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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종교의 본질, 아니 매우 궁극적 삶의 의미 같은 것을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의 예수를 믿어도 좋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도 좋다. 그런데 그것을 도대체 왜 믿는가?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을 왜 믿는가? 죽었다 부활했다는 예수 삶의 이벤트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과도 같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스쳐지나갈 뿐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삶과 무관한 객관적 물리적 사태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과 부활을 나의 실존적 고통의 심연에서 직접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내가 부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내가 부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다시 말해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이요, 죄에게 다시는 종노릇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결코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의 주된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죄의 몸이 멸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란 일시적 사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죽고, 끊임없이 부활해야 하는 모든 순간의 삶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이러한 부활의 메세지를 전한 사도 바울 자신이 이렇게 외쳤으리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이다. 사도 바울에게도 사망의 몸의 유혹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예수다!
Q자료를 발견한 신학자들이 탐색해낸 놀라운 사실은 Q자료 속의 예수에게는 탄생설화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어떠한 이야기(내러티브)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과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하고 산 사람이었을까? Q자료 속의 예수는 전혀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해준다. 이것은 다름 아닌 공관복음서의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이니 하는 그럴싸한 드라마도 없다. 나의 ‘피’니 ‘살’이니 하는,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의미를 갖는 그런 언어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파악하는 언어는 존재하지만, 아버지가 파견하여 천상(빛)에서 지상(어둠)으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온 자라는 식의 그리스도(메시아)적 이해가 전무하다. 예수는 오직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을 뿐이다. 천국은 천당이 아니다. 천국과 천당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천국은 무형의 조직이고 천당은 장소(공간) 개념을 갖는 유형의 실체이다. 예수는 천국을 말했을 뿐 천당을 말한 적이 없다. 신약성서 전체를 두 눈을 비비고 잘 바라보라! 어느 한 귀퉁이에도 천당이라는 말은 없다. 천국이란 하늘구름 위에 붕 떠있는 어느 곳(topos)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영어로 ‘Kingdom of God(Heaven)’이 아니라 ‘Reign of God’이다. ‘나라’에 해당되는 희랍어 ‘바실레이아’는 예수의 선포 속에서는 장소적·유형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비장소적·무형적 개념, 즉 ‘지배’라는 의미맥락을 더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로마의 지배나 율법의 지배나 바리새인·대제사장의 지배가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무매개적 지배였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지배(the Reign of God on Earth)’였다.
주기도문의 주요 부분은 Q자료 속에 들어가 있다. 로마서 8:26에 보면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주기도문을 몰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바울의 손에는 Q자료가 들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같이 하라.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눅 11:2~3).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 임할 그 무엇이다. 이 땅 위에서 지금 여기 시작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같은 Q자료인 마태복음에는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마 6:10)로 되어 있다. 바로 이 말씀의 주인공이 예수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실상인 것이다.
공관복음 전체에 공통된 말씀이지만, 예수는 또 이같이 선포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막 12:31). 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맹목적으로 믿고 천당에 가는 것이 당신들의 신앙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논구하지도 않고 전혀 언급하지도 않는다 할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계명 하나를 죽을 때까지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가? 예수는 과연 부활과 대속을 선포했을까? 이웃의 사랑을 선포했을까? 기독교인이라면서 돈 잘 벌어줄 대통령을 뽑는 데만 혈안이 되고, 북한의 동포들이 북·미 수교를 바라면서 세계의 보편적·상식적 마당으로 나오기를 원하는 마당에, 그들을 빨갱이라 무조건 저주하고 반공의 기치만을 고수한다면 과연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을 실천하는 신앙의 정도일까?
“내 몸과 같이”라는 것은 모든 언어가 단절되는 절대명령이다. 내 몸이 아프면 “아야”를 외칠 뿐, 그 사이에 논리나 계산이나 공과가 개입될 틈이 없다.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적 정언명령이며, 신적인 경지가 없이는 영원히 실천하기 어려운 도덕명령이다. 예수의 부활을 1000만 번 믿는 것보다 예수의 사랑의 계명 하나를 내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 1000만 배 어렵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기독교인은 예수를 배반하는 자요, 기독교를 배교하는 사악한 무리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