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져가고 있는 한편으로, 1945년 2~3월에 일어난 이오지마 전투에 대해서는 젊은 세대도 약간 지식이 넓어졌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덕분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 두 편이 지난해 양국에서 잇달아 개봉했다. 일본과 미국 양쪽의 시각으로 각각 이오지마 전투를 그린 작품이다. 이오지마 전투에 대한 책도 일본에서 속속 출판됐다. ‘17세의 이오지마’도 그 중 하나다. 지난해 말 출간된 이 책은 증쇄를 거듭하고 있다.
약간 딴 길로 새는 얘기지만, 일·미 양측의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가 드물게 “양쪽이 잘 싸웠다”는 평가를 내릴 만한 전투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 하와이 진주만 공격은 “비겁한 기습”이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전세가 역전된 뒤 일본은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연전연패 했다. 더욱이 육군 전사자 165만 명 중 70%는 사실상 굶주림 때문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비참한 전쟁 기록을 전후 세대 대다수는 듣기조차 싫어한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는 좀 다르다. 수비대의 총지휘관인 구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忠道)는 미국 유학 경험도 있고 “미국은 일본이 가장 싸워선 안 되는 나라”라고 가족에게 말했을 만큼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싸우는 이상 전력을 다하는 것이 책무이므로, 구리바야시는 이오지마 지하에 터널 진지를 그물눈처럼 둘러치고 부하들에게 자살적 공격을 금지하고 철저한 항전을 엄명했다.
그 결과 수비대 2만1000명 거의 전부가 전사했다. 생존자는 약 1000명뿐 이었다. 미국측 사상자도 2만5000명 이상이었다. 미 해병대는 2차 대전 당시 전체 전사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000명 가까운 병사를 이 작은 섬에서 잃었다. 미 해병대 사령관은 후일 “태평양에서 상대했던 적 지휘관 중 구리바야시가 가장 용감했다”고 회고했다.
일본 측 시각으로 본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구리바야시를 합리적이면서도 정이 두터운 명장으로 묘사했다. 일·미 양쪽 진영에서 모두 지휘 계통과 관계없이 포로 살해가 벌어지는 장면을 공평하게 삽입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 관객은 “전쟁은 비참하다, 두 번 다시 일으켜선 안 된다”고 느끼는 동시에 “적어도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 측 시각에서 이 전투를 그린 영화를 나는 보지 못했다. 원작 ‘아버지의 깃발(원제 Flags of Our Fathers·황금가지)’를 읽어 보면 미 해병대의 분투를 강조하고 있다. 상륙 작전 때 전사자가 속출했고, “일보 전진할 때마다 지옥이 공격해 오는 것처럼 만들어진” 일본군의 지하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과 싸웠고, “충분한 식량이 있고,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일본군과 36일간 사투를 벌였다고 썼다. 미군 병사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죽은 그들이야말로 영웅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17세의 이오지마’에는 영웅도, 충분한 식량도 등장하지 않는다. 15세에 일본 해군에 자원 입대한 아키쿠사 츠루지(秋草鶴次) 소년은 2년 뒤 통신병으로 이오지마에 배치된다. 미군 전투기의 공습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굴삭 공사가 계속되는 지하 진지 안에는 화산의 열기와 유황가스, 대소변과 사체의 악취가 진동했다. 빗물을 받은 식수와 주먹밥 하나로 때우는 식사도 미국 측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섬 형태가 변할 정도의 맹렬한 폭격 때문에 치료시설마다 부상자가 넘쳐났다. 이오지마 앞바다에 정박한 미군 함대는 800척이 넘었다. 소년 아키쿠사는 절망했다. “이길 가능성은 없다. 신도 기적도 믿을 수 없다. 전멸은 피할 수 없다. ” 미군 상륙으로 격전이 시작 되었지만, 무기가 없는 통신병은 응원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포격과 총격으로 토막난 일본군 사체가 공중에 흩뿌려진다. “어머니!” 라는 단말마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바닷가에서 양군이 살육전을 벌이고 미군이 승리한 이후, 지하 진지에서 게릴라 식으로 출격하는 일본병과 미군의 육탄전이 계속됐다. 약 한 달 뒤 구리바야시 사령관 등 일본군 400명은 최후 총공격을 벌이다 전멸했다. 그러나 지하 진지에는 소년 아키쿠사를 비롯해 장병 수천 명이 더 남아 있었다. 병사들은 굶주림과 갈증에 괴로워했다. 불도저로 생매장 당한 병사도 있었고, 미군이 터널에 해수와 함께 가솔린을 흘려 보내고 불을 붙이는 바람에 타 죽은 병사도 있었다. “어머니!”라고 외치면서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또는 남은 힘을 쥐어짜 “바보자식!”, “이런 전쟁, 누가 시작했어?”라고 신음하며 죽어 가는 병사들도 많았다. 아키쿠사는 자신의 상처에 들끓는 구더기와 이를 먹으며 연명했다. 미군 포로가 됐을 땐 쇠약해서 의식불명인 채였다. 미군 상륙 석 달 뒤의 일이었다.
미국이 이오지마에서 큰 피해를 입은 뒤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피하고 온당한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에 서명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아키쿠사 씨는 “전우들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 뒤 60년간 이 나라는 전쟁이 없었으니까 ‘너의 죽음은 무의미하진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고뇌에 찬 표현은 전사자를 영웅시하는 미국 측과 완전히 다르다. 전멸을 전제로 한 싸움을 강요 당한 병사들의 비애가 짙다. 구원이 있다면,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독자에게 안겨주고 평화에 기여하는 것일 것이다.
인터넷에 한 독자가 이런 독후감을 썼다. “(일본의 수상 등) 정치가는 야스쿠니 신사보다 이오지마에 가면 어떻겠는가.” 일리 있다. 패전 수년 뒤에 섬을 방문한 유골 수집단은 동굴 안에서 가족 사진과 편지를 안은 일본 병사의 백골화한 유해를 잇달아 발견했다. 아직도 1만 명 이상의 유골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8·15는 패전국 멍에 달래려던 기획물이었다 (0) | 2007.08.11 |
---|---|
조선인 전범 (0) | 2007.08.11 |
日, 학교가 왕따 당한다 (0) | 2007.08.10 |
고려 삼별초가 日류큐왕국 기초 세웠다 (0) | 2007.08.10 |
日패전 굴욕 희석시키려 종전기념일 8·15로 조작 (0) | 2007.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