유는 순전히 임시적인 증상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4.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치유의 증거에 대한 문제 기도의 결과로 병이 낫는 것은 분명히 실제적으로 있는 일이며 많은 경우의 치유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에 관한 어머어마한 주장과 또한 그 은사로 발생한 치유에 대한 주장은 비평되어져야 할 일이다. 뼈가 부서진 것이 치유된 경우가 어디있는가?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살갖이 찢어진 것을 치유해 주었다거나 찢어진 얼굴이나 파열된 두개골을 치유해준 신유의 은사에 관하여 들어본 일이 있는가? 지극히 정상적인 명쾌한 지상과 감정을 지닌 균형잡힌 사람들이 일단 질병에 걸리면 불합리한 행동도 하게 된다. 치유자들이 그토록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수많은 환자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질병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의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집회 저 집회를 찾아 다니면서 이적이라고 믿는 사실들을 봄으로써 자기들의 신앙을 보다 돈독히 하려 든다.
5.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는 방법 치유되지 않는 사실이 자신들의 잘못이나 하나님의 잘못 때문이라고 추론하게 된다. 분명히 하나님은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치유해 주신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게서 치유해주시는 것과 성서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해 주고 있는 병고치는 은사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성서는 신유에 대하여 어떻게 교훈하고 있는가? (1) 예수께서는 말씀 또는 만지심으로 치유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말씀 한마디로 치유하실 수 있었다. (2) 예수께서는 즉각적으로 치유하셨다. 예수께서는 결코 점진적 치유를 행하신 일이 없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예수님을 비평하는 자들은 그분의 치유를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에 불과했다고 주장하기 쉬웠을 것이다. (3) 예수께서는 완전하게 치유하셨다. 회복기가 필요없었다. (4) 예수께서는 누구나 치유하셨다.(5) 예수께서는 기관 질병도 고치셨다. (6) 예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셨다.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ㅍ적과 이적은 그분의 신성을 확증해주었다고 말했다(요20:30-31).
1. 사도들의 치유 신유의 은사를 부여해주신 일차적 무리는 사도들이었다. 70명의 사람들에게도 부여해 주셨다. 바나바, 빌립, 스데반 등의 사람들이 동일한 은사를 받았다.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12사도(바울도 포함)와 70인과 그리고 12사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지녔던 은사였다. 베드로가 성전 문 앞의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다. (1) 사도들은 말씀이나 만짐으로 치유했다. (2) 사도들은 즉각적으로 치유했다. (3) 사도들은 완전하게 치유해 주었다. (4) 사도들은 모든 사람을 치유할 수 있었다. (5) 사도들은 기관 질병을 치유했다. (6) 예수님의 경우처럼 사도들은 죽은 자를 살렸다. 은사주의자들은 그들이 치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진정으로 성서적인 치유의 은사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안다. 그들은 치유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로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려 든다.
2. 종식된 신유의 은사-하나님께서 친히 치유를 계속하신다. 이적적인 표적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어느 사도도 신유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복음의 소식의 확실성을 확신시켜 주는 강력한 표적으로 베푼 외의 다른 목적으로 신유의 은사를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왜 에바브로디도를 간단히 치유하지 않았던가? 신유의 은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을 유지케 하기 위하여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드로비모가 병들었기 때문에 밀레도에 두고 떠났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라면, 그리고 완전한 건강이 보장되어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으려 쇄도할 것이며 그럴 경우 그들의 구원받으려는 동기는 지극히 잘못된 것일 것이다. 하나님게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원하시지 자기들의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인양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3. 은사주의자들의 치유현상에 대한 설명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이외의 어떤 확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치유는 확실히 성서적인 은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기도의 응답으로 이적적인 치유를 베푸신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치유되지 않거나 또는 그대로 죽을 경우 은사주의 교사들은 "믿음이 부족했어" 하는 식이 전형적인 설명이다.
4. 그리스도인이 질병에 걸리는 이유 (1) 하나님이 허용하셨다. 하나님께서 벙어리와 귀머러기와 소경이 되게 하셨다. 비록 이 모든 것들을 우리의 논리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것들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것이다. (2) 질병은 사단으로부터 온다. (3) 죄에 대한 벌로서 질병이 올 수도 있다. "아직 고백하지 않은 어떤 죄가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낫게 하심을 믿읍시다." 어떤 경우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징벌하심으로써 사람이 아프게 되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치유를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질병에 걸렸을 때 하늘을 우러러 치유를 간구할 권리를 가진다. (1)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 때문에 치유하신다. 야훼 로페카는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 때문에 치유하신다. (3) 하나님은 자신의 본보기 때문에 치유하신다.
6. 그리스도인이 병원에 가야 하나? 우리가 병들었을 때 해야 할 일은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의사를 찾아가는 두가지 사실이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바울은 이적적으로 치유했었고 그와 함께 동행한 누가는 의료행위로 치유했었던 것 같다.
방언에 대해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어떤 사람은 방언을 영적인 최고의 선으로서 예수께 더 가까이 인도해 주는 비할데 없는 체험으로 묘사하면서 긍정적인 견해를 취한다. 모리스의 간증에서 "나에게.. 방언의 은사는 찬양의 은사로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알지 못할 언어를 사용할 때 나는 나 스스로 생각해서 드리는 기도로써는 전혀 얻을 수 없는 사랑과 두려움과 순수하고 분명한 존경심이 생겨남을 느낀다."고 소개한다. 웨인 로빈슨은 "그것이 사람의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체험이 사람의 내면에 자신만을 생각하게 하고 이기적인 관심으로 향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그것이 사람을 다른 사람과 그들의 필요에로 관심을 갖게 하는지가 문제이다. 고통과 분열을 겪고 있는 세상의 실제와 조우하기를 피하려고 변명을 늘어 놓는다"고 기술했다.
1. 방언에 대한 언급을 주는 세가지 성서 마가복음 16장, 사도행전 2,10,19장, 고린도전서 12-14장이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일차적으로 고린도교회에서 성령의 은사가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을 논하는 바울의 이야기 중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모든 은사보다 우월한 사랑 그들은 자기 희생적인 관심-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일보다 자신의 영적인 체험이나 영적인 황홀경을 즐기는데 더 관심이 많았었다. 방언을가르키는 희랍어 글로사는 언어를 뜻한다. 오늘날 많은 은사운동 추구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황홀경 속에서 중얼거리는 언어로서 개인적인 기도에 사용하는 언어라고 주장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언어를 말했었음이 자명하다.
3. 방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던 7가지 이유 (1) 글로사는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 (2) 디이아렉토스(행2:6,8)는 자기가 태어난 곳의 말로서 들을 수 있었다. 말과 방언은 황홀경 속에서 떠들어대는 알아듣지 못할 말에 대해서 사용된 일이 없다. (3) 글로사는 언제나 복수형이나 기베리쉬는 단수형이다. (글로사의) 단수형을 사용했는데 거짓된 이교적인 기베리쉬(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전 14:2,4,13,14,19). 바울이 진정한 방언의 은사를 말하려 할 경우 그는 복수형을 사용했었다. 흠정역은 이와 같은 모든 단수형의 단어 앞에 unknow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교적인 황홀경에 빠져 상태에서 말하는 방언과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진정한 은사의 차이를 구분했다. 흠정역의 번역자는 앞에서 제시한 이유로 말미암아 27절을 제외한 14장 전체에서 unknown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한 것이다. (4) 글로사를 말하고 있을 때 통역은 허메뉴오이다. 기베리쉬가 말해지는 곳에는 통역할 길이 없다. (5) 각종 방언에서 각 종류는 게노스로 종족, 국가 등을 나타낸다. (6) 방언을 믿는 자를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에게 제시하는 표적이라고 말했다(사 28:11,12). (7)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린도교인들은 그들의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려 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유일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은사 사용은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라는 또 다른 언급을 하고 있다(고전 14:16-17). 오순절 교파와 은사운동 노선에 있는 사람들은 황홀경 속에서 지껄임을 방언으로 간주한다. "모든 방언들의 각 경우 글로솔랄리아는 언어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무의미한 말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피상적인 유사성조차도 갖지 않은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언어가 아니었다"고 언어학 교수인 윌리암 사마린은 기술했다.
원어를 보면 고린도전서 14장의 모든 절은 글로사를 사용한다. 그런데 다만 단수형이라고 기베리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4. 천사의 말이란? 천사들이 사람들과 이사소통을 할 때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소통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3장 2,3에서 가정법 동사이다. 가정법이 사용될 경우 그것은 실제적으로 발생하지 않을, 가설상의 과장된 상태를 뜻한다. 너희들의 말이 아무리 아름답고 놀랍고 이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심지어 천사들의 언어를 할 수 있다 할지라도 너희에게 사랑이 없다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오 오직 시끄러운 말장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통역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방언의 은사를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경건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황홀경 속의 중얼거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서경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강조하는 결과이다. 예언의 은사는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인 것이다. 프로페튜오는 앞에 말하다이다. 시간상의 앞을 뜻하긴 하지만(예언)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 앞에서라는 뜻이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이다. 예언의 은사는 살마을 세우고 그들이 선행을 하도록 격려해 주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 주는데 사용되었다. 이전에 배운 일이 없는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은사주의는 어떠한 은사도 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영적 은사는 없다고 한다.예언과 지식은 어떤 다른 세력에게 영향을 받게 되어 폐하여질 것이다. 바로 그 다른 세례을 바울은 온전한 것이라 불렀다. 온전한 것이란 영원한 상태, 천년왕국 이후에 창조될 새 하늘과 새 땅일 것으로 여겨진다.
5. 방언이 그친 이유 1) 방언은 이적적 은사로서 이적의 시대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이적적 은산느 다만 고린도전서와 같은 초기 서신서에만 언급되어 있다. 2) 방언의 이적은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행해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적인 표적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실 때에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외국어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심판을 내리실 계획을 하셨는데 그 심판은 언어로 상징된 심판으로서 방언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자신을 어떤 한 백성만을 통로로 국한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을 한 국가와 한 언어만으로행하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었다. 방언이란 이스라엘에 대한 국가적 축복을 옮기신 표적이라 할 수 있다. 방언은 그러한 과도현상의 표적이었다. 일단 그 역할을 성취한 이상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더 이상 행할 기능이 없는 것이다. 3) 방언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보다 열등한 것이었다. 방언은 개인적인 계도도 못할 뿐 아니라 교회의 계도에도 소용되지 못한다. 4) 방언을 말하는 것은 신약성서가 완성되었을 때에 무용한 것이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는 종식되었다. 5) 방언은 신약성서 중 최기에 기록된 책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고린도전서는 방언의 은사가 언급된 유일한서신서이다. 그 어느 서신서에서도 방언에 대한 언급을 다시 하지 않았다. 6) 역사가 방언이 그쳤음을 기록해 준다. 방언의 은사에 대한 언급이 속사도 교부시대의 어떠한 저술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교회으 초기 4,5백년 역사동안 방언에 관한 언급은 몬타누스파롸 터툴리안 뿐이었다. 1731년 얀센파에 방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02년 갠사스주의 토베카에 있는 베델성서대학의 애그니스 오즈맨은 성령의 침례로 부르는 어떤 것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했다. 이때부터 미국 교회의 거룩운동의 한 부분으로 그 행습이 행해지게 되었다. 1906년 LA의 아주사 거리에서 말해졌다. 이를 계기로 오순절 교파의 교리가 성장하게 되었다. 1960년에는 캘리포니아의 밴 너이스에 있는 어떤 회중교회에서 현대은사운동이 시작되었다.
6. 요엘서 2:28에 대한 그릇된 해석 베드로가 오순절날 사람들에게 말한 바는 그들이 천년왕국 시대에 모든 육체들이 받게 될 성령의 능력을 예비적으로 맛본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른 비란 가을에 농작물위에 내리는 것이며 늦은 비란 봄에 내리는 비를 뜻한다. 천년왕국 시대에 두 종류의 비 모두 첫째달에 내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에서 곡식들이 잘 성장하게 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베드로는 분명히 오순절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요엘을 인용했다. 확대해석은 말아야 겠지만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제14장 방언의 문제2 오늘날 행해지는 방언은 어떤 종류의 방언인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면 사람들은 내가 마치 20년이나 젊어진 것 같다고들 하며 또한 나는 기분이 고양되고 기쁨과 용기와 평안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충만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인격체라고 느낀다."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능력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들이 방언을 말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하고 있는 방언은 성서적인 방언의 은사가 아니다. 사실상 그들이 행하는 방언은 황홀경 속에서의 체험을 계속하려는 노력이 더욱 힘들어져 감으로써 환멸감으로 종식될 수 있다.
1.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방언에 대한 설멸 1) 방언은 사단 또는 마귀가 주는 것일 수 있다. 동아프리카로부터 귀신에 들려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가 보된 일이 있는데 그들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그 두 언어 모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2) 방언은 배울 수 있다. 존 킬달 등은 연구를 모두 마친 후에 방언이란 학습되어지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은사운동 가운데서는 방언을 말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그 사람이 방언을 시작하려고 노력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들의 경우 영적 문제에 대한 해결은 방언이다. 3) 방언은 심리적인 것일 수 있다. 집회에서 발생하는 열광적인 정서가 작용하는 곳에서 사람은 자신의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에 빠져들어 쉽게 방언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심리학적 영역은 최면술이다. 지도자에게 복종을 잘하고 암시에 잘 걸리고 지도자를 의존하는 사람들이 방언을 잘 한다고 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해당됨은 분명하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사고와 언어에서도 유사한 언어분해 현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구조적으로 볼 때 방언의 그것과 동일하다. 의도적인 조절에 의한 소극적 반복 상태로 돌입하는 것은 거짓된 방언을 행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바이다. 몰몬교의 조셉 스미스는 "일어나 말을 하든지 또는 어던 종류의 소리라도 좋으니 그것을 계속 지껄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방언을 말하게 해주신다."고 가르쳤다. 자기들의 방언은 특정한 정서적 상황 하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무의식적으로 통제된 언어행위의 형태라고 결론지은 것은 놀라운 것이 못된다. 오늘날의 방언은 고린도에서 행해지던 바와 같이 거짓된 모습을 가지고 성령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인들을 멀리 떨어져 있게 할 수 있다.
2. 오늘날 방언이 널리 행해지는 이유 영적 굶주림이다. 사람들은 방언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갖는 방법이라고 듣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상실하고 있다고 두려움을 갖는다. 그들은 이와 같은 무엇인가 좀더를 필요로 하고 있다. 세속화되고 기계화된, 그리고 지극히 지식화된 차갑고 무관심한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신의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접촉 중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들은 체험을가진 자들 가운데 자신이 소속되기를 원하며 그러한 체험을 갖지 않고 관망하는 자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으로 여겨질까 두려워한다. 차갑고 생명력이 결여된 기독교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은사운동 대열에 참가하는 사람은 활동과 흥분과 따뜻함과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영적'이란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은사운동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 믿는 자들에게 그들을 매력적이고 다이나믹한 방법으로 순수하게 영적인 상태로 이끌어 준다고 약속하는 점이다.
1. 사로잡힌 자와 사로잡히지 않는 자 성령께 사로잡혀야 한다고 말한다. 황홀경의 속의 체험을 가진 일이 없음을 시인하면 예수께서 당신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는 사로잡힌 자와 사로잡히지 않은 자 이두 종류의 신자들의 수준으로 구성된다. 체힘이 없으면-이 체험을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의 침례라고 함-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한다. 멜빈 핫지스는 "우리는 신약성서에 성령의 침례가 영적인 삶과 사역을 완전하게 개발시키는데에 요건적이고 일차적인 전제조건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자연인과 영적인 사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나라(고전 2:14-15)에서 자연인(중생하지 못한자)과 영적인 사람(구원받은 자)의 차이에 대하여 기록했다. 영적으로 되어진다는 말은 로마서 8:6-9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단순히 성령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분상 영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그들이 항상 실제적으로 영적인 상탸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3:1-3에서 영적 어린아이인 육신에 속? 사람에 대해 기록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의 삶은 거룩하지 못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영적인 상태란 어떤 종류의 영적 체험으로써 사로잡히는 순간 들어가게 되는 영원한 상태가 아니다. 영적인 상태는 단순히 매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받고 매순간 성령 안에서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행하는 것은 한 번에 한 발자욱씩 옮기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3. 참된 양적 상태의 표 성서에서는 자신의 죄악됨을 매우 증오하는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영적 상태에 대한 또 다른 기본진리는 영적인 사람의 궁극적 목적이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궁극적 영적상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이것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 사로잡히는 체험으로 일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성경을 포기하고 영적 상태에 이르는 바른 길을 포기하고 체험이라는 잘못된 길로 달려간다.
4. 은사가 영적 상태를 보장치 못함 대부분의 방언 은사를 영적상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여기고 그것을 강조한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영적 은사들을 소유했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영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상태에 있었으나 그들의 행위는 그 교회로 하여금 육적인 혼란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어떠한 영적 은사도 우리가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 안에서 행하며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빠지게 되는 함정은 그들이 종종 방언 체험을성령의 침례로 부르면서 그것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참된 영적 상태의 형태라고 하는데 있다. 격정적이고 극적인 방법으로 성령께 사로잡힌 바되면 우리가 전에 갖지 못했던 일정한 수준의 영적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고 믿으려는 강력한 경향이 있다. 그는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쓰러지게 되면 새로운 영적 생활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고 배웠었음을 수긍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러한 체험을 가진 뒤에도 여전히 육신과의 싸움에 허덕이게 됨을 고백했다. 어떤 종류의 체험을 가졌다고 생각하든 또 얼마나 자주 성령으로 말미암아 쓰러지거나 방언을 말하는 체험을 갖는다고 생각하든 그들은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바 매일 성령 안에서 행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상태의 결과는 의와 거룩이다. 찬양과 행복과 자기성취가 많이 강조된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유쾌한 영이 아니라 거룩한 영이시다. 은사주의자들은 때때로 거룩하기보다는 유쾌한 자들로서의 인상을 준다. 보다 덕 극적인 결과를 갖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2등 그리스도인으로 격하된다. 은사운동의 한가지 심각한 문제는 그 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이 성적부도덕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5. 바울과 거짓 사도 거짓 사도들(super apostles)은 바울의 영적 상탸가 별것 아니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바울은 그 반면 그는 자신이 겪는 영적 고난의 경력을 제시했다. 바울에 따르면 그의 생애는 연약함과 파선됨과 절망과 겸손이었다. 계속 긴장과 스트레스와 공초와 비참한 상태의 연속에 처해 있었다. 성서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고난과 투쟁과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는 투의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경은 성령으 침례를 받으라는 명령이나 교훈을 주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믿는 순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는다. 성령의 침례에 관하여 7번의 직설법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명령이나 권고형이 아니다. 합당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말해준다. 자동차의 경우 기름과도 같다. ㅇ일회사를 소유하고도 휘발유를 배급받는 것과 같다.
1. 성령의 충만이 아닌 것 성령의 충만함은 피차 복종하며 서로 사랑하며 서로 순종하며 피차의 최선을 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2. 제언이 아니라 명령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바울의 말은 계속적으로 충만을 받으라 또는 충만을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명령조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기 안에 계신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자기 안에 충만하게 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매일의 과제요 도전이다.
3. 충만은 소유가 아니라 소유됨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속속이 스며들어 완전히 젖는 상태를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은 소금을 휘젖는 성령을 소유한 것이다. 당신이 해야할 모든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당신의 삶을 맛있게 하도록 내어드리는 것이다. 제자들은 근심으로 가득찼다. 그 순간 근심이 그들을 압도했고 삼켜버렸다. 모든 사람이 놀랐다. 심히 두려워 했다. 두려움으로 가득찬 경험이 있는가? 바리새인들은 분기가 가득했다. 충만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는 특정한 정서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사람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됨을 알게 된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4.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일어나는 일 확실히 성령의 충만은 신자에게 엄청난 유쾌함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소멸할 수가 있다면 성령을 존경하고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게 해드리는 일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재능과 우리의 재물을 성령님의 통제하에 온전히 내어드림으로써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노래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한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피차 복종하며 서로 경청하며 피차의 권위에 순복한다. 성령충만한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며 성령충만한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한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말씀을 비교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은 같은 종류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하게 하는 사람이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는 모든 일에 사로잡힌 자이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사로잡힌 자이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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