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영성과 영성수련

YOROKOBI 2007. 7. 9. 09:01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이 무엇이고, 영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우리 시대에는 어떤 영성이 필요한지, 영성수련을 위해서는 어떤 점들을 이해해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1. 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예수'란 한 사람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란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 즉 우리가 그 사람을 누구라 생각하느냐에 대한 고백이다. 세상 속에 있는 한 평범한, 그러나 평범함 속에서 다소의 비범함을 지닌 어떤 대상을 자기 나름대로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우리는 나사렛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대교나 무슬림에서는 예수님을 출중한 예언자이긴 하지만, 구세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고백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평범한 인물로 보는데 그쳤나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에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또는 어떤 인물이나 물질적 대상을 넘어서 영적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영성이라 한다.  사람, 사물, 사건, 자연환경 등을 표면적인 것만 보지 않고 그 내면과 이면에 있는 어떤 것들을 볼 수 있는 눈, 또 그것이 얘기하고 있는 것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1)우리는 영성을 지님으로써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이 "나

는 영성이 없다"고 하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다른 영성이 있을 수가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성의 개념은 차원이 다르다. 후자는 포괄적 차원의 영성이고, 전자는 종교적, 신앙적 차원의 영성이다. 우리는 하나의 물질을 보면서 그 물질이 말하는 바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눈과 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경험적 사실을 통해서, 어떤 체험을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또는 삶의 달관을 통해서 주어지기도 한다. 종교적인 교육, 즉 어린이들에게 종교교육을 시키거나, 이런 모임을 통해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신앙의 교리를 연구한다거나 하는 것이 이런 영적인 눈과 귀를 가지기 위한 작업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우리는 영성의 눈을 지님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윤락여성이 있다고 할 때 나는 '창녀'라는 관념으로 그녀를 본다. 불결하다든가 폭력과 연계되어 있다든가 바람끼가 있다든가 하는 생각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천박한 인간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그녀를 나의 결혼 대상자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을 1차원에서 보는 시각이어서 내가 보는 것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한편 그 여자의 인생과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 영성의 눈으로 본다면, 그는 윤락여성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딸이라는 것이다. 그가 왜 그런 일에까지 빠지게 되었고, 그에게도 순수한 사랑과 영혼이 있고, 그를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있고, 그가 꿈꾸고 있는 세상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나 도시빈민에 대해서도 영성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성이 없으면, 노동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피곤한 것, 품을 파는 것으로 볼 뿐이다. 그러나 영성의 눈으로 볼 때는 노동이란 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고, 도시빈민의 삶에서 인간의 순수함과 공동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 영성을 지님으로써 사물을 존재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목적이 있다. 즉, 꽃은 꽃을 피우기 위해 있다든가 하는 등의 목적을 말하는데, 그 목적에 충실한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아름다운 계곡과 경관이 좋은 땅이 있다고 하자. 어떤 이는 그것을 보고 시상과 악상을 떠올린다. 또 어떤 이는 자연의 섭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창조주를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곳에 골프장이나 실버타운을 지어 분양하면 사업이 잘될 거라는 투기의 가치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 땅이 그 땅의 본연의 모습으로 있게 한다. 즉, 그것을 보고 자연의 섭리에 감탄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조적인 방법으로, 또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그 땅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사업으로 그 땅을 활용할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윤창출을 위한 방법으로 이용하게 된다. 우리가 영성을 지닌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것이 창조하신 본연의 목적대로 있는 것인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영성을 지닌 자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세상을 거룩한 것, 하나님의 것으로 보게 된다. 

  3) 영성을 지닌 신앙이란 우리가 입으로만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고, 내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영성을 지녔을지라도 우리와 다른 타종교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합당한 영성을 지니게 되고 그들은 그들의 영성을 통해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예수를 어떤 사람으로 고백하는지에 대한 영성은 우리들의 정체성을 판가름하게 된다. 영성을 지님으로써 나와 세상,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이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결합하게 된다. 그 결합을 통해 존재, 즉 이웃이나 하나님이나 세상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영성을 지니지 못할 때에는 표면적인 이해에 그치게 되고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참된 자신을 볼 수 가 없다. 주체성을 갖지 못함으로 인해 미디어, 뉴스, 광고 등 영상을 보면서도 사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상, 광고의 홍수, 미디어의 공세에 허약할 수밖에 없게 된다.

2. 그리스도교의 영성 
   그리스도교의 영성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나의 영성은 정상적인가? 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예배드리려고 교회당으로 오는데 까치가 심하게 울어대고 있었다고 하자.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날 밤에 고양이가 나무에 올라가서 까치 새끼를 물어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미 까치는 자기 새끼를 죽인 고양이를 쫓아다니면서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마침 그때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오던 집사님이 나에게 "목사님, 오늘은 참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봅니다. 까치가 저렇게 울어대는 걸 보니......"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집사님은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 혹은 좋은 소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살아왔기 때문에 까치의 울음을 듣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까치는 자기 새끼를 잃어버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시는 분, 나의 허물을 덮어 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나의 간청을 기꺼이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시다, 구원이시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들어왔던 얘기이고, 우리도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사실 자체가 무엇인지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렇게 반가운 소식을 가져다 주는 그런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회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사회 문화적 전통이 뭔가 잘못되어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승이 제대로 되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좀더 깊은 내면의 세계, 영성을 깊이 접하지 못하고 살아갔을 때, 십자가에 대한 의미는 나에게 그저 좋은 소식, 구원, 혹은 목에 반짝거리는 목걸이 정도로 나타날 수가 있다.
    모든 종교가 각각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종교는 윤회설이라는 눈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종교는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유심론적 눈으로 사물을 보기도 하며, 여러 가지 정신으로 세상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복음정신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복음정신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측면이 일반적으로 얘기해 오는 명상과는 구분된다. 사색과 명상, 묵상과 관상은 각각의 차원이 있다. 사색은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것이며, 명상은 영적 차원에서 사색하는 것이다. 묵상은 신앙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로써 신앙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신앙적 명상이다. 묵상이 나의 이성과 상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관상이란 나를 온전히 비운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묵상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복음정신이라는 우리의 영성을 여러 차원에서 영성수련의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 즉 복음정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과 모범적인 인간, 완전한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 세계에서 제거되고 부활하셨다는 이 세 가지의 사건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제시된다.

     영성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 영성을 가지고 사물을 식별하는 차원이고, 또 하나는 식별된 사물을 통해 자기에게 나타나는 반응이다. 무엇을 보고 측은지심을 느꼈다면 도와주어야겠다든가 하는 판단을 하게 되고 그 판단에 의해 나타나는 행동이 있다. 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윤리라고 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윤리와 결합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 신앙이 행동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계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에 가장 강조하셨던 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해 내려오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대체로 실종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만 강조되었다. 특히 가톨릭에서 그런 부분이 많은데, 세례성사, 고해성사 등 성사를 하거나, 교회법을 충실히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나를 믿으라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시고 당신 자신이 길이 되어 주셨다.
    복음정신이란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실까?"에 대한 명상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판단하고, 예수님처럼 실행하는 것이다. 복음정신이 우리의 영성이라면 세상 사물을 모두 영성의 눈, 즉 복음정신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복음정신이라는 영성을 지니지 못할 때에는 경험적 이데올로기, 지식적 이데올로기가 영성을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경을 읽고 인용하는 목회자도 제각기 다른 정치적, 사회적 입장에 서게 되고 설교도 행동도 달리 하게 된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분단현상을 볼 때에도 복음의 눈으로 본다면 이것이 어떤 문제이고 하나님께서 어떤 걸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만일 영성의 눈이 없다면 자기가 살아온 경험, 가령 자신이 어렸을 때 공산당에게 어려움을 당했다거나, 자기 부모가 어떻게 고난을 당했다는 경험에 의해, 혹은 반공교육에 의해 익혀온 이데올로기를 통해 분단의 현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통일을 반대하거나 통일을 한다면 상대방을 온전히 굴복시키는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활에 유리하냐 불리하냐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정신이라는 영성을 철저히 지니고 복음정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수련을 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정신으로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타당한 행동양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3. 우리 시대의 영성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성은 무엇인가? 교회사를 통해서 보면 세상과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멀어져갈 때, 새로운 영성의 관점들이 수도원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로마 사회가 성적으로 타락하고, 윤리적으로 부패했을 때 나타난 것이 정결 운동이었다. 그것이 카푸치노 수도회 같은 수도원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서 많은 여성들이 수도원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종교와 사회가 로마 제국의 폭압적 현상에 대해 침묵을 지키면서 교회가 사회와 결합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나타난 것이 베네딕트 수도회 같은 관상수도회였다. 또 14세기에 교회가 너무 부자가 되어 민중들이 도탄에 빠지고 죽어가는 것은 외면하고 오직 성전을 건축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을 때,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프란치스코가 주동한 청빈운동이었다. 이와 같이 교회의 모습은 사회와 세상에 대해서 거꾸로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원 운동은 사회운동으로 볼 수도 있다. 세상과 교회가 썩고 부유하고 타락할 때, 정결, 은수, 청빈 등을 주제로 한 영성이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고 빛이 되고 길이 되었는데, 그들 영성의 고유성이 모든 복음정신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도 물질적 풍요로 인하여 파행적으로 치달은 사회현상에 대하여 인간화, 도덕, 윤리의식 등 정신세계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고 있다. 그 이전부터 우리는 '삶의 질'을 강조하는 기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환경, 성차별, 치안의 불안정, 교육의 왜곡성, 대형 사건 사고 등 모든 것이 물질만을 추구했던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나타난 현상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 인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공동체를 잃어버리고,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던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이제 인간답게 살고 지상에서 좀더 하나님 나라다움을 지니기 위해 필요한 영성, 즉 물질의 풍요만을 추구했던 데서 온 그 반동을 우리는 가난의 정신, 자발적 가난으로서 가난의 영성으로써 극복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경제회복이 중요하지만 어떤 경제회복으로 갈 것인가를 질문해야 하고, 그것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은 '복음정신에 입각한 경제'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평등, 공존, 소유의 재인식, 자원의 절제 등이다. 우리도 잘 살아 보았고 풍요로움도 누려 보았지만, 그게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는 가난의 삶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가난이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가난도 있지만, 자발적인 가난도 있다. 불편함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작은 것을 추구하고 낮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복음정신에 입각하여 우리 시대가 나가야 될 방향이라 생각한다.

4. 영성 수련의 강조점
  1)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정신에 입각한 영성을 지니려 할 때 중요한 점은 신앙과 신학이다. 즉 신앙적 믿음과 이성적 지식이 대단히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적인 눈을 지니는 데 좀더 진보할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깊이와 그것을 이성적으로 더욱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성자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 믿고,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고 신학의 중요성을 말했다. 성경만 들이대고 얘기하면 다 옳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탄도, 이단도, 사이비도 성경을 인용한다. 아전인수의 성경해석은 결국 인간을 죽이고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교회를 살찌우게 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죽이게 되는 것이다. 중세 교회의 죄악상도 모두 성경에 충실한 것이었다. 성경을 인용해서 말한다면, 인간을 죽이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고 전쟁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공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2)그리고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경 이전에 인간의 삶이 있었고 신앙공동체가 있었다. 성경은 신앙공동체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성경의 세계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삶의 체험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의 체험을 내 것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독서를 열심히 해야 하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삶을 체험화하기 위해서 보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볼 때에는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관찰하고, 판단할 때는 복음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과학적 관찰과 복음적 판단이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3)영성수련의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계시를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교리로서 설명할 때, 자연현상, 인간의 양심, 역사의 발전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을 간접 계시(자연계시)라 하며, 온전한 직접 계시(특별계시)를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자연현상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필요한 영성수련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가급적 뭔가를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그것에 해당한다.
     4)또한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며 노력해야 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 발전과 현실 속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을 발견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5)끝으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훈련이 될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함과 같이, 예수님의 전 인격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인간성, 품성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도 우리의 영성을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수련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영성의 핵심은 바로 복음정신에 있다. 복음정신을 우리가 지닐 수 있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더 깊이 바라보고 명상할 수 있는 훈련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