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판 쉰들러’,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들

YOROKOBI 2007. 9. 15. 16:26

‘일본판 쉰들러’,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들

후세 다쓰지, 야나기 무네요시, 아사히 겐즈의 경우

 

일본 정치인들이 식민지 시절의 역사를 왜곡하는 망언을 일삼아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동안 미국 의회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으나 무산되곤 했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문’이 이번만큼은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결의문 채택 무산을 위해 일본이 더욱 노골적인 로비에 나서면서 파장 또한 더욱 커지고 있다.

일본의 도를 넘는 행보에 가장 든든한 후견인을 자처하던 부시도 민망했는지 일본의 위안부 망언 등을 공개적으로 꾸짖고 나섰다. 일본이 최근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결의문 채택 무산에 안간힘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숙원이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가능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위안부 관련 결의문이 미 의회에서 채택되면 또 다시 상임이사국 진출의 기회가 멀어질 수 있다는 초조함이 작용하고 있다.

부시정권 이후 노골화되고 있는 미일동맹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동북아에서 중국의 부상과 남북통일을 대비하는 측면이 크다. 이러한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있어 일본은 무시할 수 없는 미국의 파트너지만 그동안 일본의 2차 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원죄로 말미암아 국제 정치계 특히 유엔에서 항상 찬밥신세였다는 것이 미국과 일본의 생각이다. 유엔에 분담금을 가장 많이 내는 국가 중에 하나인 일본으로서는 그래서 그에 걸 맞는 정치적 위상을 오래 전부터 요구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 뿐 아니라 최근 부상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문제 등 일본이 국제사회의 지도적인 국가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반성해야 할 과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여전히 일본 유력 정치인들은 반성은커녕 안으로는 전쟁을 영구 포기할 것을 명시한 헌법9조마저 바꾸겠다고 하니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남북한과 중국은 물론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는 구호를 넘어 더욱 강력하게 구축해 나가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언론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본에는 작지만 순수하고 지속적으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제기하고 한국과의 연대를 기다리는 개인과 단체(주로 동아리 수준이 많지만)들이 많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양심적 일본인들의 선배격이라 할만한 인물 몇을 이야기하자. 이름 하여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친구들’이라고 해야 할까.

△ 후세 다쓰지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일본판 쉰들러’라고 불리는 후세 다쓰지(1880~1953).

인권변호사인 그는 이미 2004년에 우리 정부로부터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그는 일본의 민중운동은 물론 조선과 대만의 독립운동과 농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2ㆍ8 독립선언 당시 ‘조선청년독립단’소속의 조선인 유학생 등 일제 하 조선과 일본에서 체포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무료로 변호를 맞았으며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사죄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 같은 활동으로 인해 1932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두 차례나 옥고를 겪었다.

다음으로는 조선총독부의 광화문 철거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그의 평전은 야나기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서양 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 제국을 해체하고 일본 안팎의 여러 민족이 문화적으로 대등하게 공생하는 아시아를 이상으로 삼은 실천가이자 사상가’. 그가 주창한 민예운동이란 민중적인 일상의 미를 이상향으로 삼고, 뛰어난 미의 창출을 방해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 것으로 머릿속에서만 존재하거나 유한마담들의 사치품으로 전락한 심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렇듯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운동가했던 야나기의 진면목은 1922년 일본의 잡지 <개조(1922년 9월호)에 발표한 ‘없애버리려고 하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에서 잘 드러난다.

△ 야나기 무네요시

“아직도 이 제목이 독자들에게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부디 다음과 같이 상상해 주기 바란다. 가령 지금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하여 마침내 조선에 병합되고 궁성이 폐허가 되고 대신 그 자리에 대규모 서양식 일본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저 푸른 해자를 넘어 멀리 바라볼 수 있었던 흰 벽의 강호성이 파괴되는 광경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 (중략) 정치는 예술에 대해서까지 무분별해서는 안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권력의 행사는 삼가라. 자진해서 예술을 옹호해주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우방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도시를 위하여, 더욱이 그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하고” (후략)

야나기는 최근까지 그의 작품전이 한국에서 열릴 정도로 한국 문화계에서는 존경받는 존재로 1984년 우리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끝으로 전남 신안군 하의도 농민운동사에 빛나는 영웅 아사히 겐즈(1898~1988).


농업사회였던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에게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반대로 일제 역시 식량수탈이 식민지 수탈의 주요 부문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소작쟁의는 치열하고 목숨을 거는 투쟁일 수 밖에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으로 유명한 하의도의 농민들은 조선후기 왕실과 인척관계라는 권력을 이용해 농지를 강탈한 풍산 홍씨 집안에 이어 일제시대에는 도쿠다 재벌에 맞서 농지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여 나간다. 당시 오사카화학노조 위원장이자 조선인 노동자 조직인 조선노동총동맹 고문이었던 아사히는 고향 하의도에서 농토를 잃고 오사카로 흘려들어온 하의도 출신 노동자들의 사연과 함께 일본농민조합 위원장인 스기야마 모토지로의 부탁으로 1927년 일경의 감시와 검문을 피해 몰래 하의도를 들어가 결국 농민들을 조직해 일본농민조합 하의지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때 도쿠다 재벌의 사주를 받은 악질 친일파 박춘금 일파와의 충돌로 인해 아사히는 경찰에 체포돼 1928년 11월 일본으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하의도 농민조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죽을 때까지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는 하의도 주민들을 그를 의인으로 여기고 있으며 오는 5월에는 하의3도농지탈환운동기념관 개관에 맞춰 아사히의 장녀 사다케 즈이코를 초청해 공로패도 전달할 계획이며 민족문제연구소는 아사히를 독립유공자로 국가보훈처에 서훈도 신청할 예정이다.

 

△ 무안하의농민조합소작쟁의 사건에 대한 광주지법의 기록. 피고인들 가운데 아사히 겐즈(朝日見瑞)의 이름이 뚜렷하다(붉은 선 표시부분)


후세 다쓰지, 야나기 무네요시, 아사히 겐즈 처럼 오늘 날에도 일본의 곳곳에서 한국인 못지않게 일본의 과거 전쟁책임은 물론 미래의 군국주의 부활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일본인들의 눈에 김완섭, 오선화 같은 정체불명의 자칭 친일파나 한승조, 뉴라이트 교과서포럼 같은 학자들은 어떻게 비춰질까. 더욱이 한국인의 70%가 구독하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가 이구동성으로 광복이후 처음으로 이뤄지고 있는 친일 과거사에 대한 청산작업에 돈타령을 하며 틈만 나면 반대를 일삼고 있는 모습을 그들은 또한 어떻게 생각할까.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은 하나같이 일본인 경찰보다 조선인 경찰이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본인들 앞에서 자신의 충성심을 검증받으려는 알량한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련만 요즘 같은 시절에는 무엇 때문에 여기저기서 식민지 미화론을 그토록 열렬히 주장하는지 그 속내가 여간 궁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