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심리

칼 융 분석심리학의 주요 개념

YOROKOBI 2007. 6. 3. 23:13
칼 융 Part 1. 분석심리학자로의 성장  

 

 

1. 영혼을 찾는 소년, 칼
 
칼 구스타프 융은 다른 아이들과는 어딘가 달라보이는 , 다소 우울한 성격의 아이였다. 아홉 살이 될 때까지 형제나 자매가 없었기 때문에, 어린 융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공상에 잠기곤 했다. 
 
지금 바위 위에 앉아있는 이 존재가 나일까 , 아니면 가 앉아있는 바위가 나일까?
 
바로 이 바위가 융의 일생 동안 그의 이론에 영향을 끼친 , 그만의 비밀 바위였다. 
 
Jesuit
예수회 수사를 의미함.
예수회란 1540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가 F.사비에르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한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그는 1875년 7월 26일 스위스의 케스빌에서 스위스 개혁파 복음주의 교회성직자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매우 종교적인 가정이어서, 외조부는 물론 여덟 명의 숙부 또한 성직자였다. 그래서 융은 어린 시절 교회와 묘지를 운동장삼아 놀았는데, 이따금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검은 상자를 운반해와서 ‘ 예수 ’ 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
그는 심지어 아버지가 ‘ 제수이트Jesuit ’ ( ‘ 예수 ’ 와 비슷한 발음이 난다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린 융이 듣기에 ‘ 뭔가 대단히 위험한 것 ’ 을 뜻했다 . 소년 융은 “ 이 ‘ 예수 ’ 는 신뢰할 수 없어 . 그는 사람들을 데려가서 구멍에 넣어버리잖아! ” 하고 생각했다 .
융은 그의 지적인 삶이 세 살 때 꾼 꿈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 꿈속에서 그는 땅에 난 깊은 구멍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붉은 카펫 위에 금빛 왕좌가 있고 그 위에 이상하게 생긴 것이 앉아 있었다. 칼이 보기에 그것은 큰 나무둥치 같은 생김새에 사람의 살갗과도 같은 질감이 났다. 그 때 어디선가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 저것은 ‘ 식인종 man-eater ’ 이란다 ! ”

그리고 그는 공포에 질려 잠에서 깨어났다.

수 십 년 후에 융은 가톨릭 미사의 상징체계에 숨어있는 식인풍습의 모티프를 발견하게 되었다 .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꿈에 나타났던 ‘ 식인종 ’ 의 상징을 이해하게 되었다 . 그는 ‘ 어둠의 제왕으로서의 예수인 제수이트와 그 남근상이 같은 것이었음 ’ 을 깨닫게 되었다 . 그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어둡고 창조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평생동안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융이 정말 흥미를 느꼈던 것은 신-하느님이었다. 신은 그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죄로 가득찬 생각들을 하게 함으로써 그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융은 다음과 같은 환각체험을 했다. 
 
“나는 지옥불에 뛰어들기라도 하듯이 나의 모든 용기를 그러모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날뛰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내 앞에 거대한 사원과 그 위에 펼쳐진 푸른 창공의 영상이 나타났다. 신은 세상을 굽어보며 하늘의 금빛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왕좌 밑부분에서 거대한 똥이 떨어져내려서 사원의 빛나는 새 지붕을 박살내고, 대성당의 벽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자신이 본 영상에 대해 당황하는 대신, 융은 이 환상을 영광의 징표라고 여겼다. 그는 아버지나 숙부들이 예배 중에 설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신의 일면을 보았던 것이다. 한편 어린 융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비밀이야. 이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니까. 사람들은 신이 자신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내게 나쁜 짓을 하도록 강요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생각하도록 강요했던 것을 모르고 있어!’
 
갑자기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공허와 위선으로 가득찬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비밀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아버지의 서재를 뒤졌으나 허사였다.
 
지친 융은 버릇대로 그의 바위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서서히 머리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스스로 답을 깨치게 되었다. 융은 자신의 내부에 뭔가 영원한 것이 있음은 물론, 그 바위처럼 어떤 ‘다른’ 존재도 자신 안에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존재는 그 비밀을 알고 있어. 아니, 그 존재가 바로 그 비밀 자체야. 왜냐하면 그것은 수천년이나 나이를 먹었으니까.”

바위가 그를 혼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 것이다.
 
이같은 친가 쪽의 스위스 신교전통으로 인한 영향 뿐 아니라 , 융은 다른 종교적 영향도 함께 받으며 성장했다. 존경받는 목사였던 외조부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목사이긴 했지만 외조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즉 영적인 세상과 접해본 사람이었다. 매주 그는 둘째부인(융의 외조모)와 그의 딸(융의 어머니)이 듣는 가운데 고인이 된 첫번째 부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융의 어머니는 외조부가 설교문을 작성하는 동안 외조부 뒤에 서서 나쁜 영혼들을 쫓아내어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융에게 들려주었다.
 
영혼과 접촉하는 것은 스위스의 시골사람들에게는 특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 융은 그의 어머니를 어둡고 예측할 수 없는 ‘ 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뿌리내린 ’ 존재로 느꼈다. 그녀는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사람을 놀래키는 야릇한 존재였다.
스위스 신교와 이교적 영성주의 spirituality라는 이러한 이중적인 종교적의 영향으로, 융 자신 또한 이중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 제 1 인격 ’ 과 ‘ 제 2 인격 ’ 이라고 불렀다 .
제 1 인격 : 일상적이고 평범한 세계와 관련된 인격. 다혈질이며 약간 유치하고 규율을 무시하는 인격이다. 그러나 학문적인 성공, 과학에 대한 탐구, 교양있고 존경받는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욕심이 있다.
 
제 2 인격 : 더욱 다루기 힘든 인격으로, 그의 바위나 신의 은총에 대한 비밀과 동일시된 ‘ 타자 ’ 이다 . 제 2 인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저 옛날로부터 전해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융은 어머니의 초자연적 세계와 제 2 인격 차원을 연관지었다. 어린 시절 그는 검은 프록코트와 부츠를 착용한 작은 남자상을 조각해서 조약돌과 함께 필통에 넣어 다락방에 있는 금단의 장소에 숨겨놓았다. 때때로 그는 비밀의 메시지를 담은 종이조각을 필통 안에 집어넣기도 했다. 이러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행동을 통해 그는 제 2 인격 세계와의 접촉을 느꼈다. 훗날 융은 정신분석의 과제는 환자의 정신적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의 자연 과학자·철학자·신학자로, 초기에는 자연 과학을 연구하였으나, 심령적 체험을 겪은 뒤 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신비적 신학자로 활약했다. 철학적으로는 무한자를 모든 피조물에 존재하는 힘과 생명으로 보고, 그 무한자를 신으로 규정.
성부·성자·성령이라는 3위격의 통일신으로서의 전통적 교리를 부정했다.
《천국의 놀라운 세계와 지옥에 대하여》를 써 유명해졌는데, 이는 《묵시록》의 새로운 해석으로서 그의 학문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 밖의 저서로 《자연 사물의 원리》 《영혼 세계의 질서》 《새 예루살렘》등이 있다.
 
한편 융은 사춘기 내내 제 1 인격과 제 2 인격의 세계를 융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열 두 살 때에 ‘ 신경증neurosis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 고 회상한다 . 그는 원인 불명의 졸도를 여러 번 하여 학교를 자주 빠지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것이 완벽한 ‘ 거짓 행동 ’ 이라고 여기고 걱정했다 . 의사들은 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고, 아마도 간질발작일지 모른다고 여겼다고 한다.

융은 이러한 기절발작을 의지력으로 이겨냈는데 , 그 후 또 다른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자신이 안개의 벽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느낀 것이다. 

 “ 이제 알겠어 ! 나는 지금부터 나 자신이 된 거야!

이제 융은 점점 더 자신의 제 1 인격, 그리고 새롭게 발견된 자아관념과 동일해져갔다. 제 2 인격의 세계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데다 매우 강건한 젊은이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들과 함께 크고 우렁찬 웃음소리, 삶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 등을 갖춤으로써, 그는 풍채 당당하고 -특히 여성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사람으로 일생을 살게 된다.
 
젊은 시절 융은 과학과 철학에 강한 흥미를 느꼈으며 , 바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의학을 공부했다. 융이 스무살이던 대학 2학년 시절,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로 인해 공부를 그만둘 위기에 처했던 융은 숙부에게 돈을 빌려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융은 학창 시절을 만끽했고 , 의학과 함께 철학, 특히 칸트와 니체의 철학에 푹 빠졌다. 그는 스베덴보리 역시 탐독했고, 관념론과 초과학적인 현상들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2. 칼, 대학에 가다
 
융은 대학교에서 토론단체인 Zofingia Club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융은 클럽의 활발한 지적토론에 몰두했고, 그를 매혹시킨 주제, 바로 인간의 영혼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철학자 칸트는 영혼의 지향방향이 두 가지이며 , 하나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적인 세계로 향해 있다고 천명한 바 있었다. 이러한 칸트의 사상은 융 자신의 이중성(제 1 인격과 제 2 인격의 세계)과도 부합하였다. 만약 칸트가 옳다면, 시간과 공간의 과학적 정의를 왜곡하는 여러 초과학적인 현상들을 통해 우리는 영혼세계에 대하여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융은 생각했다. 따라서 초심리학(parapsychology, 정신감응, 투시력 등의 초자연적 심리현상을 다룬다 )과 최면, 강신술, 투시, 텔레파시와 같은 현상들을 필히 연구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런 연구를 하기 위해 어떤 길을 택해야할까? 그 때 전광석화처럼 , 정신의학psychiatry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융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전까지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정신의학이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크라프트 에빙Kraft-Ebbing의 저서에서 융은 다음과 같은 발견을 하고 흥분하였다.
 
Krafft-Ebing, Richard, Freiherr von
(1840~1902)
성의 정신병리학에서 선구적 역할을 한 독일의 신경정신학자. 독일과 스위스에서 수학한 후 32세의 나이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정신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정신이상에서 유전의 역할과 변태성욕에서부터 간질, 진전마비, 편두통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었다. 그는 매독과 부전마비(말기 매독에서 간혹 발생하는, 광범위한 뇌조직 파괴로 인한 정신질환)간의 관계를 확립하고, 최면술에 대한 실험도 행하였다. 성적 정신이상에 대한 파격적인 연구결과를 담은 저서 ' Psychopathia Sexualis (1886)'로 오늘날까지도 잘 알려져 있다.
"정신의학자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정신질환에 걸린 환자의 인격은 물론 , 자기 자신의 인격 전체에 대해서도 반응을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하여 정신의학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학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늘 찾아헤맸으나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인 현상과 영적인 현상 모두에 공통되는 경험적 분야이다. 결국 자연법칙과 영혼의 충돌이 현실화되는 지점을 찾아낸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확신을 가지게 된 당시에, 정신의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을 확고히 해주는 여러 가지 특이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 같은 소리가 났다. 세상에, 멀쩡히 있던 식탁이 정확히 한가운데에서 두조각으로 쪼개져버린 것이다. 또 몇 주 뒤에는 부엌 찬장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찬장을 열어보니 빵을 써는 칼에 달린 쇠칼날이 산산조각 나있었다. 융의 어머니는 이런 징조들이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믿었다. 융도 동의했다. 그는 어떤 강령회에 참석해왔는데, 거기에서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융은 그 강령회에 2년 이상 참가하였다. 영매는 그의 열다섯 살난 사촌 헬렌Helene Preiswerk이었다. 그리고 故 사무엘Samuel Preiswerk이 그녀의 영적 수호자였다. 몽환의 상태에서 헬렌은 점차 원래의 그녀와는 다른, 조용하고 세련된 성격을 가진 이벤느라는 여성이 되어갔다. 헬렌은 또 수많은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종종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도 등장하였다.
 
그 당시에 융은 거의 깨닫지 못했지만 , 헬렌은 사실 사춘기소녀 특유의 감성으로 융에게 홀딱 반해있었다. 그래서 강령술에서의 많은 강신이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행해졌던 것이다. 그녀가 그를 속인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융은 강령술에 발길을 끊었다.
 
현시대의 우리가 보기에는 , 이러한 초자연적 경험들과 강령술이 융이 정신의학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호해 보인다. 그러한 초자연현상과 ‘ 정신의학 ’ 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길래 ?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정신의학과 융이 학자로서 첫 발을 내딛던 1890년대의 정신의학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주지하자. 인간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것은 융의 동시대인들에게 심령연구, 즉 ‘ 강신술 ’ 현상에 대한 연구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과 밀접히 관련된 것처럼 비춰졌다. 심령연구모임The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은 인간의 정신이 신체(물질)에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물질적인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1882년 설립되었다. 
 
  
3. 무의식의 발견과 프로이드
Charcot, Jean-Martin
(1825~1893)
현대 신경학에 대한 창시자 중 한 명이자 가장 위대한 프랑스 의학교수겸 의사 중 한 명. 1853년 파리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3년 뒤 중앙병원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1860년부터 93년까지 파리대학의 교수로 재임했으며, 그곳에서 살페트리에르 병원과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병원에서 1882년에 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신경학클리닉을 개설했다. 유능한 선생으로서 그는 각국의 학생들의 존망을 받았다. 1885년에 그에게 배웠던 학생 중 한 명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였으며,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심리적 근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히스테리의 신체적 기원을 발견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샤르코가 최면술을 연구했던 것이었다.
저서로는 '신경계의 질환에 대한 강의 Lecons sur les maladies du systeme nerveux, 5 vol. (1872-83)', '살페트리에르에서의 화요일 강연 Lecons du mardi a la Salpetriere (1888)' 등이 있다.
 
인간의 잠재의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의식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무의식 Unconscious이라는 영역에 대하여 많은 연구결과가 정립되었다. 예를 들어 파리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Salp etriere 의 유명한 신경학자였던 샤르코 Jean-Martin Charcot(1825~1893)는 육체가 마비된 상태에서도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최면술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마음 , 혹은 정신적 에너지 mental, or psychical energy의 역학과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의 공통된 의견은, 무의식이 의식의 정상적 기능을 방해하기 시작한 순간 무의식은 마음의 접근불가능한 영역에 갇혀 버렸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무의식에 대한 샤르코의 유물론적 접근은 1880년대의 또다른 신경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psychoanalysis을 발전시켜 융이 그를 만나기 수년 전에 이미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최면이라는 방법 대신 ‘ 자유연상기법 free association method ’ 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환자는 침상에 편안하게 누워서 뭐든 떠오르는 것을 치료자에게 말하고, 치료자는 그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환자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해 환자는 정신적 상처를 입었던 사건과 연관되어 잊혀졌던 기억들을 회상해내게 된다.

그러한 회상을 일컬어 소산 abreaction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 트라우마가 일단 회상되고 나면 그로 인해 생겨났던 신체적인 질환까지도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용어였다. 이와 비슷한 선상에서 망각, 말실수 등과 더불어 꿈에 등장하는 상징도 무의식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이같이 무의식의 미스터리에 대해 非강신술적인 접근을 해보인 프로이트의 이론이 20세기 심리학에 커다란 충격을 주긴 했지만, 강신술은 여전히 심리학의 중요한 일부로서 19세기 말까지 계속해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임상 정신의학에 대하여 유물론적인 교육을 받은 융 자신도 늘 심령현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후에 보게 되듯이,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는 확신에 찬 유물론자인 프로이트와 갈등을 빚게 된다.
한편 샤르코의 제자였던 피에르 쟈네 Pierre Janet는 ‘ 다중인격 ’ , 즉 해리성 인격장애의 무의식 상태를 연구했다. 그는 환자 레오니를 밀접하게 연구하면서 그는 최면상태에서 치료자와 ‘ 잔여기억 residual memory ’ 의 표현이나 텔레파시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야기하는 존재가 바로 무의식이었음을 밝혀냈다.
융의 사촌이자 영매였던 헬렌 역시 이벤느를 위시한 다른 인격들을 창조했었음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 융은 1902년 박사논문소재로 헬렌의 강령회를 채택했다. 이벤느로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그녀의 정상적인 의식상태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융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에서 분리된 부분이 환각의 형태를 통해 다른 인격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강령술에서 그러듯이 의식적인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무의식은 의식적인 태도를보상compensate할 수 있다. 즉 무의식의 창조물에는 의도성과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에너지는 목적적인teleological 기능을 수행한다.     
 
4.뷔르골츨리 병원과 환자 바베뜨
 
1900년 12월, 융은 취리히대학교의 부속병원인 뷔르골츨리Burghozli 정신병원에 조교로 부임하여 정신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뷔르골츨리의 모든 의사들은 병원 내에서 기거해야했고, 병원은 원장인 브로일러Breuler 박사에 의하여 마치 수도원처럼 운영되었다. 브로일러는 당시 스위스에서 가장 저명한 정신의학자 중 한 명이었는데, 직원들에게는 권위적이었지만 환자들에게는 친절하고 인간적인 의사였다고 한다.
Hades
그리스어 'AIDES' ("보이지 않는 자")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그리스 신화 속의 신. 로마신화에서는 플루토 혹은 플루톤('부유한 자')으로 불리움. 거인족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제우스나 포세이돈과는 형제지간이다. 크로노스가 살해된 후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아내 페르세포네(데메테르의 딸)와 함께 죽은 자와 내적인 힘을 다스렸다.
 
이 병원에서 융은 생애 최초로 정신병자들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병자들이 하데스의 지하세계에 있는 죽은 영혼들처럼 보였다. 그는 매일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는 미친 남자들과 여자들을 대했다. 이들은 정신이상psychosis, 즉 강박증이나 ‘무의식의 침략’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한 질환으로 인해 환자의 일상적인 정신작용이 망가졌고, 환자는 관례적인 사회적 행동 대신 엉뚱한 행각을 벌이게 되었다. 뷔르골츨리에서 보낸 9년 동안 융은 브로일러가 운영하는 실험심리 프로그램의 선구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후에 브로일러가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라고 재명명한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를 주로 다루었다.

대부분의 정신의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이 뇌의 퇴행성 질환이라고 믿었다. 즉 신경조직상의 장애에 관련된 문제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반면 브로일러 측에서는 정신분열증 역시 2차적인 증상들이 있으며 그것은 원래 심리적인 증상이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치료자는 환자와 정서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환자의 환각이나 무의미한 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로일러는 병의 초기 단계에 환자를 집중적으로 치료해서 병이 만성화되는 것을 막고자 애썼으며, 그 결과 많은 환자들이 현저히 회복되기도 하였다. 브로일러는 한편, 정신질환의 심인성 형성과정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연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했다.

융은 브로일러의 지휘 하에 위와 같은 연구들을 지속하면서 단어연상검사word association test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 테스트에서 환자는 특별히 선별된 단어들을 듣고 최초로 연상되는 단어를 말해야 한다. 그 결과 단어연상 및 반응시간에서 나타난 불규칙성이 콤플렉스complex를 구성하는 무의식적 감정들과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융은 콤플렉스의 다양한 유형과 각각의 기원에 대해서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바베뜨 Babette라는 늙은 여성환자가 융의 관심을 끌었다. 서른 아홉 살 이후로 12년 동안 그녀는 뷔르골츨리에 입원해 있었는데, 늘 이렇게 중얼거렸다.

  “ 나는 오트밀 바닥에 있는 플럼케이크야 . 나는 나폴리랑 같이 세계에 국수를 공급해야 돼! ”

융이 단어연상검사를 통해 이 표현을 분석했을 때 , 그녀의 삶이라는 문맥 속에서 이 말들이 뭔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그녀는 뒷골목의 가난뱅이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술주정꾼이었고 어머니는 매춘부였다. 바베뜨의 콤플렉스는 그녀의 열등감과 불행했던 삶에 대해 보상하고 싶다는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신병적 생각들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융은 피부와 땀분비 반응을 통해 심리적 상태를 측정하는 검사장치를 가지고 실험을 하기도 했다 . 소위 말하는 ‘ 거짓말탐지기 ’ 말이다. 그는 단어연상검사를 범죄사건의 범인을 찾는데에도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돈을 훔쳤던 간호사를 잡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그는 이 작업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한 반응들이 피험자의 주관적인 죄책감에 따라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실제로 그 사람이 유죄인가 무죄인가와는 상관 없이 그러한 반응들이 생겨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융은 ? 특히 미국에서 -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05년 그는 뷔르골츨리의 수석의사가 되었고, 취리히대학 의학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정신분석에서 더 많은 성과를 이룩할수록 유명세의 발판이 되었던 실험심리학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융은 12년 뒤에, “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실험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 거의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을 것이다. ” 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   
 
 
5.융의 가정생활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융은 어느 모임에 갔다가 층계 꼭대기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과 결혼할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 저 소녀가 내 아내야 ! ” 하고 말하기도 했다 . 칼과 에마 로젠바흐Emma Rosenbach는 그로부터 7년 뒤인 1903년 2월 14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에마는 스위스계와 독일계의 피를 받은 뼈대있는 가문 출신으로 , 교양 있고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이한 융은 그 덕에 자신만의 연구를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을 얻게 되었다.
 
신혼부부는 처음에 뷔르골츨리 근처에 집을 얻어 살다가 , 1909년 이후 취리히 근교의 쿤스나트 호숫가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하게 된다. 자녀는 다섯 명이 태어났다.
 
1911년경 안토니아 볼프Antonia Wolff가 융의 정부가 되었는데, 이 관계는 안토니아가 1952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삼각관계로 인해 두 여자 모두가 고통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묵인했고, 그 사실은 취리히의 관련분야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에마와 안토니아는 모두 융의 연구에 동참했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다. 에마는 아더왕 신화를 평생의 주제로 삼아 연구했다. 성배전설에 대한 그녀의 연구는 그녀 사후에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Marie Louise von Franze와 융학파 분석가들에 의해 완성되고 출판되었다. 
 
 
6. 융, 프로이드를 만나다
 
융의 단어연상검사와 관련된 연구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다시 한번 확고히 해주는 것이었다 . 융은 프로이트에게 연구논문을 한 부 보냈고, 이를 계기로 그들은 1906년부터 1913년까지 긴밀한 학문적, 인간적 우정을 나누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 엄청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융이 1907년 비엔나에서 프로이트를 처음 직접 만났을 때 그들은 장장 열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융은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 중 진정 중요하다고 느낀 첫번째 인물이 바로 프로이트였다고 술회한다. 프로이트와 비견할 인물이 아무도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융의 정신의학적 백그라운드와 뷔르골츨리에서의 경험 , 그의 지성과 명망 등을 이유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진영은 융을 적극적으로 초청했다. 게다가 융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장점도 있었다. 당시 프로이트측은 정신분석학이 유대인들의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편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융은 곧 프로이트측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국제정신분석학회International Psychoanalysis Association(IPA)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최초의 정신분석학 저널인 Jahrbuch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 융이 ‘ 정신분석학의 적자 (嫡子) ’ 로서 추앙되었던 1909년으로부터 불과 4년 뒤인 1813년에, 프로이트가 융에 대하여 ‘ 그 경건한 척하는 짐승 같은 녀석 ’ 이라고 혹평하게 된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 두 사람의 결별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프로이트의 권위주의
 
S a ndor Ferenczi
(1873~1933)
정신분석적 이론과 치료법에서의 테크닉에 대한 실험에 기여했던 헝가리의 정신분석학자. 1894년 비엔나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신경학, 신경병리학을 전공하고최면술 기법을 익혔다. 1908년 프로이트를 만나서 프로이트측의 비엔나 정신분석 학회에 가입하였다. 그로부터 오랜동안 프로이트와 밀접한 우정 및 학문적 공조관계를 유지했다. 1913년 헝가리 정신분석 학회를 창설했고, 1919년에는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정신분석학 교수가 되었다.

1909년, 프로이트와 융은 클락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오랜 뱃길에서, 두 남자는 서로의 꿈을 분석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꿈해석에 필요한 자세한 개인적인 배경을 털어놓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제자를 원했고, 융에 대해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위상을 유지하길 바랬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권위가 실추될까봐 두려웠을테지만, 바로 그런 행동으로 인해 융에 대한 프로이트의 권위는 모두 사라졌다.

한편 프로이트는 그 언쟁이 융의 부성 콤플렉스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 즉, 융은 정신분석학의 ‘ 아버지 ’ 인 자신을 죽이고 정신분석학 , 그 ‘ 아름다운 어머니 ’ 를 혼자서 독차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자신과 융 간에 발생한 여러 초자연적인 사건들(프로이트는 융 앞에서 두 번이나 갑자기 기절했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 프로이트적 설명방법 ’ 에 의지해야만 했다 .

바야흐로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의 비엔나파와 융의 취리히파로 쪼개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 이에 대해 페렌치S a ndor Ferenczi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융은 더 이상 프로이트를 (신처럼) 믿지 않는다! ”
 
2.  이론적 견해차이
 
1906년 조발성 치매와 연상실험에 대한 연구에서 융은 ‘ 프로이트의 눈부신 업적 ’ 에 빚진 바 있다고 인정하였다 .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의 유아기의 성적 욕구sexuality에 대한 집착에 의구심을 품었다. 또 그는 프로이트의 치료법에 대해서도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융은 그 치료법이 이론적으로 제시하는 정도의 성과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두 사람 모두 갈등의 골이 제법 깊어질 때까지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서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러다가 1912년 뉴욕의 포드햄대학에서 융이 강연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공적인 장소에서 이러한 갈등이 크게 불거지게 되었다. 원래 융은 강연에서 정신분석학을 소개하고 옹호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자신의 견해에 맞게 모든 것을 재해석하여 강의했다.

융은 히스테리 hysteria와 강박적 신경증obsessional neurosis이 ‘ 틀림없이 성적인 ’ 리비도가 비정상적으로 환치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병적 상태는 교란된 성적 본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발성 치매의 경우 환자들은 총체적인 현실감각의 상실을 겪기 때문이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정신병에서 현실기능을 상실하는 것이 너무나 극단적이기 때문에 , 성적인 특성이 전적으로 배제된는 여타의 본능적 충동들 역시 상실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현실 이 性의 작용이라고 주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유아의 성적 욕구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 프로이트는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이 일종의 성적 행동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융은 유아의 빨기행동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만족감은 단지 인간이 음식을 먹는데서 비롯되는 만족감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유아의 성적 본능에 대한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성인만의 생식적 본능을 모든 연령대의 인간에게 공통되어 있는 식욕과 혼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출생에서 성숙하기까지 정신적 삶의 발달을 설명하는 데 있어 섹슈얼리티의 개념을 과도하게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결론지은 융은 정신적 에너지에 대한 성적 정의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3. 철학적 차이
 
융은 오랜 동안 영혼의 신비로운 측면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프로이트와 달랐다 . 프로이트와 가까이 지냈던 6년동안 융은 정신의학과 정신분석학이 제한한 한계선까지 그의 제 2 세계를 가급적 억제하였지만, 여전히 초심리학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11년에는 점성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융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풍부한 전리품을 가지고 ‘ 종교적인 리비도의 구름 ’ 으로부터 돌아오겠노라고 프로이트를 안심시켰다 .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영역에 초심리학이라는 부분을 추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성적 욕구에 관련한 이론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프로이트는 여전히 오컬티즘의 검은 해일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이 그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로 인해 그들의 우정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가고 말았다.
 
 
7. 이상한 사건들
 
융은 1909년 3월 프로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떠나기 전날 밤에 ‘ 정신분석 운동의 황태자 ’ 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 그런데 그날 저녁, 프로이트가 신비학에 대해 적의를 표하자 융은 매우 화가 났다. 날카롭게 반박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있던 융은 자신의 횡경막이 자꾸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 갑자기 그들 위로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책장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융은 그것이 ‘ 촉매적인 외형화 현상 ’ 의 한 예라고 생각했다 . 황태자로서의 서임식이 있던 저녁, 융의 제 2 인격이 프로이트이론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책장을 넘어뜨리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1909년 융은 고대신화 연구에 몰두했다. 님프와 켄타우루스를 분석하면서 융은 혼란에, 그리고 흥분에 빠졌다. 신화와 정신병자들의 중얼거림에서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뷔르골츨리의 한 환자는 “ 태양의 중앙에 페니스가 솟아나 있어요 . 그것은 움직이면서 바람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 라고 말했다 . 이러한 표현은 융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미트라 신앙을 연구하고 난 후에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었다. 미트라 신앙에서는 바람이 태양 중앙에 매달려 있는 튜브에서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자는 미트라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환상이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정신의학에서는 ‘ 일상의 잔여물들 ’, 즉 보고나서 잊어버렸으나 마음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무의식이 보유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융은 무의식이 개인이 아닌 ‘ 고대의 ’ 잔여물들도 저장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태양에 대한 환자의 이미지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단적인collective 이미지가 아닐까?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잊혀진 신화들로 되돌아갈 수 있는 통로가 아닐까?
 
 
8. 프랭크 밀러를 오진하다
 
그 후 융은 프랭크 밀러라는 젊은 미국 여성이 쓴 아티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아티클에서 그녀는 무의식적인 ‘ 고대의 잔여물 ’ 에 가리워진 어떤 영상을 묘사하고 있었다 .

  “ 내가 반쯤 잠에서 깨어 누워있을 때 , 고대 아즈텍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 나는 치완토플이라고 하오 . 내 영혼의 동반자를 찾고 있지만 허사였소. ’ 하고 말했다 . 그 때 초록색 독사가 그를 물고 그의 말을 죽였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 그를 삼켜버렸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半의식적인, 혹은 최면적인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즉 심령술사들이 죽은 영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때와 같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인 것이다. ”
이에 대해 실험심리학자인 테어도어 플러노이 Theodore Flournoy는 그것이 무의식에 있는 역치下의 일상적 잔여물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융은 다른 견해를 보였다.

     “ 밀러 양은 내향적 인물이다 . 그녀의 정신적 에너지가 내부로 향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무의식적인 고대의 잔여물들이 생겨난 것이다. 치완토플의 실패와 죽음은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영웅적 행동을 해내지 못한 밀러 양 자신의 실패를 극화한 것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독립하고 싶어하고 있으며,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녀의 무능력은 그녀 역시 ‘ 산사태에 묻혀버리게 ’ 될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

융은 밀러가 결국 정신병에 걸릴 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
 
융은 그녀의 명예훼손 문제에는 아랑곳 없이 , 그녀를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프랭크 밀러에 대한 분석결과를 출판했다. 후에 개정판에서 융은 예측이 ‘ 주요 측면에서 볼 때 정곡을 찔렀다 ’ 고 덧붙였다 . 왜냐하면 프랭크 밀러가 정신분열증으로 고통받으면서 요양소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공적 예측은 융의 방법론이 환상fantasies-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이미지들과 동일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는-에서 발견되는 심리적 증상들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어지는 여러 케이스들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사실 융은 프랭크 밀러에 대해서는 틀린 예측을 한 것이었다 . 최근 연구 결과, 그녀가 요양소에 입원하기는 했지만, 정신분열증의 주요 증상인 환각hallucination이나 망상delusion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녀는 수 주 후에 퇴원했다.

그렇다면 융은 왜 프랭크 밀러를 오진한 것일까 ? 프로이트에 대한 투쟁이 극에 달하고 있을 당시 융 자신은 그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사실 프로이트가 설명했던 신경적 장애neurotic disorder의 성적인 근거에 대해서 그다지 성공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배격하기 위해 정신적 장애psychotic disorder에 대해 무리를 해서라도 확신에 찬 예측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밀러가 정신분열증에 걸릴 것이라는 융의 예언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더라면 , 프로이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편협한 이론을 넘어서서 정신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결국 정신분석학 전체를 융의 손으로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융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지지하는 기본적인 ‘ 근친상간incest 욕구 ’ 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 프로이트는 아동의 환상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융은 프로이트가 근친상간 욕구를 문자 그대로 어머니를 범하고 싶어하는 충동으로 여겼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융은 근친상간 욕구가 한 개인으로 완성되고자 하는 정신과정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재탄생rebirth에 대한 욕구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한편 밀러의 케이스에서 무의식에 남아있는 ‘ 고대의 잔여물 ’ 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융의 제 2 인격의 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융은 그의 제 2 인격 측면의 ‘ 환상적 사고 ’ 를 제대로 다룰 만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 융은 프랭크 밀러가 병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고, 반면 융은 1913년 병이 들었다! 크라프트-에빙의 예언적 경고에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 환자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반응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 의 문제를 발견할 위험에 빠질 것이오 ! ”
 
9. 고통스런 항해를 떠나는 융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융은 위험한 항해를 위해 출항했다. 바로 중년의 위기를 관통하는 여행이었다.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융은 위험한 네카이아Nekyia, 즉 ‘밤바다 여행night-sea journey’을 감내해야만 하는 영웅에 대한 오랜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영웅의 항해는 태양 고유의 일상적인 뜨고 짐, 즉 태양의 ‘삶’과 ‘죽음’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태양의 연간주기는 황도대zodiac로 상징된다. 때때로 영웅은 바다괴물에게 잡아먹히기도 한다. 성서에 나오는 고래와 요나 이야기를 상기해 보라. 가끔 괴물이 못된 여성의 형상으로 묘사될 때도 있다.
네카이아Nekyia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의 주인공 오딧세우스가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떠난 여행을 일컫는 말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러한 바다괴물은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즉, 현재 우리가 애착하고 있으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벗어나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어머니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어머니의 안(고래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러한 재진입을 통해서만이 그는 그녀로부터 다시 한번, 이번에는 영적으로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재진입은 성적인 근친상간 욕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융은 밀러를 오진함으로써 그 자신의 무의식 여행에 대해 예언한 바 있었다. 그 여행은 무척 위험한 여행이었다. 융 자신도 뷔르골츨리의 미친 이들에게서 통제되지 않은 무의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목도했었다. 그들의 정신이 광기의 바다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융이 그러한 정신적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융은 서른 아홉살이었고 막다른 길에 직면해 있었다.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를 저버렸다. 그는 과학적인 텍스트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고, 대학에서의 직위도 내팽개쳤다. 1914년부터 1919년 사이에 그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그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탐험해야만 했다. 융은 이 때의 기분을 묘사하면서 타로카드의 ‘매달린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10. 다시 홀로 바위 위에
 
융은 자신의 삶이 마치 외계에서 오는 뉴스처럼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방황을 거듭했다. 그러던 1913년 가을의 어느 날, 그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영상을 보았다.

      “ 나는 괴물 같은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북쪽 지방과 저지대를 뒤덮고 내 쪽으로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 해일이 막 스위스를 집어삼키려고 할 때, 알프스산이 점점 더 높이 솟아오르더니 우리나라(스위스)를 보호해주었다. 그 때 나는 우리의 현실 세계에 어떤 무서운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몰아치는 누런 물결 위로 찬란했던 문명의 파편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을 보았고, 셀 수 없이 많은 익사한 시체들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 바다 전체가 피로 변했다. ”

융은 같은 꿈을 수 주 후에 또 꾸었는데 , 그 때에는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 이것은 현실이며 곧 그렇게 될 것이다 . ”

그리고는 1914년 6월까지 이와 비슷한 불길한 꿈들을 되풀이해서 꾸게 되었다. 마지막 꿈에서 융은 한 그루의 나무를 향하여 얼어붙은 땅 위를 쉼없이 걸어갔다. 그 나무에는 치유력을 가진 즙이 가득찬 달콤한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고, 융은 열매를 따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14년 8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융은 그 꿈들이 단순히 개인적인 꿈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 자신의 경험이 인류 전체의 경험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융은 자신의 무의식세계를 탐험하는 힘든 여정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혼자 호숫가에서 조약돌로 집짓기 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에 그러했듯이, 환상과 이미지의 폭포에 몸을 던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 어두운 깊은 곳을 향해 풍덩 뛰어들었고 ’ , 자신이 ‘ 우주의 심연 끝에 ’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달이나   텅 빈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 나는 마치 죽은 자들의 땅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 ”
그 곳에서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인 엘리야와 살로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러나 그가 대면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필레몬Phillemon이었다.

      “ 그는 꿈 속에서 나에게 훨훨 날아왔습니다 . 황소의 뿔이 머리에 나 있었고 손에는 세 개의 열쇠가 달린 열쇠고리를 들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열쇠는 잠긴 것을 열기 위해 따로 빼서 다른 손에 쥐고 있었죠. 그리고 노인의 등에는 물총새 같은 날개가 나 있었습니다. ”

융은 그 꿈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본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 그림을 그리던 중 그는 호숫가에서 죽은 물총새를 발견했다. 

      “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놀랐습니다 ! 물총새는 내가 사는 곳에서는 매우 드물었죠. 나는 그 죽은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물총새를 단 한 마리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
이 사건은 그가 일생동안 경험한 많은 우연의 일치 중 하나였다 . 이 영향으로 융은 필레몬의 등장을 현실로 생각하게 되었다. 융과 필레몬은 정원을 산책하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 필레몬 , 당신의 말씀은 제 생각이 저 자신 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

     “ 물론 아니지 . 자네는 자네 자신이 그 생각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이란 숲 속에 있는 짐승과도 같은 것이라네. 혹은 방 안에 있는 사람과 같다고도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가 그 짐승이나 사람도 만들어냈다고 생각할 건가? ”

 

     “… ? ”  

 

 

11. 필레몬, 신화적 상상
 
필레몬은 누구인가 . 혹은 무엇인가.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융은 그 자신과 자문자답한 것일 뿐이며, 필레몬은 환상의 산물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사로잡았던 망상이나 알 수 없는 음성들과 유사한, 정신병적 증상인 것이다. 그러나 융은 필레몬이 자신에게 영적인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보내진 영혼의 구루guru라고 생각했다.
 
융의 후기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 필레몬은 ‘ 영혼의 원형적 이미지 ’ 라고 칭할 수 있으며 , 정신질환자를 치명적인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무의식적 이미지의 소산이다. 그러나 합리성을 중시하는 우리 시대에 이르러 거의 사라지게 된, ‘ 신화적 상상 mythopoeic imagination ’ 의 소산이기도 하다 . 그러한 상상은 도처에 자리잡고 있지만, 터부시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1916년 여름, 융에게 큰 전환점이 다가왔다. 융의 집에 유령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딸들이 유령을 목격했고, 아들은 악마가 낚시를 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오후, 현관문이 스르르 열리고 초인종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한 유령이 집으로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지금 막 돌아왔다 . 그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찾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

융은 유령의 말을 받아쓰기 시작했는데 그러는 동안 그 영혼 같은 존재는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 그 후 사흘 동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줄줄 글을 써내려 가서 Septem Sermones(일곱 개의 설교)를 완성했다.

말하자면 융은 큰 원을 빙 돌아 , 그가 학생시절 참가했던 사촌의 강령회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촌 헬렌이 영매가 아니라 융 자신이 영매였다!
 
 
 
 
 
칼 융 Part 2. 분석심리학의 확립  
 
 
1. 만다라, 마음의 중심으로 가는 길
 
융은 남은 일생 동안 이 무의식여행이 선물한 영감들을 표현 하고자 노력했다. 무의식여행을 끝내고 속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즈음, 융은 매일 아침 일기장에 작은 원 모양의 그림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그의 내면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고 한다. 융은 동그라미 속에 그린 그림들이 그릴 당시의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로부터 언짢은 편지를 받은 다음날 그린 동그라미 그림은 둘레가 찢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융은 내면의 변화가 그림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 융은 자신의 그림을 통하여 매일에 걸친 정신적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자기가 그린 원형의 그림이 인도의 전통에서 만다라mandala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생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도에서 말하는 만다라는 인간의 이상향인 소우주로서, 동양종교가 헌신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융은 동양 종교에서 나타나는 만다라가 서양인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융은 만다라의 특징이 자기self를 나타내는 상징의 역할에 있다고 보았다. 즉 만다라는 한 세계를 대변하는 단위로서, 인간정신이 가지고 있는 소우주적 형태와 상응한다고 기술하였다. 만다라를 보면 정신발달의 목표가 ‘중심, 즉 개성화individuation를 향한 경로’ 임을 알 수 있다. 만다라는 자기, 다시 말하여 개인이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와 의미를 담지한, 한 개인의 전체, 의식과 무의식의 합을 나타낸다.
몇 년이 지난 1927년, 융은 어떤 꿈을 꾸고 나서 위와 같은 생각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리버풀Liverpool-‘the pool of life’-에 있었다. 그곳은 비, 담배연기, 그리고 짙은 안개로 가득찬 지저분한 도시였다. 어두운 겨울날 비가 내리는데, 자기와는 공통점이 없는 대여섯명의 사람들과 함께 어둡고 우중충한 도시를 걷고 있었다. 그가 받은 느낌으로는 그들은 항구에서 올라오는 중이었고, 도시는 절벽 위에 있었다. 절벽을 올라 꼭대기에 도달하자, 가로등에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넓은 사각형의 광장과 그리로 통한 많은 거리들이 보였다. 도시는 전통적인 유럽풍으로 설계되어 있었고 모든 도로들이 방사선 모양으로 광장을 향하고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는 둥근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비, 안개, 연기에 싸여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그 작은 섬만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 섬에는 꽃들이 활짝 핀 한 그루의 목련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햇살을 받아 마치 빛의 근원인 듯 보였다.

지긋지긋한 날씨를 탓하는 것으로 보아 융의 동반자들은 그 나무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리버풀에 살고 있는 또다른 스위스인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여기에 살게 된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했다. 융은 꽃이 핀 나무와 태양빛처럼 빛나는 섬을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 '그가 어떻게 여기 살게 되었는지 알만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융은 그 스위스인이 원하는 것이 조용하게 빛나는 것, 영적으로 평온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모든 길들이 한 곳으로 모이는 중심이자 어두운 그곳에서 빛나고 있는 목련나무의 영상은, 심리학적 성장이 일차원 선상에 있거나 명쾌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그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심리적인 성장이 오직 자기라고 하는 정신의 중심을 향하여 반복하여 돌아가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 꿈을 통하여 융은 인간정신에 존재하는 어떤 패턴 및 상황, 즉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원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는 자기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는 일직선상의 진화가 아니라 정신의 중심인 자기의 주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기술한다. 융의 이러한 통찰은 그에게 안정된 느낌을 가져다 주었고 내면의 평화를 찾게 했으며, 정신적 방황을 겪던 자신을 격려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융은 깨어나서 꿈에서 본 영상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왜 그 그림이 그렇게 중국적으로 보이는지 의아해했다. 며칠 뒤, 리하르트 빌헬름 Richard Wilhelm이 융에게 주석을 달아달라고 하면서 중국의 연금술서, ‘황금꽃의 비밀The Secret of the Golden Flower’ (원제는 태을금화종지太乙金花宗旨입니다) 필사본을 보 냈다. 그것을 읽어본 융은 다른 문화권에서 사용했던 고대의 상징체계 기저에도 공통적인 심리적 배경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2. 원형, 본능, 이미지
 
융은 이미 정신병자들의 망상이 고대의 이미지나 상징이라는 집단적인 저장고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네카이아를 여행할 때 그 자신이 직접 보았던 이미지들도 고대의 저장고의 존재를 확신케 해주었다. 1919년 융은 그러한 기억과 관련하여 최초로 원형archetyp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개인무의식에 덧붙여, 그는 본능instincts과 원형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개념을 상정하였다.
본능은 필요에 의해서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충동이다. 그리고 본능은 새의 귀소본능처럼 생물학적인 성질의 것이다. 본능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본능이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 자체를 조절하는 선천적이고 무의식적인 이해방식이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원형이다. 원형이란, 모든 정신과정을 결정하는 필수요소로서, ‘직관intuition’의 타고난 형태이다.

본능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형은 우리의 이해방식을 결정한다. 본능과 원형 모두 '집단적'이다. 개인적인 것을 넘어 보편적이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내용과 관련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본능과 원형 또한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원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