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랑채에서 시작한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YOROKOBI 2007. 6. 13. 12:03
사랑채에서 시작한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기획특집]생명의 열매를 찾아서②정동장로교회(現 새문안교회)
▲ 첫예배를 드렸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옥집과 새문안교회 미니어쳐 ©구굿닷컴
한국의 교회는 예전에 비해 참 많이 아름다워졌다. 예배실 안에는 딱딱한 의자 대신 푹신한 방석과 함께 의자가 놓여있고, 벽에도 빨간 벽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무늬가 살아있는 고급 인테리어와 현란한 조명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또한 왠만한 교회에는 성도들끼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작은 카페도 있어서 맛있는 쿠키와 커피로 교제를 자유롭게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한국의 교회는 어떤 장식이나 편한 의자도 필요없고, 단지 성도들끼리 모일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족했다. 그 공간이 헛간이건, 대청마루이건, 창고이건 상관없이 모여서 하나님만 예배할 수 있다면 대만족이었다.

한국 최초 장로교회 탄생의 중심에 있었던 언더우드 선교사

1887년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가 탄생된 해이다. 그리고 그 첫 예배의 장소는 아름답고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꾸며진 멋진 교회가 아니라 작은 한옥의 사랑채였다. 그 중심에는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선교사가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4년 4월 5일, 미국에서부터 시작한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를 태평양을 건너는 제물포항에서 마쳤다. 그리고 앨런(H. N Allen) 선교사와 함께 광혜원(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에서 과학교사로서 병원에 찾아오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과학을 가르치며 조선에서의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 언더우드기념관 3층 사료관 입구 ©구굿닷컴
또한 언더우드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열어 가르치는 것을 보고 1886년 예수학당이라는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예수학당은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고아학교였다. 예수학당 출신으로 민족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있다.

예수학당이 발전하여 경신학교가 되었는데, 경신학교의 대학부는 연희전문학교로서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되었고, 고등부는 현재 경신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틈틈이 부인인 릴리어스 홀튼(Lillias S. Horton) 선교사와 조선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선교에 대한 불을 지피기도 했다.

한옥 사랑채에서 14명이 드린 정동장로교회의 첫 예배

1887년 9월 27일 화요일 밤,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옥집 사랑채에는 여느 때와 달리 빈틈도 없이 여러 사람들 앉아있었다. 14명의 한국인과 언더우드 선교사, 그리고 로스(John Ross) 선교사가 사랑채를 가득 채웠다. 이들은 조선의 한복판에서 조선 사람이 지은 한옥 사랑채에서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것이다.

▲ 새문안교회 사료관 전시실 ©구굿닷컴
로스 선교사는 만주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사역을 했는데, 한국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인 ‘코리안 프라이머(Corean Primer)’를 발간했고, 조선인의 도움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그 전에 로스 선교사가 중국에서 조선 선교의 어려움으로 실망하고 있을 때, 50대의 조선 상인이 찾아와 한국어와 정세들을 알려 준 사람이 있었는데, 이 분이 훗날 백홍준 장로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백홍준 장로는 서상륜 장로와 함께 정동장로교회의 첫 장로가 된 분이다. 서상륜 장로는 홍삼 장사꾼으로서 만주에서 열병으로 앓고 있을 때, 헌터(Hunter) 선교사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예수를 영접했다. 그 후, 만주에서 활동하시고 있던 로스 선교사와 함께 누가복음(1882년 발행)을 번역했다.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출판한 “한국초기 선교사들의 이야기” 54쪽에서 55쪽을 참고하면, 당시 두 명의 초대 장로가 백홍준 장로와 서상륜 장로가 아닐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새문안교회로 이름이 바뀐 유래

▲ 현재 새문안교회 본관(예배당) ©구굿닷컴
정동장로교회는 이 날 첫 예배를 시작하고 두 명의 장로를 세움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새문안교회’로 이름이 바뀐 유래는 이렇다. 당시 교회가 광화문 서쪽 돈의문(敦義門) 안 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돈의문은 한양 도성의 서쪽 큰문으로 서대문(西大門) 또는 새문, 신문(新聞)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에 따라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 일대를 새문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정동장로교회를 사람들이 ‘새문안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시작한 새문안교회는 교인의 숫자가 증가하자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 교인의 헌금 1,591냥을 가지고 경희궁 맞은편 종로구 신문로 2가의 현재 피어선 빌딩자리에 4칸 짜리 한옥을 구입해 새로운 교회를 신축하게 되었다. 또한 1904년 10월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전도한 송순명 장로의 장립을 시작으로 한국교회 최초의 당회가 구성되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게 되었다.

▲ 새문안교회 정문 ©구굿닷컴
계속 증가하는 교인들을 감당하기 위해 1910년 5월 29일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1,200여명이 한꺼번에 예배드릴 수 있는 새로운 벽돌교회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 1대 담임목사직을 맡았다가 1916년 10월 12일 소천하심으로 인해 쿤스(E. W. Koons) 선교사가 1920년까지 5년간 새문안교회를 대신 맡았다.

일제 치하에서 3·1 운동과 독립운동이 한참이던 1920년 12월에 차재명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직을 맡았고, 뒤를 이어 김영주 목사, 강신명 목사, 김동익 목사, 그리고 지금의 제 6대 담임목사인 이수영 목사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3대 담임 김영주 목사는 해방과 함께 교회 부흥을 위해 생명을 다해 일하다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새문안교회의 아픔이 되기도 했다.

한국 교회 120년 역사를 대변하는 생명의 열매, 새문안교회

▲ 언더우드교육관 ©구굿닷컴
새문안교회는 한국 교회의 첫 시작이자 기둥으로서 한국 기독교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을 생명으로 사랑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묻어있는 새문안교회는 1887년 첫 예배를 시작으로 지난 120년간 꾸준히 부흥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서울은 물론 한국 각 지방에 교회를 새롭게 개척하여 한국 복음화에 노력하였으며, 농촌봉사, 근로봉사, 의료봉사 등 구제사역에도 남다른 열심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척박한 조선 땅에 복음이라는 귀한 씨앗을 심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열정과 진리를 잇고 로마서 10장 15절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 위해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는 열방(멕시코, 러시아, 가나, 태국 등)의 사람들에게 힘써 복음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