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YOROKOBI 2007. 9. 21. 17:59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서경식 지음/돌베개
        온몸 던져… 시대에 맞서 20세기 밝힌 49인의 초상…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인간이 살아온 역사 중에서도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를 살았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규정한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탄식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20세기는 광기와 비이성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식민지배와 전쟁,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이름의 야수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인간성을 할퀴고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인간이 비(非)인간으로 돌변하고 비인간은 다시 반(反)인간으로 추락했다. 암울하고 참담한 세상. 끝없이 이어진 무고한 주검의 행진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온몸을 불살라 20세기의 어둠을 밝힌 영혼들을 위한 레퀴엠이다. 이 느릿하고 장중한 진혼곡은 볼리비아의 밀림 속에서(체게바라), 중국 뤼순(旅順)의 감옥에서(안중근) 쓰러져간 인물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인다. 우리의 무력감과 냉소주의를 질책하기 위해.

도쿄 케이자이 대학교 법학부 교수인 저자 서경식씨는 "내가 집필한 인물들은 그 시대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했던 사람들"이라며 "얼핏 특별해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의 삶의 형태는 20세기를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1995년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펴낸 '20세기 1000명의 인물' 중에서 서 교수가 쓴 부분을 한 권으로 정리했다. 저자는 스페인 프랑코 독재, 독일 나치즘, 일본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49명의 신산한 생애를 섬세한 문장으로 그려나간다.

쿠데타로 친구를 잃고 망명생활을 전전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시인을 향한 저자의 헌사는 이렇게 갈무리된다.

"1936년의 스페인과 1973년의 칠레. 이 두 쿠데타가 네루다의 생애에 짙은 명암을 드리우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괴물'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생애. 그 밑바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독재의 강압과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인간해방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오래도록 네루다의 시가 울려퍼질 것이다."

첼로와 지휘봉을 무기로 프랑코에 맞섰던 파블로 카잘스와 아우슈비츠에서 홀로 살아남아 야만의 시대를 증언했던 프리모 레비의 고단한 삶은 차라리 질긴 슬픔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조선인(김구 홍범도 김산 윤동주)과 남한 독재체제에 항거한 운동가(김지하 박노해 윤이상)들도 소개된다. 이들에 대한 관점은 독특하다. 이를테면 안중근 의사의 행동을 협소한 국가주의의 틀에 가두지 말라는 식이다.

"국민국가 형성기라는 시대적 제약 속에 있었던 안중근의 사상에 국가주의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가 진정 호소하려 했던 것은 모든 민족의 평등과 자결의 존중이야말로 아시아 평화의 기초라는 이념이었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 전날까지 '동양 평화론'을 썼다. 그의 호소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핵심을 촘촘한 언어의 체로 걸러내는 솜씨는 발군이다. 무엇보다 49인의 삶을 뚜렷하게 돋을새김하면서도 고통과 절망 속에 감춰진 희망의 무늬를 읽어내는 긍정의 철학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20세기 역사가 21세기 인류에게 보내는 통렬한 아포리즘. 이 책을 펼쳐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