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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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