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생명의 열매를 찾아서 ⑤신분철폐와 민족독립에 앞장선 승동교회
이원용 기자 jewings100@yahoo.co.kr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인사동은 한국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귀한 장소이다. 한지로 만든 공예품과 전통문양이 아로새겨진 다양한 장식품들은 지나가는 외국인 관광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곳곳에 자리 잡은 갤러리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미술작품들과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인사동에는 조선시대 모양으로 꾸며진 전통찻집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에서 품기는 차(茶)의 향기는 도시의 바쁜 사람들을 쉬어갈 수 있도록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인사동 골목에 걸려 있는 승동교회 안내판 ?뉴스미션
한국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예술로 가득한 인사동 한 구석에 네온사인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십자가와 전통문화, 한편으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모습이지만 골목을 지나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면 교회의 역사와 모습에 놀라움을 갖게 된다.
올해 114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 일제시대 민족 독립을 위한 기지가 되어 3·1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교회, 바로 승동교회이다.
사무엘 F. 무어(한국명 모삼열) 선교사가 설립
1892년 9월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으로 한국에 한 외국인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그가 바로 승동교회의 설립자인 사무엘 F. 무어 선교사(Samuel Farman Moore, 한국명 모삼열)이다. 그는 당시 조선에 미리 들어와 조선 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사무엘 A. 모펫(Samuel Austin Moffet, 한국명 마포삼열)과 그래함 리(Graham Lee, 한국명 이길함)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양(현재, 서울)에 정착하였다.
무어 선교사의 선교열정은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한 예로, 무어 선교사는 한글 공부에 열의를 보였는데,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외국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떨어진 곳에 조그만 집을 얻어 살았다.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주던 식모를 전도하였고, 조선에 도착 후 6개월 만에 한국어로 능숙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서울 거리를 다니며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한강까지 걸어가 강 주변에 모여 있는 마을까지 들어가 사람을 만나고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무어 선교사의 시선은 소외된 계층에 멈추었다
▲사무엘 F. 무어 선교사(한국명 모삼열) ?뉴스미션
무어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한 이후부터 한국의 언어, 문화,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종종 먼저 사역을 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무어 선교사는 곤당골(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사는 백장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계층은 양반, 중인, 상인, 천인 4가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장의 신분은 가축(소와 돼지, 닭)을 도살하는 일을 전담하는, 천인 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낮은 신분이었다. 그래서 사회에서 가장 무시 받고, 소외된 계층이었다. 백장은 결혼할 때도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수 없었고, 죽어서도 지게에 실려져 조용히 장사를 지내야 했던 신분이다.
▲사무엘F.무어 선교사가 설립한 곤당골교회(승동교회의 전신) ?뉴스미션
무어 선교사는 백장들이야말로 가장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소외된 계층인 백장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893년 6월, 백장들이 모여 사는 곤당골에 16명의 교인들과 함께 장로교회로서 두 번째 교회인 ‘곤당골교회’를 설립하였다. 곤당골교회는 백장들에게 사람대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백장들은 교회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무어 선교사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조금씩 세상을 알게 되었다.
시련 속에 탄생된 승동(勝洞)교회
그러나 곤당골교회의 평안과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곤당골교회는 무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양반 계층 성도들도 있었다. 이 양반들이 교회에 천한 신분인 백장들이 출석하자 같이 예배드리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백장들은 뒤에서 예배드리게 하시오.”라고 무어 선교사에게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양반과 천민은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며 양반들의 항의를 뿌리쳤다. 이에 양반들은 곤당골교회를 떠나 홍문동(현재 광교 지역)에 ‘홍문섯골교회’를 설립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무어 선교사는 이 두 교회를 오가며 예배를 집례할 수 밖에 없었다.
시련은 계속되어, 1898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곤당골교회를 삽시간에 삼켜버렸다. 교회를 잃은 성도들(백장들)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다시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은 이 기회를 살려 양반과 백장이 한 장소, 한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양반들이 옮겨간 홍문섯골교회에서 양반과 백장이 구별 없이 한데 어울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교회는 나중에 부흥하고 발전하여 1905년 현재의 인사동 위치로 옮겨지게 되고, ‘승동(勝洞)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승동교회는 철저하게 구별되어졌던 신분계층을 무너뜨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외계층을 위해 먼저 사랑을 베푸시고 복음을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교회가 되었다.
▲3.1 독립운동 기념터 기념비 뉴스미션
또한 승동교회는 민족 독립을 위한 전초기지를 제공하였다. 일제시대였던 1919년 2월, 승동교회의 청년면려회장이었던 김원벽과 20여명이 독립운동을 위한 논의를 교회 기도실에서 갖게 되었다. 그리고 3월 1일 하루 전날에 인쇄된 독립선언문이 전국 각지로 우송되었고, 서울에서는 승동교회에 운송되어 청년부 대표들에 의해 서울 각지역으로 배포되어 3·1 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통을 지키고,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승동교회 전경 뉴스미션
승동교회는 서울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승동교회 건물은 100여년의 한국 교회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를 모두 가지고 있는 한국 역사의 보고이다. 그리고 무어 선교사의 사명과 열정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교회이다. 오늘도 승동교회는 소외계층을 위해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사회사업, 구제사업을 통해 어려운 이웃에게 큰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있고, 민족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 기도와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받은 만큼 되돌려 주기 위해서 세계선교에도 정열을 다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무어 선교사의 열정의 마음가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다. 시간이 존재하는 한 승동교회는 한국을 위해 기도할 것이며, 한국의 모교회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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