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이 땅에서의 승리를 장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승리케 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를 건축해서 큰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남은 소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큰 교회는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중략)사람들은 본래 크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속성이고, 죄가 부추기는 인간의 경향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만 놔두면 대형화는 거의 자동적으로 더 큰 대형화를 추구합니다.
특정 교회의 대형화가 그 교회의 영적 진운을 긍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자만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개인(의 부)이 그런 것처럼,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의가 덩달아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기가 더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크기는 영적 상태와 긴밀히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시절과 큰 교회 시절, 교인들이나 목회자의 영적 상태가 같을 수 없습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와 영적 상태가 같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부의 문제를 그토록 경고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의 축적 과정이 영적 과정이듯이, 교회의 크기의 문제는 곧 영적인 문제이기 쉽습니다.
왜 우리는 '부의 기만성'(deceitfulness of riches)(마 13:22)에 관한
예수의 경고를 예배당의 크기에 적용하려는 용기와 지혜를 갖지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교인 몰려드는 현실은 재앙
(중략)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교회가 작고, 지식이 적고, 부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날로 대형화하고, 지식인은 넘치고, 부자들은 많아지는데,
빈곤과 소외, 양극화와 불안은 커져 가고 있습니다.
준비된 교회, 준비된 지식인, 준비된 부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말했듯이 세 살배기에게 억지로 살을 찌운다 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건강한 유아라는 점을 반증해 줄 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재앙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지식을 쌓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재앙인 것과 꼭 같습니다.
그때의 부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방치하신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서 교회 건물이 감당하지 못할 즈음,
오히려 교회는 이미 그때부터 발전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양적인 외양에 취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물량적 성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 복음은 이미 상실돼 있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규모 자체가 중요해질 때, 그때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 교회는 넓은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자기 진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큰 기독교 기업을 일으키고, 큰 교회 건물을 건축해서, 큰일을 하겠다는 것은
철저하게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중략)
사람의 눈에 성공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것이 교회와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에 적당히 얼버무려 접목하면, 쾌감은 몇 배로 늘어납니다.
세상적 욕구도 은근히 충족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뤘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교회 안의 보통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포퓰리즘의 위험성
목사님,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의견이 어찌어찌 만들어졌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곧바로 치환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 의견이 차선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도출되는 과정이 또한 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극단적이고 지나친 비유일수도 있겠습니다만,
히틀러의 집권과 만행 배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을 포함한 멀쩡한 독일 중산층이 열렬한 지지가 있었습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그것이 세습이든 교회 건축이든 교인들의 다수 의사를 앞세워 정당화해 왔습니다.
포퓰리즘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것은 오히려 대형 교회일수록 편만한 게 현실입니다.
포퓰리즘이 문제인 것은 어떤 결정이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따르는 부작용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은 그것이 대중의 욕구를 수단으로
지도자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는 대중의 의사와 욕구를 조작하려는
(때로는 지도자 자신도 스스로 합리화하는) 술수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국가든 교회이든 구성원이 깨어 있을수록 포퓰리즘은 힘겨운 전략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목회자 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한국적 상황에서,
일반 교인들의 개입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대형 교회일수록,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대형 교회에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일에 소극적이거나 나아가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기 쉬우며,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교회의 크기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불쾌해 합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교인들을 늘 깨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회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레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일 것입니다.
'사랑의교회'가 건축 문제를 결정할 때, 대형 교회가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이런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여, 가능하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핍한 시대에 그런 어마어마한 결정 앞에서 교인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토론의 기회를 부여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명실상부한 민주적 과정을 거치기 위해 교인들의 적극적 관심을 유발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는지 진정 궁금합니다. 그런 과정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도출된 합의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 만들어진 '억압적 합의'일 뿐입니다.
전간 시절 영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이며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해럴드 라스키는 "누구나 빵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케이크를 먹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자들 앞에 설 때마다 매번 자신이 부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이론에 투철하게 살았던 비기독인이었습니다. 저는 라스키의 태도가 반드시 우리가 따라야 할 준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불평등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급진적'(radical) 통찰을 떠올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소리로 교회 '안'을 깨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정말 모골이 송연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뻔뻔스럽게 불의와 타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일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기커녕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변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말로써 부인하는 일을 단죄하는 데는 재빠르지만,
행동으로써 일상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에는 관용이 넘치거나 무감각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맡겨진 책무를 소홀히 할 때, 이단과 반쪽 진리가 판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도 타기하는 세습과 대형화를 탐한다 한들,
이제 별로 놀랄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이제 세상은 교회를 향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너무도 다르지 않거나(거룩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지요),
아니면 그 악행에서 세상을 오히려 앞서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하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교회는 그들의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끼리끼리의 모임이요,
예수 이름을 입에 달고 훈계를 일삼는 가소로운 집단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란...
썩지 않는 웅장한 건물과 허공에 새길 명성을 위해 혈안이 된 집단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중략)
하나님의 슬픔을 잃어버린 사랑의교회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사랑의교회' 문제는
단순히 새 예배당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마음을 한없이 짓누르는 것은 그것이 어쩌면 사소한 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교회'가 혹시 이미 슬픔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진 않았는지, 두렵습니다.
예수는 죄에 휘둘리는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깃든 깊은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슬픔이 마르면 남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 슬픔을 아는 자가 잠 못 이룰 때,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셨다며 자신의 태평한 잠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과연 오늘의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점은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덕담을 건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중략)
악이 도처에 편만한데,
축복의 말을 또 하나 첨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한국의 기득 계층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대형' 매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해 오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별 문제 없이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잘 돼 가고 있다고
국민의 눈과 판단력을 가리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럴수록 교회 안팎에서 불의는 더 만연하고 약자들의 고통은 갈수록 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양지만(듣기 좋은 말만)을 자꾸 비추자는(하자) 것이 어쩐지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목사님, 부디 작금의 일련의 상황들이
'사랑의교회'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형언 못할 비애에 대해
마침내 눈을 뜨고, 목사님의 사역에는 일대 쇄신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고세훈 /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개혁연대 지도위원
글위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