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 신도의 개요

YOROKOBI 2008. 1. 28. 01:08
 

1.신도사상의 역사
※신도사
제1기 : 고대 - 나라시대
제2기 : 중세 - 헤이안, 가마쿠라,요시노, 무로마치 시대
제3기 : 근세 전기 - 에도시대 중엽
제4기 : 근세 후기 - 메이지 시대 초엽

1. 고신도
1)고신도의 원시적 요소 및 특징
①나라시대 이전의 신도로 아직 불교와 습합하지 않은 단계를 말함.
②자료 -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 각종 노리토 - 제1기 말엽에 결집됨
*고신도의 발전 과정
①원시적 단계 - 신도사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어야하는가라는 문제가 대두된다.(일본 민족의 기 원과 구성 문제, 엄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일본은 복수 민족의 연합체이다.)
원시문화에서는 공통적으로 제사가 중심이 되어 도덕, 문학, 법률 등을 지배하 거나 포함하면서 문화가 미분화된 혼일 상태로 존재한다. 고신도의 원시적 요소 는 관념 및 신앙의 측면과 그 외적 발현인 의례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신관 - 일본어神는 어원상 上와 통한다. 그것은 선악, 귀천, 강약, 대소와 상관없이 위력을 발현하는 것은 무엇이든 かみ가 될 수 있는데, 八百萬神(やおよるずかみ-많은신)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천체, 산, 들, 강, 바다, 바람, 비, 지수풍토, 새, 짐승, 벌레, 수목,위인이나 영웅, 귀족 등
2. 영혼관 - 영혼이란 신과 인간의 지상적인 몸 안에 있으면서 영묘한 활동을 하는 반정신적, 반물질적 존재 혹은 일종의 기와 같은 실재로 간주되었으며 통상 지상적인 몸과 함께 있지만 그 몸을 벗어나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혼은 신들과 인간의 영묘한 활동 주체이기도 하면서, 나아가 널리 편재한다고 인식되었다.
3.선악과 길흉 및 죄악 등의 관념과 연관시켜 보면 - 신은 생성신이며 선이고 길이었다.
이를 저해하는 존재로 악신의 활동이 거론되었다. 결국 고대 일본인들은 선은 길한 것이고, 악은 흉한 것으로 생각했다.
즉, 선은 아름답고 좋고 다행스럽고 귀한 것으로, 악은 선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겼다.

2)국가 종교로서의 고신도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이본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종합해 보면 신대권 전설의 대강이 일관된 하나의 흐름을 보여준다. 황실 및 국가의 원천으로서 개벽신이 있고, 그 신들의 맨 끝에 나타난 이자나기, 이자나미 두 신이 국토신을 낳았으며, 다시 두 신은 우주의 주재자이자 황실의 선조신인 아마테라스와 이즈모 계통 신들의 선조인 스사노오를 낳았다. 아마테라스의 직계인 츠쿠시 계통의 선조신이 마침내 이즈모 계통의 신들을 병합하여 황실을 열었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신대권은 황실 및 국토의 신적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화적 구성을 보면 두 가지 상호 연관되는 관념이 중심이 되어 신들의 그룹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아마테라스라는 신격
이 신격은 가장 위대한 자연신인 태양신이자 동시에 황실의 선조신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황실의 선조신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마테라스 출생의 유래
-이자나기가 황천에서 돌아오는길에 몸을 씻으면서 왼쪽눈을 닦았을때 아마테라스가 생겼다는 설
- 이자나기, 이자나미 두 신이 국토, 산하, 초목을 낳은 후에 천하의 주로 낳은 것이 아마타라스 라는 설
- 앞의 두 설이 결부되어 이자나기가 천하를 다스릴 보배로운 아이를 낳기 위해 왼손으로 백동경 을 잡았을 때 생겨난 신이 아마테라스라고 보는 설

2.아마테라스가 국토와 만물, 모든 신들의 부모인 이자나기, 이자나미 두신이 낳은 신으로서 결 국 국토 및 여러 신들과 형제임을 보여준다는 점
그런데 국가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국민을 빠뜨릴 수 없는데 ‘고사기’나 ‘일본 서기’ 에는 국민을 낳았다는 기사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으로 추론해보면 국민은 국가나 숭경하는 신들 안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2.중세 신도
1) 신기 제도의 완성
신도사의 중세는 다이카 개신을 전후하여 나라, 헤이안 시대를 중심으로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까지 해당된다. 중세 신도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신기 제도의 완성, 불교와의 습합, 신도론의 발생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신기 제도는 다이카 개신에서 시작되어 헤이안 시대 초기에 완성되었다.
중국의 당 제도에 따라 국가 제도를 정비한 다이카 개신 때 ‘근강령’이 완성되었고 그 후 전반적으로 ‘근강령’에 준하여 천무천 황기에 재편집된 것이 701년에 완성된 '대보령‘이다. 이후 718년에 보정판이 나왔는데, 이것이 ’율령‘이다. 이 율령중 제2권 6편이 ’신기령‘이고, 이 신기령 1편 범10조 및 직원령 중 신기관의 직제 조항이 합쳐져 당시의 신기 제도를 구성했다.
신기관의 소관 업무는 천시지기의 제사, 신사에 근무하는 축부의 명부 관리, 신사령의 민호인 신호의 명부 관리, 오나메사이, 진혼제 무의와 점복 등이다.
중요한 것은 천황 즉위 및 천조 때 지내는 제사이다. 천조일에 중신들이 장수를 비는 축사를 올릴 것, 기부경검을 올릴 것, 즉위와 더불어 전국의 국사로서 천신지기를 제사할 것, 즉위 후 일정 기간에 대상회를 거행하고 햇곡식을 바쳐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제사할 것 등이 정해졌다.
율령은 원래 당령 즉 당고종 때 선찬된 영미령을 본뜬 것이다. 이때 시도된 윤식은 일본 문화사 및 사상사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물론 신기령 또한 당의 사령에 의거한 것으로 중국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에서는 고신도의 제의와 관념을 계승한 측면이 많으며 조정 의식으로 수정되어 있다. 당제의 모방이라 해도 신기령에는 일본 고유의 내용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도 제사는 조정 의식으로 규정되고, 신기관은 대정관 보다 상위에 있었다. 물론 이것이 실제 신기관이 대정관 이상으로 힘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국민 문화의 발전에 수반되어 점차 제정분리가 확립되고, 신도가 국가 제사로서 중요성을 획득했음을 뜻한다. 중앙 정부의 신기 제도 성립은 하나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각지 신사에서도 신도 의례가 제정되었고, 아마테라스가 황실의 조상신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2)불교의 영향
이와 같은 신기 제도의 완성은 신도가 국가적 제사로 발전되었음을 보여 주는 한편 신도의 형식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형식화된 제도로서의 완성은 오히려 사상으로서의 자발적 발전을 저해했다. 신도가 제도화의 과정을 밟는 동안 불교가 인심을 사로잡게 되었으며 그 세력이 점차 문화를 외적, 내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신도와 불교와의 교섭 관계가 생겨났으며, 불교는 신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신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킨메이 천황 때에 도입되고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발전한 불교는 제1기의 230여 년간 오로지 현세 불교, 정치 불교로서 번성했다. 종파로서는 삼론종과 법상종으로 대표되는데 모두 학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 제2기에 들어가면서 나라 불교는 쇠하고 그 대신 사이초의 텐다이슈와 쿠카이의 신곤슈가 성립된다. 이 두 파는 전대의 현세 불교적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고 밀교적 기도 종교로 인심을 사로잡으면서 일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나의 불교 문학으로서 당시의 사상적 경향을 대표하는 원씨물어를 보면 헤이안 시대의 불교는 통상 말해지는 것처럼 단순히 기도 종교적 의례라는 표면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 아미타 신앙 및 정토희구의 사상을 통해 더욱 깊이 있고 폭넓게 인심을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끼친 영향과 신도와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선불 습합의 제1단계- 불교와 신도의 습합은 이미 불교 포교의 초기 단계에서 대체적인 경향으로 존재했는데, 이런 경향이 더욱 뚜렷하게 된 계기는 나라 시대 741년에 이루어진 대불 주조였다.

2.신불 습합의 제2단계- 신이 부처에 의해 보호받고 구원받는다는 관념이 나타난다. 신전독경을 비롯하여 신을 위한 출가, 불경 필사, 탱화 제작 등이 일반화되었고 신궁사가 여기저기 세워졌으며, 나아가 신도의 신들에 대해 보살이라는 호를 내리는 일이 종종 행해졌다. 이런 변화는 신도의 신이 불법을 수호하는 지위에서 중생과 마찬가지로 부처에 의해 구원받는 존재로 끌어내려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불교측에서 보자면 지배력의 상승을 의미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이러한 관념이 오랫동안 인심을 지배했다. 이처럼 불교가 지배적인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해서 결코 신도의 대항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런 신도의 대응을 간과해서도 안 되었다.

3.신불 습합의 3단계에는 헤이안 말기에 본지수적설이 등장한다. 이때 신은 본지인 부처가 수적한 것이라고 간주된다. 권현의 관념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본지수적설은 겐페이 시대를 거쳐 가마쿠라시대에 이르러 좀더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이론으로 발전된다.
2단계에서 제3단계로의 변화는 신도의 신들 지위가 향상되었읆을 의미한다. 불교 옹호의 호법신에서 부처에 의해 구원받는 중생 중의 하나로 지위가 하락되었던 신도의 신들이, 이제는 부처의 화신으로 간주된 것이다. 이는 신도가 사람들 사이에서 잠재적 세력으로 존재했으며, 불교측이 이를 무시할 수 없어 고심한 흔적임을 보여 준다. 하지만 신도의 이와 같은 형식적인 지위 향상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불교에 의한 정복을 의미한다. 신도의 신이 부처의 수적이 됨으로써 구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 혹은 부처 같은 존재가 됨으로써만 신이 신앙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본지수적설의 등장은 역시 불교 지배력의 증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3)가마쿠라 전기의 신도론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와 불교계에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고 새로운 종파가 생기면서, 본지수적 사상은 점차 조직화되고 이론화되어 신도론의 형태로 나타난다. 신도사와 불교 내에서의 이와 같은 신도론 발생은 신도측에서의 신도론 성립을 위한 전제이자 원인을 구성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상호 자극과 교섭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신도측의 신도설 성립이 불교측의 신도설을 전제로 하면서 원인이 되는 동세에 불교측의 신도설 또한 신도측으로부터의 자극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양자에게 공통되는 유력한 원동력이 된 것은 13세기 말 몽고 침입에 의해 자극된 신국사상이라는 시대 정신에 있다.
불교의 여러교파 중 신도론을 제창한 주목할 만한 종파로는 구불교의 텐다이슈, 신곤슈와 신불교의 니치렌슈, 신슈 등을 들 수 있다.
불교 신종파의 발흥과 그에 따른 제교의의 유행 및 구불교와 신불교에서의 신도론 발생 등에 자극받아, 점차 신도측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몽고 침입이라는 국가적 대사건을 계기로 신국이라는 역사적 자각이 국민 정신 안에 등장했다.

4)가마쿠라 후기의 신도론
감마쿠라 시대 말기는 사상사적으로 혁신적 기운이 일어난 시대였다. 고우다 천황은 밀교에 정통했으며 교법상의 복고에 관해 생각해 왔는데, 때마침 조정에서는 송학이 수입되어 한당 이래의 사장학문에 대한 새로운 자극이 일어낫다. 고우다천황의 아들인 고다이고천황에 의한 건무중흥의 대업도 이런 사상적 기운의 한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건무중흥의 근본 뜻은 왕정복고의 정신이었으며 그것은 황조신 및 건국사에 대한 신앙 그리고 신국의 자각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도오부서로 대표되는 시대 정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나아가 이세 외궁과 남조는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사상적으로도 관계가 있었다. 당시 신도사에 나타난 체계적 시도는 대체로 이 양자 중 한 쪽에 속하거나 교류 관계를 가졌던 신도가에 의해 행해졌다.

5) 무로마치 및 센코쿠 시대의 신도론
무로마치 시대를 지나 전국 시대에 이르는 약 2세기 반 사이의 신도사적 경향으로는 현저한 불교 세력 및 그에 대한 신도측의 반동적 기운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와서 불교가 특별히 왕성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교의 신도에 대한 영향은 그 이전부터 대세였기 때문이다. 시대 정신의 대세 및 국가적 자각에 기초하여 신도론이 성립되었으나, 시대 정신의 흥분 및 감격이 진정되고 요시노 시대의 왕정복고 운동이 다시금 장군치하로 돌아가자 사상계의 대세도 원위치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신도 또한 예부터의 불교 지배 조류에 함몰되었다. 한편 그 대치점에서 반동적 기운이 일어났다. 즉 사상계에서 신도 사상은 불교 운동의 리듬을 타고 발전했던 것이다. 료부 신도의 발전 과정 중 불교가가 신도에 관해 쓴 저서가 등장했다는 점과 사원의 유래를 밝힌 연기설 및 이를 본뜬 신사의 연기설이 다수 생겨났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6)천주교의 전래 및 신도와의 교섭
사비에르에 의한 천주교 전래는 전국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친 일본 문화 사상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는 천주교의 구미문명이 끼친 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상적 측면세서 비록 후대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천주교가 끼친 내면적 혹은 잠재적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세 초기에 나타난 전승 타파 정신 및 자유 토론의 기운은 천주교에서 자극받은 부분이다.
당시는 전국 시대로 인심이 동요하고 재래의 종교가 부패된 사상적 과도기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천주교는 간명한 교리, 포교자의 열성, 신기한 서구 문물의 배경 등에 힘입어 인심을 사로잡아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천주교와 재래 종교 특히 신도와의 교류를 살피고자 할 때 우선 느끼는 것은 자료의 빈약함이다. 천주교도들이 신사를 불질렀다는 등의 기사는 종종 천주교사에 전해지지만 천주교측의 신도론이나 신도측의 천주교론에 관해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천주교측에서 신도를 우상 숭배적 미신으로 간주했으며 신도의 국가 종교적 입장에서는 천주교를 도저히 어울리기 힘든 외국의 종교로 간주함으로써 상호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도는 단순히 현세적 종교로서 내세의 구원에 관한 교의를 갖고 있지 않다 하여 불완전한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측의 공격에 대해 신도측이 변호나 항변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던 것은 당시 신도가 내세적 불교와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편 당시 불교에 지배당하던 유교가 점차 독립하여 마침내 근세 문화의 지도적 정신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신도 또한 점차 불교에서 벗어나 유교에 지배당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신도는 유교와 결합하여 기독교 및 불교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로써 불교, 기독교, 신도, 유교라는 네 종교간에 가가 상이한 관계가 성립된다.




3.근세 전기 신도
도쿠가와 막부의 문교 정치 정신으로 진흥된 당시 유교 운동은 일반 문화사상 주목할 만한 두 가지 경향을 수반했다.

첫째는 배불 정신으로 오닌기 이후 사회 개조의 기운이 낳은 시대 정신의 자유로운 신장 및 그 안에 조성된 유교의 세속화, 즉 불교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유교의 현세적 인륜주의의 본질을 발휘할 것을 주장한 데에 따른 결과이다. 하른 한편으로 이는 오랫동안 불교가 지녀 왔던 사회적 세력의 타성화, 특히 기독교인 취조의 특권 및 그에 따른 폐해에 대한 반발을 의미했다.
둘째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다. 이는 일본 유학이 이미 학문으로서 의 일반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유학의 치국평천하하는 정치적 의의에 있어 당연히 국사 연구와 관련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 준다. 사실상 당시의 유학자는 후대 유학과 국학으로 나뉘어진 이후의 전문 유학자와는 달리 일본학을 겸비한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거의 모든 유학자들은 일본의 신도에 관심을 보였고 신도측도 배불적 태도를 보였기에 유교 및 불교와의 혼유로부터 불교가 배제됨과 동시에 신도와 유교의 융합이 더욱 진척되었다. 이는 신도의 유교화 혹은 신도 독립에의 진척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유교적 신도는 넓은 의미로 볼 때, 코카쿠 신도가 등장하기까지의 근세사 전기를 지배했다.

1)주케 신도(유가 신도)
이에야스의 고문으로 막부 문교 정치의 창업에 기여한 근세 주자학파의 개조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찍이 주케 신도의 서장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특별히 주케 신도 방면의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교 신자였던 모친을 설득하기 위해 유교를 쉽게 풀이한 천대본초에서 신도와 유교가 명칭은 다르나 실은 하나로 모두가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만민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데에 그 본의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내세를 기원한다는 점에서 미신이라고 배척하고 이와 동일한 입장에서 신사에 공물을 바쳐 기도하는 것도 배척한다. 그는 무종교적 유교주의의 입장에서 신도를 보고자 했으며 신도에 대해 특별히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후계자 하야시 라잔은 일본 고전에 조예가 깊었으며 신도론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는 일본은 신국으로서, 예부터 전해진 신도가 불교에 습합됨을 탄식했다.
이들의 신도론은 배불을 일차적인 특성으로 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유교가 주이고 신도가 종이며, 형식적으로는 신도가 주이고 불교를 종으로 보는 경향을 일관되게 지니고 있다. 또한 중세의 케치카부사적 입장에서 불교적 요소를 제거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신도라고는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종교적 신비적 요소를 제거하여 합리주의를 근저로 하는 정치적 도덕적 왕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주케 신도의 특색이다.

2)스이카 신도
유학적 신도의 경향을 집성하여 근세 신도 사상 하나의 대학파를 이룬 것이 스이카 신도이다. 스이카 신도는 당시 신도계를 풍미한 대세력으로 코카쿠 신도 완성 이전의 신도계 및 사상계 대부분을 지배 했다. 주케신도를 집대성하여 스이카 신도를 창시한 야마자키 안사이는 그 인격과 신앙 및 학문으로 이 일파의 개조가 되었다.
고전 해석에 기초한 스이카 신도의 신념 중 후세에 가장 큰 감화를 준 것은, 천일일체의 황조신 아마테라스오미가미의 자손인 천황에 대한 절대적 숭경의 신앙이다.

4.근세 후기 신도
1)코카쿠 신도
*코카쿠 신도의 발생
코카쿠 신도의 발생은 스이카 신도를 완성한 안사이의 죽음 직후인 겐로쿠 시대까지 거스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초기 이래 주케 신도에서도 이미 보인 유학의 세속화 기운은 겐로쿠 시대의 해방 정신 안에서 자유로운 학문적 요구로 이어졌다. 그것은 우선 유학에서는 이토 진사이의 코기가쿠로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오규 소라이의 코분시가쿠로 나타났다. 진사이학은 당시의 관학이었던 주자학에 반발하여 주희의 불로적 영향과 그에 기초한 내세적 이론에서 벗어나 논어와 맹자에 의거하여 공맹의 옛 뜻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소라이학은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오경에 의해 고대 문명을 규명하고자 했다. 이들의 복고 정신 안에는 고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 즉 코카쿠(古學)의 관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를 더욱 학문적으로 심화시켜 와카(和歌)의 영역에서 실행하고자 한 자가 곧 케이추이다. 그의 학문에서 신도가 특별한 연구 대상은 아니지만 그의 언설 속에는 신도관이 녹아 있다.
그의 신도관은 당시 일반과는 달리 고전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해석하고자 했으며,그가 유교나 불교와는 다른 고도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신도가는 아니었지만 코카쿠 신도의 단서를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코카쿠 신도는 가모노 마부치에 와서 그 틀이 잡힌다. 마부치에 따르면 유, 불 도래 이후의 일본 문화는 감상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문예, 도덕, 신도 등 모든 면에서 타락했다. 그래서 그는 중세 이후의 시가를 배척하고 만엽집 및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문학상의 이러한 만엽주의는 불교나 유교와 습합한 신도를 배척하여 코카쿠 신도를 제창하게 했다. 이를 위해서 만엽집을 비롯한 고전 문학을 해명하고 그 정신을 이해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마부치는 코카쿠 즉 고신도의 정수를 발휘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코카쿠 신도는 마부치에 의해 그 정신적 성립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코카쿠 신도의 집대성
마부치는 코카쿠 신도를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으로 고전과 관련하여 코카쿠 신도의 내용을 상세히 언명한 것은 아니다. 마부치는 주로 만엽집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고사기 와 일본서기의 신대기에 관해서는 다만 연구의 단서를 열었을 뿐이다. 그는 다만 인간세를 어명하는 데 전력했을 따름으로 아직 신대까지는 관심이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인간세 곧 만엽집 연구는 신대를 이해하기 위한 전단계였다. 이런 마부치의 정신을 이어받아 코카쿠 신도 연구를 완성하고 집대성한 자는 케이추의 학풍을 체득한 모토오리 노리나가 였다.
노리나가는 쿄토 유학 이전의 젊은 시절에 당시 일반적이었던 가도의 쿠학풍을 배웠고, 신도에 있어서도 이세 신도 및 스이카 신도를 배웠다. 1762년 32세 때 마부치를 만난 이후, 노리나가는 그의 감화를 받아 점차로 고사기 연구에 들어간다. 마부치의 학풍과 고대주의의 정신은 노리나가의 고전 연구 태도를 더욱 심화시켰다. 36세 때 동향의 선배로 스이카 신도팡의 신도가였던 타니가와 고토스가에게 보낸 서간에서 노리나가는 자신이 케이추에 의해 코카쿠에 입문하여 고전의 뜻을 분명히 헤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재래 신도설이 모두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스이카 신도를 공격하는 한편 고토스가도 그런 폐습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다. 그가 존경했던 고토스가에 대해서조차 추호도 양보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서 강한 학문적 신념을 계속 견지했다. 본질적 가치인 국가적 조신교나 천황 숭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고신도를 하나의 종교로 형성시켰다는 점에서 노리나가를 코카쿠 신도의 참된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2. 후기 코카쿠 신도
*코카쿠 신도 발전의 내재적 계기
노리나가는 황조의 학문을 세운다고 말하면서 실은 노리나가학을 설한 것이었다고 비평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코카쿠 신도 자체에서 볼 때, 이런 관계는 발전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노리나가 이후 코카쿠 신도는 외국풍에 의한 고전의 합리화를 배척하는 노리나가의 코카쿠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고신도의 관념 내용에 유교, 불교 등 외적 요소를 수용하여 그것을 신학적, 종교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걸었다. 그 결과, 노리나가가 배척했던 유교, 불교와의 습합의 폐단을 반복한다는 측면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는 코카쿠 신도 발전의 자연적 결과이며 노리나가 신도의 내재적 계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리나가 신도의 정통적 계승자를 자임하면서 코카쿠 신도의 대대적 발전을 실현한 히라타 아츠타네는 1776년 아키타 번사 오와다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리나가의 학문 정신에 입각하여 노리나가학을 보완 수정하는 한편 여러 모양으로 발전 시켰다. 아츠타네는 신도설에 있어서도 대체로 노리나가의 코카쿠 신도를 계승하였고 노리나가와는 다른 개성을 창출했으나 노리나가처럼 독자적인 신앙을 지니지는 않았다.
아츠타네 이후의 코카쿠 신도가에는 직접 간접으로 그의 영향과 감화를 받은 자가 많아서 사실상 히라타 신도의 학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글은 아츠타네의 설을 그대로 따라 서술하면서도 나름대로 히라타 신도에 포함된 다양한 요소에 그 특색을 발휘하여 아츠타네설을 더 심화 시키거나 정밀하게 발전 시켰다.

* 종파 신도
코카쿠 신도는 고전학의 범주 안에서 발달했으며 그 발달은 주로 철학적 신한적 고찰에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코카쿠 신도는 주로 학자들이 신봉하였고 그들은 학파를 형성했다. 이헤비해 막부 말기 신도계에 각기 상이한 특색을 지니고 나타난 현저한 현상이 교조 신도 이다. 교조 신도는 고전학에서 벗어나 교조(조직자)를 지녔고, 철학적 신학적 고찰보다는 실제적인 신앙을 중시했다. 또한 그 준봉자는 서민 계급이었고, 각각 고유한 종파를 형성했다.
이와 같은 서민의 종교로서의 신도 신앙을 반드시 새로운 것만은 아닌데, 역사적으로 보면 민간 신앙, 통속적 교화, 료부 신도의 흐름, 신가쿠 운동 및 좀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지방 제사 등에서도 그런 서민 종교로서의 신도 신앙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신도가 각기 그 독자적인 특색을 지니고 종파 신도라는 하나의 현저한 현상으로 신도 사상에 출현한 것은 대체로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초년에 걸친 시대, 즉 코카쿠 신도가 발전한 시점인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말기의 과도기에 나타난 인심의 동요, 불교의 무력화, 코카쿠 신도의 진흥 등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교조신도의 분류
*교조신도 : 후지코, 짓코교, 후소교, 마루야마교, 미타케교,
미소기교, 구로즈미교, 곤코교,텐리교
*준코카쿠 신도 : 슈세이교, 타이세이교, 신슈교, 신리교, 신토혼쿄쿠, 타이샤교, 진구교


5.메이지 정부의 교화 정책과 신도
메이지 정부는 코카쿠 신도의 내용으로써 교화적 통일을 실현시키고자 시도했으나 당초 교화 정책의 중심이었던 코카쿠 신도는 오늘날 해체되었고, 신학 및 종교적 교의의 측면은 종파 신도 안에, 그리고 국가적 제사의 측면은 신사 안에 남게 된다.


2.신도신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서라 말해지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역사서이면서도 가공의 신화시대를 설정하고 있다. 이 양서에 기술된 신화를 통상 기기신화라 하는데, 그 신도신화는 고대왕권의 확립기 뿐만 아니라 중세 및 근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 있어 가장 지속적이고 강렬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 기기신화의 내용은 (1)천지개벽․국토창생신화 (2)이자나기․이자나미의 황천신화 (3)아마데라스․스사노오신화 (4)오오쿠니누시․국토이양신화 (5)천손강림신화 (6)호데리․호오리신화 등의 여섯가지 주요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천지개벽․국토창생신화 : 태초의 우주는 카오스 상태였는데 이윽고 맑은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한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 땅이 되었다. 이를 '아메노치노하지메노도키'(天地初發の時)라 한다. 이 때 하늘의 다카마가하라(高天原, 신들이 사는 곳)에 '조화삼신' 즉 최고 근원신인 아메노미나카누시노가미(天御中主神), 생성의 힘을 인격화한 다카미무스히노가미(高御産巢日神)와 가미무스히노가미(神産巢日神)가 나타났고, 이어서 우마시아시카비히고지노가미(宇麻志阿斯訶備比古遲神, 생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신)와 아메노도코다치노가미(天地常立神, 하늘 그 자체의 신격으로서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신)가 나왔는데, 이 다
섯신을 고토아마츠가미(別天神)라 한다.

또한 구니도코다치노미코토(國常立尊) 이하 칠대에 이르는 천신 가미요나나요(神世七代)가 나타났는데, 이 중의 한 쌍인 남신 이자나기와 여신 이자나미가 결혼하여 일본 국토와 신들을 낳았다. 즉 아메노미나카누시노가미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에게 "이 말랑말랑한 국토를 튼튼하게 굳혀라"는 신칙을 내린다. 이를 천지초발의 신칙이라 한다. 이 신칙에 따라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천부교에 서서 아메노누호코(天沼矛)라는 창으로 바다를 휘젓자 그 창 끝에 묻은 것들이 굳어 섬이 되었다. 이자나기는 이 섬을 '오노고로시마'라고 이름지었다. 두 신은 이 섬에 내려가 아메노미하시라(天之御柱)라는 기둥을 세우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리하여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생식행위를 통해 낳은 것이 아와지시마(淡路島), 혼슈, 시코쿠, 큐우슈우를 비롯한 8개의 섬 즉 오오야시마(大八洲)이다. 그런 다음 두 신은 바다와 강의 신들, 바람과 비의 신들, 산과 들의 신들, 초목의 신들을 낳았는데, 끝으로 불의 신 가구츠치를 낳다가 이자나미는 성기가 불에 타버려 죽고 만다.

(2)이자나기․이자나미의 황천신화 : 이자나기는 죽은 이자나미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오려고 황천국으로 내려간다. 그 때 절대 자기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이자나미의 신신당부를 잊고 이자나기는 몰래 불을 켜보니 여신의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고 얼굴은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놀란 이자나기가 도망치자 모욕당했다고 느낀 여신은 황천의 온갖 귀신들을 불러내어 그 뒤를 쫓았다. 가까스로 지상으로 빠져 나온 이자나기에게 여신은 "지상의 사람을 하루에 천명씩 죽이겠다"고 저주했는데, 이에 대해 이자나기는 "그러면 나는 하루에 천오백명씩 태어나게 하겠다"고 대답한다.

(3)아마데라스․스사노오신화 : 황천국에서 도망쳐 나온 이자나기는 부정을 씻기 위해 히무카의 다치바나노오도(橘之小門)에 있는 강물로 몸을 씻어 낸다. 그러자 많은 신들이 생겨났는데, 마지막으로 왼쪽 눈을 씻자 태양의 여신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오른쪽 눈을 씻자 달의 신 츠쿠요미노미코토(月讀命)가, 그리고 코를 씻자 폭풍의 신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가 태어났다. 이 신들을 삼귀자(三貴子)라 한다. 이자나기는 아마데라스에게 다카마가하라를, 츠쿠요미에게 밤의 나라를 그리고 스사노오에게 바다를 다스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어머니 이자나미의 나라인 황천국으로 가고 싶어한 스사노오는 이 명령에 불복했으며, 또한 아마데라스의 영역인 다카마가하라에 올라가 온갖 폭행을 일삼았다. 이에 화
가 난 아마데라스는 아마노이와토(天岩戶)라는 굴속에 숨어 버렸고 세상은 암흑에 빠지고 만다. 그러자 신들은 의논 끝에 제사와 춤을 통해 여신을 다시 굴에서 나오게 하는 한편 스사노오를 다카마가하라에서 추방했다.

(4)오오쿠니누시․국토이양신화 : 이 후의 이야기는 이즈모(出雲)라는 곳을 중심 무대로 전개된다. 지상으로 추방된 스사노오는 머리가 여덟개인 거대한 뱀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한 후 산신의 딸과 결혼한다. 거기서 태어난 딸 스세리비메(須勢理毘賣)의 남편 오오나무치(大穴牟遲神) 혹은 오오쿠니누시(大國主神)가 아시하라노나카츠구니(葦原中國) 즉 일본땅을 통치하는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다카마가하라의 신들은 아마데라스의 직계 자손이 지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 수차례 사자를 파견하여 결국 오오쿠니누시를 설득함으로써 국토이양의 동의를 받아낸다.

(5)천손강림신화 : 이에 새로운 통치자로서 아마데라스의 후손인 니니기노미코토(邇邇藝命)가 삼종의 신기 즉 거울(야타노가가미), 구슬(야사카니노마가타마), 칼(아메노무라쿠모노츠루기)를 가지고 5부족과 함께 사루타비코노가미(猿田毘古神)의 길안내를 받아 히무카(日向) 다카치호(高千穗)의 쿠지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 봉우리로 내려온다. 이 때 아마데라스는 "일본은 내 자손들이 왕노릇할 만한 땅이다. 황손인 그대가 내려가서 다스려라. 황위 대대로 번성함이 천지가 영원한 것과 같으리라"는 신칙을 내린다. 이를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이라 한다. 또한 아마데라스는 특히 거울과 관련하여 "이 거울은 오로지 나의 분신이라 생각하라. 항상 그대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나를 모시듯이 이 거울을 보아라"는 신칙을 내렸다.

(6)호데리․호오리신화 : 니니기는 히무카에서 지상의 여인과 결혼한다.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 가운데 호데리(火照命=우미사치가미海幸神)와 호오리(火遠理命=야마사치가미山幸神) 형제는 어느 날 서로 도구를 바꾸어 사냥을 하기로 했는데, 동생 호오리가 그만 형의 낚싯바늘을 잃어 버린다. 이에 상심하여 울고 있던 호오리는 해궁으로 가서 해신의 딸과 결혼하며 잃어버린 낚싯바늘을 되찾아 나오고 해신의 도움으로 형 호데리를 굴복시킨다.
이상이 기기신화의 주요 줄거리인데, 여기에 나오는 신통기 계보를 재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 고토아마츠가미(別天神) : 신통기의 맨 앞에 나오는 아메노미나카누시노가미 이하 오대에 걸친 천신들을 가리킨다.
나. 가미요나나요(神世七代) : 고토아마츠가미 이후 다카마가하라에 나타난 구니도코다치노미코토 이하 이자나기, 이자나미에 이르는 7대 천신들의 시대를 가리킨다.
다. 지신오대(地神五代) : 가미요나나요 이후 초대 진무(神武)천황 이전까지 해당하는 황실의 조상신들 즉 아마데라스, 아메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天忍穗耳尊), 니니기,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를 가리킨다.
라. 구니츠가미(國神) : 다카마가하라 및 히무카 계열이 아닌 이즈모 계열의 신들 가령 스
사노오, 오오쿠니누시, 고토시로누시(事代主命) 등을 가리킨다.

3.신사(神社)와 의식 및 교리
유대교는 성전에 신이 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신도는 신사에 신이 거하는 것으로 믿으며, 신의 상징은 거울이다. 신사의 구조는 힌두교의 절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구조를 하고 장식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세 신궁과 이즈모 신사(出雲大社)는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건축된 대표적인 신사이다. 여하튼 조용한 산에 위치하는 일본의 신사는, 10세기에는 3,132개, 1880년에는 약 18만 개나 되었으나 1920년에는 약 12만 개로 줄었다고 한다.
신도는, 교리는 없고 다만 신사의 의식을 중시한다. 그러나 신사의 예배는 개인적이지 교회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의식은 없고 개인적으로 엄숙한 자세로 신사에 들어가서 합장을 하고 절을 한 다음에 본당 앞에 비치된 헌금함에 돈을 넣는다. 신사 중에서 이세 신궁이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기 때문에 제일 신성한 신사로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경도의 이세 신궁 내전에는 둥근 거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신사에 가면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 등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이것을 물론 돈을 주고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이것을 물론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일본에는 명치 유신 때 음력 설을 과감히 폐지하였음)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하기 때문에 연초는 모든 신사들이 그야말로 성시를 이룬다. 1985년 명치 신궁 사무소가 밝힌 연초 참배객은 무려 4백 2십만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헌금 상자에 던진 돈의 액수는 공표하지 않았다.
신도의 예배는 재계(齋戒 : 혹은 청결 의식 미소기 하라이), 공물을 바치는 것, 기도 등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또한 신도의 핵심 의식이 되는 것은 청결 의식이다. 이것은 가미에 접근할 때 더러운 것을 없이한다는 것으로, 가정의 가미타나(神柵 : 일본인들의 80%가 가정에 모신다는 신주 단지에 해당된다)에 절하거나 신사에 들어갈 때는 자신을 깨끗이 한다. 신사 정문의 도리이를 통과하는 것도 재계 행위와 관련되고, 특별히 손을 씻는 곳이 따로 있기도 하다. 미소기 하라이는 한자로는 (계불)로서 우리말로는 푸닥거리를 의미한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이자자끼가 아자나미를 구하러 갔다가 많은 악령들이 몸에 붙어, 그곳을 나오면서 몸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몸에 붙은 부정을 털어버린다는 의미가 있다. 혹자는 ' '와 ' '을 분리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동일시한다. 그러나 신도에서 재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속죄의 사상은 없고, 다만 악신이나 재액(災厄)을 없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는 기독교 식으로 원죄 사상은 없고, 오히려 인간은 본래 선하고 깨끗하다고 보면서도 죄예(罪穢 : つみげかれ)를 떨어버리는 것을 강조한다.
신도의 미소기 하라이는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몸과 마음과 주위를 깨끗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거니와 기독교적 원죄 의식이 없으면서도 일본인들을 도덕적 국민으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고 본다. 이 점에서 기독교적 원죄 사상이 없으면서도 일본 국민을 도덕적 국민으로 만든 일본의 정신적 밑천은 "죄예"와 청결 의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청결 의식에 대하여는 더 구체적으로 내적 청결 의식과 외적 청결 의식으로 구분한다. 외적 청결 의식은 의식전에 음식물도 선별하여 먹으며, 바다나 강에 가서 몸을 침수시킨다. 한국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일제 때 신사 참배와 동시에 어느 앞 바다에 가서 행한 의식은 바로 이 외적인 미소기 하라이 의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생업으로 인하여 직접 강이나 바다에 가서 미소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역을 대표하여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여하기도 하며, 신관이 대행하기도 한다. 일반신도들이 신사에 들어갈 때 입이나 손을 간단하게 씻는 의식은 외적 하라이에 속한다. 지금도 이 외적 하라이는 집단으로 매년 6월말이나 12월말에 강이나 바다에 가서 행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월경중의 여자들과 최근 상을 당한 자들은 신사 참여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내적 의식은 하라이(はちい : 除)로, 신에게 빌어서 죄나 부정을 물리치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승려가 '하라이구시'라는 도구를 예배자나 부정탔다는 물건 위에 통과시키는 의식이다. 이것은 신도도 영적 청결을 강조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미소기 하라이로 청결케 하는 신도에서 가르치는 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도는 죄예를 말하는데, 이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하늘의 죄예(天津罪)와 국민적 죄예(國津罪)가 있다. 天津罪란 주로 농사와 관계된 것으로 밭에 물을 대는 일을 방해하여 물을 마르게 하는 일, 밭에 물대는 통을 깨는 행동, 남의 밭을 빼앗는 것, 신성한 장소나 물건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오물을 뿌리는 행동 등이다. 國津罪란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피부를 상처 내거나 백색의 피부병(문둥병 환자를 의미하는 것 같음) 환자, 근친 상간자, 짐승과 교미한 자, 번개나 조류 등으로 인하여 화를 만난 자 등이다.
신도의 기도는 손을 합장하고 묵념을 한 다음에 두 번의 박수를 치는 연속 동작을 한다. 일반 신도는 신관에게 가미 앞에서 대신 기도를 들리도록 부탁을 하는데, 이때는 대가로 사례를 한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연초에 대부분 신사에 가서 절을 하고 소원 성취의 부적을 사는 것이 관례가 되며, 동네 단위로 신도의 축제일이 있다. 신도의 축제일에 신관이 기도(축문 : のりと)할 때나 유교의 축문 읽는 것처럼 리듬과 음성의 조화를 중시한다. 신관의 기도 내용은 주로 가미의 찬양, 보호와 축복의 기원, 가미의 뜻대로 행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신도도 역시 감사와 헌신에 해당하는 공물이 있다. 헌신은 추수 감사와 같이 농사에 감사하여 추수의 첫 열매를 드린다는 뜻을 지니는 것으로, 쌀이나 술이나 기타 농산물을 바친다.
신도는 체계화된 교리가 없는 대신에 생활로서의 종교를 강조하기 위하여 국가 신도가 폐지되고, 신사 신도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 1956년도에 신사 신도 본청은 소위 경신 생활(敬神生活)의 강령(綱領)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사 신도의 교리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용은,
신도는 천지 유구의 大道로서 숭고한 정신을 배양하며, 太平을 여는 기초이다. 신의 뜻을 두려워하고, 조산의 교훈을 따라서 더 분발하여 도의 정화9精華)를 발휘하고,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사명을 달성하는 근거이다. 여기에 이 강령을 높이 받들어 향후 할 일을 명확하게 밝혀 실천할 의무로 삼아 이것으로 大道를 선양하도록 한다.
1. 가미의 은혜와 조상의 은덕을 감사하고 밝고 깨끗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제사에 열심할지니 라.
1.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며, 가미의 뜻을 받들면서 세계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다.
1. 천황의 뜻을 받들어 의좋게 화합하고, 나아가서 국가의 번성과 세계의 공존공영을 기도할 것 이다.

4.신도의례
<일본의 제의(축제) ‘마쯔리’>
웅장한 축제, 우아한 축제, 화려한 축제 등,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일본에는 다양한 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펼쳐진다. 일본인은 자연이 지니는 신성한 힘을 믿고「신」으로 섬겨왔으며, 이러한 믿음이 신도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신도에 뿌리를 둔 마쓰리는, 신에 대한 제사를 의미하는데 신을 모신 이동신사 즉, ‘미코시’라 불리는 가마를 끌면서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고, 춤을 추는 행위를 통해 신과의 교류하였고, 그로써 오곡풍성, 상업번창, 이웃이나 가족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마쓰리 특유의 열기는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신’관념을 생각해보면 특별한 제사에 대해 이렇게 열을 올리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1월
6일 -도쿄 하루미(東京晴海), 소방 마쓰리
9일-11일 -오사카(大阪 )의 이마미야신사( 今宮神社), 도오카에비스(十日戎)
15일 -나라(奈良)의 와카쿠사야마(若草山), 산불제
17일 -아키타시( 秋田市 )의 미요시신사( 三吉 神社 ), 본텐마쓰리(梵天祭り)

*2월
5일-11일 -삿포로(札幌), 유키(雪)마쓰리
3일 혹은 4일 -나라의 가스가다이샤(春日大社), 만등룡(万燈籠)
3일 혹은 4일 -전국적으로 세쓰분(節分)

*3월
3일 -전국적으로 히나마쓰리(雛祭り)-인형제
12일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물긷기

*4월
8일 -전국적으로 절에서 꽃마쓰리(佛陀誕生祭り)
14일-15일 -다카야마(高山)의 히에신사(日枝神社),다카야마마쓰리
13일-17일 -닛코(日光)후타라산신사(二荒山神社), 야요이(彌生) 마쓰리

*5월
3일-4일 -후쿠오카시(福岡市)의 하카타(博多), 하카타돈타쿠
15일 - 교토(京都)의 시모카모신사(下鴨神社), 카미카모(上賀茂)신사,아오이(蔡) 마쓰리
제삼일요일 -교토의 구루마사신사(車折神社), 미후네(三船)마쓰리

*6월
9일-17일 -도쿄의 히에신사(日枝神社), 산노(山王)마쓰리
14일 -오사카의 스미요시다이샤(住吉大社) 모심기 마쓰리

*7월
1일-15일 -후쿠오카시,하카타야마가사 마쓰리
7일 -전국적으로 다나바타(七夕)(일부지역에서는 8월중에 실시)
13일-16일 -전국적으로 오본 (お盆)마쓰리 (일부지역에서는 8월중에 실시)
14일 -와카야마(和歌山)의 나치카쓰우라(那智勝浦), 나치불마쓰리
중순경 -히로시마(?島)의 미야지마(宮島), 이쓰쿠시마신사 (?島神社)마쓰리
16일-17일 -교토 야사카(八坂)신사, 기온(祇園) 마쓰리
24일-25일 -후쿠시마(福島) 하라마치(原町), 히바리가오카의 말( 馬)마쓰리
24일-25일 -오사카의 텐만구(天?宮), 텐진(天神)마쓰리

*8월
1일-7일 -아오모리(?森), 네부타(ねぶた) 마쓰리
3일-6일 -아키다(秋田), 간토(干燈) 마쓰리
6일-8일 -센다이(仙台), 다나바타(七夕)마쓰리
12일-15일 -도쿠시마(?島) 아와오도리(阿波踊り) 마쓰리
16일 -교토, 다이몬지 오쿠리비(大文字送り火)

*9월
14일-16일 -가마쿠라( 鎌倉), 야부사메 (流鏑馬)마쓰리

*10월
7일-9일 -나가사키(長崎), 오쿤지(おくんち) 마쓰리
9일-10일 -다카야마의 하치만구(八幡宮), 다카야마 마쓰리
11일-13일 -도쿄의 혼몬지(本門寺) ,오에시키(御?式) 마쓰리
17일 -닛코의 도쇼구(東照宮), 가을 마쓰리
22일 -교토의 헤이안진구(平安神宮), 지다이(時代) 마쓰리

*11월
3일 -하코네(箱根), 다이묘교레쓰(大名行列) 마쓰리
3일-4일 -사가(佐賀)가라쓰, 오쿤치마쓰리
15일 -전국적으로 시치고산(七、五、三) 마쓰리

*12월
17일 -나라의 가스가다이샤, 와카미야온 마쓰리(若宮おん祭り)
31일 -교토의 야사카신사, 오케라 마이리(おけら?り)

- 도쿄 간다 마츠리
치요다구에 위치한 간다는 헌책방가로 유명한 곳이다. 이 간다의 마츠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벌인 축제가 그 기원이다. 매년 5월 14일에서 15일에 행해진다.과거에는 히에(日枝)신사의 산노(山王)마츠리, 후카가와(深川)마츠리와 함께 에도의 3대 마츠리의 하나로 에도 시대 '마츠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108개의 자치회에서 90개의 미코시(御輿)를 선보일 정도로 그 규모는 엄청나다. 간다 주민뿐만 아니라 은행이나 일반 기업들도 참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 오오사카 텐진사이(天神祭)
오오사카 텐진사이는 일본 3대 마츠리이자 일본 3대 선상마츠리이기도 하다. 서기 949년에 덴만구(天滿宮) 신사가 건립이 된 다음해 6월 1일에 경내 해변에서 가미호코(창과 도끼 구실을 하는 무기)를 바다에 띄워서 그 가미호코가 표착한 해변에 제사단을 마련하여 시령을 안치하고 목욕재계한 것이 그 기원이다. 매년 7월 24일에서 25일에 행해진다. 하이라이트는 25일에 있는 '여름대축제'와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후나토쿄(船渡御)이다. 후나토쿄는 약 100여 척의 화려한 배들이 도지마가와(堂島川)와 오가와(大川)를 거슬러 올라가는 행사이다. 육지에서 뿐만 아니라 강에서 축제를 즐기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다.

- 쿄토 기혼 마츠리
고대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는 고대 일본의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어 문화유산을 느낄 수 있는 도시이다. 기온 마츠리는 일본 중요 무형민속문화재로 약1100년 전에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기원했던 어령회(御靈會)가 그 기원이다.매년 7월 1일부터 31일까지 행해진다. 기혼마츠리의 하이라이트는 17일에 있는 야마보코 행진으로, 거대한 야마보코가 거리를 행진한다. 이 야마보코를 보기 위해 각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 각 지방별 주요 마츠리

- 센다이 다나바타(七夕)마츠리
1928년 8월에 동북산업박람회의 행사로서 개최된 것이 현재의 센다이 다나바타마츠리의 원형이다. 1946년 8월에 있었던 센다이 다나바타 마츠리는 전후 부흥의 시발점으로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과거 센다이 다나바타 마츠리는 소박하고 온화한 민속행사였으며 추석을 앞두고 조상과 논의 신을 염원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것이 전승되어 현재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다나바타마츠리가 되었다. 센다이 다나바타마츠리는 매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행해지며, 상가나 거리에는 크고 화려한 다나바타 장식이 눈에 띈다. 또 일본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거리를 가득 메운다.

- 도쿠시마 아와오도리
일본추석인 오봉에는 죽은 사람의 혼을 염원하는 의미로 추는 봉오도리가 있다. 동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마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봉오도리는 무로마치 시대에 서민들에게 보급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시코쿠 도쿠시마현의 아와오도리가 유명하다. 유래는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 하치수카케가 도쿠시마현 에 성을 세웠을 때 잔치상에서 서민들이 춤을 췄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춤추는 바보에 보는 바보 같은 바보라면 안 추면 손해다 손해"이라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매년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행해진다.

- 후쿠오카 하카타 기온 야마가사
후쿠오카중심인 하카타(博多)에서 열리는 하카타 기온 야마가사는 남자마츠리다. 가마쿠라시대 때 하카타 일대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그 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기원한 것이 시작이다. 이때 하카타의 거리는 일본남성의 웅장함과 묵직함으로 거리를 가득 메운다. 마지막날에 열리는 오이야마라는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야마가사를 행진하는 속도를 겨루는 것으로 정신을 통일하여 야마가사를 짊어지고 달리는 남성들의 힘찬 모습이 여름의 무더위를 시원하게 해준다. 매년 7월 1일 부터 15일까지 행해진다.


- 히로시마 미야지마 간겐사이(宮島管絃祭)
미야지마의 이츠쿠시마 신사는 12세기 당시 권력자였던 다이라노키요모리에 의하여 세워진 세계문화유산이다. 해상에 세워진 신사는 주위 배경과 건물이 하나가 되어 보는 이를 압도시킨다. 이츠쿠시마 신사는 그의 업적을 엿볼 수 있으며 헤이안시대의 대표적인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곳은 일본삼경(3景)이라 하여 미야기현의 마츠시마, 교토의 아마노하시다테(天橋立)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경승지이다. 이 이츠쿠시마 신사의 대표적인 행사가 바로 간겐사이이다. 오오사카 덴진사이와 함께 일본 3대 선상마츠리의 하나로 과거 교토 귀족들이 배 위에서 여가 생활 을 즐긴 것이 전해wu 현재에 이른 것이다. 매년 7월 25일에 행해지며 선단의 웅장함과 해면에 비친 화톳불의 아름다움의 조화는 환상적이다

- 네부타 마쯔리(ねぶた祭)
동북지방의 3대 마쯔리 중에 하나. 매년 8월 1일부터 8월 7일까지 행해진다. 네부타 마쯔리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불의 축제로 각지에서 열리는 유명한 마쯔리 중에서도 크게 성장한 축제다. '네부타'란 커다란 나무나 대나무에 종이를 부친 엄청나게 큰 등롱(나무, 돌, 금속 따위로 만든 테두리 안에 불을 붙이게 한 기구)을 말한다. 큰북의 용감하고 힘찬 리듬과 눈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피리소리와 「ラッセラ!(랏세라)」라는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춤추며 행진한다. 화려한 타스끼(일본 옷의 소매를 거치적거리지 않게 걷어붙여 등에서 X자형으로 엇갈리게 매는 멜빵) 차림의 하네또라 불리는 가운차림의 대집단이 열광하는 가운데, 대단히 화려한 색의 거대한 무사인형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아름다움도 호쾌한 마쯔리이다.
"네부타"의 어원은 "眠たい(네타이, 자고싶다)"라고 전해진다. 동북각지에서는 예로부터 악령을 물리쳐 한여름의 졸음을 깨우는 "眠り流し(네무리나가시, 칠석에 등롱을 강이나 바다로 떠내려보내는 행사. 가을 수확 전에 일의 방해가 되는 졸음을 쫓는다는 의미로 종이인형을 바다에 띄워 신배웅을 함)"가 행하여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대형화되어진 것은 에도(江戶)시대부터다.
불을 밝힌 커다란 네부타 인형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현재의 마쯔리로 발전했다. 마지막날 밤은 네부타를 배에 태우고 화려한 네부타와 힘찬 하야시(피리, 북 등으로 박자를 맞추며 흥을 돋우려고 연주하는 음악)로 악령을 불러와 멀리로 쫓아버리기 위한 해상운행이 花火대회와 함께 실시된다.

- 요시다노히(吉田の火) 마쯔리
에도 시대까지는 활화산이었던 후지산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전승되어진 축제. 일본의 3대 괴기 축제의 하나로 현재는 산을 달래는 축제로 알려져 있다. 당일 저녁부터 미코시 토기요 (神輿渡御,제례 때 신위를 모신 가마들의 행렬)가 시작되지만, 신여(神輿)는 후지산을 본 따서 붉은 칠을 한「오야마상(お山さん)」이라고 불리 우는 독특한 것이다. 오타비쇼(御旅所,제례 때 신여를 본전에서 옮겨 임시로 안치하는 곳)에 안치되면 시내에서부터 산등성이의 십분의 일까지 준비된 오오타이마쯔(大松明)와 자식에 해당하는 타이마쯔(松明)에 일제히 불이 붙여져, 도로 1면이 불바다가 된다. 또 산등성이의 십분의 오부터 십분의 팔까지의 산장에서도 타이마쯔가 태워져, 마을과 산이 여름밤하늘을 수놓는다. 다음날은 억새풀을 역은 신여가 돌아오는「스스키 마쯔리(すすき祭り)」로 활기를 띤다.

- 나마하게(なまはげ) 마쯔리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은 없는가?...우는 아이는 없나?...게으른 며느리, 게으른 사위는 없는가?...」.귀신가면을 쓰고 도롱이에 허리띠를 하고, 짚신을 신고, 커다란 나무식칼을 든 젊은이 몇 명이 「워..워..」하고 괴성을 내며 마을을 돌고, 각 집을 찾아가는 오오미소카(大 日,섣달그믐날)의 행사이다. 각 집의 주인은 정장을 하고 귀신을 맞이하여 환대한다.「나마하게」는 화로에 생긴 "나모미(なもみ)"라고 불리는 그을음을 제거하는 "나모미하기(なもみはぎ)"에서 유래되었다. 그을음이 생길 정도로 게으른 사람을 징벌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 귀신은 사악함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새해의 신이기도 하다. 나마하게가 떠나면 새해 첫 하늘에 빛이 비춰지며 새해가 밝아온다.

<축제>
-봄 (春)
[이누야마 마쓰리 축제](4월)
거리에 13대의 가라쿠리 인형의 산차가 행렬을 지어 피리와 북의 가락에 맞추어 가라쿠리 인형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밤이 되어 산차 의 초롱등에 불을 켠 행렬이 시작되면 핑크색의 벚꽃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산차는 에도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 축제는 330 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벚꽃의 명소, 나고야에서는 히가시야마(東山)공원 평화공원,메이조공원,야마자키강변,아라이제키 녹지등이 유명하다.

-여 름(夏)
[일본라인 여름 마쓰리 축제] (8월)
국보 이누야마성을 배경으로 육지와 배 위에서 불꽃을 쏘아 올려 수많은 색채로 아름답게 수놓는 여름 밤의 불꽃놀이 대회는 이 축제의 절정이다.
[ 미나토 마쓰리 축제 ](7월)
고베(神戶)항과 요코하마항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무역항 - 나고야항을 무대로 뗏목의 명인들의 뗏목타기 대회와 불꽃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가 있다.
여름철은 칠석제를 행하는 계절이 기도 하여 7월 7일에는 조릿대에 각자의 소원을 적은 종이쪽지를 달면 소원성취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근교의 이치노미야시와 안조시의 칠석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가 을(秋)
[나고야 마쓰리 축제 ] (10월)
이 지방의 영주였던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 히데요시 등의 일화가 얽힌 시대의 풍속을 표현한 행렬을 중심으로 산차렬과 꽃으로 장식한 자동차의 퍼레이드 등, 약 5천여명이 제각기 의 모습을 자랑하며 행진하는 광경은 일대장관이다. 밤에는 시 중심에서 요이마쓰리 축제가 시작되며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게 된다. 또한 오스다이도초닌 마쓰리축제는 인기가 높고 나고야의 서민적 모습을 즐길 수 있다.

-겨 울 (冬)
[ 히메노미야 풍년제와 다가타신사 풍년제 ] (3월)
`히메노미야 풍년제`이누야마시 오가타 신사와 `다가타 신사 풍년제`고마키시는 오곡 풍요, 사업 번영,자손 번영을 기원 하여 매년 3월 15일 이전의 이날과 제일 가까운 일요일에 개최되는 축제이다. 상고시대 이래 음악숭배 신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희구한 축제이다.

1.일본의 명절
1) 오쇼오가쓰
오쇼오가쯔란 우리의 설날과 같이 새해 첫날은 모든 것들이 새로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일년 중 가장 성대한 명절의 하나로 일본에서는 간지쯔 또는 간단 이라고도 부른다. 새해 1월1일부터 3일 까지를 ‘산가니찌’라 하여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 신년의 새 출발을 축하한다.
새해 첫날 아침 일찍 신사나 사원에 참배를 하게 되는데 도쿄의 경우 메이지 신궁, 나고야라면 아쯔타 신궁이라는 식으로 참배객들이 모이는 신사는 정해져 있다.
일본의 설날은 중국의 영향으로 원래는 음력의 첫날을 의미했으며, 이 기간 동안 행해지는 일반적인 관습들은 고대인들의 종교적 행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은 한해가 시작되는 새해 첫날에 조상신들의 축복과 풍작을 기원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거의 종교적 의미는 사라지고 신년을 경축하는 관습만이 남아 지켜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학교나 회사도 1~2주일 동안 휴가를 가지게 되며, 단신부임을 하고 있던 사람이나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도 귀성하여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된다. 설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하나로, ‘스스하라이’라 하여 12월중 길일을 택해 집안의 대청소를 실시한다. 이것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집안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원래는 1년간의 액을 털어 버린다는 민간 신앙적 의미를 가진 행사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설날의 장식물로 집 입구에 세우는 ‘가도마쯔’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록수인 소나무와 생명력이 강한 대나무와 매화를 곁들인 장식물인데,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송죽매를 길조로 여겨 왔으며 특히 소나무는 장수를 의미하는 나무로 숭앙되어 왔다. 요즘은 본격적인 가도마쯔는 일반 가정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대개 큰 회사의 사옥 현관이나 대형 상점 앞에서도 볼 수 있다.
일반가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설날의 장식으로는 ‘시메카자리’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 집 대문앞에 장식하는 것이다.
설날에 특별히 준비하는 음식으로 오세치요리가 있는데, 이것은 칠기로 만든 찬합에 생선을 어묵 등과 곁들여 지진 구치도리, 구이요리, 식초를 곁들여 만든 요리 등 여러 가지 음식이 담겨지게 된다. 보기에도 화려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인데, 이것은 정초 3일 동안 주부의 가사일을 줄인다는 배려와 함께 오늘날의 오세찌요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일본에도 새해를 경축하기 위해 우리 나라의 떡국과 비슷한 오조오니를 먹게 되는데, 이것은 지방마다 또는 가정마다 만드는 방법과 재료는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개는 떡을 주로 하고 생선, 닭고기, 야채 등을 넣어 국으로 만든 일본식 떡국이다. 이 밖에도 새해 첫날이 되면 가족이 모여 앉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오토소라는 술을 돌아가며 마신다. 이 오토소는 1월1일부터 3일간에 걸쳐 축하주로서 마시는 술인데, 이것을 마시면 1년 내내 재앙을 물리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전해져 온다. ‘하쯔모우데’라고 하는 신사나 절에 새해 첫 참배를 하며 한해동안의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기도 하고, 새해 인사를 나누기 위해 친척의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2) 고이노보리(鯉のぼり)
중국에서는 잉어가 황하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오랜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나오는 잉어처럼 남자아이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 출세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고이노보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러 가시 색으로 물들인 모형 잉어를 긴 대나무에 달라 마을 입구나 자신의 집 마당에 세워 두면 5월의 맑은 하늘에 정말로 잉어가 헤엄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 다나바타(七夕)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이별을 하게 된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차례 7월 7일날 만난다고 하는 중국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 일본에서 ‘다나바타’라고 하는 칠석이다. 이것은 본래 음력 7월 7일의 축제이던 것이 현재는 양력으로 행해진다. 지방에 따라서는 한달 늦추어 8월 7일에 행사를 치르는 곳도 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단자쿠’라고 하는 대나무에 소원을 적은 형형색색의 종이를 장식하여 온 가족이 함께 즐기기도 하며, 동복지방의 중심도시인 센다인 등에서는 다나바타 마쯔리에 대규모의 장식물을 만들어 상점가에 장식해 놓고 관광객을 불러모으기도 한다. 보통은 6일날 밤 처마 끝에 단자쿠를 매달고, 다음날 밤에는 이를 거두어 강이나 바다에 띄워보내곤 했으나, 최근에는 이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지역이 많아져,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불에 태워서 처분하고 있다.



4) 오 봉(おぼん)
불교의 전설에 의하면, 석가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옥에 떨어져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구하기 위해 공양을 한데서 유래하고 있다. 오봉은 우리 나라의 추석명절과 유사한 것으로, 음력 7월 15일을 전후하여 며칠간 죽은 조상들의 영혼이 후손의 집으로 돌아온다고 믿고, 이 때가 되면 귀성을 하여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를 한다. 대부분은 음력 7월 15일 경이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음력 8월 15일에 행하는 곳도 있다. 이 날은 조상들의 영혼이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7월 13일 저녁 해가 진 뒤에 영령이 길을 잃지 않도록 문 앞에 맞이하는 불을 밝히거나 실내에 초롱을 달고 불단을 깨끗하게 청소한 다음 꽃과 향로를 갖다 놓고, 야채나 과일 등 평소보다 정성을 들인 음식을 장만하여 이를 공물로 바친다. 16일 저녁에는 집을 찾아왔던 영령들이 잘 돌아가라는 의미로 다시 불을 피운다. 이때 불단에 공물로 바쳤던 음식 등을 강이나 바다에 흘려 보낸다. 이 밖에도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이나 넓은 공공장소에서는 초롱을 내걸고 노래와 북소리에 맞추어 봉오도리라는 춤을 춘다. 이 오봉기간 중에는 대부분의 회사는 휴무에 들어가고 타향에 나가 생활하던 사람들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야말로 일본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히나 마쓰리(ひな祭り)
여자아이들을 위한 행사로 3월 5일에 열린다. 여자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히나마쓰리가 되기 며칠
전부터 장래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계단식으로 만든 붉은 히나단에 옛 궁중의 옷을 입힌 작은 인형들을 각 단별로 장식한다. 히나마쓰리는 원래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지만 히나 인형을 장식하게 된 것은 에도(江戶) 시대부터라고 한다. 히나단은 원래는 7,8단이지만 매우 비싼데다가 집에 장식할 공간도 없으므로 이렇게 격식을 다 차리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히나단은 히나마쓰리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장식해 3월 3일이 되면 치운다.

- 이들 명절 및 마쯔리는 대부분 신도의 의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신도라는 종교의 대표적인 제의 이면서 의례이다. 일본인들은 생활 속에서도 신에게 소원을 빌거나 하루하루의 안녕을 위해 합장하고 기도하는데 마쯔리 기간이 되면 이런 의식은 극에 달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마쯔리 기간이 오면 자신들이 평소 기원하는 것들을 종이에 적어 매달거나 마쯔리에 특성에 맞는 일종의 기원의식을 치룬다. 그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무속신앙과 비슷한 특성이 있다. 처용의 무서운 얼굴 모습으로 악귀를 쫓는다던가 귀신이 팥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팥죽을 먹음으로써 액땜을 한다던가 하는 의식들이 모두 이런 기원의식과 관련이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이 것이 종교적 제의에 포함되면서도 무겁지 않고 즐거운 축제로써 받아 들여졌다는 점이고, 악신이나 선신을 떠나 신과 밀접해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이남교의 韓日似典] 왔쇼이(ワッショイ)와 왔소 (2003. 6. 27)

신천지 무사 당도후 기뻐 외치던 환호성
일본의 마쓰리(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미꼬시(御神輿)라고 하는 가마다. 마쓰리만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훈도시(아래만 가리는 가벼운 팬티같은 것) 차림의 원시적 복장을 하고 신령을 모시는 가마(輿)를 밀고 끌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ꡒ왔쇼이! 왔쇼이!ꡓ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행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일년내내 일본의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마쓰리 풍경이다. 그런데 이런 마쓰리의 '왔쇼이ꡑ라는 구호를 우리 한국인들이 들으면 여지없이 ꡒ왔소, 왔소ꡓ로 들린다. 사실 이러한 마쓰리는 고대 오사카 부근의 가와찌아스까(河內飛鳥)에 자리잡은 도래인들의 단지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대에는 일본을 '아시하라노 나까쯔구니'(葦原中國)라고 불렀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갈대가 무성한 중간의 나라'라는 말이 되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위(葦) 즉 갈대는 고대 한국어로 '새'라고 했는데, 일본어 모음인 '아'를 더해서 '아새⇒아시'가 되고, 원(原)은 고대 한국어로는 '발', 현대어로는 '벌'로써 '들판'이란 뜻이다. 따라서 '아시하라'(葦原)는 '새 벌ꡑ 즉 '새로운 토지ꡑ라는 의미다.
고대인들은 일본을 '황천(黃泉)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나라ꡑ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본으로 향하는 많은 고대인들은 죽음을 무릅쓴 왕래를 하였으며, 바다 중간쯤에 이르면 '죽음의 의식ꡑ을 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사히 신천지에 당도하면 그들은 기뻐서 '무사히 왔소ꡑ라고 외쳤고, 그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눈 것이 '마쓰리'의 출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장례식에나 쓰는 슬픔의 '상여'가, 일본에 건너가면 축제의 '미꼬시'로 변해 버린다.
일본의 방방곡곡에서 축제때만 되면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왔쇼이ꡑ(ワッショイ)는, 실은 죽지않고 무사히 건너온 고대 도래인들의 환호성이었던 것이다.
왠지 나는 일본의 마쓰리를 볼 때마다, 험한 바다를 건너온 이들의 비장한 각오와 새로운 나라에 무사히 도착한 기쁨으로 날뛰는 고대 도래인들의 생명의 약동같은 것을 느낀다.

5.신사와 신도
일본에는 현재 약 10여만 개소의 신사가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사라는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일본인들은 큰 나무나 산 혹은 큰 바위 등을 가미가 깃들어 있는 신성한 지역으로 생각했다. 가령 원시적 신사의 형태는 히모로기(神籬) 혹은 이와사카(磐境)라고 불리웠다. 여기서 히모로기란 신성지역에 상록수를 심고 거기다 울타리를 두른 장소를 말하며, 이와사카란 큰 돌을 세워 원형 혹은 방형으로 두른 곳을 가리킨다. 이것이 발전되어 오늘날과 같은 신사의 형태가 된 것이다.
-신사 건물의 제요소 : 신사 건물과 시설로는 도리이(鳥居), 고마이누( 犬), 데미즈야, 하이덴(拜殿), 신덴(神殿) 등이 기본이다. 먼저, 지도에 신사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식이 바로 도리이다. 신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이 도리이에는 "여기부터 신성지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기원에 관해서는, 고대 인도의 트라나(불탑을 둘러싼 울타리의 문)에서 왔다는 설, 중국의 화표(華表, 왕성이나 능묘 앞에 세우는 문)가 원형이라는 설, 혹은 한국의 솟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도리이의 재료는 보통 노송나무나 삼나무 등의 목제가 기본이지만, 근세 이후 석제, 청동제, 철제도 등장했다.

고마이누는 신사의 수호 및 퇴마를 위해 신사 입구 혹은 하이덴 앞에 놓은 한 쌍의 사자상(해태상)을 말한다. 여기서 '고마'란 고려 혹은 조선을 뜻하는 말이므로 그것이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고마이누가 신사에 놓여지게 된 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라고 한다.
한편 하이덴이란 일반인이 신사에서 가서 참배하는 장소를 말한다. 통상 하이덴은 신사의 본전에 해당하는 신덴 앞쪽에 세어져 있으며 거기서 신관이 신도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즈모대사(出雲大社)처럼 하이덴이 신덴과 떨어진 곳에 별도로 세워져 있는 경우도 있고 이세신궁이나 아츠타신궁(熱田神宮)처럼 하이덴이 아예 없는 신사도 있다.
마지막으로 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신덴이다. 거기에는 신사에서 모시는 제신과 신체(神體, 제신을 상징하는 예배 대상물로서 구슬, 거울, 검, 방울 등 신사에 따라 다양하다)가 안치되어 있으므로 일반 참배객은 출입금지로 되어 있다. 신덴의 지붕 위에는 치기(千木, 정면의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 X자형으로 튀어 나온 장식)와 가츠오기(堅魚木, 마룻대 위에 직각으로 늘어 놓은 각목)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신사에만 있는 고유한 표지라 할 수 있다.(도리이는 간혹 일본의 불교 사원에도 있다) 통상 일본 신사의 건축양식을 말할 때는 바로 이 신덴 양식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신사신앙 : 현재 일본에 있는 약 10만여 개소의 신사 중에서 일반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신사로는, 이나리신을 모시는 신사(약 3만2천여 개소), 하치만신을 모시는 신사(약 2만8천여 개소), 이세신을 모시는 신사(약 1만8천여 개소), 텐만텐진(天滿天神)을 모시는 신사(약 1만여 개소) 등을 들 수 있다.

(1)이나리 신앙 : 붉은 색 도리이와 여우상이 있는 이나리 신사에는 이나리신이 제신으로 모셔져 있으며, 일본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여우를 사자로 삼고 있는 이나리신은 원래 농경신으로서 오곡을 비롯하여 모든 식물 및 양잠을 주재하는 가미로 신앙되어 왔다. 이 이나리 신앙의 총본사는 교토의 후시미이나리(伏見稻荷)대사이다. 후시미신사에서 매년 2월초에 행해지는 하츠우마사이(初牛祭)의 기간은 봄에 산의 가미가 마을로 내려와 밭의 가미가 되는 농경 개시의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농민들의 소박한 신앙이었던 밭의 가미에 대한 신앙과 이나리 신앙이 결합함으로써 이나리 신사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 상공업이 성행함에 따라 이나리 신앙은 종래의 농업신에 더
하여 식산흥업신, 상업신, 어업신 등으로 확대된다. 이리하여 이나리 신앙은 농어촌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널리 퍼졌다. 특히 에도에는 수많은 이나리 신사가 권청되었으며, 오오사카 지역에서는 "병에는 홍법대사(空海), 욕구에는 이나리"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이나리신이 현세이익적인 장사번창과 개운출세를 가져다 준다고 신앙되었다.

(2)하치만 신앙 : 헤이안 중기 이후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하치만 신앙과 구마노(熊野) 신앙이었다. 이 둘은 불교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본지수적설에 입각한 신사 유래담(緣起)을 통해 일반 서민 사이에 깊이 침투되었다. 특히 하치만신은 가마쿠라 막부를 창시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99)대에 이르러 막부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며, 이후 전국 신사에 권청되어 급격한 발전을 보았다. 이 하치만신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제10대 오진(應神)천황이 바로 하치만이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하치만신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씨족의 조상신이라고도 한다. 전술했듯이 하치만신은 일찍이 불교와 습합하여 하치만대보살이라는 칭호로도 불리워져 왔다. 총본산은 큐우슈우 지방의 우사하치만(宇佐八幡)궁이다.

(3)이세 신앙 : 이세신 즉 아마데라스는 전술했듯이 신도의 판테온에서 최정점에 있는 가미이다. 원래 아마데라스는 태양의 여신으로서 오곡풍요의 가미였는데, 기기신화에서 이 여신이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자리매김되어졌고, 황조신 아마데라스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세신궁은 국가 제일의 종묘로서 천황만이 공물을 바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 이후는 이세신궁의 온시(御師, 신사에 소속된 기도사)들의 활동에 의해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아마데라스가 일본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어 광범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 이세신궁에 참배해야 한다는 관념이 국가적으로 형성된다.
이와 같은 중세의 이세 신앙은 주로 오곡풍요의 농경신으로서의 아마데라스가 강조되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아마데라스는 점차 현세이익적 가미로 변용되어 갔다. 특히 근세에는 오카게마이리 혹은 누케마이리라 하여 이세신궁을 참배하는 열광적인 집단 순례가 약 60년을 주기로 유행처럼 번졌다. 한편 이세신앙이 서민신앙으로 전개된 또 하나의 현상으로서 삼사탁선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즉 중세 후기에서 근세에 걸쳐 서민들 사이에는 삼사(이세신궁, 하치만궁, 카스가대사)의 가미 이름과 탁선을 적은 족자를 거실에 거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정직, 청정, 자비를 강조한 이 삼사 탁선은 민중들에게 친숙한 교의가 되어 시대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4)텐만텐진 신앙 : 일본에서는 지금도 매년 입시철이 되면 스가와라노미치자네(管原道眞, 845-903)를 학문의 신이자 텐진(天神)으로 모시는 텐만(天滿)신사에 가서 합격을 기원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모습이 흔히 눈에 띤다. 이 텐만텐진 신앙은 원래 다양한 신격의 변천을 겪었다. 미치자네는 원래 헤이안 전기에 학문의 명가에서 태어나 문장과 시가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로서 당시 천황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는 우대신이었는데, 좌대신 후지와라노도키히라(藤原時平, 871-909)의 책략에 의해 좌천되어 불운하게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사후에 교토에는 심상치않은 낙뢰가 떨어지고 후지와라씨 일가에서 의문의 변사가 이어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관공의 원령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 원령을 위로하는 텐진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947년 헤이안쿄(平安京) 북부에 미치자네를 모시는 기타노텐만궁(北野天滿宮)이 창건되기에 이르른다. 미치자네를 텐진이라 하여 뇌신과 결부시킨 것은 이 기
타노 지역에 이미 농민의 농경생활과 결부된 뇌신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뢰는 농경에 긴요한 것으로서 비를 가져다 준다고 여겨졌을 것이고, 이와 같은 소박한 농경신앙의 기반 위에 미치자네의 원령을 위무하는 텐진신앙이 결합된 것이다. 그런데 헤이안 중기부터 미치자네는 유학자들의 씨신(조상신)이자 학문의 신으로 관념되기에 이른다. 이는 아마도 미치자네의 뛰어난 학문적 능력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근세 서민들의 교육기관인 테라코야(寺子屋) 학동들이 매달 25일에 근처의 텐만신사에 참배하거나 텐진강(天神講)을 조직할 정도로 텐만텐진 신앙이 일반인 사이에 널리 침투되었다.

6.일상생활에서의 신앙생활과 분포도
- 일본인들의 종교의식은 신앙차원이라기보다는 생활 관습적이고 의례적인 의미로 받아들임

1.가미다나(神棚)에 참배(가장 대표적)
-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한 뒤 각 가정에 설치된 가미다나를 향해 조상의 영에게 인사하고
지금까지 무사히 지내온 것을 감사하며 하루의 안녕을 기원
또한 가족의 입학, 진학, 졸업, 성인식, 취직, 환갑 등의 중요한때도 안녕을 기원
심지어 자동차를 새로 샀을 경우에도 액땜을 위해 가미다나 앞에서 제사를 올림
2.출생식-아기가 태어나면 건강을 기원하여 신사의 우지가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에게 예를 올림
3.결혼식-결혼식은 신사나 교회에서 신도식으로 화려하게 올림
4.장례식-신도에서는 죽음을 부정하게 여김,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스님이 참석하여 불경을 외는 가운데 화장을 함
5.성년식-20세를 맞이한 남녀의 성년식 때 신사 참배
성인이 된 이후 야쿠바라이(액땜)=남자 42세, 여자 33세 때
도시이와이=61세 때의 간레키(환갑)를 위한 신사 참배.
6. 하츠모우데-정월 초하루에 젊은 층까지 신사를 참배
7. 오본-매년 7월에는 고향에 내려가 절에 가서 조상에게 공양하는 불교식 행사를 치룸
8. 피안-봄,가을에는 조상의 묘를 찾아 묘에 물을 끼얹음
9. 설날 아침-가족이 모두 모여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면서 설날을 축하
조오니(떡국)를 먹음
또한 하츠모오데라 하여 영험있는 신사를 찾아 참배
10.세츠분모오데- 입춘 전날 액풀이를 위해 신사를 참배
츠이나사이(追儺祭) 혹은 오니야라이(鬼やらい)라 하여 귀신쫓는 행사
(콩을 뿌리면서 "잡귀는 물러가고 복신은 들어와라"고 외침)
11.오미야마이리- 아기가 태어난 뒤 남아는 32일, 여아는 33일이 되는 날 신사에 참배
우부스나가미(産土神)신사에게 기의 건강한 발육과 행복을 기원
12.시치고산노이와이- 아이의 성장기에 세 차례 더 오미야마이리를 행함
남아는 3세와 5세 때, 여아는 3세와 7세 때의 11월 15일에 행함



<분포도>
종교별 신도수의 비율은 불교가 48.2%, 신토[神道:자연숭배․조상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고유종교로, 神社를 중심으로 발달한 神社神道가 주류]가 51.2%를 차지하여 일본의 양대 종교가 되고 있고, 신․구교를 합친 그리스도교는겨우 0.6%를 차지한다.
일본인은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일본인 중에서 확고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그렇다고 무신론자라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대부분 자신이 '무종교'(無宗敎)라고 대답한다
여론조사 결과 일본인의 70%가 무종교(無宗敎)라고 대답한다
이상한 것은 이들 가운데 75%가 무종교이지만 종교심은 중요하다고 답한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종교심이 대단히 강한 민족이지만 특정 종파에 소속되는 것은 싫어해 신을 인정하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무종교(無宗敎)라는 특이한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7.맺음말

- 모노노케 히메에서 보여지는 일본인의 신관념
일본에서는 모든 것이 신이다. 모든 자연물에 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이 지배하고 이용할 것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보여지듯 멧돼지나 들개, 사슴들이 모두 신이고 그 중 인간보다 못한 존재는 없다. 신도 인간도 일정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으며 다만 인간의 자만으로 인해 자연과 신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이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이 주인이 아님을 알고 있으며 자연물에 대해 신으로부터 빌려서 사용한다는 믿음 역시 짙게 깔려 있다. 그래서 자연재해 등에서는 신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 것을 기원한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통해 신은 인간과 화해한다. 또한 신에게 있어 자연물이 의례 그렇듯이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이라는 관념이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 나름의 이익추구가 있고 자연도 그 나름의 나아가는 방향이 있는데 이것을 모두 인정한다. 대신 그런 상태가 유지되기 위해,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서로의 범위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미(神)의 개념
가미라는 용어는 첫째로, 고대 기록에 언급된 하늘과 땅의 각종 신들과 신사에서 경배의 대상이 되는 여러 영들을 의미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새, 짐승, 식물, 나무, 바다, 산, 및 다른 자연물들도 두려움과 비상한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가미로 불리워진다. 가미는 탁월한 고상함이나 선이나 봉사 정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공포와 두려움이 된다면 악하고 무시무시한 것도 가미가 된다. 인간 신 가운데는 천황(미카도)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번개도 가미가 되고… 심지어는 여우도 간사성과 두려움으로 가미가 된다.

신도의 가미는 다신론이어서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소위 팔백만 신들을 말하는데, 팔백만이란 수적인 개념이 아니다. 팔백만신(八百万神)을 읽을 때는 야오 요로주로 읽는데 야오는 다양성을, 요로주는 많지만 일정하지 않는 수를 가리킨다. 이렇게 많은 신들 가운데서 최고의 인격신은 없다는 것이 가미의 특징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태양의 여신을 최고의 신으로 존경하는데, 이것은 일본도 중국이나 이집트처럼 태양을 중시한 사상에서 나온 것이나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태양 신은 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