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방언에 대한 소고/송인규 교수

YOROKOBI 2007. 9. 4. 20:36
  

 

 

방언은 70∼80년대에 한국 교회의 큰 이슈였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순복음교회의 확장이나 전세계적인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과도 연관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의 타고난 종교적 성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가끔씩 방언에 대한 열띤 공방이 벌어지고 있고, 찬반을 논하는 상반된 견해들이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방언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한 때 방언을 경험하기 위해 열렬히 기도한 적이 있었지만 Yes!로 응답을 받지는 못했고, 그 이후에는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다른 문제들에 착념하느라 그 때만큼 집중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내가 구태여 방언을 반대한다든지 아니면 무시한다든지 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이제 성경적 입장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소개하려는 것뿐입니다.


= 방언의 성격 =

우선 도대체 "방언"(方言, tongue, )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신약에서 방언은 인간의 혀(막 7:33, 롬 14:11; 약 3:5; 계 16:10 등)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동아리 집단 (계 5:9; 10:11; 11:9; 13:7; 14:6; 17:5)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말이 우리의 언어 활동이나 현상을 지칭합니다 (막 16:17; 행 2:4-11; 10:46; 19:6; 고전 12:10; 13:1; 14:2, 4, 5 등).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 세 번째 사용법입니다.

방언을 언어 활동이나 현상이라 규정한다고 해도 질문은 계속됩니다 -- 사실은 이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방언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방언의 언어는 배우지 않은 외국어[견해 F]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신비로운 발설"(mysterious utterances) (cf. 고전 14:2) [견해 M]일까요? 이러한 문제는 주로 오순절에 있었던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사건과 고린도전서 14장 사이에서 논하는 방언의 은사를 중심하여 제기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도행전 2장이든 고린도전서 14장이든 방언의 성격이 모두 배우지 않은 외국어 [F]라고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드물게 두 가지 모두를 신비로운 발설[M]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사도행전 2장의 경우는 배우지 않은 외국어[F]로, 고린도전서 14장의 논의는 신비로운 발설[M]로 취급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경우 방언의 기적이 일어난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pattern의 설명이 가능합니다. Pattern 1은 120명의 그리스도인들 (보통 다락방에서 모였다고 설명되는 이들)이 모국어인 히브리어 (아니면 그 당시의 통용어인 아람어)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말했는데, 듣는 이들은 각기 자기들의 방언[사투리/지방어]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기적은 화자(話者)들의 발성 기관을 벗어난 그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Pattern 2는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예 처음부터 듣는 이들의 사투리에 맞게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기적이 사도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pattern 2가 pattern 1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설명으로 인정합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성경에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pattern 2에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120명이 모두 각기 다른 방언/사투리로 말을 시작했다면, 모여든 15 종류의 언어 집단에 맞게끔 인원 배당이 되어야 할 터인데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 8명당 한 지역의 방언을 말했다는 식으로),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듭니다.

따라서 pattern 3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입장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의 성격이 고전 14장의 것과 똑같다는 전제를 가지고 형성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올바른 해석이라면,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밀을 말한" 것에 불과하고, 성령께서는 본인들조차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 내용을 듣는 이 각자에 맞는 사투리로 전환시켰다는 뜻이 됩니다. pattern 3의 지지자는 행 2:4의 "다른 방언"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바로 이 비밀스러운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논의의 진행을 위해 나는 사도행전 2장은 [F], 고린도전서 14장은 [M]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사실 위에서 소개했듯 어느 입장이든 의문점이 남기는 하지만, 논의의 진행을 위해 그냥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에는 두 종류가 있는 셈이고 다음과 같이 대별됩니다.

성경 사항 사도행전 2장 고린도전서 14장
대상 v.6 대인(對人) 방언 v.2 대신(對神) 방언
형태 vv.6-8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함 v.2 비밀(mysteries)을 말함
목적 v.11 전도 v. 2 영교(靈交)
(v.14 기도, 찬미, 축복)
유익 v.11 듣는 이의 복음 이해 v.4 자신의 덕 세움
(신앙 강화)
이해 v.8 알아들음 v.2 자기도 모름
지속성 일시적 계속적(?)
특징 표적(sign) 은사(gifts)


= 방언의 지속성 여부 =

그러면 이러한 방언 현상은 그 존속의 시기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처럼 방언은 사도 시대의 초기적 활동과 더불어 종식된 것일까요? 아니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는 우선 "표적"으로서의 방언과 "은사"로서의 방언을 나누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거의 유례가 없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성경에서도 주로 사도행전 2장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혹시 행 10:46이나 행 19:7의 방언을 이 부류에 넣는다 해도, 그 때 사용된 외국어의 종류는 사도행전 2장의 15가지에 비해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는 이런 식의 표적을 주시지 않는다는 법도 없습니다. 사실 믿을만한 기록에 의하면, 한 선교사는 특정 외국인에 대해 자기가 배운 적이 없는 그 외국인의 말로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cf. David M. Howar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3), p. 117].

자, 그럼 이제 … 은사로서의 방언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입장을 종지설(終止說, cessationism: CE)이라고 하고, 두 번째 입장을 지속설(持續說, continuationism: CO)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아 CE의 입장은 세대주의자들, 장로교인들, 일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고, CO는 오순절 교단의 그리스도인들, 은사 운동의 참여자들, 일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고 있습니다.

CE의 주창자들은 방언의 종식을 말하는 근거로서, "방언도 그치고" (고전 13:8)라는 표현을 거론합니다. 그런데 방언이 종료하는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다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고전 13:10) 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CE 지지자들은 온전한 것의 도래 시기를 "정경의 완성"으로 해석합니다. 만일 정경의 완성을 늦게 잡아 400년 경으로 잡는다면, 바로 그 때까지만 방언이 지속될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CO의 주창자들은 "온전한 것의 도래"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방언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필자는 CE와 CO 사이의 중간 입장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합니다. CE 입장의 주창자들이 방언을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CO의 주창자들이 방언의 계시적 성격을 극대화시킴으로써 마치 그것이 성경의 계시와 흡사한 (아니면 성경의 계시에 맞먹는) 권위를 가진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보통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말하는 법이지만 (cf. 고전 14:2), 통역의 은사를 받은 이가 함께 자리를 같이하면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고전 14:5, 13, 28).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방언의 내용이 마치 기록된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아니면 은근히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기록된 계시로서의 성경이 그 유일무이성과 충족성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교제를 누릴 목적으로 -- 자신이 하는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지도 않고 또 통역의 가능성 여부에 신경을 쓰지도 않고 -- 하나님 앞에서 사적 방언의 은사를 활용한다면, CE의 주창자로서도 크게 괘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각자가 사적으로 -- 아니면 그들끼리 -- 방언을 활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생생한 관계 유지에 도움을 받고, 또 이후의 봉사와 증거 생활에 신선한 자극제를 공급 받는 식으로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방언의 은사를 비(非)계시적 용도에만 국한시킴으로써, CE와 CO의 틈새에 제3의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방언 은사는 오늘날 얼마든지 지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의미의 방언 지속에 대해서는 CE의 주창자라도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올바른 방언 사용: 균형과 절제 =

만일 방언을 하나님과의 사적 교제 수단으로 인정한다면, 오늘날에도 방언의 은사가 존속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결론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방언 은사를 건전하게 활용하고자 할 경우, 우선 방언과 연관된 제(諸) 문제점을 균형있게 파악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그런 문제점일까요? 네 가지 서로 연관된 사항을 거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방언의 은사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의 견지를 유지하기보다 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방언에만 몰두하여 그것이 은사나 신앙 생활의 전부인양 치우칠 수가 있습니다. 또는 주위에 있는 그런 사람에게 데어서(?) 방언이라면 무조건 무시하고 부정적 입장을 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어느 쪽이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방언과 관련하여 불건전한 인위성의 개입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에 관한 모든 사항에 있어 우리 편에서의 노력과 열정적 추구가 요구되는 것 --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은 사실이지만, 이 아름다운 "적극성의 원리"가 방언 받는 일과 관련하여 오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방언을 주시려고 해도 우리 편에서 믿음을 발휘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주장 하에, "할렐루야"나 "Thank You, Jesus!"로 방언을 연습하고 또 고무하는 일은 크게 경계하여야 할 바입니다. 사실 방언이 어떤 경우 사단의 조작이든지, 아니면 자기 최면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 또 사실이 그럴 수 있는 -- 것도 이러한 인위적 작태 때문입니다.

셋째, 모든 은사가 그렇지만 방언 역시 그리스도인의 영적 복합 의식(spiritual complex)의 형성과 자극에 적잖은 기여 요인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신령하고, 우월하고, 뭔가 이룬 것으로 처세하고, 방언의 경험이 없는 이들은 반대로 영적 패배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신자들 간에 열등의식 (고전 12:15-16)과 우월의식 (고전 12:21)이 편만했던 이유는 바로 은사 -- 이 가운데 분명 방언도 들어 있었을 것인데 -- 의 가치 여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사 자체는 영적 성숙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 은사를 그렇게 많이 받았지만(고전 1:5-7), 교만(고전 4:6-7)과 다툼(고전 3:3-4) 때문에 영적 갓난 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고전 3:1-2).

넷째, 방언 은사의 유무가 개인의 복합 의식(complex)만 초래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공동체 내의 코이노니아까지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는 이들은 자기끼리만 배타적으로 모여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기고, 방언의 경험이 없는 이들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하여 정죄하는가 하면, 방언이 영적 성숙의 척도와 관문인 양 은근히 남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반면, 방언 활용자의 잘못된 영성에 의해 상처나 위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질투심 때문에 때로는 소외감 때문에 그런 이들을 비판하고 따돌리고 열광주의자나 신비주의자로 몰아붙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싸움은 그 명분이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근본적 문제는 동아리 간의 경쟁 의식으로 말미암은 상처나 섭섭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방언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든지, 금지 위주의 조치를 내세우는 것만이 능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은사로서의 방언이 갖는 지위를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무조건 백안시해서도 안 되지만, 성경에 의하면 방언의 은사는 은사의 목록 중에서 가장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12:28). 그것은 은사의 본질적 목적이 다른 이들을 세우는 것인데 (엡 4:12), 방언은 기껏해야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밖에는 유익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4:4). 따라서 방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연관되기보다 오히려 믿음이 약하고, 미성숙하며, 신앙적 연륜이 적은 이에게 주어지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

둘째, 방언 은사의 활용도 사적 신앙의 영역에만 국한시켜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에서 방언을 사용하는 일은 극히 주의해야 하며, 단 한 사람이라도 방언의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그 가운데 있을 경우, 방언 사용은 스스로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cf. 고전 14:11). 물론 필요가 생길 때 방언을 하는 이들끼리의 친교를 위해 따로 모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른 이들에 대해 위화감이나 소외 의식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현명하고 비위협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방언!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나누어 놓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계시적 성격을 내세우지 않는 한, 방언의 은사를 하나님과의 사적 교제 수단으로 조심스레 인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지 자신의 유익과 공동체의 유익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마찰을 줄여가면서 지혜롭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글: 송인규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