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7장 24~30절
![]() |
||
▲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 (뒤레판화집에서) | ||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가 있었다. 이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 수로보니게 출신이었다. 어린 딸이 귀신에 붙잡혀 인간 아닌 인간의 삶을 살고 있으니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예수의 소문을 들은 이 여자는 사방팔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예수님 계신 곳을 알아내고 달려가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미 이방 사람에게 이적과 권능을 행한 적이 있는 예수님인지라 그 여자는 어느 정도의 호의를 기대하고 달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막 7:27).
여기서 자녀들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 당시의 누구라도 이 말이 뭘 뜻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는 관행에 익숙한 유대인은 물론이고, 주변의 이방인들 역시 이 말이 뭘 뜻하는지는 다 알고 있는 일종의 관용어였다고 할 수 있다. 학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 “걔, 잘난 척하지만 실은 가방끈이 짧아” 같은 말처럼 딱 들으면 척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이런 관용어를 내뱉음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축복이 유대인에게 먼저 허락된 것이요, 유대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이 말이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는 아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라. 예수님이 언제 유대인의 우선성에 붙잡혀 있었던가? 그분은 수많은 이방인에게 이적과 권능을 행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계시했다. 때문에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던진 말이었지 진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짐짓 거절하신 이유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하려고 하는 진짜 이야기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셔서 이방 여인의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일까? 인격적이고 사랑이신 예수님이 이방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비속어를 내뱉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마가복음의 흐름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무려 다섯 번씩이나 동서로 넘나들며 뱃길 여행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행한 이적과 권능이 이방인에게도 재현되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에게 행한 것처럼 첫 번째 이방인 방문에서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었고(막 5:1~20), 두 번째 여행에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었다(막 6:53~56). 그리고 8장 후반부에 가면 마가의 예수 이야기가 고난과 부활 이야기로 급속하게 전환되는 걸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야기가 하나님나라 사역에서 고난 이야기로 넘어가는 전환의 길목에서 마가는 고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바로 이방인 문제였다.
이미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이방인에게도 찾아가 하나님나라 사역을 해왔다. 사역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사역이 아니라 말로써 좀더 명쾌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찾아왔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 문제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작심하시고 일부러 “자녀들의 빵을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
예수님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말이 아니라 그 이후의 행동에 있다. 말로만 본다면 예수님 말씀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은 옳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하고 싶은 말씀은 그 말이 아니다. 말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예수님의 행동 속에 들어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한 말과 다르게 여인의 청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예수님이 여인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것은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는다”는 여인의 말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옳은 말씀을 하시고 나서 스스로 옳은 말씀에 매이지 않고 그 말씀에 반하는 행동을 하신 것은, 옳은 말이 더 이상 옳은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신 것은 행동으로 말을 뒤집어엎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깔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반전 효과라고나 할까. 그림이나 음악적 표현 기법에 대비가 있듯이 영화나 문학은 허를 찌르는 반전이 없으면 안 된다. 반전이 없으면 우선 재미가 없다. 호소력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인상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때문에 예수님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때에는 대비와 반전 기법을 사용하실 때가 많다.
결국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는 관용어를 말씀하신 것은 이 관용어를 통해서 이 관용어가 뜻하는 바를 깨뜨리려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고정관념을 말씀하심으로써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로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또 고통 받는 두 여자를 치유해 줌으로써 성적인 경계도 무너뜨렸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탁월한 변증가요,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을 보면 과연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암튼 마가가 전하는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도 흘러간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요, 논증임에 틀림없다.
선교제국주의에서 경계 넘는 선교, 어떻게?
교회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방인에게 갔듯이 교회도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타민족, 타문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누가 뭐라 해도 선교공동체여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선교공동체여야 한다는 이 당위가 역사의 현실에서 구체화될 때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많은 문제가 파생된다. 그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선교제국주의 문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교회가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복음의 전령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당위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선교적 책임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당위가 때로는, 우리는 주고 저들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방적 선교로, 타문화와 타종교는 어둠과 악마의 문화요, 종교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타도 선교로, 기독교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선교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건 외국 선교에서만 아니라 국내 전도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수님의 선교를 보라. 그분의 선교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타문화를 정죄하거나 악으로 규정하는 타도의 행위를 보인 적이 없다. 세력을 확장하겠다는 의도 같은 건 처음부터 관심사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선교는 사랑의 선교였다. 섬김의 선교였다. 조용한 선교였다. 예수님은 한 번도 꽹과리치고 북을 치며 선교한 적이 없다. 정말 철저할 정도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
물론 교회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교회를 향한 핍박과 비난의 소리가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과 예수님도 핍박을 받았는데 교회라고 해서 왜 핍박이 없겠는가. 교회가 아무리 지혜롭게 잘 해도 핍박과 비난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다. 비난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핍박받고 비난받을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말씀대로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요즘 안티기독교인들이 극렬하게 교회를 비방하고 있다. 왜 그럴까? 무엇 때문에 비싼 밥 먹고 교회를 두들겨 패는 것일까? 저들이 보기에 교회의 선교적 태도가 지나치게 일방적 선교요, 타도 선교요, 제국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잃었다고 보기 때문 아니겠는가. 물론 저들의 비난이 다 근거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오해한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저들이 하는 말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무시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최우선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지만 이웃과 세상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형제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음과 같이 세상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입만 열려 있어서는 안 된다. 귀도 열려 있어야 한다. 아니 입보다는 귀가 커야 한다. 사실 입은 막혀도 상관없다. 입이 막힌 것 때문에 교회가 치명상을 입지는 않는다. 교회는 행동으로도 얼마든지 입보다 더 크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귀가 막히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귀가 막힐 때부터 사람도, 정부도, 종교도, 가정도, 교회도 내부에서 썩기 시작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지혜도 들음에서 난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개혁도 들음에서 난다. 선교도 역시 교회가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 하여 감히 말한다. 이제는 입을 막고 귀를 열자. 귀가 열릴 때까지는 입을 막자. 그래서 귀가 열리는 그날이 오면, 교회는 새롭게 회복될 것이고 선교의 문 또한 활짝 열려 세상이 교회와 복음을 반기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진정한 선교란
나는 예수님의 행적을 읽으면서 엉뚱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예수님이 이방에게 복음을 전한 사역이 참 중요한 사역인데, 예수님이 그 사역을 통해서 정말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하는 질문, 예수님의 행적에 나타난 선교적 삶에서 우리는 과연 뭘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 질문을 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서 정말 놓치지 않고 읽어내야 하는 건, 예수님이 이방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보지 않은 것이라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경계를 넘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경계가 없었던 것이라고. 처음부터 경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그렇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 보았다. 모두가 죄인이지만 모두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 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경계도, 어떤 딱지도 없었다.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 부자와 빈자, 배운 자와 무식한 자, 민족과 민족, 미개한 문화와 발전한 문화, 피부색, 종교에 대해 경계와 딱지가 없었다. 오직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을 뿐.
그러면 예수님이 종교 다원주의자였단 말인가? 너무 그렇게 단정하지는 말자. 예수님은 상대방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분별하지 않는 상대주의자도 아니었고, 모든 것을 품는 평화주의자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단지 나와 너를 분별하되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선(線)을 긋지 않고 선(善)을 행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나라의 길, 구원의 길을 증거하고 걸어가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그어 놓은 어떤 경계나 편견에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만 태양을 비추는 게 아니고 불교도나 이슬람교도에게도 차별 없이 동일한 태양을 비추듯이 예수님은 유대인의 우선성을 인정하면서도 유대인의 경계에 갇히지 않았다.
아로 보건데 선교는 마음의 경계가 없는데서 시작된다. 경계를 넘는다는 생각조차 없이 그저 복음을 따라 사는 것, 경계를 넘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선교요 성숙한 선교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사람을 한국사람 대하듯 하고, 불교도나 이슬람교도를 대할 때도 그리스도인을 대하듯 하는 것이 바로 선교적 삶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결국 선교의 본질은 인간이 세운 경계와 담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선교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복음이고, 선교적 목표가 성취된 사회가 바로 하나님나라고.
선교는 어디서부터?
그러므로 선교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겠는가? 바로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경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오랜 습성과 고정관념, 경계의 안을 강화하고 경계의 밖을 공격하려는 악한 집단의지가 강고하게 진을 치고 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하나님나라의 세계가 아닌 이방 세계가 똬리를 틀고 있다.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이 강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요, 선교의 진정한 완성이다.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방 세계야말로 가장 우선되어야 할 선교 영역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선교에 대한 이해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을 바꾸는 것이 선교의 출발점이요, 선교를 가능케 하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선교의 눈을 가질 때 진정한 선교가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정병선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방적인 공격적 선교, 이제 그만 (0) | 2007.08.27 |
---|---|
기존 기독교의 붕괴와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1)--정강길 (0) | 2007.08.27 |
아프간과 맺은 우정, 끊을 수는 없습니다 (0) | 2007.08.27 |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최고의 선교' (0) | 2007.08.27 |
아프카니스탄에서 사역 중인 한 선교사의 일기 (0) | 2007.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