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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세상을 새기다. 그 ‘소리 없는 되새김’이 있는 자리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칩거, 은둔, 혹은 침묵이라는 단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좀더 여유 를 갖고 지켜보면 그게 아니다. 작업실, 주거채, 전시실 등으로 큼직큼직하게, 그러나 짜임새 있는 집안에서 그는 혼자 늘 분주하다. 그곳을 ‘한국목판문화연구소’라고 불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곳을 유심히 기웃거린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 애완견 노마와 함께 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쉬고 있다. 노마도 가끔 집을 비우는 주인 때문인지 김 준권씨에게 정 붙이기에 바쁜 모양이다. 둘이서 산책했던 기간이 뜸해지면 잘 삐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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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역꾸역 아궁이에서 연기가 오른다. 집은 세 채로 나뉘어진다. 지금 보는 위치에서 왼쪽 끝채가 작업실이고 가운데 채는 주거용이다. 오른쪽 채는 전시공간. 널찍한 테크가 달린 곳이 중간채이다.
그를 만났을 때 다짜고짜로 “참 갑갑하 세상”이라고 했다. 이렇다 할 부연 설명이 없으니 그 까닭 을 알 수 없는 일.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수첩을 펴들고 ‘왜냐고’ 따지듯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몇 달 전에 한번 낭패를 당한 뼈저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개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가 썩 괜찮은 집을 지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갔었다.
그것도 건축사인 동생과의 합작품이라 하니 오죽하겠나 싶었다. 억지춘향식으로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의외로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작업장이 ‘미완’이라는 것이었다. ‘작가가 작업장보다 더 소중 한 공간이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갑갑함’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질 수밖에. 요즘 들어 더욱 세상이 갑갑 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일 수도 있었고, 예 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작금의 문화계, 좁게는 미술계의 현실에 대한 자조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 다. 갑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했더니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 라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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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화작업. 참으로 일손이 많이 간다. 그림과 붓과 칼을 다 어루 만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가는 일이다. 그래서 그 일 을 하려는 ‘후배’들이 많지 않다 고 한다.
반대편에 서서 거꾸로, 그러나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
그는 자신을 돈이나 권력은 없지 만 시간은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한가한 사람이라 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사는 사람처럼 보이질 않았다.
82년 대학(홍익대 미술교육과 서 양화 전공)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해온 과정을 훑어보 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수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홍 콩 등지에서 개인전이나 단체전 을 열었다. 올해 들어서만 일곱 차례의 크고 작은 전시회를 가졌다. 한 장의 목판화를 완성하기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결코 한가할 수도, 또 그래서도 안될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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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 뒤쪽에 나무판이 많다. 그는 목판화가이다 보니 나무를 다듬는 일, 그것이 첫 번째 일이 다. 그후로도 길고 짧은 과정이 계속된다.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한국목판문화연구소를 운영할 뿐 아니라 중국노신미술학원 부교수직도 겸임하고 있다. 한가하다는 말 은 단지 일한 만큼 가시적인 어떤 게 잡히질 않으니, 그걸 안타까워하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는 또 자신을 가리켜 거꾸로 가는 사람, 반대편에 선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반골 성향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해내기 힘든 작업이다. 남들은 ‘판화를 하니 한번에 여 러 장 찍어서 좋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똑같은 대입(代入)을 싫어한다고 했다.
‘정확하다, 반복적이다’라는 말은 진정한 예술작업을 함에 있어서 통용될 수 없다고.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없다.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다. 어차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노라면 그 럴 수밖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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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개념으로 마련된 공간이다. 그의 작품은 이 나라, 이 땅 사람들을 안고 있다. 그 가운 데 사람 모습이 보인다. 어느 사진작가가 알아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오륙년 전쯤에 찍힌 사진 일걸요.’ 그 이유는 머리숱에 차이가 많다는 것이다. 신경 많이 쓰면서 세상을 살아왔던 모양이다.
얼개는 건축사 동생이, 자신은 아직도 집을 다듬어 가는 중
김씨는 이곳에 집을 짓기 전에 근처의 폐교된 분교를 작업장으로 사용했다. 동생 김준봉 교수가 이론 뿐 아니라 실무에도 밝아 선뜻 집지을 용기를 냈다고 한다. 동생 김씨는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 건축 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중국 동북지역 한인동포(연변족) 전통민가 평면의 분류와 특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주거양식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한다. 김씨는 이 집 주인은 동생일 수 도 있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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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층으로 지어진 이 층의 책 읽는 자리. 미 술 관련 서적뿐만 아니 라 사회학적인 책도 눈 에 보였다.
터잡기나 얼개는 형제 가 세웠지만 토목공사 에서 마감에 이르기까 지 수십명의 ‘전문가’ 들이 동원되었다. 모 든 분야에 전문가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집은 나무, 흙, 유리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 큼 주된 재질을 이루 고 있다. 데크가 널찍 한 중간채는 복층으로 되어 있는데 내구력을 높이기 위해 침목을 사용했다. 그 양쪽 옆으로 전시공간과 작업장이 있는데 통나무, 흙조적식이라고 보면 된다.
특징 중의 하나라면 창문이 많고 널찍하다는 것. 김씨의 주된 생활 공간은 작업실이다. 작업 공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공정 순서대로 벨트 라인을 이룰 수 있도록 자리 배치를 해두었다. 작업실 측면에 사람 몸 하나 누일 정도로 쪽방을 달아 침실로 사용하고 있다. 나무를 짚이는 온돌 구들방이다.
작업실 안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그야말로 원스톱으로 모든 게 이뤄진다. 그렇다고 칩거하는 게 아 니다. 우리 산하 곳곳을 누비며 스케치 여행도 다니고 인근 몇몇 학교에 강의도 나간다. 그의 말을 빌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낮은 산세에 오목하게 둘러싸인 지형 때문인지 겨울 삭풍도 비껴가는 듯하다. 데크에서 내려다보면 길 옆으로 큰물이 흐른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좁고 시냇물이라고 보기엔 깊고 넓다. 겨울새들이 한가 로이 노니는 것을 보니 물고기도 제법 많을 것 같다.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아는 낚시터라고 했다. 그 의 집 앞마당에도 연못이 있었는데 조용히 세월을 낚기에는 그만이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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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가 주로 기거하는 쪽방에 불을 지 피고 있다. 구들방 안에서 하룻밤 자고 나 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고 한다.
차나 음식을 파는 게 더 실속있을 것 같은 집
집이 자리잡은 품새나 모양새를 보니 요즘 그 흔한 전원 카페로도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 자신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개탄한 다. 길 좋고 목 좋고 풍경 좋은 곳마다 먹 고 마시는 집들이 왜 그리 많냐는 것이다.
차라리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 캠프나 워크 숍을 할 수 있는 생산적인 공간으로 쓰인 다면 또 모를 일이라고. 흔히들 즐겨 말하 는 전원 속에서의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적 인 생활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도회지에서 텃밭을 일구는 일이라면 몰라 도 이런 곳에서, 농사에 프로인 사람들 틈 바구니에서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가는 비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 그만큼 지금 자신이 꾸려나가는 일만해도 벅차다는 얘기로 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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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외벽. 통나 무와 흙으로 벽을 세웠 다. 창틀은 김준권씨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작품인 모양이다. 그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 유리잔에 양파 나 마늘과 같은 흔한 씨를 뿌려 쉽게 자랄 수 있게 한 것들이다.
그림을 그리고 나무 를 파고 먹이나 색을 입힌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교한 작업이니만큼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니 애써 하려는 사람들도 없다고 한다. 나무와 칼, 붓을 다룰 줄 아는 장인 정신이 필요한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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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채 데크로 올라가는 계단. 나무를 사용한 주된 재료는 침목이다. 열차 받침 대인데 아주 견고하다.
미술평론을 하는 사람들은 김씨에게 한결 같이 아끼지 않는 말이 있다. 타고난 성실 성과 장인정신 내지는 프로정신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전교조 미복직 교사에서 들어선 전업작가 의 길을 어렵게 헤쳐가며 다색 목판화나 수묵목판(水墨 木版)의 경지를 이루기까지 그는 얼마나 ‘갑갑한’ 나날들을 보내야 만 했을까.
어쨌든 자신의 작품 세계에 꾸준히 천착해 온 그는 시기에 따라 풍경을 바라보는 시 각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고대 목판 역사 속에서 주로 사용되었다던 묵인(墨印) 기법의 맥을 이 어왔다.
‘그의 풍경은 자신이 칩거하여 작품 세계 에 몰입하였던 백곡(栢谷)의 풍경들과 고 향의 풍경들, 또는 오고가며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주변의 풍경이다. 그에게 이 풍경들은 현실이자 이상’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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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본 모습. 들 어가는 입구에 전시장 으로 쓰고 있는 집채 가 보인다.
돌아오는 길, 차창에 어리는 이 땅의 풍광 하나하나가 그의 목판 에 아로 새겨져 있는 듯했다. 올해 그의 ‘겨울나기’는 어떨 것이며 새 봄빛 푸른 그날에는 또 어 떤 싹을 틔울 것인지.... 그맘때면 ‘갑갑함’을 덜 수 있을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