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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스는 혹시나 해서 몸소 나그함마디 지역을 헤매었다. 비행기로 일단 룩소르까지 갔으나 콜레라 비상으로 나그함마디행 열차는 운행이 중단되어 있었다. 그는 어렵게 어렵게 몇 주 동안 탐험을 계속했다. 나 도올의 일행이 다닌 바로 그 지역이었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사람들은 그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의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 후 권위있는 프랑스 고문헌아카데미에서 이 문서의 발견을 보고했다. 1948년 2월 23일 르몽드지는 “4세기 파피루스문헌의 발견”이라는 제목 하에 단 3줄의 소략한 기사를 실었다: “고문헌아카데미 학회에서 152페이지에 달하는 파피루스의 책 한 권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여태까지 출판된 적이 없는 5개의 영지주의 문서의 콥틱어 번역이다. 이 시대의 신앙체계에 관한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카이로의 대표적인 골동상으로서 키프로스섬 출신의 타노(Phocion J. Tano)가 운영하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카이로 부근 대피라미드가 있는 기자(Giza)에서 일하고 있던 엘카스르 출신의 농부 하나가 자기네 동네에서 옛 파피루스문헌이 떠돌고 있다는 정보를 타노에게 귀띔해주었다. 타노는 곧 나그함마디 지역을 관장하는 케나(Qena) 골동상 자키 바스타(Zaki Basta)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정보가 있으니 한번 확인해보라고 일러주었다. 자키 바스타는 엘카스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애꾸눈 깡패두목 바히즈 알리(Bahij Ali)를 수배했다. 바히즈 알리는 두 개의 코우덱스를 무함마드 알리로부터 단돈 몇 천원 주고 샀다. 그리고 자키 바스타와 함께 카이로로 가서 타노에게 큰돈을 받고 팔았다. 제2, 제7 코우덱스였다. 바로 이 제2 코우덱스 속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도마복음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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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 스토리에서 가장 재미를 본 작자는 애꾸눈 바히즈 알리다. 그놈은 그 돈으로 거대한 농장을 샀다. 가장 피를 본 친구는 무함마드 알리인데 애꾸눈에게서 한 푼도 얻어먹지 못하고 이만 갈았다. 나 도올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이들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 ‘예수의 저주’에 걸려 사라졌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제1 코우덱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제1 코우덱스를 장악하고 있었던 알버트 에이드는 유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좀 질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미나 관장은 에이드에게 이 문서를 해외로 반출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러나 에이드는 공항의 세관원들을 매수하여 밀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코우덱스를 미국시장으로 가지고 갔다. 처음 그는 미시간대학 도서관에 2만 달러를 요구했다. 미시간대학은 너무 비싸다고 구입을 거절했다. 그 뒤 그는 뉴욕에 가서 볼링겐 파운데이션(Bollingen Foundation)에 접근하여 1만2000달러를 요구했다. 그러나 볼링겐 파운데이션은 사적인 책 구입은 안 한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안전하게 맡겨놓게나 해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해버렸다. 에이드는 화가 나서 브뤼셀로 건너가 그곳 은행의 안전금고에 코우덱스를 넣고 덜커덩 잠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저주에 걸렸는지 이듬해 죽고 만다.
그 뒤 이 코우덱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코우덱스의 소식을 들은 사람 중에 프로이트의 의식세계를 더 심층으로 진화시킨 그 유명한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있었다. 융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융 인스티튜트(the Jung Institute)의 마이어(C. A. Meier)에게 그 코우덱스를 구입할 것을 권유했다. 마이어는 그 코우덱스를 추적한 끝에 브뤼셀의 은행금고 속에 그 문서가 잠자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고, 에이드의 부인 시모네 에이드(Simone Eid)가 새로운 소유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이어는 취리히 근교 발리셀렌(Wallisellen)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 독지가 페이지(George H. Page)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페이지는 즉각 3만5000 스위스 프랑을 희사했다.
1952년 5월 10일 브뤼셀의 어느 카페에서 매매가 성립하였다. 이 사실은 에이드 부인의 요청에 따라 18개월 후에나 공식 발표되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후에 언론에서 “역사의 페이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관대한 희사”라고 평한 이 희사의 주인공 페이지는 이 문서가 불법적으로 유출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였다: “이 문서는 충분한 학구적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제자리로 반환되는 것이 마땅하다.” 위대한 양심의 소치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제1 코우덱스를 융 코우덱스(The Jung Codex)라 부른다. 융 코우덱스는 페이지의 소망대로 1975년 카이로 콥틱박물관으로 돌아갔다. 심리학자 융은 왜 그토록 이 문헌들을 갈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