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붉은 십자가로 도시의 밤하늘을 장식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한다.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가 널리 퍼진 까닭이다. 한국 개신교의 그 왕성한 번식력은 속성경제국가답게 속도전을 치루면서 이뤄져 왔다. 그러나 물신숭배사상에 찌들은 일부 교회들로 인해 한국개신교는 이제 일방적인 성장과 칭송의 시대를 지나 비판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나름대로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탄절과 한국인은 어떤 관계가 있는 가.
예수를 사회과학적으로 이해하든, 숭배의 대상으로 이해하든, 예수의 탄생과 활동은 인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그러나 보다 더 엄격히 보자면 원래 유대인의 종교였던 유대교에서 한 지파가 갈라져 나와 사도 바울에 의해 유럽 백인들의 숭배의 대상이 된 이가 바로 예수고, 그런 예수를 숭배했던 백인들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세계를 물질적으로 지배하면서 예수는 세계화된다. 그러니 예수의 성공신화는 유럽백인의 근세 세계약탈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세계화된 예수의 역사성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예수는 무엇이고 그의 탄생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냐다. 왜 해마다 성탄절이 찾아오면 우리는 미국식의 문화놀이로 우리의 축제인양 즐거워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축하해야 하는 것일까. 굳이 그 의미를 따지자면 그것은 예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와 약한 자 들의 편에 서서 살아온 사랑과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깊이에 있어 심오한 동양 각국의 종교와 철학에 비해 유럽백인들의 종교인 기독교는 단순한 원리하나로 생명력을 이어온다. 예수는 구세주이고 가난한 자와 약자들의 편이라는 원리다. 따라서 아시아 각국의 종교나 철학, 그리고 학문에 비해 매우 단순한 기독교와 예수가 의미가 있으려면 예수의 생애 그 자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백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말한다.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 논리적 근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된 삼위일체론이다. 그런데 사실 이 논리가 피부에 와닿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보다 나는 예수의 삶에서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우선시한 그의 계층편력에 기독교의 진수가 있다고 본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그냥' 가난한 자들 5천여명이 항상 예수주변을 따라 다녔다. 버림받은 이방인과 과부와 병자와 어린아이들. 사막풍토에서 누군가 힘있는 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곧 삶이 절단날 수 밖에 없는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 한 예수이기에 그의 탄생은 빛나는 것이다.
그런 예수를 바라보면서 다른 눈으로 오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어딘가 불일치하는 어색함이 있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성탄절이 가난한 자, 약자와 함께 하는 성탄절이 아니라, 아는 사람과 또래와 끼리끼리 선물주고받고 술이나 퍼마시며 스스로의 인생을 자축하는 날로 여겨지는 세태로 인한 어색함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어색함에 결정타를 날린 한국교회의 세력번식본능과 물신숭배사상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닐까.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예수탄생의 사회적 의미와 어긋나게 물질적 풍요와 쾌락만 찬양하는 듯한, 이 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해 무어라 말할까.
섬김보다 지배와 과시욕에 물든 일부 기독교인들의 탈선이 오늘의 한국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는 시간, 그런 시간이 성탄절을 맞아 있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김석수의 자유자재'(http://blog.daum.net/kss60)에도 동시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