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들의 썩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나니

YOROKOBI 2007. 6. 13. 12:04
[기획특집] ① 순교의 피밭, 양화진 선교사묘원
▲ 헐버트 묘지 - 미국파송선교사. 고종의 밀사로 워싱턴에 고종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가 실패.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 1969년 이승만대통령의 요청으로 한국에 안장됨. ©구굿닷컴
헤론, 아펜젤러, 언더우드, 무어, 헐버트 선교사. 이들은 조선이라는 작은 땅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땀과 열정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다. 너무나 잘 알려져서 많은 크리스찬들의 귀에 익숙한 켄드릭 선교사의 비문(碑文)의 글은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조선을 향한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조선 땅을 여러 지역으로 나눠 맡아서 복음을 전했던 이들이 이제는 한 장소에 안식처를 같이 하면서 하나님께서 한국 땅에 역사하시는 선교의 열매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뿐 아니라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생명을 바쳤던 선교사들과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 헌신자들 500여 명도 이곳에 모두 모여서 선교 대국으로 발전한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보고 있다. 이곳은 바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이다.

▲ 부서진묘비들 ©구굿닷컴
조선 땅에 이들이 순교의 피 값으로 남긴 선교의 열매를 향한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긴 여행의 출발점을 이곳 양화진으로 잡았다. 먼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외국인, 헤론 선교사

1890년 7월 26일. 이전에도 조선에서 숨을 거둔 외국인이 많이 있었지만, 이 날은 특별한 날이다. 사실 조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선교사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아니라 알렌 선교사였다. 의사인 알렌(H. N. Allen) 선교사는 1884년 10월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주었다. 민영익은 감사의 표시로 십만냥을 알렌 선교사에게 주었고, 알렌 선교사는 이 돈으로 한국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다.

▲ 셔우드홀 묘지 - 평양선교 개척자 제임스 홀 선교사와 평양 광혜여원 개척자인 로제타 선교사부부의 아들. 한국 최초 결핵협회 창설과 한국 최초 크리스마스 씰 판매. ©구굿닷컴
알렌 선교사의 후임으로 헤론(J. W. Heron) 선교사가 광혜원 원장을 맡았다. 고종의 시의이기도 했던 헤론 선교사는 전염병을 치료하던 중 그만 이질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 중 가장 먼저 사망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날이 바로 1890년 7월 26일이다.

조선시대의 외국인 묘지는 유일하게 제물포항에 있었다. 그러나 뜨거운 7월의 더위는 헤론 선교사의 시신을 한양(서울)에서 제물포까지 부패하지 않고 옮길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래서 헤론 선교사의 유족들과 선교사들은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 묘지를 사용하기를 원했고, 당시 미국 공사의 직분으로 조선에 있었던 허드(A. Heard)를 통하여 양화진을 묘지로 쓸 수 있도록 조선 황실에 요청하였다.

조선 황실에서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 사용을 불허한 이유

그러나 조선 황실은 양화진의 묘지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고, 유족들은 임시 묘지를 정동에 있는 미국 공사에 차렸다. 양화진은 김대건 신부 등 조선 천주교인들의 피가 묻은 순교지이기도 하며, 김옥균이 처형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 밀러선교사 묘지 ©구굿닷컴
또한 양화진은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통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풍류객들이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양화진에 있는 절두산에 올라 술 한 잔씩을 꺾고 갔다고 한다. 또한 상거래를 위한 많은 물자들이 드나들었고, 민란과 외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항상 상비군이 배치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 황실은 양화진을 외국인들이 사용하도록 허락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성 안에 외국인의 유해를 묻으면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며 도성 사람들의 민란과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 공사는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5개국의 공사들과 연합하여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사용해 줄 것을 정식으로 조선에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헤론 선교사가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1893년 10월 24일에 조선 황실은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였고, 처음으로 헤론 선교사의 유해를 양화진 묘지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외국인선교사 공원묘지로 조성되기까지

▲ 헤론선교사 묘지 -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선교사. ©구굿닷컴
헤론 선교사가 양화진에 안장된 후부터 줄을 이어 선교사들의 시신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디(Hardie) 선교사와 레이놀즈(Reynolds) 선교사 가족이 안장되었고, 1894년 11월 24일에는 홀(W. J Hall) 선교사와 빈톤(Vinton) 가족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 후로 야곱센(Jacobsen), 기포드(Gifford), 밀러(Miller), 그레이트하우스(Greathouse), 헐버트(H. B. Hulbert) 등 조선을 위해 몸을 바치시고 사랑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양화진에 들어오게 되었다.

양화진 묘지에는 교단을 초월하여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구세군, 가톨릭, 성공회, 성결교 출신의 외국 선교사들이 안장되어 있으며,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군인, 사업가, 정치인, 언론인 신분의 외국인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 아펜젤러선교사 묘지 - 한국 최초 선교사. 정동감리교회 창립. 배재학당(배재중고등학교 전신) 시작. ©구굿닷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는 한때 일본의 토지조사 사업으로 인해 한동안 ‘경성구미인묘지(Seoul Foreigner Cemetery)’라는 이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오랜 기간 방치되어 묘비가 총탄과 폭탄에 의해 손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과 주한 외국인, 그리고 뜻을 가진 많은 한국인들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의 정신과 의미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원일한 박사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의 소유권을 얻기 위해 수년간 애를 썼다. 그리하여 1985년, 재단법인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양화진의 묘지 조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 때부터 사용되던 경성구미인묘지라는 이름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2005년 5월 드디어 ‘서울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 조성을 완료하여 지금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생명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아낌없이 순교했던 수많은 선교사들

▲ 언더우드와 그 일가 묘지 - 한국 최초 선교사. 새문안교회 창립(장로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시작. ©구굿닷컴
조선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묘지가 양화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던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땀과 피로 척박한 땅을 복음으로 물들게 한 수많은 선교사들의 묘가 대구, 광주, 전주, 진주, 공주, 청주, 평양, 원산 등지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작은 묘비 하나만으로 자신을 낮춘 선교사들 또한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있다.

우리는 이 분들의 노력과 헌신 그리고 영혼 구원과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세계 열방 가운데 제2, 제3의 양화진과 같은 귀한 영혼의 안식처를 우리의 헌신과 사랑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전 세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9천여 개의 미전도 종족이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조선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의 열정을 이어받아 열방을 향해 달려가는 작은 예수로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