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창조영성을 향하여

YOROKOBI 2007. 7. 9. 08:56

창조영성을 향하여

 

김순현 목사  (남해 고현교회 담임, 월간지 <천리향> 발행인)


 

1. 들어가는 말
1994년 가을 무렵, 나는 미국에 유학 중이던 한 친구로부터 창조 영성을 다룬 한 권의 책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사고 및 생활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영성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가 1982년에 쓴 [원초적 축복, Original Blessing]이라는 제목의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신학서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26만 부가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96년 미국의 어느 출판사에서 발간한 연감에 "세계를 변화시킨 스무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등재되었다. 나는 그 책을 여러 날에 걸쳐 꼼꼼히 정독하였다. 그 책은 입문서로서 네 개의 길, 스물 여섯 항의 주제, 두 개의 물음으로 창조 영성을 제시하고 있었으며, 특히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라인강 유역에서 창조 영성의 꽃을 피운 신비가들, 곧 빙엔의 힐데가르트,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노리치의 줄리안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그 책은 나에게 감동과, 한 번 그렇게 살아보라는 도전을 안겨 주었고, 지금껏 나는 창조 영성이 제시하는 네 개의 길을 걷고자 씨름해왔으며, 그 여정에서 건져올린 기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얼마 전 분도출판사에서 [원복]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독자들의 관심과 일독을 기다리고 있다.
폭스는 [원초적 축복]에서 시종일관 타락/구속 영성과 창조 영성을 대결시킨다. 그는 주후 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방 기독교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 타락/구속의 영성이었고, 그 출발점은 인간의 죄성에 깊이 몰두하게 하는 원죄였다고 지적한다. 원죄를 출발점으로 삼는 타락/구속 영성은 사람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인간의 죄성을 씻는 구속에만 매달린 나머지, 인간 이외의 피조물에 대한 구원, 곧 우주의 구원을 누락시킨다. 이처럼 하느님의 창조계를 배제한 타락/구속 전통은 지구파괴(geocide), 생태계파괴(ecocide), 생명파괴(biocide)와 같은 죄를 포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타락/구속 패러다임으로 인해 드러난 부정적인 문제들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성차별, 군비확장주의, 인종차별, 인디언 대량학살, 핵 위기, 소비지상의 자본주의, 폭력적인 공산주의, 눌린 자들(아나윔)에 대한 자비(compassion, 함께 아파하는 마음)와 정의에 관심하는 예언자 전통의 실종, 우뇌를 배제한 좌뇌만의 독주, 가부장제의 전횡,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의 대두, 가학증과 피학증 등이다. 폭스는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상호의존과 상호연결을 거부하는 이분법이 깔려 있으며, 타락/구속 패러다임이 그것을 부추겼다고 조목조목 지적한다.
폭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로 창조 영성의 회복을 부르짖는다. 창조 영성은 타락/구속 영성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영성이다. 타락/구속 영성 전통이 어거스틴(주후 345-430), 토마스 아 켐피스, 부세, 코튼 마더, 탱커리에게로 소급된다면, 창조 영성 전통은 주전 9세기, 야훼 기자, 시편, 성서의 지혜문학, 예언서들, 예수님, 이레네우스(주후 130-200)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창조 영성은 서방 기독교 안에서 타락/구속 영성의 패권에 밀려 변두리에 머물러 있거나 거의 잊혀졌던 영성이다.
창조 영성은 죄 많은 인간성을 영적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축복받고 아름다움을 부여받은 우주를 영성의 바람직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창조 영성이 바탕에 깔고 있는 신학적 개념은 원죄가 아니라 원복이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축복받은 존재로서 이 세계에 태어났음을 뜻하며, 우리를 에워싼 우주가 축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창조 영성이 맺고자 하는 열매는 하느님과의 합일이 아니라 성서의 예언자 전통에 충실한 자비(同情)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깊이 있게 읽는 것을 뜻하고, 상처입고 아파하는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어울림(해방), 망신창이가 된 우주의 아픔을 치유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타락/구속 영성의 삼중 여정, 곧 정화, 조명, 합일이 놓쳐버린 중요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잘 받아들이고 음미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모든 것을 타락한 것으로 여겨 대뜸 청소하려드는 것, 그리고 영혼과 하느님의 합일을 추구한 나머지 그 영혼을 둘러싼 몸과 우주를 도외시하는 것은 건강한 영성이 아니다.
그래서 매튜 폭스는 창조 영성의 사중 여정을 명명한다. 그것은 피조물과 동무하는 긍정의 길(the via positiva), 어둠과 버림과 그대로 둠을 동무로 삼는 부정의 길(the via negativa), 창조성과 동무하는 창조의 길(the via creativa), 새로운 피조물과 동무하는 변모의 길(the via transformativa)이다. 이제부터 차례로 창조 영성의 사중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2. 긍정의 길
타락/구속 전통이 창조보다는 구속을, 환희보다는 죄를, 우주적 자각과 감사보다는 개인의 내성(內省)을 더 강조하는 길이었다면, 긍정의 길은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그 우주적 깊이를 음미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의 길은 기쁨, 우주적 창조, 지속적으로 흐르는 창조주의 에너지(다바르), 원복을 힘주어 말한다. 긍정의 길은 말 그대로 긍정, 감사, 환희의 길이다.
긍정의 길에서 창조계는 타락한 세계가 아니라 "다바르," 곧 "하느님의 창조 에너지"를 담고 있는 복덩어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죄로 가득한 세상에 태어나지만, 얼룩투성이로, 죄많은 피조물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원복"으로서, 하느님의 형상인 존엄성과 창조계를 세우고 보전해야 할 책임성을 지닌 왕다운 개인으로서 태어난다.
긍정의 길에서 이해된 겸손은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경멸"이 아니라, 대지와 동무하는 것, 우리 자신의 땅성과 동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을 뜻하는 영어의 humility가 기름진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 humus에서 유래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만물을 품는 대지의 성품이야말로 축복과 다산, 창조성과 상상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땅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을 학대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삶에 베풀어진 가장 기본적인 축복들, 예컨대 건강한 배변(排便)까지도 찬미할 것이다."
긍정의 길에서 우리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깃들인 우주를 환대하고, 우주적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우리가 영광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 세계에 영광스럽게 태어났다는 것을 신뢰하게 된다.
창조 영성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방식은 만유내재신론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층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삶의 모든 축복과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 에너지를 경험하는 것과 관계가 있으며, 만유 안에 계신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만유의 깊이 있는 공존을 경험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지금 여기"를 중시하는 실현된 종말론에서 이루어진다.

3. 부정의 길
긍정의 길이 우주적 축복과 우리 자신의 왕다운 인품의 길이자, 빛으로 나오시는 하느님(the cataphatic God)의 길이라면, 부정의 길은 어둠, 침묵, 무(無)의 길이며, 어둠 속에 계신 하느님(the apophatic God)의 길이다. 부정의 길은 어둠과 고통을 마주하는 법, 무(無)의 경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가르친다.
부정의 길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동무로 사귀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심장, 간, 창자, 뇌 등은 나름의 일을 밤낮없이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수행한다. 또한 우리는 모두 어둔 자궁에서 시작되었다. 자궁은 어둡기는 하지만 두려운 곳이 아니며, 우리의 원초적 존재의 거룩한 근원이다. 영적 심층과 접촉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어둡고 고요한 근원들을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신비는 어둠 주위에 있고, 모든 어둠은 신비 주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의 길은 모든 이미지를 여읜 침묵과 버림, 그대로 둠의 중요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영원히 버리고 버림으로써 하느님께로 가라앉을 수 있다"고 말하며, "하느님, 제게서 하느님을 없애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우리의 신적인 깊이,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면, 사람이 만든 하느님 이미지를 철저히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부정의 길은 비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고통이 비움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진정제(밸리엄)가 팔리는 세상에서 어둠을 직시하고,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을 심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껴안고, 충분히 오랫동안 고통에 입맞추는 사람만이 진실로 고통을 버릴 수 있다.
부정의 길이 없는 곳에서는 창조성이나 새로운 피조물이 있을 수 없다. 이미지를 여의게 하는 침묵이 없고, 풍부한 삶을 가져오는 비움이 없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무(無)로 가라앉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긍정의 길이 창조 신학과 성육신의 신학을 드러낸다면, 부정의 길은 십자가의 신학을 드러낸다.

 

4. 창조의 길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은 창조의 길에서 결합된다. 우리는 기쁨과 고통, 빛과 어둠, 우주와 무(無), 누림과 버림을 통해서 제3의 것이 태어나게 한다. 그것은 생생하게 다가와 자신의 신적 깊이와 신적 풍요를 드러내는 창조주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우리의 창조성-우리 안에 있는 예술가-이다. 우리의 창조성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가장 잘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의 길은 우리의 창조성과 동무하는 길이다.
창조의 길은 우리 안에 신적 능력이 들어 있음을 일깨우고, 그것을 신뢰하라고 촉구한다. 에크하르트는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배나무 씨앗은 자라서 배나무가 되고, 개암나무 씨앗은 자라서 개암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씨앗은 자라서 하느님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개인이 신적인 출산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창조주 하느님의 동역자임을 의미한다. 낳는 능력은 특정 예술이나 전문 예술가들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사람의 것이므로,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예술가를 일깨워야 한다.
창조의 길은 창조성과 동무하는 방법으로 묵상으로서의 예술을 권한다. 그것은 생활예술을 묵상의 방편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며, 우뇌로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이 빠진 영성과 신앙은 메마르게 마련이고, 영성이 빠진 예술도 건조해지게 마련이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원예, 악기 연주, 뜨개질, 점토공예, 춤추기, 연극, 시작(詩作) 등이 묵상의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렇게 예술을 묵상의 방편으로 삼을 때, 치유가 일어나고, 기쁨이 솟구친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푸르러지고, 젊어지고, 어린아이와 같아진다.
낳음을 강조하는 창조의 길은 이원론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삶을 요구한다. 낳음은 양측을 아우르고, 양측과 관계함으로써 일어나기 때문이다. 창조의 길은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변증법, 좌뇌와 우뇌의 결합, 일과 예술과 놀이의 거룩한 삼위일체를 요구한다.

 
5. 변모의 길
우리 안에 있는 창조성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지구 전체의 파멸을 초래할 핵무기를 세계 곳곳에 설치해 놓은 상태이다. 이것은 인류가 창조성을 악하게 사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창조성은 비판과 방향 제시를 필요로 한다. 변모의 길이 그러한 비판과 방향 제시의 기능을 한다. 변모의 길은 새로운 피조물과 동무하는 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 피조물은 새로워진 우주, 불의한 관계의 상태에서 바른 상태로 고쳐진 우주, 사람 안에 있는 새 마음, 새로운 사회 구조 속에 있는 새 의식이다. 이러한 변모를 가능케 하는 것, 즉 변모의 길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단연 자비(compassion, 함께 아파하는 마음)다. 자비야말로 창조성의 이정표다. 그러하기에 창조 영성의 여정은 관상에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자비'에서 완료된다.
'자비'를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시혜의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한다. 자비는 평등을 요구하고, 만물의 상호의존에 대한 자각을 요구한다. 자비는 우주적 상호의존의 진리에서 태어난 행동이다. 그러한 행동은 축제를 벌이고, 정의를 실현하는 쪽으로 행해진다.
따라서 변모의 길은 우리 모두에게 예언자가 될 것을 요청한다. 불의가 하느님의 말씀을 억누를 때,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른다. 우리 각 사람 안에는 예언자가 살고 있는데, 그는 우리의 사회적인 양심이며, 무고하게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곧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기울여지는 진심 어린 배려이다. 그러하기에 예언자는 불의한 상황을 훼방하고, 자비와 사회 정의를 통하여 치유를 일으키는 쪽으로 창조성을 발휘한다.
이처럼 변모의 길은 개인의 변모와 사회의 변모를 지향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의 매개자가 되라고 요청받는다. 변모의 길은 우리에게 왕다운 인품으로서의 존엄성과, 하느님의 동역자로서의 책임성에 걸맞는 우주적 문명,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고, 기쁨과 축제의 열기가 솟구치는 우주적 문명을 창출하라고 촉구한다.

 
6. 나오는 말
타락/구속 영성의 도식은 정화→조명→합일이다. 그것은 계단식 구조, 혹은 사다리 구조를 띤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닥다리를 다 올라간 사람은 극 소수에 불과하다. 이 도식은 소수의 종교 엘리트, 혹은 영적 엘리트만을 위한 도식이다.
반면에 창조 영성의 사중 여정은 나선형 구조를 띠고 있으며, 하나의 길은 나머지 세 길과 서로 맞물린다. 예컨대, 긍정의 길은 부정의 길이 없으면 충분히 경험될 수 없다. 부정의 길은 창조의 길에서 성취된다. 그 이유는 모든 창조성이 무로부터(ex nihilo) 그리고 어둠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창조의 길은 변모의 길에서 완수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성은 축제와 정의를 증대시키는 자비(함께 아파하는 마음)를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원래의 피조물과 관계가 있듯이, 변화의 길도 긍정의 길과 다시 관계한다.
무엇보다도 창조 영성은 사닥다리 정상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의 영성이 아니라, 대지와 동무하는 사람들, 특히 눌린 자들(아나윔)의 편에 서는 사람들의 영성이다. 창조 영성은 예수께서 그랬듯이 눌린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해방하게 하고, 그리하여 압제자마저 해방시키는 사람들의 영성이다.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폭스는 창조 영성을 "거리의 영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창조 영성은 기쁨이 넘치고(긍정의 길), 깊이가 있고(부정의 길), 정열적이며(창조의 길), 자비가 넘치는(변모의 길) 삶을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