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진보와 영성

YOROKOBI 2007. 7. 9. 08:59

진보와 영성 / 황 대 권



1989년 겨울, 차디 찬 감옥 안으로 믿을 수 없는 소식 하나가 면회자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그 무렵의 감옥은 신문 한 장 없는 외딴 섬과 같아서 면회하러 나간 동료가 물어오는 단편적인 소식만이 바깥 세상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정보였다.

세계 진보진영의 주축이었던 소련이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어떤 이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숨죽여 우는가 하면 어떤 이는 얼이 빠진 듯 허공만 바라보았다.

이제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동안 수구 부패세력들과 가열차게 싸워왔던 진보운동권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밑 모를 불안과 혼돈 속에서 운동권 인사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뒤이어 동구권이 줄줄이 무너져 나갔지만 ‘천만다행’으로 ‘주체의 조국’ 북한은 멀쩡했고 마오쩌뚱의 중국은 사회주의 정체를 유지한 채 자본주의를 실험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8년 후 독재자 박정희에 뿌리를 둔 정당들을 물리치고 소위 진보운동권이 정권을 장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고 그 5년 후에는 전 정권보다 더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서는 ‘기적’이 연출되었다. 이에 놀란 보수진영은 총궐기에 가까운 대반격을 시도했고 서툰 국정운영에 실망한 국민들은 기꺼이 보수진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진보진영에서는 또 다시 ‘진보란 무엇인가?’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문가 비전문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보를 사회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보다 분배에 더 신경을 쓰고, 자본주의 강대국에 의해 핍박받는 나라들과의 관계개선을 중히 여기는 것에서 그런 느낌을 갖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전의 보수정권 이상으로 성장에 신경을 쓰고, 자본주의 강대국들과의 관계유지를 중히 여겨온 것 또한 사실이다. 진보정권이라 하여 어느 한쪽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이념적 편향이 워낙에 심하다 보니 정부가 분배를 소홀히 하거나 자본주의 강대국들에게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면 진보진영으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반대로 성장을 소홀히 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 보수진영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다. 한 마디로 진보적 권력을 행사하기가 몹시 어려운 환경이다.

어찌 보면 현재의 참여정부란 것도 40년 넘게 미국과 일본에 기대어 극단적인 성장 위주의 발전을 해온 데 대한 일시적인 조정국면일지도 모른다. 참여정부가 입으로는 줄곧 진보와 개혁을 외쳐대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정체성의 변화는 이렇듯 주어진 조건과 관성으로 인해 쉽사리 변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진보적 정권에 의한 급격한 변화 따위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다만 권력을 거머쥔 진보적 인사들의 행태에 더 관심이 갔다. 내가 감옥에서 이런저런 연유로 알게 된 인사들이 권력의 내부에 많이들 들어갔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감옥에서 내가 경험했던 인간적 실망으로부터 그다지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감옥은 누구나 동등한 조건에서 살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할 수가 없다. 몇 달만 함께 살아보면 인간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일수록 대단한 권력욕과 술수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치문화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념이나 경력은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리 보아버린 것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말이지만, 이런 글을 통해 민주인사들을 폄하할 의도는 손톱만치도 없다. 그들은 부패한 권력구조에 맞서 자신의 몸을 내던져 투쟁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기득권에 안주하여 부정과 불의를 못 본척하는 수구세력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문제였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념과 정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유리알같이 투명하지 않으면 정치는 권력놀음이 되고 만다. 그리고 투쟁하는 사람은 사물을 투쟁의 관점에서 보게 마련이다. 투쟁이란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한 단면일 뿐인데 매사를 투쟁적으로 대하다 보면 주위 환경이 늘 싸움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민주인사들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는 몹시 서툴다. 싸우면서 닮는다고 민주주의의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동안 엄혹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된 민주주의 훈련을 받아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보적 인사들이 한 시대를 관리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실패한 분야는 생태●환경 분야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독재와 외세에 맞서 투쟁하는 동안 생태적 감수성을 체득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권력을 잡고 보니 이미 생태주의 시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생태문제를 관리할 철학과 능력은 없지, 성장신화에 세뇌된 국민들의 요구와 세계화의 압력은 드세지... 결국 그들로서는 개발주의에 기대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결국 정권이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어도 우리 사회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보수세력은 진보가 정권을 맡고나서 나라가 거덜났다고 아우성이지만 그것은 과장된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국가정책이 보수진영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데 진보적 정권이라 하여 특별히 다른 결과를 낼 리는 없다. 오히려 보수세력이 계속 집권했다면 사회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설사 재야에 있는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더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방금 전에 밝힌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보가 대안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념과 제도보다도 사람이 문제라고 했다. 그렇다.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단순히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 정도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런 얘기라면 이 땅에 정치권력이 성립된 이래 무수히 들어왔을 터이다. 사람은 사람이되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상극의 시대를 접고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가진 자들끼리 적당히 주고받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개개인의 주권은 물론 모든 생물 종들의 권리까지 보살피는 참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실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결국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의 차원을 개체와 집단을 넘어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기능 가운데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영성’이다. 영성이 높으면 그와 같은 높은 차원의 일들을 능히 해낼 수 있다. 우리 인류는 ‘운 좋게도’ 지금으로부터 이 삼 천 년 전에 영성이 아주 높은 인간을 몇 사람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가 흠모해 마지않는 석가나 예수, 공자, 노자 같은 성인들이다. 인간은 이미 그 당시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성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받은 몇 사람의 일일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듯 갈등과 고뇌에 휩싸여 서로를 미워하고 배척하며 죽고 살기를 거듭하였다. 인류사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학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같은 류적 존재로서 한 인간이 다다른 높은 수준의 영성은 결코 그 한 사람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공명을 일으키며 시공을 가로질러 인간 사회에 널리 퍼져 나갔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파괴하고자 하는 부정의 힘도 증가했지만 그에 반해 창조와 조화의 기운도 더욱 거세어졌다. 그 옛날 단지 몇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던 높은 수준의 영성이 지금은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파괴적 본능이 생명계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극대화되자 이를 근원적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영성적 인간의 출현도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달이 차면 기울고, 양이 있으면 그 만큼의 음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진보를 향한 인간의 여정은 한 순간도 쉬어 본 일이 없다. 변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사는 즉 진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과 제도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이웃(여기서 이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종을 가리킴)이 함께 행복하고 평화롭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행복이나 평화는 물질에서 올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의 내부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질과 제도의 진보는 참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물질적 진보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지만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물질의 정도는 실재로는 보잘 것이 없다. 이 욕심과 실재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인간 사회는 불행해 진다. 영성은 이 차이를 극복하여 참 행복에 이르게 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인간사회에 진보가 있다면 영성의 진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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