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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영역을 의식이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런데 며칠 전 아침, 나는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다. 전말은 이러하다. 한동안 잠잠했던 어지럼증이 재발했다. 나는 얼른 신체적인 인과관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혈압이 떨어졌구나(측정해보지는 않았다), 식사를 자주 걸러 영양이 불균형되었구나,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몸이 피곤했구나…. 그렇게 생각해도 어지럼증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더니만, 결국은 구토증세까지 나타났다. 누우면 괜찮고 일어나 앉으면 증세가 시작되었다. 이때 문득 <통증혁명>이 떠올랐다.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차원에서 정서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의식 선으로 끌어올려 ‘처리’ 안 하기 위해 두뇌가 통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이 담겨있는 책. <통증혁명>의 존 사노(John E. Sarno) 박사에 의하면, 두뇌는 통증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위궤양, 천식, 여드름, 틈새탈장, 전립선염, 긴장성두통, 과민성대장증후군, 습진, 편두통, 이명(귀울림), 어지럼증, 빈뇨 등이다(78쪽).
‘정서적인 문제? 지금으로선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거의 확고한 신념에 가까웠다. 그러나 잠시 후 “무의식영역의 것을, 의식이 어떻게 알 수 있지?”하는 질문이 생겼다. 무의식은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일체의 감정활동’이다. 그런데 무의식에는 노력을 통해 의식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것과 노력을 통해서도 불러낼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노력을 통해 불러낼 수 있는 무의식을 프로이트는 전의식(preconscious)이라고 일컬었다. 사실상 노력을 통해서도 의식으로 불려나오지 않는 무의식에 대해서는 그것의 존재여부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60~61쪽).
단발성 '싫어함'일까 옛부터 무의식에 존재해 왔을까
나는 다시 눕지 않기로 마음먹고, 의식으로 불러낼 수 있는 전의식에 대한 믿음을 되새기며, 계속해서 내가 처해있는 감정적 상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글쓰기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떠올랐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생각을 계속했다.
글을 쓸 때 나는 나의 글의 진전을 위해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완벽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내 글을 남에게 보여주기 전에 끝없이 다시 쓰고 다시 쓰곤 했으니까.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때 나는 남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곤 했다. 그때 남들이 내 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지적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글을 수정할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기뻐하곤 했다. 남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는 것을 즐겼고, 그로 인해 나의 글이 더욱 나아지는 것을 기뻐했다.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최근 학위논문을 쓰면서 나는 그러한 나의 글쓰기 행태가 흔들림을 자각했다. 지적은 반복되는데 지적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러니, 글을 수정할 아이디어를 발견하기는커녕 지적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격한 구토증세를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내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기가 싫구나.’
사실 그날은, 학위논문 초고 4쪽쯤 쓴 것(200자 원고지 약 20매 남짓)을, 그 다음 날 내가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M 선생님에게 보여주기 위해 프린트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일단 그걸 무의식의 정서적 문제로 놓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고는 나를 안심시켰다. “지적당해도 돼. 이번의 지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일 거야. 지금 나의 신체적 고통은 신체적인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야. 사실은 유치하지만 정서적인 문제였어. 나는 지금 벌떡 일어나서 회사에 갈 수 있고, 학위논문 초고를 프린트할 수 있어.”
그런데 확고히 밝히지만, 나는 M 선생님께 초고를 보여드리는 걸 강하게 원했고, 그것이 나의 논문을 위해서 참 좋은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내 글이 수정될수록 좋아진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체험도 많았으니까. 물론 ‘의식수준’ 에서의 얘기다. 무의식수준에서 그것을 싫어하는 줄은 몰랐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학위논문 때문에 단발성으로 발생한 ‘싫어함’일까, 옛날부터 ‘싫어함’이 무의식에 존재했을까? 무의식수준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문제이니 의식수준에서 가타부타 말할 수 없다.
정서적 요인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도 통증은 사라진다
어떻든 나는 억지로 일어서보았다. 곧 쓰러질 것 같아 일어날 수도 없었는데, 의외로 일어나졌다. 어지럼증이 좀 덜한 것도 같았다. 단지 기분이었을까, 속도 좀 편해진 것 같았다. 집에서 걸어나와 지하철을 탔다. 다른 날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학위논문도 프린트했다. 점심시간쯤 되자, 멀미 후 증상처럼 나른함이 있기는 하지만, 어지럼증은 거의 없고, 구토증세도 거의 없어졌다. 물론, 부끄럽고 창피했다. ‘지적당해 글이 정정되고 진전되는 걸 즐기는 줄 알았는데, 지적당하는 걸 싫어했었다니!’ 그러나 몸의 증세가 이만큼 사라진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몸의 증세를 마음의 증세로 알아채는 사람들이 참 많다. “스트레스 때문이야”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스트레스로 지목하는가? 그날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나는 내가 이제껏 의식영역의 스트레스, 내가 스트레스로 간주했던 것들을 해소해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동안 전의식영역을 문제삼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의 원인 때문에 몸이 아프다니….
사노 박사는 말한다. 정서적 요인 때문에 통증이 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거동할 수 없을 만큼 아프던 통증이 사라진다고.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환자들에게 통증을 두려워하기보다 경멸하라고 당부한다. 신체에 주의를 집중하는 전략은 이제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잠재의식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통증은 사라진다”고(131쪽).
여기서 한 가지. 사노 박사는 정말로 신체구조상의 문제로 인한 통증이 있으며, 신체구조상의 치명적인 질병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늘, 언제나, 심리적 요인 때문에 통증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짚어준다. 어디에나 완벽한 일반화는 없는가 보다.
무의식에 잠시 '나'를 빼앗겼다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서. 만일 그날 아침, 내가 ‘혈압이 또 떨어졌을 거야, 식사를 자주 걸러 영양이 불균형되었구나, 일하느라 몸이 피곤했구나…’하는 진단을 내려 신체에 주의를 계속 집중하였더라면 어지럼증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나는 ‘쉬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하루 결근했을 것이고, 학위논문 프린트는 못 했을 것이며, 그 다음 날 학위논문 보여주겠다는 M 선생님과의 약속을 어길 핑계거리를 잘 마련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정서적인 문제는 주목받지 않은 채로 안전(?)하게 무의식 속에 계속 숨어있을 수도 있었으리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무의식에 잘 숨어있으니까 나는 그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또 다시 이런 식으로 회피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이런 치유방식을 누구에게나 권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체적 증상으로부터 정서적 증상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정서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결근도 안할 수 있었고 약속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몸이 ‘거짓말처럼’ 안 아프게 되었다는 것도.
그러나, 혈압은 정말로 낮다고 느껴졌고, 몸은 피곤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로 아팠다. 그냥 아픈 척한 것이 아니다. 거울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데, 얼굴엔 혈색이 하나도 없었고 시체처럼 창백했다. 어지럼증은 사실이었으며 심각하게 결근을 고려할 만큼의 구토증세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드러누워서 쉬는 방법으로 그 아픔을 해결하지 않았다.
몇 달 전 어지럼증이 심했을 때의 일들을 시험삼아 떠올려보았다.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나는 그때 그냥 신체적 증상을 인정하고 앓아누워있었다. 거의 기다시피 병원에 갔더니 별의별 검사를 다 해주더니만(건강보험 가입자인데도 돈 엄청 들어갔다), 아무런 신체적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무의식에 “나”를 잠시 빼앗겼었던 것 같다. 인정한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그 무의식으로부터 “나”를 되찾았다. 힘들어도 문제를 의식 선상으로 올려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의식의 힘을 또 다시 확인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렇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 예전에는 무의식을 약간 경시했었으나 지금은 무의식을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는 점.
사노 박사의 <통증혁명>은 “몸의 문제는 곧 마음의 문제지. 하지만 마음의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마음 편하게 가지라는 말은 숱하게 들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해?”하는 사람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성격을 바꾸거나 스트레스를 억지로 몰아내라고 말하지 않는다(몰아내기 위해 신경을 쓰는 순간 통증은 더 심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 다만, 신체적 증상에 쏟는 정신력을, (지금 상태로선 너무 몸이 아파, 그게 몸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바보같이 들릴지라도) 마음의 증상으로 돌리라는 것뿐. 그렇게만 하면 통증 같은 신체적 증상이 완쾌(!)된다는 얘기다. 참고로, 사노 박사는 이런 것들을 통칭하여 TMS(TMS: Tension Myositis Syndrome)라 명명한다.
<통증혁명>은 지금 서점가에서 상당히 인기있는 책이다. 그만큼 ‘신체구조적 원인 없음’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이겠다. 4쇄까지 찍혀나왔는데, 이 책을 읽은 그 많은 사람들, 억지로 성격을 바꾸려 한다거나 스트레스를 몰아내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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