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1번은 본 연구원 사이트에 올렸던 내용을 다시 올립니다.
내게 주신 자들
문제가 있다고 알려진 기독 단체의 사상에 대하여 문의가 있어서 그 곳의 인터넷 사이트를 살펴보니 중요한 주장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이 예수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양태론 이라고 부르며 이단적 주장으로 판정하고 있다. 양태론 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이 모습을 달리하여 어떤 때는 하나님이 되고 어떤 때는 예수님도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바로 요한복음 17:11~12에 근거한 것이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주었다는 주장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성경 헬라어 사본 중에서 전통원문(다수 사본) 계열이 아닌, 카톨릭 계통과 같은 소수 사본을 본문으로 하여 번역하였는데 이 소수 사본의 헬라어 사본에는 이러한 의미의 번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 칼빈, 웨슬레, 스펄젼 등이 인정하는 전통 원문에 의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게 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 자신의 이름안에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그들을 지켰나이다......."
즉 예수님에게 주신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제자들이고, 그 제자들을 아버지 자신의 이름안에서 지켰다는 것이다.
영어 흠정역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주신 것은 제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While I was with them in the world, I kept them in thy name: those that thou gavest me I have kept,
이 구절의 번역에 의하여 잘못된 신앙관이 생긴다는 점을 볼 때, 성경 번역자들의 책임은 실로 막중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헬라어εν: 영어의 in의 의미) 보내실 성령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이름이 곧 성령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의 권한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의 영역과 권위 안에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3. 누구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는가?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부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받는가? 하는 것이 요점입니다.
[ 헬라어의 ‘밥티스마’는 세례보다 침례 ( 물속에 잠기는 것, 우리 몸을 장사 지내는것) 의 의미가 강합니다. 같이 쓰겠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내리신 ‘대위임명령’ 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게 되어 있고, 다른구절에는 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마태복음 28장의 명령은 주님의 공식적인 명령이라고 할수 있고, 다른 부분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주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할 때에는, 오직 예수님만 믿고 하나님이나 성령님은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를 합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으라고 하는 대상은 이방인 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은 전혀 모르겠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하고 , 침례를 공식적으로 줄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대부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고 (마28:1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침)례만 받을 뿐이러라 (행8;16)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10:48)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으니 (행19:5)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22;16)
cafe.daum.net/sarangbible 사랑성경연구원
베뢰아의 귀신론은 성서적인가? - 4
성경에서 ‘죽은자’란 죽은 신 곧 마귀와 그의 사자들 의미
베뢰아, 성경의 ‘죽은자’의 의미를 육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오류 범함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주장은 성서적 근거가 있는가?
1. 점하는 귀신에 관한 주장(행 16:16)
베뢰아에서는 점하는 귀신을 이사야서 8장 19절의 말씀을 들어서 죽은 자라고 결론을 짖고, 죽은 자를 사람이 죽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8:19).”
곧 점하는 귀신들을 죽은 자들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성경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말하기를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고 말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귀의 말대로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마귀의 말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정녕 죽으리라”가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석은 영적인 세계를 바로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마귀가 말하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주장은 육체를 중심으로 하는 주장이요,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영혼을 중심으로 한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만 알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마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 알았다. 마귀와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과만 교제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로는 마귀를 알게 되었다. 마귀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늘에서 하나님께 대적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려고 도전했다가 전쟁에 패하고 땅으로 내어쫓긴 이가 아닌가(계 12:9)? 하나님께 도전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을 반대했다는 말이요,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말이다.
지구상에는 과거에도 이념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념을 가지고 대립하는 측들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며 이를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무력을 동원하는 전쟁까지도 선택하고 있다. 인류의 마지막 전쟁은 종교 전쟁이다. 마귀의 군대와 하나님의 군대와의 대 전투가 이루어질 것을 계시록은 알려주고 있다(계19:19∼21). 마귀가 하늘에서 하늘 보좌를 넘보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생명이요, 생명의 신이신데 생명의 신이신 하나님께 도전했다는 것은 마귀가 사망의 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빛은 빛과 싸우지 않는다. 선은 선과 싸우지 않는다. 동질의 것은 곧 하나로 화합되지 결코 분리되어 다툴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귀를 가리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라고 말하고 있다(히 2:14). 그러므로 마귀는 사망의 신 곧 죽은 신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요일 3:8). 또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고 말씀한다(벧후 2:19). 이는 곧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게 되며,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요약하면 마귀는 사망의 신이므로 마귀에게 속하고 마귀의 종이 되는 자들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인 것이다(창 2:17).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영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마귀가 주장하는 산다는 것은(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육이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곧 한 사건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주장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는 사실적인 예라 할 것이다. 마귀는 육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영을 중심으로 보시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심은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함이지 육을 구원시키기 위함이 아닌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셨고(요 3:5),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3)”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내용은 영혼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선포된 것이지 육신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내용들을 근거로 볼 때 베뢰아의 죽은 자에 대한 해석상의 오류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죽은 자를 영적인 의미에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뢰아에서는 그것을 육적인 시각에서 해석했다. 곧 하나님 중심의 해석이 아니요, 세상 지식 중심의 해석, 마귀의 주장에 부합한 해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사야서 8장 19절의 죽은 자란 사람의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란 생명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생명을 잃고 사망한 자 곧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내 아버지가 죽었으니 가서 장사 지내고 와서 주를 쫓겠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 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하셨다(마 8:21∼22). 곧 마귀에게 속한 모든 이는 죽은 자이며 이는 곧 마귀가 죽은 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 8장 19절의 죽은 자란 사람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제사와 귀신에 관한 주장
베뢰아는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의 말씀을 들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주장한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0-22).”
또 “저희가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시 106:28)”를 근거로 들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먼저 ‘이방인의 제사’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알 신,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에게 등등 제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방인의 제사라고 하는 것은 위 성경이 쓰여질 1세기 당시의 사회 풍습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지 우리나라의 문화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제사가 우리나라처럼 조상 신 섬긴다고 하는 제사냐 아니면 우상에게 하는 제사냐 하는 점인데 당시의 중동 사람들에게는 우상에게 제사하는 의식만 있었지 죽은 사람에게 제사하는 의식은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의 이방인의 제사란 한국 사람을 가리켜서 한 말이 아니요, 당시 중동의 우상 숭배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또한 조상 섬기는 풍습이 아니요, 우상에게 음식 차려 놓고 하는 제사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내용은 우리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제사 의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 저희가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시 106:28).” 이는 민수기 25장 1∼3절의 말씀에 대한 인용으로서 “①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②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여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③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진노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당시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 신, 밀곰과 그모스에게 같이 제사하고 절하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재앙이 내렸다는 내용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모압 여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풍속에 의한 조상 섬기는 제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상은 곧 사망의 신, 마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생명의 신이신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사망의 신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는 것은 바알브올과 연합한 것과 같다는 의미이며, 죽은 자라는 것은 죽은 신 곧 마귀와 사단과 그의 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귀신이라고 했는데 웬 마귀이며 사단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과 사단과 마귀가 다 같은 존재임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2장 22∼26절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비방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일하는 곧 사단의 힘을 입고 일하는 것처럼 호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면 사단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사단과 동격으로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3장 10∼16절의 말씀을 보면,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안수하시고 기도하시매 곧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다. 이날은 안식일이었다. 이에 회당장은 예수님께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함이 옳지 않다며 분을 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5-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귀신들린 것을 사단에게 매인바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귀신과 사단을 동질성의 동일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5장 5절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나 죄짓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들에 대하여 “이런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죄 짓는 자를 사단에게 내주어 병들어 그 육신은 죽게 하여, 죄 짓는 것을 그치게 하여 주 예수의 날에 그 영혼이라도 구원시키려 하신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이 병들고 마르고 죽게 되는 것은 귀신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곧 사단과 귀신을 같은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0장 38절의 말씀을 보면,“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귀신들려 병든 자를 고치셨는데 이러한 자들을 총칭하여 마귀에게 눌린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서도 성경은 귀신과 사단과 마귀를 같은 존재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베뢰아에서는 천사가 사람의 몸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데 천사는 거론할 필요가 전혀 없다. 천사는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셨기 때문에(히 1:14) 밖에서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안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성전 삼고 직접 들어오시는 것이며(고전 3:16) 천사는 성도의 몸에 들어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단은 사람을 죄 짓게 하여 그 영이 죽게 만들었으며, 죽은 영의 사람이 되게 하여 마귀의 종을 삼아 버렸으므로(롬 6:16) 세상 임금이 되고 죄인들의 왕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마귀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요일3:8).
자기의 소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가 어디에 있는가? 요한일서 3장 8절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하고 베드로후서 2장 19절에는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고 했다. 누가복음 22장 3절에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하고,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는 사도 바울의 몸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다.
사단의 사자는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의 졸개들을 의미하는데, 계시록 12장 9절에는“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불신자의 사후 영인 귀신만 사람의 몸에 들어오고 그 외에는 들어 올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특정인의 주장일 뿐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마귀적 귀신론에 근거한 사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장 20∼22절의 말씀이나 시편 106편 28절의 말씀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되지 못한다. 육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는 세상 신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불신자의 사후 영과 귀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다음호에 계속>
이 내용은 베뢰아 측에서 인터넷에 제공한 그들의 주장을 근거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베뢰아의 귀신론은 성서적인가? - 5
‘프뉴마’, 하나님의 영, 성령, 천사의 영, 악의 영에 공통사용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면 성경에 ‘푸시케 아카다르톤’이라고 기록되었어야…
3. 복음서의 증거에 대한 주장
베뢰아에서는 마가복음 6장 14∼1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 된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침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도다 하더라”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님 당시에도 죽은 자가 산 사람에게 임하여 그 성격과 능력을 나타내고 그 속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퍼져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단편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시인해야 옳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헤롯을 비롯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퍼져 있는 민간 사상으로서 마귀적인 귀신론을 그대로 확인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내용 자체가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말할 수 없다.
4. 헬라어 원어의 내용에 관한 주장
베뢰아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대로 인용해보면, “성서에 나타난 귀신의 헬라어 표현은 ‘다이모니온’인데 이것의 영적인 상태로서 더러운 영(프뉴마 아카다르톤)인 것을 말해준다.
디도서 1장 15절에 더럽고 믿지 않은 자, 헬라어 특수 문법으로 재 해석해볼 때 더러운 자들, 곧 믿지 않은 자들임을 알 수 있고, 이런 더러운 것은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카다라의 부정어인 ‘아카다르토스’인 더러운 상태라는 것을 설명한다.
인간이 몸을 벗어난 것이 죽은 것인데(첫째 사망) 그 남은 영혼은 프뉴마로서 여기에 형용사 ‘더러운’ 이라는 ‘아카다르톤’을 수식하면 ‘아카다르톤 프뉴마’가 된다. 이것이 성경에 관한 원어적 설명인 ‘더러운 귀신’ 곧 ‘아카다르톤 프뉴마’와 일치된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임을 귀납할 수 있다.
모든 천사는 몸을 갖지 않은 영적 존재로서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므로 ‘아카다르톤’이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베뢰아의 궤변에 불과한 내용으로 진실과는 너무 멀다.
먼저 디도서 1장 15절의 말씀은 불신자의 사후 영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그 내용을 보면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깨끗하나 믿지 않는 자는 더럽고 믿어도 입으로 시인하고 행위로 부인하면 죽은 믿음이 되고 더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도서 1장 15절의 말씀을 불신자의 사후 영과 관계지어서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임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다음으로 더러운 영(프뉴마 아카다르톤)에 대한 것이다. 베뢰아는 이곳에서 너무나 결정적인 실수 아니면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프뉴마 아카다르톤”은 더러운 영이다.
그러나 이 더러운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님이 분명하다. 엉뚱하게 천사를 끌어 들여서 천사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더러워 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은폐 내지는 왜곡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은 프뉴마가 아닌 푸쉬케(ψυχη)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πνευμα)은 사람의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 성령, 천사의 영, 악의 영을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22장 20∼21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의 만군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누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아합을 꾀어 죽게 할꼬 하매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는데 그 중에 한 영이 나아와 가로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하더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영은 프뉴마이다.
또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에게 포위되어 절망의 상황에 있을 때에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내용이 기록된 말씀이 있다. 그 가운데 7절을 보면,“내가 한 영을 저희 속에 두어 풍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한 영도 프뉴마이다. 곧 이것은 천사의 영을 의미한다. 영이 어떻게 천사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1장 14절을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부리는 영도 프뉴마이다.
베뢰아에서는 “인간의 몸을 벗어난 것이 죽은 것인데(첫째 사망) 그 남은 영혼은 프뉴마로서 여기에 형용사 ‘더러운’이라는 단어 ‘아카다르톤’으로 수식하면 ‘아카다르톤 프뉴마’가 된다. 이것이 성경의 귀신에 대한 원어적 설명인 더러운 귀신 곧 아카다르톤 프뉴마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임을 귀납할 수 있다”고 하면서
"모든 천사는 몸을 갖지 않은 영적 존재이며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는 존재로 아카다르토스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여기서 “프뉴마 아카다르톤”이 더러운 귀신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프뉴마가 사람의 영이라고 하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른 엉뚱한 주장이다. 이렇게 성경을 오해함으로 말미암아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마귀적 주장이 서슴없이 나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프뉴마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예를 보면 하나님의 영, 성령, 천사의 영, 악의 영, 미혹의 영들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로 봐서 프뉴마(영)라는 용어는 사람의 영혼과 아무 상관이 없는 용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분명히 ‘푸시케(ψυχη)’라는 단어를 따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불신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면 분명하게 ‘푸시케 아카다르톤’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는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에서 ψυχη(푸시케)라는 단어가 씌여졌고, 계시록 6장 9절의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에 대하여도 ψυχη(푸시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뢰아의 주장대로라면 여기에 πνευμα(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옳다. 그러나 분명하게 성경은 영혼 ‘ψυχη(푸시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계시록 20장 4절에도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그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라고 할 때에 영혼에 ψυχη(푸시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프뉴마가 아니다.
그러나 귀신은 분명히 πνευμα ακαθαρτον(프뉴마 아카다르톤)이다. 그런데 베뢰아는 여기서 엉뚱하게도 천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천사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더러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천사는 더러워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천사는 그때부터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더러운 영이 돼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단은 본래 하나님을 수종들던 천사장이었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더럽게 되었다. 에스겔서 28장 15∼16절에 보면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 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수종들던 천사가 대적하므로 그 천사들을 더럽게 여겨 하늘에서 쫓아내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다는 것이다. 거룩한 영인 하나님께 수종들던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순간 더러운 영 πνευμα ακαθαρτον(프뉴마 아카다르톤)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 7∼9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우두머리 천사인 천사장은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사단, 마귀가 된 것이며 마귀를 수종들던 그의 사자들, 그에 속해 있던 천사들은 하늘에서 마귀와 함께 땅으로 내어 쫓겨 프뉴마 아카다르톤(더러운 영), 더러운 귀신이 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속여서 죄를 짓게 하여 그들의 종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사람을 종으로 삼은 마귀는 사람을 더럽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을 가지고 사람 속에 들어가 사람의 영을 죄로 죽게 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순종하게 하고 병들고, 저주받고, 고통받고, 죽이고, 멸망시키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의 특성이 그의 졸개들, 타락한 천사-프뉴마 아카다르톤(더러운 영)-인 더러운 귀신을 통하여 사람 속에 나타나게 한다. 그리고 자기가 지배하던 사람으로 가장하여 죽은 후에까지 죽은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마치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는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 영이 아니다. 불신자의 몸 속에 들어있던 타락한 더러운 영,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이 죽은 사람의 모습과 습관과 질병을 가지고 그 후손들을 계속해서 지배하기 위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님을 성경적으로 확실히 밝혀 두는 바이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성경적이 아닌 마귀적 귀신론임을 확인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귀신이 사람의 영혼이라면 영혼의 원어인 ψυχη(푸시케)가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ψυχη가 아닌 πνευμα가 쓰여진 것은 하늘에서 마귀와 함께 쫓겨난 마귀의 사자들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성경의 원어가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영 (하나님의 영, 천사의 영, 마귀의 영, 악의 영, 성령) - πνευμα
◎ 영혼 (사람의 영혼 - 생존시, 사망시 동일함) - ψυχη
◎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 - πνευμα ακαθαρτον
- 범죄한 천사, 마귀의 사자들
◎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면 - ψυχη ακαθαρτον 이 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용어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귀신의 정체는 불신자의 사후 영이 아니요 범죄하여 더러워진 천사들 마귀의 사자들임을 밝힌다.
<다음호에 계속>
이 내용은 베뢰아 측에서 인터넷에 제공한 그들의 주장을 근거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내게 주신 자들
문제가 있다고 알려진 기독 단체의 사상에 대하여 문의가 있어서 그 곳의 인터넷 사이트를 살펴보니 중요한 주장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이 예수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양태론 이라고 부르며 이단적 주장으로 판정하고 있다. 양태론 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이 모습을 달리하여 어떤 때는 하나님이 되고 어떤 때는 예수님도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바로 요한복음 17:11~12에 근거한 것이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주었다는 주장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성경 헬라어 사본 중에서 전통원문(다수 사본) 계열이 아닌, 카톨릭 계통과 같은 소수 사본을 본문으로 하여 번역하였는데 이 소수 사본의 헬라어 사본에는 이러한 의미의 번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 칼빈, 웨슬레, 스펄젼 등이 인정하는 전통 원문에 의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게 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 자신의 이름안에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그들을 지켰나이다......."
즉 예수님에게 주신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제자들이고, 그 제자들을 아버지 자신의 이름안에서 지켰다는 것이다.
영어 흠정역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주신 것은 제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While I was with them in the world, I kept them in thy name: those that thou gavest me I have kept,
이 구절의 번역에 의하여 잘못된 신앙관이 생긴다는 점을 볼 때, 성경 번역자들의 책임은 실로 막중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헬라어εν: 영어의 in의 의미) 보내실 성령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이름이 곧 성령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의 권한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의 영역과 권위 안에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3. 누구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는가?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부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받는가? 하는 것이 요점입니다.
[ 헬라어의 ‘밥티스마’는 세례보다 침례 ( 물속에 잠기는 것, 우리 몸을 장사 지내는것) 의 의미가 강합니다. 같이 쓰겠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내리신 ‘대위임명령’ 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게 되어 있고, 다른구절에는 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마태복음 28장의 명령은 주님의 공식적인 명령이라고 할수 있고, 다른 부분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주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할 때에는, 오직 예수님만 믿고 하나님이나 성령님은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를 합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으라고 하는 대상은 이방인 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은 전혀 모르겠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하고 , 침례를 공식적으로 줄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대부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고 (마28:1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침)례만 받을 뿐이러라 (행8;16)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10:48)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으니 (행19:5)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22;16)
cafe.daum.net/sarangbible 사랑성경연구원
베뢰아의 귀신론은 성서적인가? - 4
성경에서 ‘죽은자’란 죽은 신 곧 마귀와 그의 사자들 의미
베뢰아, 성경의 ‘죽은자’의 의미를 육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오류 범함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주장은 성서적 근거가 있는가?
1. 점하는 귀신에 관한 주장(행 16:16)
베뢰아에서는 점하는 귀신을 이사야서 8장 19절의 말씀을 들어서 죽은 자라고 결론을 짖고, 죽은 자를 사람이 죽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8:19).”
곧 점하는 귀신들을 죽은 자들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성경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말하기를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고 말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귀의 말대로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마귀의 말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정녕 죽으리라”가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석은 영적인 세계를 바로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마귀가 말하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주장은 육체를 중심으로 하는 주장이요,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영혼을 중심으로 한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만 알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마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 알았다. 마귀와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과만 교제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로는 마귀를 알게 되었다. 마귀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늘에서 하나님께 대적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려고 도전했다가 전쟁에 패하고 땅으로 내어쫓긴 이가 아닌가(계 12:9)? 하나님께 도전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을 반대했다는 말이요,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말이다.
지구상에는 과거에도 이념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념을 가지고 대립하는 측들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며 이를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무력을 동원하는 전쟁까지도 선택하고 있다. 인류의 마지막 전쟁은 종교 전쟁이다. 마귀의 군대와 하나님의 군대와의 대 전투가 이루어질 것을 계시록은 알려주고 있다(계19:19∼21). 마귀가 하늘에서 하늘 보좌를 넘보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생명이요, 생명의 신이신데 생명의 신이신 하나님께 도전했다는 것은 마귀가 사망의 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빛은 빛과 싸우지 않는다. 선은 선과 싸우지 않는다. 동질의 것은 곧 하나로 화합되지 결코 분리되어 다툴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귀를 가리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라고 말하고 있다(히 2:14). 그러므로 마귀는 사망의 신 곧 죽은 신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요일 3:8). 또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고 말씀한다(벧후 2:19). 이는 곧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게 되며,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요약하면 마귀는 사망의 신이므로 마귀에게 속하고 마귀의 종이 되는 자들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인 것이다(창 2:17).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영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마귀가 주장하는 산다는 것은(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육이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곧 한 사건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주장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는 사실적인 예라 할 것이다. 마귀는 육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영을 중심으로 보시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심은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함이지 육을 구원시키기 위함이 아닌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셨고(요 3:5),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3)”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내용은 영혼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선포된 것이지 육신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내용들을 근거로 볼 때 베뢰아의 죽은 자에 대한 해석상의 오류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죽은 자를 영적인 의미에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뢰아에서는 그것을 육적인 시각에서 해석했다. 곧 하나님 중심의 해석이 아니요, 세상 지식 중심의 해석, 마귀의 주장에 부합한 해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사야서 8장 19절의 죽은 자란 사람의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란 생명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생명을 잃고 사망한 자 곧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내 아버지가 죽었으니 가서 장사 지내고 와서 주를 쫓겠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 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하셨다(마 8:21∼22). 곧 마귀에게 속한 모든 이는 죽은 자이며 이는 곧 마귀가 죽은 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 8장 19절의 죽은 자란 사람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제사와 귀신에 관한 주장
베뢰아는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의 말씀을 들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주장한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0-22).”
또 “저희가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시 106:28)”를 근거로 들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먼저 ‘이방인의 제사’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알 신,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에게 등등 제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방인의 제사라고 하는 것은 위 성경이 쓰여질 1세기 당시의 사회 풍습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지 우리나라의 문화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제사가 우리나라처럼 조상 신 섬긴다고 하는 제사냐 아니면 우상에게 하는 제사냐 하는 점인데 당시의 중동 사람들에게는 우상에게 제사하는 의식만 있었지 죽은 사람에게 제사하는 의식은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의 이방인의 제사란 한국 사람을 가리켜서 한 말이 아니요, 당시 중동의 우상 숭배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또한 조상 섬기는 풍습이 아니요, 우상에게 음식 차려 놓고 하는 제사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내용은 우리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제사 의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 저희가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시 106:28).” 이는 민수기 25장 1∼3절의 말씀에 대한 인용으로서 “①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②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여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③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진노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당시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 신, 밀곰과 그모스에게 같이 제사하고 절하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재앙이 내렸다는 내용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모압 여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풍속에 의한 조상 섬기는 제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상은 곧 사망의 신, 마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생명의 신이신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사망의 신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는 것은 바알브올과 연합한 것과 같다는 의미이며, 죽은 자라는 것은 죽은 신 곧 마귀와 사단과 그의 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귀신이라고 했는데 웬 마귀이며 사단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과 사단과 마귀가 다 같은 존재임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2장 22∼26절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비방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일하는 곧 사단의 힘을 입고 일하는 것처럼 호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면 사단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사단과 동격으로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3장 10∼16절의 말씀을 보면,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안수하시고 기도하시매 곧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다. 이날은 안식일이었다. 이에 회당장은 예수님께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함이 옳지 않다며 분을 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5-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귀신들린 것을 사단에게 매인바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귀신과 사단을 동질성의 동일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5장 5절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나 죄짓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들에 대하여 “이런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죄 짓는 자를 사단에게 내주어 병들어 그 육신은 죽게 하여, 죄 짓는 것을 그치게 하여 주 예수의 날에 그 영혼이라도 구원시키려 하신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이 병들고 마르고 죽게 되는 것은 귀신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곧 사단과 귀신을 같은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0장 38절의 말씀을 보면,“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귀신들려 병든 자를 고치셨는데 이러한 자들을 총칭하여 마귀에게 눌린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서도 성경은 귀신과 사단과 마귀를 같은 존재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베뢰아에서는 천사가 사람의 몸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데 천사는 거론할 필요가 전혀 없다. 천사는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셨기 때문에(히 1:14) 밖에서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안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성전 삼고 직접 들어오시는 것이며(고전 3:16) 천사는 성도의 몸에 들어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단은 사람을 죄 짓게 하여 그 영이 죽게 만들었으며, 죽은 영의 사람이 되게 하여 마귀의 종을 삼아 버렸으므로(롬 6:16) 세상 임금이 되고 죄인들의 왕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마귀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요일3:8).
자기의 소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이가 어디에 있는가? 요한일서 3장 8절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하고 베드로후서 2장 19절에는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고 했다. 누가복음 22장 3절에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하고,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는 사도 바울의 몸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다.
사단의 사자는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의 졸개들을 의미하는데, 계시록 12장 9절에는“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불신자의 사후 영인 귀신만 사람의 몸에 들어오고 그 외에는 들어 올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특정인의 주장일 뿐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마귀적 귀신론에 근거한 사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장 20∼22절의 말씀이나 시편 106편 28절의 말씀이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되지 못한다. 육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는 세상 신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불신자의 사후 영과 귀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다음호에 계속>
이 내용은 베뢰아 측에서 인터넷에 제공한 그들의 주장을 근거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베뢰아의 귀신론은 성서적인가? - 5
‘프뉴마’, 하나님의 영, 성령, 천사의 영, 악의 영에 공통사용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면 성경에 ‘푸시케 아카다르톤’이라고 기록되었어야…
3. 복음서의 증거에 대한 주장
베뢰아에서는 마가복음 6장 14∼1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 된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침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도다 하더라”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님 당시에도 죽은 자가 산 사람에게 임하여 그 성격과 능력을 나타내고 그 속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퍼져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단편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시인해야 옳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헤롯을 비롯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퍼져 있는 민간 사상으로서 마귀적인 귀신론을 그대로 확인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내용 자체가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말할 수 없다.
4. 헬라어 원어의 내용에 관한 주장
베뢰아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대로 인용해보면, “성서에 나타난 귀신의 헬라어 표현은 ‘다이모니온’인데 이것의 영적인 상태로서 더러운 영(프뉴마 아카다르톤)인 것을 말해준다.
디도서 1장 15절에 더럽고 믿지 않은 자, 헬라어 특수 문법으로 재 해석해볼 때 더러운 자들, 곧 믿지 않은 자들임을 알 수 있고, 이런 더러운 것은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카다라의 부정어인 ‘아카다르토스’인 더러운 상태라는 것을 설명한다.
인간이 몸을 벗어난 것이 죽은 것인데(첫째 사망) 그 남은 영혼은 프뉴마로서 여기에 형용사 ‘더러운’ 이라는 ‘아카다르톤’을 수식하면 ‘아카다르톤 프뉴마’가 된다. 이것이 성경에 관한 원어적 설명인 ‘더러운 귀신’ 곧 ‘아카다르톤 프뉴마’와 일치된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임을 귀납할 수 있다.
모든 천사는 몸을 갖지 않은 영적 존재로서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므로 ‘아카다르톤’이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베뢰아의 궤변에 불과한 내용으로 진실과는 너무 멀다.
먼저 디도서 1장 15절의 말씀은 불신자의 사후 영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그 내용을 보면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깨끗하나 믿지 않는 자는 더럽고 믿어도 입으로 시인하고 행위로 부인하면 죽은 믿음이 되고 더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도서 1장 15절의 말씀을 불신자의 사후 영과 관계지어서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임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다음으로 더러운 영(프뉴마 아카다르톤)에 대한 것이다. 베뢰아는 이곳에서 너무나 결정적인 실수 아니면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 “프뉴마 아카다르톤”은 더러운 영이다.
그러나 이 더러운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님이 분명하다. 엉뚱하게 천사를 끌어 들여서 천사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더러워 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은폐 내지는 왜곡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은 프뉴마가 아닌 푸쉬케(ψυχη)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πνευμα)은 사람의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 성령, 천사의 영, 악의 영을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22장 20∼21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의 만군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누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아합을 꾀어 죽게 할꼬 하매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는데 그 중에 한 영이 나아와 가로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하더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영은 프뉴마이다.
또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에게 포위되어 절망의 상황에 있을 때에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내용이 기록된 말씀이 있다. 그 가운데 7절을 보면,“내가 한 영을 저희 속에 두어 풍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한 영도 프뉴마이다. 곧 이것은 천사의 영을 의미한다. 영이 어떻게 천사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1장 14절을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부리는 영도 프뉴마이다.
베뢰아에서는 “인간의 몸을 벗어난 것이 죽은 것인데(첫째 사망) 그 남은 영혼은 프뉴마로서 여기에 형용사 ‘더러운’이라는 단어 ‘아카다르톤’으로 수식하면 ‘아카다르톤 프뉴마’가 된다. 이것이 성경의 귀신에 대한 원어적 설명인 더러운 귀신 곧 아카다르톤 프뉴마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임을 귀납할 수 있다”고 하면서
"모든 천사는 몸을 갖지 않은 영적 존재이며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는 존재로 아카다르토스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여기서 “프뉴마 아카다르톤”이 더러운 귀신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프뉴마가 사람의 영이라고 하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른 엉뚱한 주장이다. 이렇게 성경을 오해함으로 말미암아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는 마귀적 주장이 서슴없이 나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프뉴마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예를 보면 하나님의 영, 성령, 천사의 영, 악의 영, 미혹의 영들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로 봐서 프뉴마(영)라는 용어는 사람의 영혼과 아무 상관이 없는 용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분명히 ‘푸시케(ψυχη)’라는 단어를 따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불신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면 분명하게 ‘푸시케 아카다르톤’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는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에서 ψυχη(푸시케)라는 단어가 씌여졌고, 계시록 6장 9절의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에 대하여도 ψυχη(푸시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뢰아의 주장대로라면 여기에 πνευμα(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옳다. 그러나 분명하게 성경은 영혼 ‘ψυχη(푸시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계시록 20장 4절에도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그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라고 할 때에 영혼에 ψυχη(푸시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프뉴마가 아니다.
그러나 귀신은 분명히 πνευμα ακαθαρτον(프뉴마 아카다르톤)이다. 그런데 베뢰아는 여기서 엉뚱하게도 천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천사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더러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천사는 더러워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천사는 그때부터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더러운 영이 돼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단은 본래 하나님을 수종들던 천사장이었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더럽게 되었다. 에스겔서 28장 15∼16절에 보면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 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수종들던 천사가 대적하므로 그 천사들을 더럽게 여겨 하늘에서 쫓아내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다는 것이다. 거룩한 영인 하나님께 수종들던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순간 더러운 영 πνευμα ακαθαρτον(프뉴마 아카다르톤)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 7∼9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우두머리 천사인 천사장은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사단, 마귀가 된 것이며 마귀를 수종들던 그의 사자들, 그에 속해 있던 천사들은 하늘에서 마귀와 함께 땅으로 내어 쫓겨 프뉴마 아카다르톤(더러운 영), 더러운 귀신이 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속여서 죄를 짓게 하여 그들의 종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사람을 종으로 삼은 마귀는 사람을 더럽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을 가지고 사람 속에 들어가 사람의 영을 죄로 죽게 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순종하게 하고 병들고, 저주받고, 고통받고, 죽이고, 멸망시키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의 특성이 그의 졸개들, 타락한 천사-프뉴마 아카다르톤(더러운 영)-인 더러운 귀신을 통하여 사람 속에 나타나게 한다. 그리고 자기가 지배하던 사람으로 가장하여 죽은 후에까지 죽은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마치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는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 영이 아니다. 불신자의 몸 속에 들어있던 타락한 더러운 영,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이 죽은 사람의 모습과 습관과 질병을 가지고 그 후손들을 계속해서 지배하기 위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님을 성경적으로 확실히 밝혀 두는 바이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성경적이 아닌 마귀적 귀신론임을 확인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귀신이 사람의 영혼이라면 영혼의 원어인 ψυχη(푸시케)가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ψυχη가 아닌 πνευμα가 쓰여진 것은 하늘에서 마귀와 함께 쫓겨난 마귀의 사자들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성경의 원어가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영 (하나님의 영, 천사의 영, 마귀의 영, 악의 영, 성령) - πνευμα
◎ 영혼 (사람의 영혼 - 생존시, 사망시 동일함) - ψυχη
◎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 - πνευμα ακαθαρτον
- 범죄한 천사, 마귀의 사자들
◎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면 - ψυχη ακαθαρτον 이 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용어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귀신의 정체는 불신자의 사후 영이 아니요 범죄하여 더러워진 천사들 마귀의 사자들임을 밝힌다.
<다음호에 계속>
이 내용은 베뢰아 측에서 인터넷에 제공한 그들의 주장을 근거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출처 : 베레아 비판 자료 정리
글쓴이 : 영걸(靈杰)!!! 원글보기
메모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류광수 다락방전도운동 문제점 (0) | 2007.07.25 |
---|---|
[스크랩] 이중아담론 (0) | 2007.07.25 |
[스크랩] 무료성경신학원의 정체(4) (0) | 2007.07.25 |
[스크랩] 무료성경신학원의 정체(3) (0) | 2007.07.25 |
[스크랩] 5번 자료집 마지막입니다 (0) | 2007.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