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생명의 열매를 찾아서 ④정동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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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 |
때마침 일본에서 출발한 제리오 마루라는 배가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일본 상인들과 조선 상인들이 보따리를 들고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파란 눈의 사람들이 낯설고 상기된 표정으로 배에서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파란 눈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낸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제물포항에서 무릎 꿇고 조선이라는 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바로 정동제일교회의 창립자인 헨리 G.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이다.
한국최초 근대식 학교 ‘배재학당’설립
한국에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 선교사와 스크랜톤(Scranton) 부부 선교사는 열악한 환경에서 질병과 싸우고 있는 조선의 병자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스크랜톤(W. B. Scranton) 선교사는1885년 9월부터 광혜원 원장인 알렌 선교사를 도우며 의료사역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886년에는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병원(정동병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펜젤러 선교사는 의료선교보다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선교에 더욱 관심을 갖고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처음 아펜젤러는 외국인(일본인, 외국 공관대사)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국 젊은이들을 위해 한국최초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1886년 6월 8일에 설립하였다.
그가 세운 ‘배재학당’은 당훈(堂訓)을 ‘慾爲大者 當爲人役,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로 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하지만 조선을 향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선교는 단순한 의료나 교육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펜젤러 선교사는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작정하였다.
정동교회(現 정동제일교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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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정동교회모습 |
교회 창립일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창립함으로써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아펜젤러 선교사는 작은 집 한 채를 더 구입하여 ‘벧엘예배당’이라 명하여 정식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최초의 성찬식까지 거행하게 되었다. 그가 세례를 베푼 사람은 28세의 여성으로 매서인(성경을 팔고, 전도하는 사람)의 아내였다. 이 여성은 기독교 선교사가 베푼 최초의 여성 세례자이면서, 조선 여성을 향한 선교의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학생 운동과 민족 계몽을 위한 출발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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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입구 |
이런 학생들의 배경에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있었고, 독립협회의 중심인물로 민주주의 선봉자들인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채연, 신홍우, 오긍선, 여운형 등이 있었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와 함께 살면서 배재학당의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의 기둥인 학생들을 깨우는 데 동참하였다. 더욱이 아펜젤러는 독립협회를 조직할 당시부터 관여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정동교회는 배재학당과 더불어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매일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을 일깨우고, 계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회 기관지인 ‘협성회보’, 교회신문인 ‘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하기도 했다. ‘삼문출판사’는 배재학당 안에 있는 인쇄소로서 영문으로 된 한국 연구 잡지인 ‘한국유기(韓國留記)’, ‘천로역정’과 ‘사민필지(四民必知)’라는 기독교 문서까지 출판하였다.
생명과 육신까지 바친 아펜젤러와 민족과 세계를 향한 정동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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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내 아펜젤러기념상 |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 선교사가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가던 중 다른 배와 충돌하여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던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 소녀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 소녀를 안고 남아있던 배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배에 오르려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배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강타하였고, 그 이후 아펜젤러 선교사는 목포 앞 바다에 잠들고 말았다. 아직까지 아펜젤러 선교사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죽기까지 사랑했던 조선을 위하여 생명과 육체까지 바쳤던 것이다.
정동교회는 당당하게 아펜젤러 선교사의 한국 사랑을 잊지 않고 실천해 오고 있다. 정동교회는 민족구원과 계몽을 위하여 더욱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였고, 한국의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발전에 큰 기둥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조선 사랑을 본받아 세계 열방을 향한 선교에도 큰 관심을 갖고 실천하고 있다. 아프리카 세네갈,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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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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