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납치 - 김대중]
8일 오전11시 좀 못되어서 택시로 도쿄구단에 있는 그랜드팔레스 호텔에 갔다. 2211호실에 있는 양일동 통일당 당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양당수는 내가 먼저 만나자고 청했다. (중략) 셋이 함께 식사를 하고 낮12시45분경에 나는 마침 낮2시에 기무라도시오씨와의 약속이 있어 양당수와 작별햇다. 이때 양당상수가 김의원에게 나를 전송하라고 해서 김의원과 나는 함께 복도로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체육인같이 생긴 청년들(6~8명)이 몰려들었다.
"왜이래?" 나와 김의원이 고함을 쳤다. 그들은 내 입을 틀어막더니 양씨의 옆방인 1210호실로 밀어넣었다. 이 방은 미리 빌려놓은 것 같았다. 방에 끌려들어간 내가 반항하니까, 무릎뼈를 차고 턱을 치면서 마취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마취약이 잘 안듣는 체질이었던지 마취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은 몽롱해도 의식은 잃지 않앗다. "아하,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중략)
그때 괴한들이 틀어쥐고 있던 나의 팔을 더욱 죄며, 때려 다시 의식을 잃은 것 같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에 실렸다. 그들은 나를 차안에 엎어놓은 채 입을 막고 무릎으로 깔고 앉았다. 차에는 나 외에 5명이 탄 것 같다. 차에 실려 5~6시간쯤 달렸다. (중략) 나를 실은 채, 약 1시간 이상 가더니 바닷가에 이르렀다. 납치범들은 여기에서 인계하고 돌아간 것 같다. (중략) 육지에서 바다위에 떠있는 모터보트로 옮겨졌다. (중략) 지금까지 묶여있던 것을 풀고 다시 본격적으로 묶기 시작했다. 두 팔을 앞으로 결박하고 50kg정도의 물체를 매달아 상하좌우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눕혀 놓았다.
* WP칼럼 'DJ납치사건' 전말 밝혀 (03.2.24) 김대중대통령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973년 8월 발생한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소상히 밝혀 눈길을 끌고있다. (중략) 레이너드에 따르면, 하비브 대사는 CIA요원으로부터 납치사건의 범인이 한국 중앙정보부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24시간은 기다리겠지만, 우리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김대중씨를 살해할 것"이라면서 직원들에게 그들이 아는 중요한 직위의 한국사람들에게 모두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만일 (중요한 한국사람이) 사무실에 없으면 집으로 찾아가라. 한밤중이라도 좋다. 한밤중에 찾아가면, 그들은 미국이 가볍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이하 생략)
============================================================================================== [장준하 선생 실족사 - 의문사]
장준하 선생은 일제 시절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하여 상해로 가서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일제 패망후 상해로 도망와서 독립군을 찾아온 박정희에게 3가지 이유를 들어 따졌다고 합니다.
하나, 만주에서 일본 장교를 하면서 독립군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
둘, 독립군이 되고자 했다면 일찍 탈출하여 독립군 될 생각을 하지 않고, 일제 패망후 소련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뒤늦게 탈출이라고 도망 온 이유가 무엇인가?
셋, 만일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다면 계속 일본 장교질 하면서 독립군을 죽였을 것 아닌가? 하면서 질책하였다고 합니다.
해방후 이승만 정권에서 사상계라는 잡지를 통해 독재권력에 항거하셨고, 2공화국에서 입각하여 차관급(?)으로 있다가 8개월후에 3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보는 박정희는 친일파에다 쿠데타로 인한 반역자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3공화국에서는 누구보다 더 박정희와 대립각을 세웠고, 감옥도 여러번 가셨고, 박정희는 장준하 선생을 눈에 가시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거지 수사로 옥중에 있으면서 출마하여 국내 최초로 옥중 당선된 이가 장준하 선생이셨고, 평생을 검은 양복 하나로 지내면서 겨울에도 연탄불을 피우지 아니하고 내복으로 지내셨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는 가난한 국민들을 생각해서 라고 하더군요.
감옥을 들락거리며 야당 생활을 한 그 분의 아드님들은 돈이 없어 대학도 못 갔다 하더군요. 유신이 그 패악을 떨쳐갈때, 815를 앞두고 무슨 큰 결심을 앞두었듯이, 소중하게 간직하던 독립군 시절의 태극기도 남에게 주면서 곧 큰 일이 있을 것임을 암시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장준하 선생이 등산을 가셨는데 실족사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독립군 생활을 하여 산을 잘 탓으며, 남들에게 산을 내려가는 요령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런 분이 실족사라니....
부검 결과 시신의 귀 뒤에 뭔가로 얻어맞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높은 절벽에서 추락한 사람이 몸에 상처가 없이 비교적 깨끗하여 타살설이 있었으나 밝혀진 것은 없다 나중에 장준하 선생이 실족사한 장소에서 통나무를 굴리니 통나무가 많이 상했다고 합니다.
1. 등산(산행)을 간 후, 죽음을 목격한 이가 오직 1명 2. 부상한 이를 옮겼다는 이가 오직 1명 3. 사고이후 가족보다 정부(군부대 or 청와대)가 먼저 알았다는 사실 4.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혈흔이 (거의) 없고, 머리에 치명적 상처가 있었다는 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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