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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1 Jesus said, “I shall give you what no eye has seen, what no ear has heard, what no hand has touched, what has not arisen in the human mind.”
우리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며, 헬레니즘 문명권의 사람이며, 페니키아 문명의 전통 속에서 활동한 사람이며, 아시아 대륙의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탈리아 미남형의 구레나룻 털보 남자로 생각하거나 서구라파 전통 속에 갇혀 버린 전형적 서양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장의 예수 말씀도 그 본래적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서구적 신비주의(mysticism)의 맥락에서 오묘하게 해석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 주석가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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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 ,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희·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 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 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물체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惚恍)하다 하도다.
놀랍게도 예수의 말과 노자의 말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처음의 삼자, 볼 수 없는 것(the invisible), 들을 수 없는 것(the inaudible), 만질 수 없는 것(the intangible)이 순서도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이 이·희·미 삼자는 논리적으로 꼬치꼬치 따져 규명할 수 없다는 노자의 말은 예수에게서는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 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 즉 인간의 개념적 언어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일자 즉 하나(the One)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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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기록된 바”라고 하여 인용한 이 구절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4복음서가 쓰이기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의 메시지는 4복음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사야 64:3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나 그 의미맥락이 전혀 다르다. 바울이 도마복음서를 인용하였다고는 생각하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도마복음서의 자료가 된 어떤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성서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큐복음서 제33장(마 13:16~17, 눅 10:23~24)에 나오는 “너희가 지금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라는 예수의 말씀도 본 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본 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황홀”의 해석에 있다. 마태 13:17이 말하듯이 “볼 수 없는 것”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에 의하여 선사되는 그 무엇이다. 여태까지 최고 권력자들인, 선지자나 왕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그 눈이야말로 복된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드는 데 바로 예수나 노자의 말씀의 위력이 존하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객관적 사유 속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이라는 것도 개념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황홀이란 결코 신비로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명(有名)의 세계에 대하여 무명(無名)을 말할 뿐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유명이란 유욕(有欲)의 다른 말이요, 무명이란 무욕(無欲)의 다른 말이다. 인간은 결코 개념적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개념적 인식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 고착성이다. 고착적 개념은 그릇된 욕망을 자아낸다. 인간의 과도한 분별지(分別智)는 항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지만, 고착된 개념을 향한 집착은 인간을 독선과 오만과 번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다. 집착이나 욕심·욕정이 사라지면 분별지는 무분별지로 전식(轉識)하게 되고, 무명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수에게서 선물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당만 짓고 세속적 축복만을 갈망하고 물리적 번영만을 기구(祈求)한다. 초기 예수운동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였다.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들을 수 있는 것을 버리고 들리지 않는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추구의 핵심은 나 존재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다. 욕망의 부정은 욕망의 근절이 아니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마음속에 통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어찌 세속의 형상에 집착하는 자들을 예수를 믿는 자라 말할 수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