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바른이해: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그들의 신앙행위의 표현과 더불어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를 유지시켜 주는 신앙행위이다.이 십일조는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고대 근동지방의 많은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로마,그리이스,카르타고 그리고 시리아 등이다. 십일조는 종교적 영역에서 뿐만아니라 세속적 영역에서도 행해졌는데 즉 통치자가 십일조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본래 신에게 드렸던 십일조를 신격화된 통치자에게 드리게 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삼상8:15-17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 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될것이다"라고 함으로서 왕의 십일조가 왕제도의 폐해의 하나임을 지적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생각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바로 여기에 십일조 본래의 출발과 의미가 있다.
(창 14:18-20)에서“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언급된 장면이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아 그에게 축복하니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장면이다.
특히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는 제사장 직이 그 후에 나타날 완전한 제사장 직에 대해서 히브리서 7:1-9에서 해석한다.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구약 제사 제도를 주관했던 레위인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땅의 소출이 아니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다는 언급이 없을뿐 아니라.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에 맞춘다.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또는 풍습에 따라 드린 행위이다.
(창 28:20-22) 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도중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시고 훗날 자신을 갑부가 되게 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재물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것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후 400년이 지나서야 십일조 제도가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레위기 27:30-33) 여기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았는데 바치는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20%까지 바치도록 하였다.
(민수기 18:21-32)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주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주께 돌려드린다는 표로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드려야 했다.-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신명기 12:4-19) 백성들은 모두 중앙장소로 가서 거기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에 한정하고,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신명기 14:22-29, 26:12-15) 십일조를 받은 중앙 성소의 책임자들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다. 3년 차 십일조는 사회보장의 형식으로 공동체에서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이 해당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곡식과 가축이다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십일조가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행위의 실천을 의미했다. 여기의 대체적인 십일조는 레위인만이 차지하는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전이 아닌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각 성읍에 십일조를 직접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나누어 줄수 있다는것이다.
백성을 위한 십일조의 신명기의 규정과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활보장을 말하는 역대기 사가의 규정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여하튼 십일조의 본래의 의도는 가족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풍성한 수확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히 먹고 마시는 축제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수확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회 하층민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보 장제도 이기도했다. 그러나 이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레위인 제사장들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십일조로 변해 갔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예전 그들의 성소 자리인 벧엘에서 제사를 행하는데 심지어 그들의 성전 제사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그러면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는다.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려무나"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의식 같은것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삼 년마다 행하던 십일조를 삼 일에 한 번씩 하면서 복을 더 얻으라 하면서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비웃으며 비꼬았던 것이다.
십일조 드리는 사람이 윤리적 도덕적 자세가 어떤것인가는 상관없이 십일조만 내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성경의 십일조 정신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십일조 쓰는 용도에 있어서도 이웃을 위한 쓰여짐이 분명한데도 그 교회목회자 마음데로나 혹은 교회내에서만 배불리며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크게 보아 두가지 십일조를 드렸다.
제1 십일조는 레위인을 의한 십일조
제2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드리는 십일조였는데
자기 소득의 20% 까지 냈는데 그래서 상당한 불평도 있었다고 한다.
교회사적 십일조는 초대교회이후 자발적으로 드려지다가 주후585년에 교회법으로 확정되어 그것은 안바칠 경우 파문했다고 한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서 그 이후 기독교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에 비판을 받았고,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십일조를 걷는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루터는 십일조를 교회에 내기 보다는 세속적인 통치자들에게 낼 것을 주장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개혁교회 즉 개신교회들은 십일조를 계속 실시했으나 점차 십일조 배척하는 기운이 농후해져서 프랑스 혁명이후에는(1789) 여러 나라들이 공식적으로 철폐했고 그 나머지 나라들도1848년 이후에는 모두 철폐했다. 신앙심이 강한 홀랜드 국가에서는 몇 년전까지만해도 십일조 및 각종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각츌로 이뤄나가는 교회들이 대단히 많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리고 신약에서의 십일조의 법은 구약에서보다는 구속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레위족도 없을뿐만 아니라 제사장 이라는 직분도 없기때문이다.
말3:7-12의 십일조 문제는 흔히들 강조하는 십일조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BC 5세기의 이스라엘 사회는 정치,종교, 경제적으로 아주 암울했었다.바사의 식민지로서 이사야.학개.스가랴등의 선지자들이 외쳐대던 영광스런 메시야 왕국이 가시적이면서 즉각적으로 임할것으로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BC 537년 제1차 바벨론포로 귀환후 1세기가 지났는데도 이뤄지지않자 의심이 깊어만갔다. 좀더 구체적인 배경설명에 있어서 느헤미야와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적 상황을
들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와 말라기는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A). 느헤미야 10:37-39; 12:44-47;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한다. 백성들이 예물로 드리는 밭의 소산물을 받고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갖다 놓으라고 한다.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지원토록 하기 위해서이다.
(느 10:37-39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특히 거두어들인 십분의 일 중의 십분의 일을 성전 창고에 있는 각 방에 두어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에도 성전을 잊어버리지 않고 체계적인 십일조와 헌물 관리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느 12 : 44,47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해 율법이 정한 십일조, 거제물, 처음 익은 곡식, 등을 여러 마을에서 수집하여 성전 창고에 쌓으라고 했다.“제사장들과 레위인은 하나님 섬기는 일만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했다 ”. 그러나 포로 후 이런 조처가 있었지만 십일조의 혜택을 받아야 할 레위인은 정작 생계 문제 때문에 성전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느 13:10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 그래서 성전제사는 중단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이 방치되었다(느 13:11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 ").
이렇게 된 것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던 제사장이 성전 창고에 모아둔 십일조를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 13:7-9 "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십일조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횡령의 문제였다. 당시 엘리아십 제사장과 도비야라는 사람이 서로 공모하여 레위인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성전 옆에 마련한 창고에 있던 십일조를 비롯한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들의 개인 창고로 옮겨감으로써 그 식량이 바닥났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적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느헤미야와 동시대적인 인물로서 말라기서를 비교해서 보자면-
(말 3:8, 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제사장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그리하였다고 했지만, 그것이 성전에 있는 창고와 관련이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보다는 성전과 관련이 있는 제사장, 레위인, 지도자들인것이다. 그래서 도적질 이라는 표현은 전 백성들의 문제가 아니라 성전에서 일하는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성전 창고 강탈 행위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의 종들과 동일시 하셨기때문이다.
말라기 2장은 제사장들의 도덕적 부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이 담겨 있고 3장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더러움을 깨끗케 해서 드려질것과 헌물이 가난한 자들에게서 착취하였던 자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것으로 요청되고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십일조와 헌물”도적질 하는것을 중단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한다. 이 구절 역시 1, 2장에서 제사장들에게 행한 심판 내용의 연속이다.
(말라기 3:7-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
본문은 구약성경에 언급된 십일조와 관련된 마지막 언급으로서 십일조 지지자들이 인용하며 복의 근거로까지 제시 한다. 십일조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선 말라기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책망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그의 직접적인 대상이 “제사장들”이라는 게 분명히 나타난다(말2:1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말2: 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더럽힌 사람들이다.
* 그들은 더러운 떡을 드리고
(말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 병든 짐승들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림으로써
(말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
*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다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
그런데도 그들은 뻔뻔하게 그것이 번폐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이유를 댔다
(말1:13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저주하시고 그들의 복을 저주하리라는 말씀을 내리신다
(말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말라기 3:10 본문에 언급된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레위인을 비롯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창고에 저장해두어야 하는 십일조이다(느 10:37-39). 그리고 계속해서 과거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착에 이르는 동안에 하나님 내리신(밤낮으로 만나와 메추라기) 풍족히 먹고 남은것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과연 그 성전일하는자들과 가난한자들에게 줄 십일조를 성전 옆 창고에 들이고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몰래 빼돌리지말고 정직히 행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지 아니 주시는지를 시험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가 본문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때문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만국인이 온전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가능하다.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때문이다.
구약의 십일조 강조점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고 또 우리 재산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할수있다는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몇구절밖에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18:12 그리고 히브리서 7:1-10이 유일한 본문들이다.
(복음서:마 23:23; 눅 11:42; 18:12)“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 그리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23:23). 이 말씀은 십일조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정확하게 말씀하심은 찾을수 없다. 마태복음 23장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십일조를 실행했다거나 가르침이 없을까?
그렇다면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14:22-23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장로들의 미쉬나를 정확히 지키기 위해 작은 식물이라도 엄격하게 지키려는 생각에서 채소와 박하와 향료의 십일조까지 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엄격한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고 단지 그들이 세부적인 열정 등엔 지나치리많큼 과도했으나 율법의 강령인 사랑, 자비, 정의, 신의 등의 성경이 원래의 지시하는바에서는 벗어나 있었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너희가 하고 싶다면 그런 사사로운 규칙들을 지키되 하지만 정말 중요 문제시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다.
“가장 작은 식물에까지 십일조를 하기를 원한다면 좋은일이지만, 동시에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들 즉 "이웃사랑”절대 빼놓을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 준수에 있어 자유롭고(행 15장),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0)" 가난한 자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의 대상자라는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신약은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던 십일조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
(마 23:23)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그러면서 이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맥락에서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바리새파인들이 십일조에 대해 충실해야 함은 사실이다. 십일조는 의식법적인 문제이고,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십일조에 필요로했다.
예수님의 구약적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근거는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신것과 또 예수님의 사역은 “때가 찼다”는 선언인것이다.새 시대의 실제적인 전환점은 그분의 죽으심,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써 이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는 자신을 율법의 규정에 복종하셨으며(갈 4:4), 그분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구약 시대의 문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부탁을 하신 것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십일조와 같은 의식법과 관련된 언급들은 신약에서는 적용되않는다고 봐야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십일조가 신약의 어디에서도 “폐지되었다”것을 못봤다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안식일과 제사 제도에 대해서는 “폐지되었다”는 문구도 보지 못했다는것과 일반이다. 똑같은 원리로 신약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적이 없고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만 있을뿐이기때문이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로서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고는 했으나, 그러나 자신은 그것이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요구하지 않고(고전 9:15, 18),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8에서 감독이 복음을 전하면서 수고비를 받아야 할 것을 언급했지만 구약의 기업이 없던 레위인들이 하던 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만 언급하였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도우려고 사용되는 돈을 모으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알리고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호소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 그대로 따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롬 15:25-27).
고린도 교회에게는 이런 식으로 드리는 헌금의 정신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고 썼다. 이것을 바울은 “참 연보” 즉 넉넉히 주는 선물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헌금을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함으로써 현대 교회가 일괄적으로 “십분의 일”을 부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헌금 방법을 실시하였다(고후 8:12)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필요물질에 있어서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정한다는 것이다. 고후 9:7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신약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표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이 없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사랑이라는 두글자로 함축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 내용들도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이다. 이웃을 미워하는자는 이미 살인한자이고 남.녀로 인한 음욕품은자는 이미 그들과 간음했다 라고 까지 확대 해석 하셨다.
쉬운예로 1개월에 5000만원 수입있는자가 1/10인 십일조 500만원을 교회에 내고 그 나머지 4500만원 자기 마음껏 인생 즐기는 것에 사용해도 괞찬을지모르나(왜냐하면 구약에 근거한 정확한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은 그것을 초월한 그 이상이다.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용어를 덧붙이신다.
한국 경제정의에서 상위5%가 아주 부유층이고 그리고 그 이하가 중산층 그이하의 빈곤층은 이루 말할수 없이 많다. 한국의 교회 상황도 상위 10% 정도만 자립성 위라고 표현할수 있지만 그 외에는 오늘도 배고품의 배를 움켜잡고 아주 검소하게 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대도 자기는 십일조 정상적으로 내었다고 생각하고 그 나머지는 통장에 예금을 잔뜩 잔뜩 쌓으면서 즐긴다는것은&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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