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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군속의 기구한 삶

YOROKOBI 2007. 8. 11. 12:52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우쓰미 아이코|동아시아

1942년 6월15일 부산 서면, 지금의 하얄리아 부대 자리에 있던 일본군 임시군속교육대에 조선인 청년 3000명이 모였다. 이들은 몇 주 훈련 후 곧바로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로 보내졌다. 연합군 포로 감시가 이들에게 주어진 업무였다. 일본 학자인 저자는 생존자의 증언과 묻혀있던 역사자료를 발굴, 조선인 전범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 대만의 청년들을 백인 포로를 감시하는 데 충당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 서구인에 대한 아시아국가의 열등의식을 걷어내 황국신민화 교육을 효과적으로 이루려 했다. 하지만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인 군속은 기구하고 아이러니한 인생을 강요당했다. 포로감시 군속 조선인은 일본이 패전하자 순식간에 전범 낙인이 찍혔다. 포로들은 조선인 군속을 색출해내 전범 법정에 세웠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고향에 돌아가겠거니 생각했던 조선인들은 하나 둘 기소되어 일본군과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다.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피해자인 조선인”이라는 항변은 무시되었다. “전쟁범죄에 관한 한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이 전승 국가의 입장이었다.

조선인들은 졸지에 식민지 피해자에서 전범이 된 상황이 납득 안 갔지만 손 써볼 도리가 없었다. BC급 전범으로 판결 난 조선인은 모두 148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23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유기형을 받은 사람은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서 수년간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이해 못할’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BC급 전범은 1951년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요구는 묵살되었다. 해방이 된지 한참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 있었던 셈이다. 얼마 후 미국의 일본 재군비 계획에 발맞춰 A급 전범들이 속속 풀려났다. 하지만 BC급은 예외였다. 일본인이 일본인 전범을 가두고 재판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조선인 전범이 정당한 대접을 받을 리 만무했다. 조선인 전범은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닌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몇 년 후 일본사회에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그 상실감과 혼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책은 전쟁과 냉전체제를 거치며 약소국 시민이 어떻게 짓눌리고 삶이 왜곡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전범에 대해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조선인 전범에 대해 무시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모습이 바로 전쟁 책임에 대해 보이고 있는 일본의 현재 그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거나 살아 있는 조선인 전범은 아직도 해방을 맞지 못했다. 이호경 옮김.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