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4

YOROKOBI 2007. 5. 23. 17:43

 1-4. 지식인, 위기를 말하다




경향신문이 특집기획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을 위해 실시한 설문에서 ‘지식인 위기론에 동의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定義)로 답변을 시작했다. ‘지식인의 위기·몰락’에 동의한다고 밝힌 최장집(고려대 교수)은 “비판적 입장에서 현실 사회·정치 체제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발전 방향이나 미래상에 대해 총체적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에 충실한 근대화 이행 시기 유럽 지식인들의 전통이 한국 사회에도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개념도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판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인텔리겐치아형 지식인의 의미가 중심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최장집의 지식인 위기·몰락론은 그가 제시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등 ‘민주화 이후 20년’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직결된다. 그는 “지식인의 몰락은 민주화 이후 ‘군부 독재 반대’ ‘불의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의 의미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대안적 비전을 갖는 데 실패한 결과”라고 말했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은 “동의하는 측면과 동의하지 않는 측면이 동시에 있다”고 전제한 뒤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의 위기라는 측면에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최장집처럼 그도 한국적 지식인 전통이 인텔리겐차에 있음을 지적했다. “자신의 전문 지식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지식인(Intellectual)’의 전통이 강한 서유럽이나 미국과는 달리 동유럽이나 한반도의 경우 정통성이 취약한 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의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 이후 이른바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이 대거 권력에 참여하고 자신의 전문 지식을 통해 국가 권력에 봉사하는 ‘지식인’으로 변신하면서 과거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이 가졌던 도덕적 위상 등이 붕괴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군정에서 문민으로의 체제 전환, 여야간 정권 교체 등 민주화 20년간 권력 이동을 거치는 동안 ‘권력과 지식인 관계’도 변하면서 지식인이 위기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조국(서울대 교수)도 “민간·민선 정부의 출범 이후 비판적 지식인이 정부에 참여하는 범위와 수가 늘면서 권력과 지식인 간에 존재해야 할 긴장이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교수는 “위기의 주원인은 진보 정권 출범 이후 소위 진보 지식인들이 대거 정권에 투항해 어용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학자는 “과거의 전투적 민주화 운동 진영이 국가에 대항해 진척시켰던 기본권 차원의 민주화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면서도 “그러나 이후 국가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서 미래지향적 틀을 만들지 못했고, 과거처럼 선명성과 상징성을 띠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화에 따른 사회 다원화, 권위의 파괴 등을 들어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의 위기’는 비정상이 아닌, 불가피한 현상이란 해석도 제기됐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유교적 습속에다 식민지 상황, 군사독재 아래서 지식인의 전범은 저항적이고 체제 비판적인 우국충정의 양심지사였다. 그 문학성과 별 관계없이 박정희 시절 김지하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이 실례이고, 고은 시인이나 리영희 교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윤평중은 “그러나 87년 이후 민주주의의 빠른 성장이 오히려 지식인 사회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먼 배경으로 작용했다”며 “거대한 적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계몽적 지식인의 목소리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식인의 전문화가 가속화되고, 전자 민주주의의 도래, 권위의 파괴 등이 맞물려 지식인의 위기 소리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신광영(중앙대 교수)은 지식인의 위기를 ‘민주화의 역설’로 설명했다. 그는 “지식인의 위기는 민주화 운동의 성공에 따른 사회 다원화의 산물”이라며 “다원화되면서 각 영역에서 독자적인 지식과 활동 논리가 등장했고, 과거와 같은 포괄적 이론이나 지식의 필요성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식인에 대한 요구와 기대도 ‘지사적 지식인’에서 ‘전문적 지식인’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식 성격의 변화, 지식 기반·토대의 변화, 전문가의 등장, 지식인의 권위 하락은 하나의 맥락속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재일(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은 “유기적 지식인의 몰락과 인문학의 몰락은 세계적인 추세다. 정보화 사회는 지식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라며 “일제 치하, 군사 독재 아래서 저항세력의 구심점으로 지사적 지식인의 존재가 요구됐지만 현재는 기능적 전문가로 대체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지식인의 자질 문제라기보다는 토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적 추세”라는 분석이다.

어느 대학의 한 교수는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에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상대적 의미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지식 정보 사회로의 진입에 따른 지식 성격의 변화에 있다”고 말했다. 실용적 가치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전통적 지식인의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도 “신비화되어 있던 지식인들의 실체를 점차 확인하게 되었고 정보와 지식의 일상화 및 대중화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은 “칼 만하임의 ‘자유부동하는 지식인’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등으로 상징되어온, 지식인의 특별한 지위가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중기(한신대 교수)는 “지식인은 지식 테크니션이 아니다”라며 “진지하게 사회와 민중에 대해 고민하고 학술적·운동적 실천으로 옮기는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현연(가톨릭대 교수)은 “우리 학문과 지식 체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특권·엘리트 의식이 팽배해 있으며 현실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위기론에 동의하지만, 그 위기를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는 지식인도 있다. 이광백(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지식인의 위기는 지식인과 일반인을 구분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서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 되는 ‘지식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이며, 지식인의 위기는 역으로 사회의 진보”라고 말했다.

임헌영(문학평론가)은 위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지식인이 비판의식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면 한국사회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나 여전히 지식인은 강력하게 존재한다. 인류 사회에 부패와 부정과 평화 위협과 인권 탄압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식인은 강력하게 부각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보(연세대 교수)도 “위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기능화, 지식인 사회의 권력화 등 많은 문제점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성찰과 미래의 대안을 희구하는 욕구가 어느 나라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이환(서울산업대 교수)도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권이나 중요성이 과거보다 크게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사회가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국에서 지식인의 위상은 외국에 비해 왜소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명희(공주대 역사교육)도 “현대는 지식 기반 사회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지식인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다만 과거의 지식인상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지식인상이 정립되지 않아 혼란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을 지식인의 위기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지식인들의 말속에도 지식인 사회에 대한 회의·절망이 깔려 있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현재에 이른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의 주역이 결코 지식인일 수 없기 때문이고, 동시에 한국 사회의 현실이 절망적·부정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결코 지식인에게만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상조(한성대 교수)는 “기존의 지식 패러다임이 현실 분석과 미래 전망의 힘을 상실하였다는 의미에서 위기를 언급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한국 지식인만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문제는 지식인 자체라기보다는 지식인과 사회 일반(대중·정치인·언론) 간의 소통 메커니즘의 부재이고, 이는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