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오늘에 있어서의 개신교와 로마카톨릭 교회와의 논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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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480년 가까이 흐른 20C를마지막 보내는 오늘에 있어서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신학적으로 교리상으로 얼마나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또 얼마나 먼 위치에 있는가? 분명 오늘의 상황은 종교개혁 시대의 상황은 아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상호적 그리스도로 규정했던 심각한 갈등은 지금에 와서는 많이 완화되어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정말 그 갈등은 완화되어 있는가? 오늘에 있어서는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없는가? 분명히 옛날의 갈등이 완 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갈등 중 일부는 종교개혁 시대에는 없었던 것이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오늘에 있어서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논쟁점은 무엇인가?
1. 베드로 수위권과 로마교황 수위권
이 유명한 로마 가톨릭의 사도권의 계승이론에 의하면 개신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진정한 사도적인 교회가 되지 못한다. 개신교회는 진정한 사도적인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개신교회 성직자들 역시 진정한 성직자가 아니다. 진정한
성직자는 합법직인 주교에 의해 서품받은 신부들만이 진정한 성직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이 유명한 사도권의 계승이론은 가톨릭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다. 가톨릭은 로마의 교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상명하복적인 구조를 교회의 중추로 생각하고 있고 이 사고방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소위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념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철저히 거부당하고 있다.
1980년대의 보프(L. Boff) 신부에 대한 심문은 그의 해방신학이 가톨릭의 교황청과 갈등을 빚은 것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긴 했지만 사실상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의 유명한 교회론 <교회, 가리스마와 권력>이 주창하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론>을 교황청이 결코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베드로 수위권과 로마 교황 수위권 및 사도권의 계승이론은 정당한 이론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잘못된 이론 때문에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와의 진정한 에큐메니칼적 일치는 심각한 장애에 부딛히고 심지어는 일치운동이 원천적으로 파괴되기도한다. 가톨릭은 개신교회에서 받은 모든 성례를 무효로 보기 때문에 개신교회의 세례도 무효이고 성찬도 무효이다. 이것은 개신교회의 성직자들이 성례를 집행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는 개신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멸시가 그 근거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같은 심각한 개신교회에 대한 멸시를 잉태시키고 있는 베드로 수위권 및 교황수위권과 사도권의 계승이론의 신학적 정당성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베드로가 역사적 예수의 계승자라는 베드로 수위권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베드로가 역사적 예수의 계승자라는 신학적 성서적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가톨릭에서는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어디에 그 근거가 있는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에 의하면 마 16:16-19이 바로 그것을 위한 성서적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위의 본문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틀림없고 또한 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긴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정말 예수께서도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종교 개혁자들의 답은 달랐다. 루터(M.Luther)는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해석했고 칼빈(J.Calvin)은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루터가 해석한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본 견해는 잘못된 해석이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을 보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말씀은 자기 자신에 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베드로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해석한 칼빈의 해석은 이 본문을 매우 훌륭하게 해석한 탁월한 해석이다.
그런데 이 탁월한 칼빈의 해석도 완벽한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이 결함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말한 예수의 말씀이 문맥상으로 베드로라는 개인을 향하고 있지 신앙고백이라는 추상명사를 향하고 있지 않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칼빈의 해석이 갖고 있었던 결함은 20C의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극복되었다. 쿨만(O.Cullmann)이나 레드 .E.Ladd)같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의 <너>를 <고백자 베드로>로 해석했고 이 해석은 이 본문에 대한 매우 탁월한 해석이었다.
<고백자 베드로>라는 말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서의 베드로라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신 것이고, 따라서 그 말씀은 그 순간은 베드로라는 개인을 향하고 있었지만 내용상으로는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의 대표일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마 16:16-19에 대한 해석으로 칼빈에 의해 훌륭하게 해석되고 20C의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진 <고백자 베드로>라는 해석이 이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이 본문을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굽히지 않고 있다. 엄밀하게 언급하면 이 본문은 가톨릭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완전히 막혀있는 본문이 아니다. 이 본문 한 귀절 만으로 생각하면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될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상황과 성서전체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만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본문이 베드로라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틀림없고 또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가 틀림 없다면 예수의 부활,승천 이후에 등장하는 최초의 초대교회의 최고의 지도자는 당연히 베드로이어야 한다. 그러면 베드로는 정말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등장하는 최초의 초대교회의 수장이었는가?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이에 대한 답은 상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의 대체적인 결론은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등장하는 최초의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의 수장은 베드로가 아닌 예수의 동생 야고보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추정은 갈 2:9에서 바울이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이 여기는 3명의 지도자를 언급하면서 <야고보,게바,요한> 의 순으로 언급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왜 야고보라는 이름이 베드로라는 이름보다 먼저 언급되어 있을까? 이것은 우연일 수 있다.
무스너(F.Mussner)와 같은 갈라디아서를 주석한 가톨릭의 대표적 신학자는 이 문제가 갖는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이것은 결코 서열 순서일 수 없다는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본문 하나만으로는 이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어떤 서열을 암시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밝혀 낼 수 없다. 양쪽의 가능성이 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행 15:6-21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회의 장면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이 사도회의의 장면은 야고보가 이 회의의 의장이었다는 것을 상당 부분까지 암
시하고 있다. 이 회의에 베드로도 참석하고 있지만 베드로의 발언은 참고 발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고 이 회의를 주재하고 결론짓고 결정사항을 공포하는
이가 야고보이다. 이 사도회의의 장면은 100% 그러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야
고보가 초대교회의 중심적인 지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당히 깊은 곳까
지 암시하고 있다.
갈 2:12 이하의 본문에는 이 문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 온다는 소
식을 듣고 이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해 나오는 비겁한 행동이 기록되어 있
다. 그런데 문제는 왜 베드로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을 두려워 했겠는가 하는 문
제이다. 만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야고보가 보낸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 베드로의 비겁한 행동을 보고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는 것
으로 되어 있는데, 만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바울이 어떻게 베드로를 꾸짖을 수 있었을까? 바울은 단 한번도 베드
로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사도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바울은 언제나 베
드로를 자신의 동역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의 모든 증거들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가톨릭의 주장의 허구를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마 16:16-19의 본문
은 <고백자 베드로>로 해석하는 것이 전체성서와 초대교회의 역사에 상응하는 해
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는 초대 교회의 중심적 지도권을 일시적으로 베
드로가 아닌 야고보가 행사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은 베드로 수위권을 위한 반
론을 위한 것이지 야고보 수위권이나 이와 유사한 계층적 질서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모두 민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했을 것
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예루살렘 공동체 속에서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의 동
생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일시적으로 교회의 중심적 위치에서 일했지 않았겠
는가라고 추정할 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행 15:6-21의 사도회의를 오늘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주교단회의의 모체로 생각하고 교황은 베드로의 권한을 이
어받고 주교들은 다른 사도들을 계승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 모체가 되는
행 15:6-21의 사도들의 의장이 야고보였다면 이 주교단회의의 의장이 누구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승자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성서적으로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
약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라는 사실이
라고 해도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것은 더더욱 그 근거가 희박한 허
구이다. 이것은 근거가 희박한 정도가 아니고 근거가 아예 없다. 왜냐하면 베드
로 사후에 초대교회의 교부들 가운데 그누구도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암시
하는 문서가 지금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철저히 허구이다. 그
러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가?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구원의 기관으로서의 지상교회는 사도단의 단장인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화에 의해 사복되며,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사도단의 으
뜸으로 세우셨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사복하다 로마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사복을 하게되는 역사적 사실 때문인것이다." [이기정 편저, 중요 교리,
전례 용어해설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92), p115]. 베드로는 과연 로마에서순
교했는가? 그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가능성은 상당히 있는 것으
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클레맨스 편지에 의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네로시대에 로
마에서 순교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것
과 로마교황 수위권과 무슨관계가 있는가? 만일 죽은 장소가 그렇게도 중요하다
면 예수께서는 죽으셨는데 그러면 예루살렘의 주교가 예수 그릿도의 권한을 대행
해야 하지 않겠는가? 베드로가 죽을 때에 자신의 권한을 로마의 주교에게 양도한
다는 말을 남긴적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철저히 허
구이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승자이고,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이며, 로
마 교황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명된 주교만이 사도권을 계승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허구이다.
그러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 분은 누구인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 분은 죄많고 허약한 인간이 아니고 성령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
서 오늘날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은 성령이시지 그밖의 어떤 존재도 아니다. 예수
께서 내가 가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고 바로 이 보혜사인 성령께
서 오수절에 강림하신 것이다.베드로를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진정한
사도로 만드신 분은 바로 이 성령이시다. 그리고 진정한 성직자도 바로 이 성령
에 의해 부름받은 사람들이 진정한 성직자인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사도성은 어떻게 되는가? 가톨릭에 의하면 교황에 의해 합법적으
로 임명받은 주교가 다스리는 교회가 사도적 교회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해석은
잘못되었다. 교회의 사도성은 사도들의 통치하는 교회가 사도적인 교회이다. 그
런데 마지막 사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사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
다. 그러나 사도들은 죽었지만 사도들의 말씀, 교훈, 복음은 남아있다.
오늘날 교회가 사도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사도들이 남긴 말씀과 그들의 교훈과
복음에 복종하는 것은 사도들이 남긴 말씀과 그들의 교훈과 복음에 복종하는 것
이 진정으로 사도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즉 교회가 그분들의 말씀과 교훈과 복
음에 복종할 때, 사도들의 권위는 살아있는 것이고, 이렇게 되었을 때 사도들의
통치는 교회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적 교회는 정신이 살아있는 교
회를 의미한다. 동시에 사도적 교회는 사도들의 삶에 동참하는 교회를 의미하는
데 곧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 당했던 사도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가 진정한
사도적 교회인 것이다.
2. 마리아 론
다음의 5개 항목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
2)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없는 삶을 살았다.
3) 마이라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4)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이다.
5) 구원사역에 있어서의 마리아의 중재성.
첫째,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는가?
물론 아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 아들과 딸들이 있었다."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요셉, 유다라 하지 않느
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냐"(마13:55) 이상의 마태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 최소한 아들이 4명 있고 딸도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먼저 우리 주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공경하는 것이 마땅한 일
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52항) 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은 명백한 오류이고 성서에 위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신학
자들은 위의 마태의 본문에서 형제라는 개념을 사촌형제와 그와 유사한 관계에서
도 사용할 수 있으므로 마리아의 평생 동정녀 이론을 정당하다는 지극히 납득하
기 어려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참고 J.Binzler,Die Buuder und Schwestem
Jesu,1967).
마 13:55의 내용은 요셉과 마리아가 언급되고 그리고 아들들의 이름과 딸이 언
급되고 있는데 이들이 마리아의 아들,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마리아를 위해
성서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마리아의 평생동정녀이론은 수녀원 제도의 존속을 위
해서는 유효할지는 모르다 역사적 진실은 아니다 사도신조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생시킬 때 동정녀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이것이 성서의 증언과 일
치한다.
둘째, 마이라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는가?
1854년 12월 8일 교황 피우스(Pius)9세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는 교리를 선포했다. 소위 마
리아는 무염시대의 교리는 19C 중엽에 비로소 공적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종교
개혁시대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논쟁점이 아니고 오늘의 신학적 논쟁점이 되
고있다.
13C 가톨릭의 신학의 교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1225-1274)는 마
리아의 무염시대의 교리를 부정했다. 1439년에 바젤(Basel) 공의회는 무염시대의
교리를 신앙조항으로 선언했지만 이 공의회는 당시 교황과 유대관계를 맺지 않아
합법적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트랜트공의회는 (1545-1563)에서도 이 문제는 반대자들의 입장 때문에 하나의
동일된 견해를 얻어낼 수 없었던 교리였다. 그런데 이 교리가 유감스럽게도 교황
피우스 9세에 의해 선포되었고,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마침내 티없이 깨끗한 동
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59항)라고 피우스 9세의 교의가 추인되고 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천주의 성모는 마치 성신께 형성된 새로운 조물같이 온전히 거룩하시
고 아무런 죄에도 물들지 않으셨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56항) 라고도 선언했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죄없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 한분 뿐이셨다.
셋째,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는가?
마리아는 몽소승천의 교리는 20C 중엽에 로마 가톨릭에 의해 선포된 교리이
다.1950년 11월 1일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
셨던 하나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두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
상의 영광에로 들어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신앙의진리이
다"라고 선포했다. 이 해괴망측한 이상한 교리는 오늘의 가톨릭 정신을 대변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
에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으셨다."(제2차 바
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제59항)라고 선언함으로서 연속적으로 추인
하고있다. 그런데 마리아의 무염시대 및 몽소승천의 교리는 마리아를 예수님에게
버금가는 천상천하의 모후로 추대하려는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신심의 발로러서
성성에 근거가 없는 크게 우려할만한 교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마리아를 예수님과 버금가는 존재로 만들려는 가톨릭 교회의 의도는 아담과 그
리스도 사이의 유형론을 하와와 마리아 사이의 유형론으로 발전시킨 교리 속에서
도 잘 찾아 볼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를 둘째 하와로 주장하면서 "하와
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공적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형론을 하와와 마리아 사
이의 유형론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성서에 그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를
제2의 그리스도로 승격시킬 위험이 있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
다.
넷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인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4C 초부터 언급되기 시작하다 431년 에베
소(Ephesus)공의회에서 신조로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하나님의 어
머니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오늘의 가톨릭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어머니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마리아가 참 하나님
이신 예수님의 참된 어머니였다는 예수님의 참된 인성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교
리인 동시에 이 마리아에게 출생하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셨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교리였다. 그런데 이
교리를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형태로 이 교
리의 그 핵심을 변경시키면서 원래 존재하지 않던 개념을 뭡게 추가시킨 채로
이 교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엄밀하고 정확하게 언급하면 마리아는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예수님의 지상에서
의 어머니셨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의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영원화
시키면서, 마리아는 천상에서도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영원히 옛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영원히 하나님의 어머니이시고
또한 그 역할을 하도록 규정되신 분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상천하의 모후"이시고 마이라의 모
성은 "천상에서도 계속된다"라고 고저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천상에서도 계
속되는 마리아의 모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에 언급될 마리아의 중보성과 관
련되어 있는 것으로 마리아를 통한 기도의 유효성과 본질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
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그가 낳은 아들이 그 형제들인 많은
신도들의 맏이시므로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고 이 교회를 모성애로 돌보시는
교회의 참된 어머니이다.그러므로 교회는 효심을 가지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공경
해야 한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이나 교회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성서
적인 표현이 아니다.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라는 개념은 성서에 도무지 존재하
지 않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이다라는 것은 에베소 공의회의 원래적 의미
로 읽어야 한다.그런데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쓰면 오해의 소지
가 많으므로 마리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셨다는 표현으로
만족하는 것이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혼란을 피할 수 있는 훨씬 좋은 것으로 보
인다.성서 속에서 마리아의 영원한 하나님의 어머니 되심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는 오히려 예수님이 마리아를 낳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신 분으로 파악하는 것이 성서의 정신에 가깝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영원한 모성에 대한 가톨릭의 주장은 성서의 정신을 상당부분
뒤집는 것이다.
다섯째,마리아가 인류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중재자일 수 있는가?
교황 베네딕트 15세(1914-1922)는 마리아가 고난당하고 죽은 그의 아들과 함께
고난을 겪었으며 예수와 함께 인류를 구속하셨다는 사상을 발표했고 이러한 선언
은 교황 피우스(Pius) 11세에 의해 재가되었다.
즉,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에서 예수님과 협력했던 분이므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함께 이룩하신 분이고 지금도 마리아는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있는 구원의 중재자라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트 15센나 1917년 "모든
은총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 큰 고통을 받는 성모님의 자녀들이 생생한 신념을 가
지고 위대하신 천주의 모친께 간절히 호소의 기도를 올리기를 바랍니다"(이기정
편저,중요교리, 전례용어해설, P291)라는 선언을 한 바 있다.
이 선언 속에서 우리는 로마 교황청이 마리아에 대한 기도를 장려하고 있고 또
한 마리아가 은총의 결정적인 통로임을 선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바티
칸 공의회 문서에 의하면 마리아는 우리의 "변호자"이고 구원의 "보조자,협조자,
중재자" 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과한 교의헌장,제62항).마리아는 모
성애로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효성이 지극
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마리아의 청을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모
성애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마리아와 "깊이 결합되도록"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권
고하고 있다(교회에 과한 교의헌장.제62항).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도 바오르의 말씀대로 우리의 중재자는 한분 뿐
이시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60항)라고 선언하
고 있다. 가톨릭의 공적인 교리는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로"라는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
즉,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를 갖는 중재자라는
뜻은 아니다. 마리아를 통해 전달되는 은총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리아
에게 전달된 은총일 뿐이다.이런 의미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은총의 중재자는예
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은총을 받는 길은 두 길이 아닌가? 그리스도께 직접 기도해서
은총을 받는 하나의 길이 있는 것이된다. 그런데 혹시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효한 은총을 받는 길이 아닌가라는 간과될 수 없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것
은 특히 가톨릭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리구리(Alfons von Libuori,1787년경
사망)의 [마리아의 영광]이라는 책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심각한 의혹이다.가톨릭
교회 내에서 100판 이상 인쇄가된 이 유명한 책에서 리구리는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욱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다"라는 언급과
"아들이 그 모친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가?"등의 언급을 한바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혹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두
길중에 실재적으로 사용되는 길은 마리아를 통하는 길 뿐이 아니지 않
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 가톨릭의 [중요교리,전래용어 해설]이
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성 알퐁스 리구리께서는, [엄
밀하게 따지자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공로에 의해 우리에게 은
총과 구원을 얻어 주실 수 있는 중재자시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당
신 아들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중재자가 되신다. 비록 성모님은 예
수님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또한 그리스도이 이름을 빌어 기도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어내실 수 없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우리가
청하는 모든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어린 아이가 아닌 왕으로, 힘세고 권
력을 장수로서 오실 수 있었고, 또한 오심에 성모 마리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심에 성모님이 반드시 필
요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한님은 성모님을 통해서 당신의 은총으 마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이기정,중요 교리, 전래용어
해설 , p291-292). 이상의 언급에서 매우 중요한 중재자적 기능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이 성서의 본질적인 정신이
고, 그리스도 밖에 하늘의 여왕이 또 한분 계셔서 은총을 중재한다는
것은 성서와 심각하게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교리이다.
개신교회가 2가지 성례만(세례,성찬) 인정하는데 반해 가톨릭 교회는
7가지 성사 (세례,성찬,신품,고백,견진,혼인,종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그런데 외형상 가톨릭 교회가 개
신교회에 비해 성사제도가 5가지 더 많다는 차이 보다도 성사제도에
대한 두 교회의 내적인 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는 훨씬 더 심각하다. 이
차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직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사지권이
있다는 가톨릭 교회의 주장이다.
가톨릭 교회에 의하면 우리들의 죄는 가톨릭의 사제들에 의해 사죄된
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원죄가 사죄되고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들의
자범죄가 사죄딘다. 또한 종부성사 때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
에 기름을 바르고 신부가 기도가 있으면 이 땅에서 지은 죄가 사죄되
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이 성직자들의 사죄권은 마16:19과
요20:21-23)에 근거되어 있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주장이다. 베드로
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 속에는 사죄권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그러므로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의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용서
하거나 죄를 보류하거는 권세가 포함된 것으로 가톨릭 교회는 인식하
고 있다. 그런데 이 권세는 교황과 주교를 통해 사제들에게 전달되어
있는 권세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오직 사제들을 통해서만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가? 오늘의 가톨릭 교리서의 주
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죄의 사람은 고백성사로만이 아니라 전례의 기도와 (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나) 신심기도로써도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단, 여기
에는 반드시 통회가 따라야 하며 큰 죄는 고백을 꼭 해야 한다[가톨
릭 교리서해설(서울: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1984),P398].
위의 가톨릭 교리서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신심기도로써 직접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큰 죄는 반드시 고백해야 한다는 마지막 부분에 붙어 있는 중요
한 언급이다. 가톨릭 교회는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죄는 우리의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큰 죄이다. 가톨릭
교회에 의하면 탐욕, 교만, 호색,분냄, 시기, 게으름,미사에 불참하는
것 등은 대체로 대죄에 속한다.
그러나 대죄와 소죄의 구분은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대체로 보아서 살인,강조,교만, 성적범죄 등 큰죄로 여겨지는 것은 대죄이고 그렇지 않는 것이 소죄이다. 그런데 구원의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대죄도 반드시 고백해서 고백성사를 통해 사제
를 통해 사죄를 받아야 된다는 이 중요한 단서는 결국 사제를 통하지
않고는 큰 죄의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가
톨릭 교회의 주장은 작은 죄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지만 큰 죄는 반드시 사죄를 통해서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결론은 지극히 위험하고 우려할 만한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큰 지는 사제가 하
나님을 대신해서 용서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의 가톨릭 교리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우리의 죄
를 고백하여 용서 받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찬
탈하고 있다는 비판이 부분적으로는 지나치다 해도 상당 부분 타당성
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직접
적인 만남의 사건이다. 눅 18:9-14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는 죄 용서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직접적 만남의 사건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 세리가 하나님
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고
백하기 위해 사제에게 가야한다고 한 번도 가르치신 적이 없다. 인간
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용서함을 받고 거듭나는 하나
님과 인간 사이의 최초의 만남의 사건도 사제들의 세례가 아니다. 가
톨릭 교회에 의하면 사제들의 세레를 통해 비로소 원죄가 사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에 대한 복음을 듣고 믿을 때 그 죄가 사해
지는 것이다. 즉, 죄의 용서와 칭의는 일차적으로 말씀의 사건인 동시
에 믿음의 사건이다."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다"(눅 24:47) "저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선
지자도 증거하되 저는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가톨릭의 사제의 세계가 없이는 원죄
의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가톨릭의 교리는 죄의 용서와 칭의가 말씀의
사건이요 믿음의 사건이라고 가르치는 성서의 정신과 충돌딘다. "그러
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읠보다 하심을 얻지 못하
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이
것이라"(행 13:38,39). 죄의 용서와 칭의는 제도적인 가톨릭 교회 속
에 폐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전파를 통해 나타나는 말씀과
성령의 사건이다. 이 말씀과 성령을 가톨릭이라는 제도적인 교회 속에
유폐시키면 안된다.
성사제도에 나타나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가톨
릭 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직접적으로 대리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께로 직접 나아가는 길을 가
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사제도와 안수를 통해 죄가 직접적으
로 용서되고 성령이 직접적으로 주입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이다.
이 잘못된 신념은 신품성사와 견진성사에도 나타나는데 신품성사와 견
진성사 때의 안수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직접 주입된다고 가톨릭 교
회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품성사 때의 주교의 안수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신도들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성령이 결국 교회의 제도 속에 유폐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바로 이와같은 성사제도의 문제점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화체설과 더불어 가톨릭 성사제도의 심각성을 잘 나타내 주
고 있다.
4. 교황과 교회의 무오성
1870년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무오성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우리는 신적으로 계시도니 교리인 교항에 대하여 가르쳐 확실하게 하
고자 하나니, 교항이 그의 지고한 사도적 권위를 인하여,모든 그리스
도인을 부양하고 치료하는 직무를 수행하기 이하여,그의 자리에서 말
할 때는, 신적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향하여 믿음과
도덕에 관계되는 교리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부여하신 무오성을
소유하게 된 축복받은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신적인 지원에 의해, 온
세계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과 도덕에 관계된 교리를 분명하게 언급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자신이 언급한 이러한 정의들은 - 교회의
동의가 있더라도 - 변경시킬 수 없다.
교황 피우스(Pius) 9세에 의해 주장되기 시작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
희에서 확정된 교화 무오성의 교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65)
에서도 계속적으로 추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
회는 "주교단의 으뜸이신 로마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최고
목자와 스승으로서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신앙과 도덕
에 과한 교리를 결정적으로 선포할 때에,교황은 직무상의 무류성을 향
유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결정은 교회가 통의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개정될 수 없는 것이라 함이 마땅하다. 그것이 베드로 안
에서 이미 교황에게 약속된 성신의 도움을 받아 선포된 것이므로 이
결정은 그 누구의 승인도 필요치 않고 다른 판단을 요구하는 어떠한
상소도 있을 수 없다. 그럴 때에는 로마 교황이 개인 자격으로 선언하
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교회 자체의 무류의 은사 (카리스마)를 특별히
지니고 있는 세계 교회의 최고 스승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교리를 설명
하고 옹호하는 것이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제25항)라고 선언했다.
결국 오늘의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시대에도 공헌되고 있지 않았던
교황무오의 교리를 놀라웁게도 이 개명한 시대에 선언하고 있는 것이
다.
오늘의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무오성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
다. 그 첫째는 교황의 무오성이고 둘째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있는
주교단의 무오성이다. 이 무오성은 내용적으로 교황이 주재한 공의희
의 무오성을 의미한다. 셋째의 무오성은 전체교회의 무오성이다. 이 3
가지 무오성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적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이
3가지 무오성은 내용상으로 살펴보면 결국은 교황의 무오성으로 집약
된다. 왜냐하면 전체교회의 무오성을 전체교회를 사실상 대변하는 기
관은 전체 주교들의 모임인 공의회 뿐이기 때문에 공의희의 무오로 귀
착되고 공의희 역시 교황이 빠지면 그 모든 결정이 무오한 전체교회의
결정으로서의 효력이 없기 때문에,즉, 공의희의 결정은 교황이 인가할
때에 비로소 무오한 결정이기 때문에, 결국 3가지의 무오성은 내용적
으로 로마 교황의 무오성으로 귀착되는것이다.
그러면 교황의 결정은 정말 무오한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먼저
그 유명한 갈렐레오 재판을 머리에 떠 올릴 수 있다. 교황 바울 5세
(1605-1621)와 교황 우르반 8세 (1623-1644) 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하나님이 말씀에
위배된다고 선언했고 갈릴레오를 고문하고 종교재판소의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았던가? 1619년 5월5일에 금서목록총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책
을 금서로 정하고 지구가 돈다는 이론은 성서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으
로 탄핵하지 않았던가? 이와같은 세인들의 질문을 잘 알고 있는 교회
는 교황 무오의 이론에 "신앙이나 도덕에 과한 교리를 선포할 때" 무
오하다는 단서를 붙였다.즉, 자연과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오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 대해 무오하다
는 설명이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기 마리아의 무염시대의 교리를
선포했는데 그것이 과연 무오한가?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가 성모승
천의 교리를 선포했는데 그것이 과연 무오한가? 동정녀 마리아는 정말
평생 동정녀이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성서와 근본적으로 출돌되
는 잘못된 교리라는 것을 이미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교황 식스 투스
(Six -tus) 5세는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a)의 옛 번역을 좋아해
서 이 옛 번역을 조금이라도 고치는 자는 출교하겠다고 선언했는데 그
번역문은 이미 수 없이 고쳐진 채로 개정판이 출간되고 있다. 또한 우
리는 공개적으로 무오성을 부인했던 교황의 이름을 언급할 수 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이노센트 3세, 클레멘트 4세, 그레고리 11
세.하드리안 6세,바오르 4세 등이다.
무오성은 하나님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 교
회는 교황이 지상의 그리스도 대리자라는 잘못된 교리를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교황이 교황의 보좌에서 행하는 일을 무오한 그리스
도의 일과 동일시 시킴으로써 교황의 보좌에 앉은 교황을 신격화 시키
는 대단히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류는 성서와 신학
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를 지극히 제한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연구를 통
해 밝혀지는 탄압받을 심각한 위협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5. 최근의 가톨릭 교회의 긍정적 변천
지금까지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상의 중요한 문제점들을 살펴 보
았다. 그 중에서 마리아론이나 교황과 교회의 무오에 대한 교리 등은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오늘의 새로운 가톨
릭 교회와 심각한 문제점들이다. 이와 같은 교리들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 중 일부는 종교개혁 시대 보다 더욱 문제가 있고 부정적인 방향
으로 발전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와같은 부정적인 발전
에 비해 긍정적인 쪽으로 변천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 눈에 띄는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
다.
1) 개신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치운동에 과한 교
령]을 발표하면서 "서구의 갈라진 교회와 교단"이라는 항목에서 개신
교회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
교회 성도들에 대해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제20항). 이와같은 표현은 제2
차 바티칸 공의희 이전의 교리서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천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회를 다
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를 '열교
(Haeresis)' 혹은 '이단'이라고 하고 그 신봉자들은 열교인이라고 한
다... 바오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단자는 한두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로 알다시
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디도 3:10). 여기서 이단자란 열교이을 뜻한
다."[윤형중,상해 천주교 요리(상) (서울 :가톨릭출판사,1992), pp
258-259.] 이와같이 구원이 없는 이단인 열교도인 프로테스탄트 신자
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놀라운 변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가 성서를 존중하고 성서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기리고 (일치운
동에 관한 교령, 제21항),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초로 사랑과 덕행을
행하고자 하는 것(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3항)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바로 이와같은 긍정성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회와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형제적 대화로써 점차로 일치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을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권고하
고 있다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제18항).이오같은 개신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천은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평신도의 성서 읽기와 말씀의 전례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다준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성서를 모국어로
번역해서 평신도들이 성서를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
이었다. 이것은 평신도들이 성서에 직접 접근할 수 없었고 성서의 번
역도 금지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이룩한 가히 혁명적인 업적이었다.
종교개혁시대에 그토록 억압했던 모국어의 성서의 번역과 평신도들의
성경읽기와 오늘이 가톨릭에서는 모두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개신교정신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가톨릭은 또한 미사
중에 <말씀의 전례>를 허용함으로써 개신교회의 설교와 약간 유사한
말씀의 선포가 공적 미사속에 등장한것도 매우 긍정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가 미사중에 <말씀의 전례>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그 가치를 너무 크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개신교회의 예배에서 말씀의
선포가 차지하는 중요한 비중은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는 성체성사가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가톨릭은 철저히 성사 중심의 교회
이고 개신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가톨릭 교회 내에서 성서 번역과 읽기가 허용되고 있다고 해서 개신교
회에서 처럼 자유로운 번역과 읽기가 허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
톨릭 교회는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권한은 철저히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권에 속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제21
항). 즉, 자유스런 성서번역과 해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
톨릭 교회의 성서와 교회와의 관계는 개신교회의 관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개신교회에서는 성서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를 지배하는
권위인데 반해 가톨릭은 그 반대로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를 보호
하는 틀로 작용한다. 이점에 있어서는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적 문제점
이 오늘에 있어서도 가톨릭 교회내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내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가톨릭교회가 교회와 교황의 무오성
을 최근까지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개신교회에서 오랫동안 강조되던
성서의 무오성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교회와 성서 사이
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교회와 성서 사이의 관계
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 어떠한가를 잘 알 수 있다.
3) 사회정의와 이웃 및 세상에 대한 책임의 강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등장하는 가톨릭 정신의 가장 중요
한 변천은 사회정의와 이웃 및 세상에 대한 책임성이다. 이점은 오늘
의 가톨릭 교회가 칭찬받을 가장 훌륭한 점인데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한 교황 요한 23세의 탁월한 정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의 인권의 중요성과 사회정의에 대한 강도
높에 강조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제29항),
사회적 책임과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환기 시켰다 (현대세계의 사목헌
장, 제31항).
바로 이와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라틴 아메리카로 건너
가서 메델린(Medelin)의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기본정신으로
발전되었고 이웃과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가톨릭의 모습이 구현화
도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급진적이긴 하지만 라틴 아메
리카의 해방신학이 형성되게 되었다.
과거의 가톨릭 교회는 결코 사회정의를 위한 교회로 지칭하기는 어려
운 교회였다. 과거의 가톨릭은 대체로 지배자의 종교였고 지배 권력과
결탁된 특징을 많이 나타내는 교회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를 기점으로 가톨릭은 가난하고 힘 없는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의 모
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인권과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교
회라는 강한 인상을 전세계에 심게 되었다. 바로 이와같은 모습을 통
해 가톨릭은 점차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고 세계적으로 가
톨릭의 교세는 크게 확장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무오
성이나 마리아론과 같은 잘못된 교리를 추인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햐
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톨릭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새롭게 하는 분수령
이었다.
< 결언 >
오늘의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과거 종교개혁 시대와 같은 심각한
갈등상황 속에 있지 않다.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일
치운동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면서 일치운동에 방해되는 온갖 경솔한
열심을 피할 것을 전체 가톨릭 신도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일치운동에
방해되는 온갖 경솔한 열심을 피할 것을 전체 가톨릭 신도들에게 권고
하고 있다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4항)이 권고는 훌륭한 권고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 교회 내에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교리상의 문제
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도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일치로 나
아가는데 불필요하고 경솔한 열심을 피해야 한다.그러나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진정한 일치를 위해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교
황 수위권 및 베드로 수위권, 마리아론,성사제도 및 성직자의 사죄권,
교황 및 교회의 무오성 등은 신학적 오류이므로 가톨릭 교회가 다시
검토해서 바른 신학적 입장을 갖기를 바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
의회 이후 나타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정의와 이웃과 세상에 대
한 책임성은 훌륭한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 그리스도의 제자들 카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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