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독도폭격 ‘전모’ 드러나
1952년 독도폭격 ‘전모’ 드러나
미국, 한·일 분쟁지역 비화 우려…폭격연습 중지 |
한국전쟁이 고착상태에 빠진 1952년 9월 15일. 대한민국 독도 상공에서 정체불명의 단발 프로펠러 전투기 한 대가 나타났다. 이 비행기는 몇 차례 독도 상공을 선회하다 독도 부근에 4발의 폭탄을 투여하고 일본 방향인 남쪽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당시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광용호 선원과 해녀 23명이 이를 목격했다. 마침 학술 연구 목적으로 울릉도에 머물던 독도탐험대장 홍종인이 5일이 지난 20일 정부에 폭격 사실을 보고를 하고 동아일보가 당시 9월21일자 신문을 통해 ‘미군기로 생각되는’ 비행기의 독도 폭격 사건을 보도했다.
자칫 1948년 6월 8일, 미군 폭격기의 독도 폭탄 투하로 26명의 사상자를 낸 독도폭격사건이 재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는 1952년 11월 10일 외무부 명의로 당시 부산에 있던 주한 미 대사관에 9·15 독도폭격사건에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 방지에 나서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을 지켜봄에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한국 정부는 미 대사관이 수집한 세부적인 정보를 한국 정부에 알리고 그와 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한다.” (1952년 11월 10일 한국 외무부에서 보낸 ‘Note Verbale')
한국 정부의 항의와는 상관없이 미 행정부와 군 당국은 9월 21일자 동아일보 보도가 난 이후 독도폭격사건을 두고 발 빠른 대응을 보였다.
우선 1952년 10월경으로 추정되는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당시 미육군 대장이 앨런 라이트너(Allan Lightner) 주한 미대사관 참사에게 보낸 편지(미 극동사령부 발)에서 클라크 대장은 “미육군사령부가 9월 15일에 있었던 미국 군용기에 의한 Kokdo(Tokdo의 오기로 보임) 폭격이라는 허황된 주장의 사건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는 요청을 수일 전에 받았다”며 “내가 조사를 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대응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미 정부와 군 당국은 한국과 일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긴밀한 협조 체계를 이룬다. 수시로 문서를 교환하고 대응 방법을 모색해 간다. 이 과정에서 라이트너 참사가 한국 정부를 담당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독도분쟁 말려들지 않기 위해 폐쇄 결정?
주한 미 대사관이 작성한 문건으로 추정되는 10월 15일의 각서(memorandum)의 내용은 향후 미 정부가 독도 폭격 연습장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단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폭격지대로서의 분쟁영토(독도)의 사용’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서 미 정부는 크게 두 가지 판단을 하게 된다. 하나는 ‘분쟁영토’인 독도를 계속해서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한다면 미국이 한·일 양국의 분쟁에 개입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과 폭격이 계속될 경우 발생하게 될 민간인의 사망과 부상이 미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1952년 10월 15일 경 미 정부는 한국의 공식적인 요청이 없었지만 이미 독도 폭격연습장 사용 중지와 대체 장소 마련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로부터 항의 문서를 받은 4일 후인 11월 14일 라이트너 참사는 마크 클라크 대장에게 한국 정부의 항의 문서를 전달한다. 이 문서에서 라이트너 참사는 한·일 양국이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행정부의 조언을 요구하게 된다.
3주 가량 지난 12월 4일 한국 정부의 항의 문서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게 된다. 주한 미 대사관 명의로 발송된 이 문서에서 미국은 시간이 흐르고 제한된 정보로 인해서 조사가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조속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독도의 한국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1951년 딘 러스크 미 국무부 차관의 문서에서 미국의 입장이 언급됐다며 확답을 회피했다. 딘 러스크는 1951년 7월 19일 독도의 한국 영유권 내용이 누락된 미-일 강화조약 초안에 대해 양유찬 주미대사가 문제를 제기하자 같은 해 8월 10일 “독도는 지금까지 한국이 영토로 주장한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즉 미국은 1952년 9월 15일에 있었던 독도폭격사건에 대해서는 시간과 자료부족을 근거로 어떤 책임있는 답변도 한국 정부에 하지 않았다. 단지 ‘사건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은 상태서 재발방지 노력’만을 약속했을 뿐이었다.
12월 4일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하기 위해 라이트너 참사는 미군 책임자와 수시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당시 미극동사령부 참모장이었던 힉키(Doyle O. Hickey) 중장은 라이트너 참사에게 보낸 11월 27일자 편지에서 “사건이 발생한지 2달이 넘어서 사건에 대한 결론이 쉽지 않다”며 “이 기간 동안 우리 비행기가 이 지역을 사용을 요청한 기록도 없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폭격 연습은 해당국인 한국 정부에게도 미리 알려졌을 것”이라며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권한 밖의 일”이라고 답변했다.
라이트너 참사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미 행정부 극동아시아담당 부서의 영(Kenneth T. Young) 국장에게 조언을 받았다. 힉키 중장에게 편지를 보낸 날짜와 동일한 12월 4일 라이트너 참사는 영 국장에게 “한국 정부가 독도 영유권 등 미-일 평화조약에 자신의 입장을 담으려는 요구를 알고 있다”며 “11월 14일에 보낸 당신의 편지 내용으로 미 행정부가 한국정부의 요구에 대해 거절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라이트너 참사는 이런 과정을 거친 후 12월 4일 한국 정부에 미 행정부의 공식입장을 밝히게 된다.
이후 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입장을 밝힌 것과는 별개로 독도 폭격연습장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52년 12월 9일자 주일 미 대사관의 터너(William T. Turner)참사는 라이트너 참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동사령부가 잠정적으로 대체 장소를 물색할 때까지 독도사용을 멈출 것을 희망했다”고 밝혀 독도 폭격 연습장은 사실상 이 때부터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POST’ 독도폭격연습장은?
이에 라이트너 참사는 미 정부가 한국정부에 정식 통보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터너 참사는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2분을 중심으로한 직경 10마일 지역(독도와 부근 해역)을 더 이상 폭격 연습장으로 유지시키지 않고 북위 37도 30분과 동경 132도 30분 지역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그리고 라이트너 참사는 후방지역 군단장이었던 헤렌(Thomas W. Herren) 소장과 상의한 후 이듬 해 1월 20일 독도 폭격장 사용 중단 결정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독도 폭격장은 1953년 3월 29일 미일합동위원회에서 미군의 폭격연습장에서 최종 해제됐다. 이후 미국은 새로운 폭격 연습장을 물색하는데 힘을 쏟게 된다.
박성호 기자 ⓒ시민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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