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는 생지옥이었습니다. 희생자만 20여 만 명이 넘었습니다. 해외서평 ‘17세의 이오지마’에서 보시듯,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옥쇄를 부르짖던 일본을 항복으로 몰고 간 것은 역시 이 원자탄이었습니다. 일본은 해마다 이 날이 되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피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모임을 갖습니다. 세계를 향해 일본이 원폭에 희생당한 피해자였음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올해도 아베 총리를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 참석했습니다.
오래 전 이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가슴이 답답한 적이 있습니다. 피폭 생존자들이 원폭투하 당시의 정황을 증언하는 녹음을 들을 때였습니다. 한 조선인 피폭자는 원자폭탄이 휩쓸고 간 뒤,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다고 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처럼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할까 봐 겁이 났던 겁니다. 조선인은 원폭의 피해를 입고도, 또 일본인에게 보복을 당할까 걱정해야 했던 이중의 피해자였습니다.
이번 주 나온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일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객원교수의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동아시아)은 이런 피해자였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대한 기록입니다. 전후 B, C급 전범으로 판정 받은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한 군속들이었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모집된 3000명 가운데 4.3%가 전범으로 판정 받은 겁니다. 참고로, 일본 헌병 가운데 전범이 된 사람은 1534명으로 전체 헌병 3만6073명의 4.2%였답니다. 악랄함의 상징인 헌병보다 조선인 포로감시인 출신 전범 비율이 더 높았다는 얘기입니다.
일본군 이등병보다 아래이고 군마(郡馬)나 군견(軍犬)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당한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이렇게 많이 전범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전쟁 후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과 포로들의 증언, 수기에서 조선인 감시원은 가해자로 지목 당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보다 감시원들이 더 가혹했다고 증언한 포로들도 많았습니다. 우쓰미 교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일본군 최하층에서 직접 포로를 통솔·감시해야 했던 조선인 군속들이 패전 후 포로학대의 책임을 뒤집어썼다고요.
이 책은 25년 전 일본에서 나왔습니다만 조선인 포로감시인들 얘기는 아직도 생소합니다. 작년 우리 정부의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이들을 ‘강제동원에 의한 전쟁 피해자’로 인정했습니다. 조선인 전범들은 우리 현대사가 매우 복잡한 곡절을 겪어왔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래 전 이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가슴이 답답한 적이 있습니다. 피폭 생존자들이 원폭투하 당시의 정황을 증언하는 녹음을 들을 때였습니다. 한 조선인 피폭자는 원자폭탄이 휩쓸고 간 뒤,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다고 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처럼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할까 봐 겁이 났던 겁니다. 조선인은 원폭의 피해를 입고도, 또 일본인에게 보복을 당할까 걱정해야 했던 이중의 피해자였습니다.
이번 주 나온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일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객원교수의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동아시아)은 이런 피해자였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대한 기록입니다. 전후 B, C급 전범으로 판정 받은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한 군속들이었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모집된 3000명 가운데 4.3%가 전범으로 판정 받은 겁니다. 참고로, 일본 헌병 가운데 전범이 된 사람은 1534명으로 전체 헌병 3만6073명의 4.2%였답니다. 악랄함의 상징인 헌병보다 조선인 포로감시인 출신 전범 비율이 더 높았다는 얘기입니다.
일본군 이등병보다 아래이고 군마(郡馬)나 군견(軍犬)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당한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이렇게 많이 전범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전쟁 후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과 포로들의 증언, 수기에서 조선인 감시원은 가해자로 지목 당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보다 감시원들이 더 가혹했다고 증언한 포로들도 많았습니다. 우쓰미 교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일본군 최하층에서 직접 포로를 통솔·감시해야 했던 조선인 군속들이 패전 후 포로학대의 책임을 뒤집어썼다고요.
이 책은 25년 전 일본에서 나왔습니다만 조선인 포로감시인들 얘기는 아직도 생소합니다. 작년 우리 정부의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이들을 ‘강제동원에 의한 전쟁 피해자’로 인정했습니다. 조선인 전범들은 우리 현대사가 매우 복잡한 곡절을 겪어왔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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