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관서 지역은 야마토 정권 이래 1600년을 넘는 역사가 있는 지역이다. 오사카후, 교토후, 효고현, 시가현, 나라현, 와카야마현을 포함해서 2후4현의 지역을 뜻한다. 오랜 역사만큼 이곳은 음식과 예술, 과학, 산업 등 각 분야에서 조상의 남다른 지혜가 묻어나온다. 오랜 시간 정제되면서 이어져 내려온 지적(知的) 유산들, 그 중에서 오사카 지역의 오와라이(お笑い·유머 및 개그)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은 유머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일본에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큰소리로 웃는다거나 농담을 내놓고 하는 모습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서양인들은 “아시아인들을 만났을 때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을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고 한다. 아주 시끄럽게 떠들면 중국인, 아주 조용하고 잘 웃지 않으면 일본인, 그 중간 정도이면 한국인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곳 오사카에서만큼은 얘기가 달라진다. 오사카 사람들은 모이면 웃음꽃이 피어나고 시끌시끌한 편이다. 일본에서도 오사카를 포함한 관서 지역 사람들은 오와라이에 소질이 있다고 정평이 나 있다. 유머는 사람 관계를 깊게 만드는 윤활유로서 좋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 관서 지역에 가보면 유머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고, 생활 곳곳에 그것이 스며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필자가 일본에 처음 유학 왔을 때다. TV를 켜면 연일 두 사람이 마이크 앞에 나와 대화를 나누며 관객을 웃기는 장면이 나왔다. 만담과 신희극 같은 형태였다. 일본어가 서툴 때엔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데 가만히 앉아서 시청하다보면 어디서 본 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1970~198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만담이었다.
한국에선 한때 유행했던 만담이 코미디나 개그로 바뀌면서 그 형태가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스타일만 바뀌었을 뿐 만담의 형태가 이어져오고 있다. 한데 이 일본 만담계의 주요 인사 중 상당수가 오사카 출신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알려진 코미디언 중 다수가 충청도 출신인 것과 비슷하다.
오사카엔 기질적으로 유머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많지만, 아예 이들을 전문적으로 키워내는 제도까지 마련돼 있다. 바로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개그맨 양성학교가 이곳에 있다. 요시모토 고교(吉本興業)라는 학교인데, 지금은 전국 여러 도시에 분교까지 냈다. 이 학교는 일본에서 개그맨들의 등용문으로 이름나 있다. 그래서인지 전국 각지에서 인기 개그맨을 꿈꾸며 오사카로 유학오는 젊은이들이 많다.
개그맨을 양성하는 2년 과정으로 시작된 이 학교엔 현재 배우 양성, 가수 양성 과정 등도 개설돼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는 학생을 배출한 뒤 연예기획사처럼 그들을 관리하는 회사 역할도 한다. 이 학교에서 개그맨 과정을 밟고 있거나 이 과정을 마친 졸업생은 이 회사가 운영하는 ‘base 요시모토’라는 극장에 설 기회도 갖게 된다. 관람객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재학생이나 졸업생은 실전 연습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오사카`-`난바 센니치마에(難波千日前)에 있는 지하 극장 ‘base 요시모토’. 약 230석 되는 극장엔 10~20대의 젊은이들이 가득 차 있다. 깜깜한 무대에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다.
“안녕하세요. 귀여운 아가씨들이 왔어요.”
콤비를 이룬 두 여성이 만담꾼으로 나온다. 박수가 쏟아져 나오고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나온다. 장내는 순간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요즘 신세대들의 태도나 말투를 약간 비꼬는 듯한 고전적 만담이 흐른다. 관객들 사이에선 “두 사람을 보면 저절로 힘이 난다” “모두가 우리 사는 일상의 이야기”라는 말이 나온다. 어느새 무대에 선 배우와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친구가 되어버린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선은 없다.
이 만담의 주인공인 여성 콤비는 한 번 이별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팀을 결성한 것은 젊은 만담사의 콘테스트 ‘M-1그랑프리’에서 일본 최고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M-1 그랑프리’라는 이 콘테스트는 만담사들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2001년 오사카에서 시작됐다. 인기를 얻어 현재는 도쿄에 있는 방송국에서 주관하고 있다. 매년 수천 개의 팀이 출전하는 이 대회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중계 방송된다. 우승자는 최고의 인기 만담사로서 인정받는다. 이 두 사람은 팀을 결성한 지 5년여. 어느 정도 인기를 모았지만 목표를 이루는 그날을 위해, 오늘도 무대에서 최선을 다한다.
오사카 미나미에 있는 가가와시키(河川敷) 광장에 가면 여기저기에서 연습하고 있는 만담꾼들을 볼 수 있다. 극장 근처의 공원이 연습 장소로 알려져 있는데 하도 열연을 해서인지 근처 주민들의 불만이 접수돼 ‘만담 금지’라는 간판이 붙을 정도였다. 공원에서 쫓겨난 신인 만담사들이 몇 시간이라도 연습하기 위해 이 광장으로 모인 것이다.
오사카에서 열리는 젊은 만담사의 콘테스트인 ‘M-1그랑프리’는 일본 일대에서 거대한 축제다. 지난해 경우, 약 4000팀이 출전했다. 그 중 70%가 여성 회사원이나 일반인들이라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NHK방송국을 그만두고 연예인으로 전직해 이곳에 출전한 남성도 있었다. 지난 9월 예선전이 시작된 올해의 경우, 역대 최다인 4239팀이 출전했다. 시청에서 일하는 동료 커플, 어머니와 장남 등 참가자들의 구성도 가지각색이다. 최종 우승자가 누가 될지 정말 궁금해진다. 신인 만담사를 뽑는 대회에 8000명이 응모한다고 하니 가히 ‘만담의 도시’라 할 만하다.
필자는 7년 전 일본 체류 생활을 오사카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일본의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오사카 출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다”는 말을 잘한다. 그만큼 기질적으로 유머가 많다는 말이다. 오사카 출신들은 이런 점 때문에 다른 도시에 가면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오사카 사람의 특징 중에 일본어로 ‘보케(惚け)’와 ‘쓰코미(突っみ)’라는 표현이 있다. 일부러 말이나 행동을 바보스럽게 하는 걸 보케라하고, 그런 바보스러운 행동이나 말을 지적하는 걸 쓰코미라고 한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유머의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오사카 사람들은 생활 속에 이 두 가지가 녹아 있고, 이것이 상대방의 웃음을 자아낸다.
필자와 친하게 지내던 한 일본인 친구의 경험담이다. 그가 보케(바보스러운 말이나 행동)를 하면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그의 머리를 때려가면서 지적했고 결국 모두가 한바탕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도쿄대에 진학한 뒤 상황은 달라졌다. 오사카에 있었을 때처럼 보케를 했는데 아무도 지적하며 맞장구 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내게 “도쿄 사람들은 나를 보고 황당해하더라”며 머쓱해졌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유독 오사카 사람들이 농담을 잘하고 유머에 소질이 있는 걸까. ‘상인의 도시’로 알려진 오사카에선 예로부터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상대와 장소에 따라 말을 달리해야 하는 법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익혀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말 놀이가 발달하게 됐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기보다는 필요에 의해서 유머를 익히고 쓰게 된 것이다.
연예평론가인 오사카예대의 아이바 아키오(相羽秋夫) 교수는 “이곳에서 말은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을 웃기고 상대방과의 거리감을 줄여나가는 것을 의미했다”며 관서 지역 사람들의 특성을 말했다.
그리고 그런 특성이 라쿠고(落語)라는 이 지역 언어나 만담 등에서 충분히 발휘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사카에선 두 사람만 모이면 곧바로 만담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관서 지역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평범하게 대화만 나누는 데도 유머가 묻어나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이 지역 사투리 자체가 유머스러운 것이었다. 관서 지역의 사투리는 재미와 ‘와(和)’를 존중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한다.
1960년대의 드라마, 1970년대의 버라이어티 쇼, 1980년대의 만담에서도 관서 사투리는 일상적으로 등장한다. 경쾌한 관서 사투리로 예능인으로 정상에 선 아카시아게 산마씨는 NHK 방송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좋아하는 예능인 조사’에서 6년 연속 1위이다.
단골 토크쇼 출연자인 연예인 다운타운과 나인틴나인도 관서 사투리로 유명세를 떨쳤다. 일본의 오와라이(개그) 학회의 이노우에 히로시(井上宏) 회장은 “부드러운 유머가 넘치고 듣는 이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는 관서 사투리는 ‘일상’을 연출하는 도구로 적격”이라며 “TV에서보다 고전 라쿠고 등에서 한 수 높은 풍부하고 다양한 관서 사투리를 접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민족으로 알려졌다. 한데 이곳 오사카만은 예외인 것 같다. 사람들간의 대화 자리를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고 웃길 줄 아는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거나 모자라더라도 같이 돕고 공존하는 걸 중시하는 오사카 사람의 넉넉한 정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힘은 이곳 사투리에서 나오는 걸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오사카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 같다. 바로 내가 이 도시와 이곳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김 인 호 | 조선대학교 토목과 졸업. 일본 오사카시립대학 석사(토목과).
현재 오사카시립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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