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분별은 반드시 필요하다[펌]

YOROKOBI 2007. 7. 25. 15:15
제목 / 심판 행위와 판단 능력 (2005년 8월 28일)- 작성자 /박영신목사
마태 7: 1-5, (15-20)/찬송 53, 349, 369/교독 22 (시편 96편)
<<줄임 글>>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구절과 뒤이어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하는 구절, 이 둘 사이에는 쉽게 이어놓지 못할 거리가 있는 듯 합니다. 어찌 보면 앞의 것은 ‘세상 돌아가는 대로 거기에 맞춰, 팔방미인처럼 살아라’ 하는 일종의 처세 격언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뒤의 것은 ‘음흉한 속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꿰뚫어볼 수 있는 비판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단호한 훈계로 다가옵니다. 이 두 가르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새김질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비판’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같은 최고-최종의 재판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한 심판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서고자 하는 작태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사물을 날카롭게 가리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밝히 분별해내고, 거기에 분명한 입장과 결단을 내리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절대자인 듯이 심판 행위를 일삼는 독선 덩어리가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서운 오만입니다. 그 오만을 오만이라고 밝혀놓기 위해서라도 예수 사람은 명쾌한 식별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삶입니다. 산상수훈이 처세술의 수준에 머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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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머리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이 구절은, 얼핏 보면 예로부터 전해내려 오는 속담이나 격언처럼 친숙한 느낌마저 줍니다. 부들부들 하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살이에 좋다는 일종의 처세술과 이어져 있는 글귀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다음에야 그의 처지를 어찌 알 수 있는가? 큰 소리 치지 말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하는 따위의 말로도 바꿀 수 있는 평범한 내용처럼 들립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두고 낮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으로 이 구절을 끌고 가게 되면, 산상수훈의 본문 내용이 도대체 기독교의 빛깔을 가지고 있는가 하고 묻게까지 됩니다.


물론 그렇게 풀이하여 간단하게 결말을 내릴 수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란다면 무조건 침묵을 지켜야 하고 두루뭉술하게 팔방미인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물에 물 탄 사람처럼 아무 맛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밑으로 내려가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하면서, 분별하여 조심하고 경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며 적당히 세상 돌아가는 대로 거기에 맞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포장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는 사람조차도 꿰뚫어보아 그 불투명하고 음흉한 속내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날카로운 판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어렵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 데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구절이 같은 장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또다시 캐묻게 됩니다.




II. 심판으로서의 ‘비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할 때, ‘비판’이라는 말은 ‘재판’장의 자리에 올라서서 모든 것을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최고 최종의 ‘심판관’이 행사하는 그러한 심판 행위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심판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고 심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시민 법정에서 배심원이나 심판관이 되어 판결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의 책무’를 그만두라는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최종의 심판을 받게 될 터인데 마치 우리 스스로 최종의 심판자처럼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그런 식으로 심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재고할 여지란 전혀 없다는 듯이 확고부동의 태도로 판단을 내리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확정 판결’ 행위를 얼마나 밥 먹듯 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판단이 뭐 그렇게 완전하다고 최종의 심판자인 듯이 재고와 수정과 조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저지르는 과오가 바로 이러한 데 있습니다. 요지부동 버티고 앉아 자기의 원래 생각을 고쳐 잡지 않으려는 자기 오만에 우리의 과오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지조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주관과 줏대가 있는 사람이라는 듯이 살아갑니다.


지난 날 대학가에서도 그러했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시국을 보는 견해와 입장 차이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은 그렇게 옳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생각은 모두 그렇게 틀렸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버릇대로 정치 입지를 넓히고 굳히기 위해서 독선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를 정당화하고 상대방을 규탄합니다. 국민들은 덩달아서 박수치고 합창케 합니다. 그렇게 해서 권력을 잡고 권력을 잃습니다. 선거에 이기고 지는 현상입니다. 이 권력 쟁탈의 과정에 깊이 빠진 나머지, 어떤 이들은 선거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분통을 삭이지 못해 안절부절 견디지 못하게도 되고 허탈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침내 ‘이런 나라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한탄하면서, ‘이민이라도 가야겠다!’고 탄성을 발하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자기의 판단이 옳다는 듯이 확신하고 또 그렇게 행동합니다. 조그마한 흔들림도 없습니다. 최종의 심판을 내렸고, 그 심판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요지부동입니다. 상대방의 생각과 입장에는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운동은 운동이고 운동가는 운동가입니다. 정치는 정치이고 정치인은 정치인입니다. 운동의 노선과 정치의 강령이 절대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 노선이나 정파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시대의 특정 입장에 갇혀 있는 역사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당파와 정파의 울타리 너머, 시대의 테두리 너머 거기에서 모든 것을 최종으로 심판하시는 존재입니다.




III. 판단으로서의 ‘비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생각, 나의 입장, 나의 행동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깊이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입장과 행동은 살피지 않고 하나님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켜세우고는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의 길이라고 한다면, 이는 오만입니다. 오만 중 오만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 스스로 최종의 심판자인양 상대방의 생각, 입장, 행동을 서로 정죄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무례하게도 하나님을 밑에 깔고, 자기의 생각, 자기의 입장, 자기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칩니다. 상대방의 생각과 입장과 행동은 하나님의 길과 어긋난다고 정죄합니다.


겸손을 잃은 인간의 오만입니다. 인간이 지난 한계 때문에 최종의 심판을 내릴 수 없음에도 최종의 심판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무서운 오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최종의 재판장처럼 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비춰봐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 스스로 살피고 비춰보는 것, 우리가 ‘심판자의 역’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뜯어보는 것, 그것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 해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그가 참된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그가 전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불투명한 것을 꿰뚫어보아 모든 것을 뜯어보고 갈라볼 수 있는 능력 곧, 분별력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터하고 있어야 할 바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예리하게 관통해 볼 수 있는 ‘비판’ 능력을 키우고 그것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달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그가 ‘거짓 선지자’는 아닌지 가려 볼 수 있는 비판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외치고 있는 바로 그가 ‘거짓 선지자’는 아닌지 뜯어볼 수 있는 판단 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달콤한 말에 귀가 솔깃하여 이랬다저랬다 하는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는 점이고, 능청스러운 위선자의 꾐에 휘둘려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는 경박한 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점입니다.


죄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 밝게 볼 수 없게 된 마당에 사물을 명쾌하게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더구나 최종의 절대 심판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계 투성이의 인간이기에 그 생각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최종의 것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판단이란 이렇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남들의 판단에 우리가 압도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그 엄청난 심판의 행위를 흉내 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러한 사람을 분별하여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비판의 비판’ 능력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광복절에 북쪽과 남쪽 사람들이 함께 만났던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도 시민 단체의 한 사람으로 몇 차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틀에 박힌 제 생각이 많이 허물어지기고 했습니다. 저녁 만찬 때 바로 옆에 자리한 북쪽 남성의 말씨가 그렇게도 부드러웠던 것에 놀라기도 하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하는데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한, 옆에 앉았던 북쪽 여성이 제게 대해서 매우 못 마땅하다는 듯이 말해 준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남과 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때였습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여러 가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성이 불쑥 ‘선생님은 조국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저를 규정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의 지식 부족이 ‘조국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결되고 만 셈입니다.


이쪽저쪽 모두 틀에 박힌 많은 고정관념을 허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최종의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앉아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도 가져봤습니다. 스스로 살피면서 서로 뜯어볼 수 있는 비판 능력도 가꾸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굳혀온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도 가져보았습니다. 남과 북을 뛰어 넘는 그 초월의 권위 앞에 우리 모두 겸손하게 꿇어 엎드릴 수 있다면 말입니다.




IV. 마무리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인생을 부드럽게 살라고 하는 금언 속담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처세술 수준의 어구가 아닙니다. 물에 물탄 듯이 엄버부리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최종의 심판을 내리는 최고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서고자 하는 것, 우리가 어느 쪽에 서 있건 그것은 주제넘고 주제넘은 짓입니다. 무모한 노릇입니다. 어리석은 짓거리입니다. ‘궁극의 심판자’, ‘최종의 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그렇게 절대의 권위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절대의 최종 심판을 내리는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서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라는 듯이 떠벌리는 인간의 생각과 발언, 그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절대라고 하며 내세우는 그 뻔뻔스러운 ‘심판자’의 행각을 꿰뚫어 그 속을 알아차릴 수 있는 비판 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자기의 생각과 입장이 마치 절대의 것인 양 내세우는 그 오만한 ‘심판자’의 태도도 거부하고 포기할 수 있는 자기 비판 능력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예수 사람의 품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알고 모르게 저지르는
도도한 심판 행위,
형제자매를 심판하는
터무니없는 행동,
그 습속을 벗어버릴 수 있게
은총 내려주시고,
우리가 저지르는 행동의 옳고 그름을
뜯어보고 가려낼 수 있는
판단 능력,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그 능력의 빛 받아
모든 것에 투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은총 내려 주시기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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