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헌금에 대한 4가지 오해(4 Myths About Giving) / 미소

YOROKOBI 2007. 9. 4. 20:34
헌금에 대한 4가지 오해(4 Myths About Giving)
번호 : 129   글쓴이 : 미소
조회 : 163   스크랩 : 9   날짜 : 2006.03.25 15:04

스캇 모튼

(스캇 모튼은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헌금 개발 디렉터다. 스캇은 이 글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선교사들에게 후원 관리를 훈련시키다 보니 자주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그 질문들은 죄책감에서 나온 것들인 경우가 종종 있고, 그 죄책감은 성경의 가르침보다 헌금에 대해 기존에 가졌던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시간이 갈수록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헌금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헌금에 대해 가르치는 것과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오해 1. 10퍼센트를 드려야 한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헌금을 덜 드려도 된다는 애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헌금에 대한 신약성경의 기준이 힘들지만 올바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신 것은 불과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23:23로,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드리지만 “의와 인과 신”은 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신 내용이었다.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12에서 십일조를 언급하시며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인용하신 것이다. 이것 역시 십일조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자기 의를 위한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훈계하신 것이었다.

  

베드로, 바울, 야고보는 십일조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십일조에 대해 침묵한다. 그렇다면 다른 헌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우리는 누가복음 21:1~4에서 이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두 렙돈”을 넣은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금액의 많고 적음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만큼 힘을 다해 드리는 헌금을 칭찬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은 우리가 여유분에서만 헌금을 드린다면 우리는 핵심을 놓친 것이다.

  

만일 10퍼센트가 헌금의 목표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 A씨는 화요일 오전에 나와 성경을 공부하는 새신자다. 그는 매달 806불을 번다. 그가 십일조를 드리려면 80불을 헌금하고 나머지 720불로 살아야 한다. 그는 아주 검소한 아파트에 사는데 월세가 500불이다. 십일조를 드리든 드리지 않든, 그 소득으로 두 자녀를 키우기는 어렵다. A씨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희생적으로 헌금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매월 50불을 드리는 것조차 희생적 헌금이 될 것이다.

  

다른 친구는 1년에 250,000불을 번다. 그도 A씨처럼 믿음이 성장하고 있는 성도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재정적으로도 헌신하고 싶어한다. 만일 그가 수입의 10퍼센트를 드리면 세금을 빼고 225,000불이 생활비로 남을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요지를 이해하겠는가? 250,000불을 버는 친구는 십일조만 내면 자유로운가? 아니다. 그가 그 이상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다.

  

바울은 10퍼센트를 헌금하라고 가르칠 기회가 많이 있었고 바리새인 출신인 그가 그렇게 가르쳤을 법도 한데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말하면서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는다(고전16:1~4). 대신 성도들에게 매주의 첫날에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라고 명령한다(2절). 그는 오히려 희생적 헌금을 한 마게도냐인들을 본받으라고 권한다(고후8:3). 바울은 십일조를 기준으로 내세우는 대신 예수님처럼 더 광범위한 기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를 드려야 하는가? 신약성경은 고정된 퍼센트를 제시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이 영향을 받을 정도로 현금하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여유분에서가 아니라 ‘생활비’에서 드리라.


 

오해 2. 첫 10퍼센트는 지역 교회에 드려야 한다.

 

이 가르침은 말라기 3:10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라는 말씀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십일조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이것이 십일조 전부를 지역 교회에 드리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단, 10퍼센트를 넘어서는 부분부터는 선교기관이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쓸 수 있다.

 

 구약 시대의 ‘성전 창고’는 십일조로 드려진 곡물을 보관하는 특별한 방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역 교회가 유대인의 성전에 해당되는가? 성경학자들은 유대인의 성전에서 하던 일들을 오늘날의 교회 정책에 그대로 도입하는 것을 경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 시대의 논리를 따른다면 유대인들의 다른 행습들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저명한 구약하자인 월터 C. 카이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을 사용하는 일에 주의해야 한다… 그 창고는 오늘날의 지역 교회와 동일하지 않다.”

 

  목회자들이 수입의 첫 10퍼센트를 지역 교회에 드리라고 요청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성경의 명령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물론 나는 헌금의 최대 부분이 지역 교회에 드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근거가 될 만한 성경 구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이 지역 교회에 헌금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냐는 단순한 논리 때문이다.

 

  우리는 그 외에 또 어디에 헌금할 수 있는가? 성경적인 제안들은 가난한 자(갈2:10), 고아와 과부(약 1:27), 전임 사역자(신 26:12), 선교 사역(빌 4:10~20), 우리를 가르치는 자(갈 6:6) 등이다. 선택은 당신에게 있다.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아도 될까? 바울은 이에 대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고후 9:7)라고 요약하여 말한다.


 

오해 3.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그리스도인 리더는 사람들에게 요청할 필요가 없다.

 

본의 아니게도 이러한 신념의 후원자가 된 사람은 조지 뮬러다. 그는 경건한 목사였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않았어도 그의 고아원에는 많은 후원이 들어왔다. 우유가 떨어진 바로 그날, 우유마차가 고아원 앞에서 고장 났다는 ‘마지막 순간의 공급’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것은 기적인가? 그렇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과 선교 사역의 필요들이 그처럼 기적적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저녁 식사 시간에 후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는 일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해 보라. ‘작정 주일’이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해보라. 헌금바구니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나 진실하고 정직한 헌금 요청이 비성경적인가? 만일 헌금 요청이 잘못이라면, 다음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12제자와 70문도에게 사역 여행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찾아간 마을에서 “합당한 자”의 잡에 유숙하라고 하셨다(마 10:11).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중동 문화에서는 어떤 집의 문 앞에 서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로마를 지나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NKJV-도움을 받아 가기를 바람이라)”라고 말했다(롬 15:24).


  *모세는 성막을 짓기 위해 금, 은, 기타 헌물을 드릴 것을 사람들에게 요청했다(출35:5~9).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에게 한 끼 식사를 부탁했다(왕상 17:10~11).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것과 유대인도 아닌 사렙다 과부에게 가서 그녀의 마지막 식사를 달라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엘리야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했겠는가? 하나님(까마귀)께만 구하는 것과 사람(과부)에게 구하는 것은 동일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뮬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 뮬러 시대에는 큰 도시에서 정오 대기도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 기도회에서 사람들은 기도 제목에 대한 응답을 내놓았다. 또한 뮬러는 사람들에게 고아원 사역과 재정 현황에 대해 보고했다(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뮬러는 사람들에게 후원을 직접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고아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렸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디에 헌금할지 결정하기 위해 먼저 구체적인 필요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적이고 진실하고 정직한 후원 요청을 하는 목사와 선교사는 ‘하나님께만 구하는’ 사람 못지않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

 

 

오해4. 한 번 작정한 헌금은 절대 중단할 수 없다.

 

신명기 23:21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더디면 네게 죄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선교 사역에 대한 후원을 조금이라도 중단하면 그 사역이 무너질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신명기 23:21은 신명기 16:17의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는 말씀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드리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받았느냐에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가 아기를 가지려고 직장을 그만두면 헌금을 줄일 수도 있다. 어떤 부부는 믿음으로 이전과 같은 수준의 헌금을 하지만, 헌금을 줄여도 잘못은 아니다.

 

  단순히 선호도가 바뀌어서 헌금을 줄이거나 재분배하는 것은 어떤가? 도시 빈민 사역에 10년 동안 해온 헌금을 지속하기보다 카자흐스탄의 선교를 지원하고 싶을 수 있다. 빈민 사역에 대한 헌금을 줄이고 카자흐스탄에 대한 헌금 작정을 늘릴 수 있는가?

 

 헌금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기억해야 할 것은 민수기 18:21에서 나타나는 수직적 드림과 받음의 원리다. “내(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선교사는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고, 헌금하는 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헌금의 특권과 의무가 있지만, 당신이 헌금의 궁극적 원천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헌금하는 자라면 긴장을 풀라. 당신이 헌금을 받는 자라면 긴장을 풀라. 당신은 헌금을 받을 특권을 가졌지만, 기부자가 아닌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헌금 선호도를 조정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고리도후서 9:7의 ‘즐거움의 요소’ 때문이다.

 

  만일 구제 사역에 대한 당신의 열정이 즐거움 없는 ‘의무’로 시들어 버렸다면, 먼저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점검해 보라. 만일 모든 헌금이 고역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은 심각하게 세상에 휩쓸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영적 건강 상태를 점검해 본 후에, 당신이 즐겁게 후원할 수 있는 사역이 어떤 것인지 결정하라.

 

  어디에 작정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생각 없이 바꾸지 말라. 그러나 한 번 작정했다고 해서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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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3월호가 끝나갈 즈음에 뒷쪽에 있는 [추천, 해외아티클]코너에

실려있는 스캇 모튼의 글을 보고 공감이 가서 옮겨봅니다.

출처 : 헌금에 대한 4가지 오해(4 Myths About Giving) / 미소
글쓴이 : 마리안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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