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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가 ‘두 자료 가설’(TDH)의 핵심으로서 이미 19세기 전반에 Q라는 어록자료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도 Q자료는 가설적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Q자료의 강력성은 그것이 전 지구상의 모든 기독교인이 유일한 신앙근거로 삼고 있는 가장 권위있는 신약성서 자체 내의 자료라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새로운 자료가 아니라 바이블 그 자체인 것이다. 아무리 기발한 정통자료가 새로 발견되어본들(일례를 들면, 최근 공개된 유다복음서 등),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정경의 개념 속에 편입시키질 않는다. 그리고 그냥 해괴한 외경(apocrypha)이라고 치지도외해 버리면, 신앙의 새로운 근거로서의 자격이 없어지고 만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아성에 충격을 던질 수 있는 새로운 자료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사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Q자료는 정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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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Q자료는 이러한 신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적 자료였기 때문이었다. 신학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유용한 수단으로서 활용하기는 했을지언정, 그 실체를 일반에게 공개하는 데는 무리가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Q자료가 가설이 아닌 사실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사건이 바로 1945년 나그함마디 지역에서 아부 알 마지드(Abu al-Majd)라는 15세 소년이 사바크를 캐기 위해 곡괭이질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도마복음서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도마복음서가 “예수 가라사대”로만 이루어진 어록이라는 사실이 실체로서 눈앞에 드러났을 때 가장 경악한 것은 Q자료 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의 Q가설이 단순한 가설이 아니었다는 물증(物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Q자료는 그 범위를 정확히 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대체로 82개 정도의 가라사대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도마복음서는 114개의 가라사대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마복음서의 3분의 1이 정확하게 Q자료와 중복될 뿐 아니라, 도마복음서의 나머지 부분도 거의 다 현재 공관복음서의 기록들과 내면적 연관성이 확보된다. 도마복음서는 우리가 흔히 치부하는 ‘외경’이라는 개념으로 처리될 성격의 문서가 아닌 것이다. 즉 Q자료와 동일한 계열의 또 하나의 Q자료였던 것이다. Q자료가 마가복음에 선행한 자료라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 Q자료나 도마복음서의 원형은 이미 AD 50년 전후에 성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현존하는 신약성서의 일부인 Q자료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소란을 피워야 할까? 도대체 뭐가 그다지도 새롭단 말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도마복음서라는 문서의 출현은 Q자료를 가설적 허깨비가 아닌 실체(實體)로 드러냈고, Q자료라는 실체는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혁명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앞서 4대 성인 이야기를 할 적에 이미 언급했지만 예수에게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적과 부활이었다. 신이 아닌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crucifixion) 다시 살아났다(resurrection)는 기적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예수를 사랑하고 믿는다는 행위가 꼭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전제는 ‘사도신경(Apostolicum)’을 외우기를 강요하는 권위조직 속에서는 매우 유의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도신경이란 본시 교회의 권위조직과 연계된 후기 사도들의 신경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3·4세기경에 날조되어 7세기 초에나 오늘의 형태가 되었고, 십자군전쟁의 와중에 있었던 교황 이노센트 3세(1198~1216) 때에나 비로소 공식문건이 되었던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해야만 꼭 예수를 믿는 것일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부활하여 지금 하늘에 있든지 말든지 간에, 이미 죽어버린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죽었다 부활했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이지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환상적 체험 속에서 생겨난 이야기일 뿐이다. 그 이야기를 심오한 철학적 관념으로 해설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에 관한 타인의 담론이지 예수 자신의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이 아닌 ‘이야기’를 최초로 문서화한 천재가 마가였다. 이야기 즉 내러티브(narrative)란 말씀을 사이사이에 삽입한 하나의 드라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세례와 전도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하나의 통일된 시퀀스를 지니는 드라마로서 엮어낸 이야기인 것이다. 말씀집에는 드라마적 요소가 삽입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 가라사대 파편(sayings gospel)은 소박하고 진실한 한 인간의 생각이 표현된 언어의 모음일 수 있지만, 이야기복음서 즉 담화복음서(narrative gospel)는 그 인간의 생애 전체를 패션드라마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화려한 구라’일 수가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Q자료 속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없다. 그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대척점으로 묘사되고 있지도 않다. 그의 탄생도 없고, 그의 죽음도 없다. 더더욱 부활은 없다. 그의 죽음이 비극적이거나, 신적인 것이거나, 인류의 구원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황당한 전제가 없다. 그가 세상을 하루아침에 변화시키거나 심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사람들은 그를 그의 이름으로 경배하기 위하여 모이지도 않았고, 그를 신으로 숭배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찬송이나 기도나 제식으로 활용하지도 않았다. Q자료 속의 사람들은 예수를 자기들이 처한 세상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도록 만들어주는 지혜로운 교사로서만 생각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공관복음서 속의 예수의 참모습이라는 위대한 사실이 도마복음서를 통하여, 그리고 Q자료를 통하여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