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주관적 은혜주의 넘어서기

YOROKOBI 2007. 9. 16. 08:27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설교를 들은 뒤에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는 인사도 하고, 어떤 사람의 간증이 끝난 뒤에서 “은혜로운 간증이었어요” 하고 말하고, 성실하게 교회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참, 저 사람은 은혜로워!” 하기도 한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자랑할 때도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은혜는 영적인 기쁨과 평화를 경험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우리 모두 추구해야 할 영적 경지다. 신약성서의 서신은 공동체에게 은혜와 평화로 인사를 나누었다. 은혜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은혜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은혜와 감동을 구분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은혜를 주관적인 감동과 혼동할 때가 많다. 자기 기분에 맞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자기 기분에 맞지 않거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은혜가 없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설교 행위에서 두드러진다.

청중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설교에 대해서 “은혜롭다”는 표현을 한다. 설교의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자기 기분에 들면 은혜롭게,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인 감정이 바로 은혜의 기준으로 작동된다는 말이다. 완전히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설교나 거꾸로 청중들을 공격하는 설교를 듣고도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은혜를 인간의 주관적 심리작용으로 착각한다는 데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의 청중들은 오직 자기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따라서만 은혜 여부를 결정한다.
 
이건 단순히 청중들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이런 청중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주의(populism)에 빠져든다.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는 쪽으로만 설교의 초점을 맞출 뿐이다. 결과적으로 설교의 내용은 끝없이 단조로워지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론만 끝없이 자극적으로 바뀐다.

나는 성서텍스트가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세계를 풍요롭게 전달하려고 애를 쓰는 설교자들을 별로 못 보았다. 텍스트는 해석되지 않고 끝없이 반복적으로 도구화되고 있을 뿐이며, 청중들의 종교적 기분을 자극하는 쪽으로만 진도가 나가고 있다. 이는 ‘익스트림’으로 흘러가는 한국 개그계와 비슷하다. 오늘의 한국 개그계는 극단적으로 자학적이며, 따라서 허무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는 교회와 개그계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은혜는 결코 사람의 심리적 감동이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은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사건인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는 그 사태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다. 루터의 신학명제인 ‘sola gratia’(오직 은혜)에 따르면 구원은 인간의 업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인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다
.
예를 들어 우리가 햇빛의 존재론적 능력을 안다면 그는 이미 은혜 안에 들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물인 태양이 우리의 업적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빛을 주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은혜는 우리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관적 행위이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주관적 감정 안에 머물고 있는 은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은혜로 살아가는 길이 아닐는지.
 
정용섭/ 샘터교회·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