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늦은 밤에 책을 읽다가 연필을 책상 위로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떼구루루 하는 연필 굴러가는 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깼다. 독서삼매에 빠져 있던 나는 그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소리는 아주 오래 전 내 일상에 깊숙이 각인된 것이었다.
1960년 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그 당시 우리는 학교에서 연필 따먹기를 많이 했다. 사실 연필만이 아니라 구슬·딱지 따먹기도 거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연필 따먹기는 주로 학교 책상 위에 연필을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자기의 연필을 튕겨서 상대 연필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상대 연필을 정확하게 가격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고, 상대의 가격을 피할 수 있는 요령도 배웠다. 연필과 연필이 부딪치는 소리, 상대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굴러가는 소리가 내 무의식 깊은 곳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내 어릴 때의 기억을 되살린 그 연필 굴러가는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소리’는 무엇일까? 왜 소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가? 물리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이 소리는 공기의 진동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만 가능한 현상이라는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소리’ 앞에서 경천동지의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지구에는 소리가 있다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이 말은 곧 소리가 없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비존재의 개연성이 존재의 당위로 변했다. 이런 점에서 소리는 바로 창조능력과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고백했다는 말일까?(요 1:1)
청각장애인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소리는 비존재다. 소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의술의 도움을 받아서 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 세상은 전혀 다르게 경험될 것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들리기도 하는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돌입할 것이다. 그러나 청각장애를 계속 갖고 있는 사람들은 선생의 설명을 통해서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실체로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소리는 여전히 비존재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청각 비장애인인 우리는 청각 장애인들과 전혀 다른 소리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소리의 존재론적 능력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우리에게도 역시 소리는 비존재다. 우리에게 소리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게 문제다. 너무나 많은 소리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청각장애인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청각비장애인은 소리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양자 모두 소리의 존재론적 능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와 달리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새와 대화할 수 있었다는 건 그가 바로 새의 소리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화두를 붙들고 용맹정진하는 불교의 선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소리를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영운지근(嶺雲志勤)은 청소를 하다가 자기가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대오 경험을 했고, 청허휴정(淸虛休靜)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우쳤으며, 고봉원묘(高峰圓妙)는 목침이 침상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대오각성하고, 초석범기(礎石梵琦)는 성루의 북 소리를 듣고 대오했다고 한다.(2007년 3월 23일, 한겨레 18.0c, 김영민 글에서 인용) 소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진정한 예술경험이고, 구원경험이다. 위대한 작곡자들에게서 우리는 이런 선승들과 비슷한 경험을 발견한다.
2000년 사순절 기간에 필자는 독일의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에 있는 필하모니의 연주를 관람할 수 있었다. 교향악단과 합창단이 함께 연주하는 베르디의 레퀴엠이었다. 고전 음악에 대한 소양이 별로 없는 필자가 그때의 경험을 음악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리’에 대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종종 불협화음을 내는 베르디의 그 작품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여 있는 작곡자의 영적인 상태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가 작곡하기 전에서 이미 그런 소리가 있었는가, 아니면 베르디에 의해서 창조되었는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소리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다만 베르디가 그것을 나름으로 구성했을 뿐이다. 그런 일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음악적인 영감에 사로잡히는 사람만이 존재론적 지평에서 소리를 듣고 그것을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작곡도 분명히 예언자들의 경험과 비슷한 신탁(神託)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선승들의 깨우침과 작곡가들의 존재론적 소리의 경험, 예언자들의 신탁과 사도들의 생생한 예수 경험이 있는가? 즉 나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소리를 듣는가? 이것을 판단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자신도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배타적인 권한이다. 나는 다만 조심스럽게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에 충실할 뿐이다.
정용섭/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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