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전개과정
반민자들에 대한 심판은 해방 후 우리의 자주정부가 들어섰다면 곧 착수했을 것이나, 3년 이상 공백이 있어 혼란 속에 방치되어 왔다. 그 후 여러가지 주변 사정과 정치정세의 변동이 있었던 것은 유감스럽고 곤란한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일이 갈수록 더욱 곤란이 가중될 것으로, 반민법에 규정한 바와 같이 단시일 내로 이 사업을 완결하여, 민족정기를 부흥하는 동시에 전 민족의 분노를 일소하고, 완전하고 순정한 민족통합으로 민족국가의 만년대계에 매진할 것이다. 본 재판부는 이러한 사건을 처단함에 있어, 첫째로 전국적으로 반역자의 낙인이 찍힌 자로 주로 하고, 둘째로 각 지방별로 반역자의 낙인을 받은 자를 주로 할 작정이다.
결국 순정한 민족의 총의를 반영하여 결정될 것이고 처단될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개인의 사감이나 편파한 관념에 흐르는 것은 절대금물이요, 만일 그러한 피해가 있어서 이 중대한 사무수행에 혼란을 야기해서는 안된다. ( 특별재판부는 성명 1949.3.12 )
그러나 또 나는 분명히 조선 대중이 나에게 기대하는 점은, 어떤 경우에서고 청조한 지조와 강렬한 기백을 지켜서 품호한 의사의 형범型範이 되어 달라는 상식적 기대에 위반하였다. 내가 변절한 대목, 곧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 사정이 지조냐 학식이냐의 양자 중 그 일을 골라 잡아야 하게 된 때에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나의 암우가 저의 걷고 싶은 길을 걸어서 수사修史 이하의 많은 오점을 몸에 찍었다. 그런데 그것이 금일 반민법 저촉의 조건임이 명백한 바, 이 법의 처단을 받기에 무슨 비겁한 체를 할 것이냐. 도리어 준엄한 수형 하나에 저의 책임의 경감을 기함이 당면할 것이다.
반민법이 무론 그 법 그것으로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위력을 가진 법이기 때문에 이를 무서워함이 아니다. 이 법의 뒤에 국민 대중이 있음을 알며, 그네의 비판과 요구가 이 법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 법에 그 법문 이상의 절대한 권위를 감염感念하는 자이다. 까마득하던 조국의 광복이 뜻밖에 얼른 실현하여 이제 민족정기의 호령이 굉굉히 이 강산을 뒤흔드니, 누가 이 앞에 숙연히 정금正襟치 않을 것이냐. 하물며 몸에 소범所犯이 있어 송연悚然히 무려자축撫慮自縮할 자야 오직 공손히 이 법의 처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가 질편초叱鞭楚를 감수함으로써 조금만치라도 국민 대중에 대한 공구참사의 충정표시를 삼는 것 이외에 다른 이 있을 수 없다. 삼가 전후 과루過淚를 자열自列하여 엄정한 재단을 기다린다. ( 1949년 2월 12일 마포형무소 구치중에서 최남선의 <자열서>에서 )
제헌국회의 구성상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한민당이 약화되고, 무소속의 소장파들이 대거진출하였다는 사실이다. 친일파 처리문제에 가장 열의를 가지고 참가한 의원들은, 대체로 이 소장파에 속하는 의원으로 제헌국회 초기에 많은 활약을 하기도 하고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젊은 민족 혈기와 역사 사명감을 가지고, 반민법 제정 및 반민특위의 구성과 활동에 있어서 주도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사실상 반민특위는 소장파 의원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제2, 3회 국회 회기 때는 소장파 전성시대로서, 국회에서 소장파들의 영향력이 가장 컸을 때이다. 그리고 반민특위가 와해되어 버리는 제4, 5회 회기에는 국회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사건 등으로 인해, 소장파 의원들이 구속되고 분해되어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정부수립 후 제헌의회에서 진용을 갖춘 반민특위는, 처리해야 할 친일파를 위에서 언급한 대로 조목조목 자세하게 나열하며 규정하였다. 1948년 9월 22일에 온갖 우여곡절 끝에 전물 3장 32조의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법률 제3호로 공포되었다. 이어 그 해 12월 23일까지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중앙사무국이 구성되고, 각 시도에도 조사지부 등이 설치되자. 반민특위는 본격적인 조사업무에 들어갔다. 이로써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다 갖춘 셈이었다.
그러자 49년 들어서 2월 15일에 이승만은 ‘반민법 개정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억지를 부리며 친일파 척결과제를 방기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온통 친일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친일파 반민족자들이 없으면 그 자신의 정치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에, 자나깨나 반민특위를 없애고자 획책하였다.
이승만의 담화에 맞서 16일 김병로 특별재판관장은 ‘반민법은 특별법이다. 반민법이 계속 존재하는 한 특위에서 반민법에 의하여 행동하는 것은 불법이 아닐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김병로는 이에 앞서 1월 12에도 이와 비슷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병홍 특위 제1조사부장도 비슷한 취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반민특위는 특위 명의로 최초 공식 담화를 발표하여 조목조목 이승만의 담화 논지를 비판하였다. 이후 국회프락치 사건이 날 때까지 순탄하게 반민특위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반민특위는 일제 때 발행된 신문잡지를 비롯한 출판물과,조선총독부 등 일제 통치기관의 문서를 토대로,반민족행위자 일람표를 작성했다. 특위는 일제 때 발간된 <친일파의 군상들>이란 고발서적을 찾아내어, 이를 참고로 7천여명에 이르는 친일파 부일협력자들의 반민족 죄상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3개월 간에 걸쳐 친일파들의 행적을 찾아내어 반민법 해당자들에 대한 일람표까지 작성하는 등 예비조사를 끝낸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에 대한 검거를 개시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가 검거한 제1호 친일파는 화신재벌의 총수 박흥식이었다. 그는 일제 시대 조선 비행기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에 기여한 인물로, 반민법이 제정되자 해외도피를 계획하여 미국여권까지 준비하다가 체포되었다. 1월 10일에 검거 제2호 친일파는 반민법 제정을 앞장서서 반대해온 악질 친일분자이자 관동군 촉탁이었던 이종형이다. 그는 만주에서 일본헌병대의 앞장이로 밀정행위로 무려 2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밀고하여, 그 중 17명의 독립투사를 사형당하도록 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나중에 반민특위 강제 해체 이후 이종형은,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부끄러운 한 단면을 우리 역사에서 읽을 수 있다. 얼마나 우리 역사에서 부끄럽고 분통 터지는 일인가!
반민특위는 다시 49년 1월 13일에 3·1 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을 검거했다. 최린은 초대 ‘매일신보’ 사장, 임전보국단장을 등을 지낸 거물급 친일파였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한 방의석과, 일제 경시 출신으로 강우규 의사를 체포하여 고문 치사하게 했던 김태석 등을 검거했다. 14일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친일 변호사 이승우와, 일본 왕실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친일귀족 이풍한을 검거했고, 18일에는 일경 경시 출신으로 평북 경찰 특고과장·충남지사 등을 지내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고문 악행을 일삼아온 악질 친일파 이성근과, 고종의 조카로 매국활동을 벌인 자작 이기용을 구속했다. 이기용은 해방 이후 3년이 지났는데도 자기 집 응접실에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을 걸어놓고, 일왕실로부터 받은 훈장 30여 개를 진열해 놓아 조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20일에는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낸 친일파의 거두 박중양을 대구에서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했고, 중추원 참의와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지낸 재계의 중심인물 김연수를 붙잡았다. 그는 동아일보사장이자 현 고려대의 설립자인 김성수의 동생으로, 현 삼양라면·우유를 만들어내는 삼양사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22일 고등계 형사 하판락, 국제신문 편집국장 정국은, 중추원 참의 김우영을 검거했다.
24일 수도청 고문치사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전 수사과장 노덕술과,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 등을 검거했다. 특히 악질 중의 악질 경찰 노덕술은 1월 25일 수도청장 장택상 밑에서 수사과장으로 있다가 체포되었다. 26일 일본 헌병출신으로 현직 경찰간부 유철과, 악질 왜경출신 노기주 등을 검거했다. 그 뒤 27일 종로경방단장 조병사, 28일 중추원 참의 김갑순, 일제 고등경찰 서영출, 31일 친일 변호사 임창화, 일군에 비행기를 헌납한 문명기 등을 속속 검거했다.
2월에 들어서도 반민자들에 대한 검거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반민특위는, 특히 문화교육계에 손을 대어 독립선언문을 쓴 뒤 변절한 육당 최남선, 친일문인 춘원 이광수도 검거했다. 이들은 민족문화말살에 앞장 선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남선은 고개 숙이고 민족 앞에 사죄를 했으나 이광수는 마지막까지 자기변명으로 일관했다. 2월 18일 이토오 히로부미의 양딸로 일제의 고급 밀정이자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 요화 배정자는 79세의 노령으로 체포되었다.
반민특위 검거활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검거선풍이 회오리치자, 반민법 해당자들은 지하로 잠적하거나, 일본 등 해외로 탈출하여 검거의 손길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들은 늘 마음의 조국으로 생각했던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밀항을 준비해왔다.
일제시대에 함경도의 자동차왕으로 불릴 정도로 운수업을 하며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방의석은, 북한에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탈출 월남해 있다가, 삼척에서 머물며 일본 밀항 직전 검거되었다. 노덕술과 함께 수도청 고문사건의 배후인물인 전 수도청 부청장 이구범도, 일본 밀항 직전 검거되었다.
그러나 몇몇 양심을 회복한 친일분자들은 진심으로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떳떳하게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아, 여생을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경 출신의 정성식 등은 특위활동 기간에 자수했는데, 이렇게 자수한 반민법 해당자는 무려 61명이 되었다.
반민특위 활동이 더 확대되자 반민법 표적 중 하나인 일제경찰 출신 상당수가 헌병대로 자원 입대했다. 군은 항상 치외법권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친일파 원용덕은 당시 헌병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영관급으로 대우하고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이들 중 2관구청장을 지낸 이익흥, 서울시내 서장급 간부들인 원우경·김정채·전봉덕 등 상당수에 이르렀다. 반민특위가 채병덕 참모총장을 찾아가 이들 소환을 요구하자, 채병덕은 ‘군에서 필요해 불러들인 인재를 골라가며 친일파라고 몰아세우는 이유가 무어냐. 전봉덕·이익흥 등이 친일파라는 증거를 대라’며 특위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처럼 군에 입대한 경찰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이든 탓도 있어서, 태연하게 집에 잔류해 있다가 검거되었다. 장택상 밑에서 수도청 부청장을 지내고 고문을 지내던 최연, 김제경찰서장 이성엽,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언순, 전 성동서장 유철, 경주서장 서영출,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 고등경찰 양재홍, 그리고 악질 경찰·헌병으로 애국지사를 색출 고문하거나 동포를 괴롭힌 하판락·노기주·김성범·심영환·문구호·김덕기·이극일·김영호·김대형 등 30여 명을 구속하였다.
반민특위는 일제 헌병·경찰 출신에 이어 중추원 참의를 지낸 자들도 남김없이 검거하였다. 일제 칙선 귀족원의원까지 지낸 박중양, 충남갑부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갑순, 그리고 김창수, 장헌식, 서병조, 김영우, 서병주, 신각, 김재환, 정해봉, 진희채, 고원훈, 박희옥, 최승열, 원병희, 손준영, 김연수, 한정석 등을 체포하였다. 아시히 신문 특파원이자 일제 경찰의 끄나풀인 정국은도 체포하였다.
그 밖에 비행기를 헌납한 문병기, 조선항공업사장 신용항, 항공업자 김정호, 군수업자 백낙승, 총력연맹 후생부장 겸 학병모집부장을 지낸 손영목, 황국신민서사를 만든 조선총독부 사회과장·학무국장을 지낸 김대우, 임전보국간의 산파역을 하고 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낸 시인 김동환, 내선일체에 앞장선 이각종, 국민동원총진회를 조직한 이성환, 황도정신을 주창한 안식연, 친일매국단체 국민협회회장을 역임한 김부일,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 이병길,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 충남지사 대화동맹 간부를 지낸 정교원, 총독부 학무과장을 지낸 엄창섭, 목사로 신사참배를 강요한 정인과·양주삼·정춘수·진필순·김길창·김동만·김인선 등이었다.
이와같이 특위가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파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들에게 응징의 철퇴를 가하는 일대 선풍을 일으키자, 이승만은 이를 견제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자중할 것을 요청하며 친일파들을 비호하였으나, 대부분 국민들은 특위의 과감한 활동에 찬사와 격려를 보냈다. 이러한 당시 여론을 위에서 보듯, 49년 2월 2일자 서울신문의 사설 등 여러 신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반민특위가 반민법 해당자들을 속속 피검 조사하여 특별검찰부에 넘기고 기소하자, 특별재판부도 반민자들에 대한 역사적 공판을 준비했다. 1949년 3월 12일 특별재판부는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결의를 밝혔다.
또 역사적인 친일파 반민공판을 주재하며 재판에 임하는 각오를 다음 같이 밝혔다.
[ 불행히도 우리 민족은 영토적으로 인근 강대국에게 늘 침략당했던 관계로, 사대사상이 물든 것도 양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민족을 돌보지 않고 자기 한몸의 영화를 위하여 일제에 아부하고서도 반성할 줄 모르는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것이니만큼, 어디까지나 사심없이 법에 따라 엄정한 재판을 할 것].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자 7천여 명을 파악하고 49년 1월 8일부터 검거활동에 나선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여자 60명 포함)이었다. 이 중에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에 이르렀다. 각 도별 송치건수를 보면 중앙서울 282건, 경기 32건, 황해 26건, 충남 25건, 충북 26건, 전남 27건, 전북 35건, 경남 50건, 경북 34건, 강원 19건 등 모두 559건이다.
다시 반민특위의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건은 221건이며,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할 것은 불과 38건이다. 그렇지만 죄질이 극악한 악질친일파라도, 그나마 대부분 집행유예나 보석으로 풀려나서 실제로 처벌받은 민족반역자는 거의 없었다. 이들 체포당한 친일파들의 재판과 그 결과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 사례를 하나 든다면, 사형을 선고받은 평북도경 고등과 사찰주임으로 악명높은 김덕기 사건이다.김덕기가 검거한 사상범은 1천 여명이었는데, 일제에게 재판받은 그 독립운동가 중 9.6%가 사형, 9.4%가 무기, 7년 이상 징역형이 10%, 1년 이상이 71%에 이르게 한 악질친일분자였다. 김덕기는 재심청구를 냈다가 기각당하고, 사형을 확정받았지만 한국전쟁 직전에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따라서 해방후 친일파 및 친일잔재 처리문제는 청산하지 못한 과제로 우리 앞에 남겨졌다.
<바로보는 한국근현대 100년사> 제2권, 김송달, 1998.6, 거름출판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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