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 야쿠자의 역사

YOROKOBI 2008. 1. 28. 01:06
 

1.야쿠자의 유래

 야쿠자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온 몸에 문신을 하고 파마 머리에 새끼손가락을 절단한 범죄자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야쿠자라는 말의 어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야쿠자라는 단어는 일본식 블랙잭인 '오이초 카부'라는 인기 있는 카드게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 게임은 카드숫자의 합이 19인(블랙잭은 21) 사람이 이기는 게임인데 19이상의 숫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8-9-3(야쿠자)은 숫자의 합이 20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쓸모 없는 사람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또 하나는 화투 비슷한 노름중에 카르타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1에서 10까지 숫자가 쓰인 카드로 여러 게임을 한다. 그 중 삼마이(三枚) 카르타는 3장의 패를 뽑아 합이 9가 되면 최고로 치는데 잘못해서 8, 9, 3 세 장을 쥐면 최악의 경우가 된다.

 8과 9와 3을 일본어 발음으로 각기 야, 쿠, 사로 시작되므로 '야쿠자'가 됐다.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뜻이었다.

 일반인들은 폭력배를 지칭하는 은어로 이 야쿠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보통명사로 굳어졌다.

 야쿠자는 17세기초에 '카부키 모노' 또는 '미친놈'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부르는데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사람들은 이상한 옷에 이상한 머리 모양을 하고 나쁜 행동을 일삼는 등 평판이 안 좋았다. 쇼군시대엔 이 사람들이 '로닌'(낭인)이라고도 불리워졌는데 작은 소규모의 때거리로 일본전역을 몰려다니며 작은 마을과 도시들을 약탈했다.

 야쿠자의 근원은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인력 송출, 건설, 하역 등의 목적으로 무리를 지은이들이 당시에는 마피아들의 패밀리처럼 누구누구 일가(一家 )라는 명칭아래 텃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슨무슨 구미(組), 또는 무슨 가이(會)로 바뀌었다.

 야쿠자는 두목급인 오야붕(親分)에서부터 일반 부하급까지 엄격한 계급구조를 가지고 있는데다 '사무라이'(武士)식 규율을 지니고 있어 수사관계자들이 내부로 침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사무라이 규율을 따른다는 그들의 의식이나 행사는 격식을 중히 여기고 있다. 보스의 취임식이나 조직을 확대할 때 실시되는 분가 행사시에도 제단을 차리고 인가서를 수여하는 등의 순서를 가진다.

 일본의 야쿠자들은 다른 폭력 조직들과 서로 결합, 보다 큰 집단을 이루고 다른 큰 집단과 또다시 결합, 더욱 큰 전국적인 단체를 이루는 피라미드식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일본의 야쿠자들은 대략 7대 폭력조직으로 구분한다. 그 중에서도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이나가와가이(稻川會), 스미요시가이(住吉會) 등이 3대 광역조직으로 이들의 조직원 수만 해도 일본 전체 폭력배의 48%에 달한다고 한다.

 야마구치파는 12년 전 와타나베가 두목에 오른 후 조직원이 3배나 증가해 지난99년에는 전체 조직원이 1만6천5백여 명에 달했다.

 예전의 야쿠자는 주로 도박판을 개장하여 수입을 얻었다. 그러다가 차츰 요식업소․유흥업소 등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이들로부터 금전을 상납받기도 하고, 업소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등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또, 이렇게 모은 막대한 재산과 폭력을 배경으로 유망한 사업을 주선하거나 이에 개입한다. 최근에는 마약거래나 고리대금업과 같은 불법 또는 합법을 가장한 사업을 통해 해외로 진출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한국의 조직폭력단도 일본의 야쿠자 조직을 본뜬 것이 많다.


 2.야마구치구미(山口組)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조(山口組)는 조직원 숫자가 많을 때는 10만 명을 넘기도 해 규모 면으로 미국 마피아를 훨씬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조직이다. 일본 야쿠자의 전부를 알려면 야마구치 조직의 줄기를 알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대 고베(神戶)에서 처음 조직된 야마구치조는 일찌기 오사카 일대를 포함하는 간사이(關西)지방을 제패, 그 여세를 몰아 규슈(九州), 시고쿠(四國), 홋카이도(北海道)지역에까지 문어발처럼 세력을 뻗었다.

 최근에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지방에도 거점을 마련했다. 몇 년 전부터 도쿄진출을 노려온 이들은 도쿄 일원에 이미 1백여 개의 사무실을 갖고 있다. 당연히 기존 세력들과의 마찰이 빚어졌고 그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야쿠자들에게 있어서 도쿄를 점령한다는 것은 거대한 규모의 유흥가를 손에 넣는 것 외에도 전국제패라는 자존심이 걸린 과제였다.

 이미 야마구치 조직은 일본 전국을 석권한 최고 최대의 조직이 되어 있다. 실제로 야마구치 조직의 역사는 다른 조직과의 세력다툼으로 벌어진 살인과 이에 대한 보복 살인 등 항쟁과 대립의 역사이다.

 야마구치 조직이란 것이 야마구치 노보루(山口登)라는 초창기 오야붕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당시는 고베의 조그만 깡패 조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야마구치 조직을 떠오르는 태양으로 만든 다오카 가쓰오(田岡一雄)라는 인물이 가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다오카가 3대째의 두목이 된 후 야마구치 조직의 세력확장 수법에는 공통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한 개의 도시로 진출할 때 기존 야쿠자 조직과 마찰을 하게 되고 표면적으로는 야마구치 조직원이 먼저 습격을 받거나 살해된다. 야마구치 조직의 본부 타격대는 이러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량의 조직원들을 동원, 전격적으로 지방 조직을 괴멸시켜 버린다. 일본의 언론들은 이를 야쿠자들끼리의 항쟁 (抗爭)이라고 표현한다. '피로 피를 씻는다' 즉 상대방의 피로 자신들이 흘린 피의 복수를 하는 것, 이것이 야쿠자의 항쟁이다.

 1962년 규슈(九州)항쟁시에는 총칼로 무장한 3백 명의 타격대가 파견돼 몇 백 명 의 상대방 조직원들과 목숨을 걸고 야쿠자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 1990년에는 동북지방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마구치 조직의 진출이 시작되자 현지의 기존 조직인 굔도세키구치(極東關口)회와 마찰이 빚어졌다. 먼저 야마구치 조직원이 피살체로 발견됐고 그의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8백 명이 넘는 야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이틀 후, 중소도시인 아키다(秋田)시내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항쟁의 배경에는 지방 경제와 관련된 이권 탈취를 둘러싼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은 물론이다.


<야마구치구미의 수도권 진출>

 야마구치 조직은 수도권 진출을 위해 경쟁 조직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슬며시 요코하마 항구에 연락사무소를 내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도쿄의 암흑세계를 주름잡고 있던 이나가와 조직의 반발이 있자 야마구치는 일단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이나가와 조직과의 요코하마 충돌사건으로 이미 중간 간부의 손가락을 잘라주고 화해를 감수했던 다오카 두목은 공개적인 행사를 통한 진출을 시도했다.

 그는 1963년 4월 거물 우익인사와 마약심의회 의장, 국회의원 등 지역 유지들을 모아 '마약추방 국토정화 추진동맹'의 결성대회를 요코하마에서 열었다. 그리고 그 동맹의 지부장에 야마구치 조직의 중간간부를 임명했다. 이 동맹은 대외적으로는 마약추방 관련 단체였으나 실질적으로 야마구치 조직의 하부기관 역할을 하는 요코하마 사무소가 개설된 셈이었다.

 이 같은 우회적인 진출 움직임에 발끈한 이나가와 조직은 수도권 일대의 야쿠자 조직들을 모두 불러모아 조직의 연합체인 '관동회'를 결성해 대항했다.

 바야흐로 피비린내 나는 야쿠자전쟁이 폭발하기 직전의 긴장된 시기였다. 그러나 시대는 큰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1964년 초부터 일본경찰에 의한 대대적인 야쿠자 소탕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년 후 경찰의 집중적인 단속에 견디지 못한 관동회가 먼저 해체됐고 차례 차례로 각 조직들도 와해되기 시작했다. 야쿠자들은 물밑으로 숨거나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겨울잠을 자는 뱀들처럼 은신했다.

 야마구치 조직조차도 내부적으로 해산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으며 이나가와 조직도 같은 입장이었다. 자연히 야쿠자 조직끼리 다툴 시기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나가와 조직의 두목은 불법 도박장 개설혐의로 검거돼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야마구치 조직도 철저하게 구조조정에 들어가 내부적인 물갈이를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자연히 양대 조직은 상호 협조하기로 합의하는 상황이 됐다. 1972년 두 조직은 형제의 언약을 맺고 상부상조하기로 했다. 당시 언론들은 이 만남을 '지하제국의 검은 약조'라고 비난했다.

 결과적으로 야마구치 조직은 수도권 진출에 성공했고 경찰의 집중단속은 앙숙관계였던 양대 조직을 결속시켜 준 셈이 됐다. 오히려 손을 맞잡은 그들은 경찰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이로써 460단체 조직원 1만2천명의 야마구치 조직과 65단체 5천300명의 이나가와 조직이 손을 잡았다. 그 후 거대한 공룡같은 이들 양대 야쿠자조직의 화해무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동성회(東聲會)―

오사카(大阪)지방에서 방대한 세력권을 확보한 야마구치(山口)조직의 다오카 두목은 1965년을 전후해 본격적인 수도권 진출을 시도한다. 전국각지의 군소 조직들을 굴복시킨 저간의 여세를 몰아 도쿄 입성을 시도할 수도 있었으나 다오카 두목은 전투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조직이 비약적으로 확대된 이면에는 무력 제압의 방법 외에도 야마구치 조직의 일원이 되려는 지방 군소 조직들을 형제의 결연으로 받아들이는 합병의 방법도 속속 시도됐다. 수도권 진출을 위해 이 방법으로 접근한 조직은 재일 동포 정건영(鄭建永.일본명.町井久之)이 이끄는 동성회(東聲會)였다.

 동성회도 야마구치 조직의 접근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이유는 당시 수도권 지역 야쿠자사회에 있어서 그들의 불리한 입장 때문이었다. 동성회는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의 혼란기에 떠돌이 조직이었던 정건영 일가를 모체로 불우한 재일 동포들이 모여 세력을 확대, 도쿄 긴자(銀座)에 조직을 구축했다.

 도쿄지역의 야쿠자 사회에는 나와바리(세력권)라는 영역을 중시했다. 아무리 많은 조직원을 거느리고 전투력이 있는 조직이라도 과거부터 내려오는 영역을 가진 일가를 계승하거나 수하에 있지 않으면 야쿠자조직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결국 동성회는 강한 조직력은 갖고 있으면서도 '전통적인 계보를 갖지 않은 신흥 조직', 또는 '확실한 영역이 없는 떠돌이들'로 지목돼 다른 조직들로부터 소외돼 있었다.

 그 이유 중에는 조선인 차별이라는 민족감정이 포함돼 있었다. 동성회는 여전히 도쿄 야쿠자 사회에서는 이단자 취급을 받으면서도 비약적으로 세력이 확대됐다. 정건영은 전후 일본의 프로레슬링 흥행계의 영웅이었던 역도산(力道山)과는 같은 동포라는 점에서 우애가 깊었다. 지방 흥행권을 장악하고 있던 야마구치의 다오카 두목은 프로레슬링 흥행 업무를 통해 정건영과 인연을 맺게 된다.

 수도권 지역에서 설움을 받고 있던 정건영이 파죽지세로 도쿄의 야쿠자조직들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해 들어오는 야마구치 조직과 손을 잡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마구치 조직도 도쿄의 전통적인 영역 같은 것은 인정하기 싫었다. 세력권은 힘으로 탈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른 지방에서도 그것을 실천해 온 야마구치 조직이었다.

 1963년 2월 야마구치와 동성회는 형제의 결연을 맺었다. 그 후 야마구치를 상징하는 마름모꼴 디자인 속에 동성이라는 두 글자를 넣은 배지를 가슴에 단 야쿠자들이 도쿄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양 조직 합병의 이면에는 당대 일본 우익의 최고 우두머리였던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라는 사람이 야쿠자를 우익의 활동에 활용하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야나가와 조직과의 싸움>

  1964년부터 일본 경찰은 본격적인 야쿠자 단속작전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단히 마음먹고 야쿠자들을 궤멸시키기로 작정한 경찰의 집중 단속에 전국 각지의 내노라하는 조직들은 차례 차례로 해산됐다. 그러나 야마구치(山口)조직만은 그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66년부터 경찰은 야마구치조직에 대한 집중적인 단속을 펼치기 시작했다 . 오사카부 경찰청은 '특별단속본부'를 설치하고 조직원들의 일제 검거를 단행했다.

 재일 동포 야쿠자 양원석의 친구 강동화는 2대째 두목으로 옹립된 후 공갈혐의로 재판에 휘말렸는데 1967년 상고심도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강동화는 빨간 스포츠 카를 타고 오사카 구치소로 출두, 배웅 나온 조직원들에게 '일본경찰에 항복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수감됐다.

 두목이 없는 조직에 대한 경찰의 궤멸 작전은 용서 없이 계속돼 일제 단속 등을 통해 철퇴가 가해졌다.

 이 같은 상황은 수감 중이던 양원석에게도 알려졌고 그는 조직의 해산을 결심했다. 그러나 강동화는 해산을 반대했다. 그는 "지금 우리들은 다오카(田岡) 오야붕의 수하에 있다. 마음대로 야마구치 조직의 깃발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나고야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양원석은 오사카 형무소에 있던 강동화를 만나 설득했다. 이때 악명 높고 기세 등등하던 강동화도 "회장(양원석)이 만든 조직이므로 회장 마음대로 하게나…"라며 쓸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각각 다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두 사람을 특별히 만나도록 해서 조직 해산을 합의시킨 배경에는 경찰당국이 펼친 모종의 계획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에도 야마구치 조직 본가는 끄떡없이 해산되지 않고 건재했다. 그래서 최소한 산하단체인 야나가와(柳川)조직 만이라도 해산시켜 제1차 야쿠자 단속작전을 통해 경찰은 성과를 올렸다는 형태로 결론지으려고 했었다. 결국 야마구치 조직의 본가를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옥중에서 작성된 해산동의서와 성명서는 문장과 두 사람의 서명까지 같은 필적으로 적혀 있었다. 따라서 글은 경찰 측에서 미리 준비했고 두 사람은 손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은 조직을 해산한 후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강동화는 1987년, 양원석은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조직을 해산하던 당시 한국국적이었던 두 사람에 대해 일본 경찰은 강제송환을 암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위협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적지 않았다.

 곧바로 두 사람에 대해 야마구치 조직 본가로부터도 절연(絶緣)처분이 내려졌었다. '본가의 허락 없이 조직을 해산했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해서 재일 동포들이 주축이 돼 '죽음의 군단'으로 불리며 일본 전국 야쿠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 조직의 이름은 야쿠자계에서 사라졌다.

<오사카 전쟁>

 수도권 진출을 성취한 야마구치 조직은 이제 거의 일본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조직으로 커졌다.

 그런데 1975년 야마구치 조직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오사카에 기생하고 있던 한 작은 야쿠자 조직이 야마구치에게 반기를 들고 달려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마츠다 구미(松田組) 항쟁사건으로 알려진 야쿠자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말한다. 이 사건은 그 후 3년 4개월에 걸쳐 계속된 3차례의 유명한 오사카 전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이 항쟁사건에 대해 당시 매스컴들은 야마구치 조직을 코끼리로 봤고 마츠다 조직은 한주먹꺼리도 안 되는 모기에 비유했다.

 야마구치는 약 5백 개의 산하단체에 1만1천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마츠다는 약 20개 단체 350명의 약체였다. 코끼리와 모기의 다툼으로 비유됐으나 '전 투는 반드시 병사의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다'며 마츠다 조직원들은 사생결단의 자세를 취했다.

 사건은 1975년 7월 어느 날 밤 오사카 주점가의 주템이라는 클럽에서 발생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던 야마구치의 야쿠자 4명이 괴한 5명으로부터 집중 사격 을 받고 3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마츠다 조직에서 파견한 5명의 히트맨(살인특공대)들 이었다.

 짧은 역사의 신흥 야쿠자조직인 마츠다는 주 수입원이 불법 도박장 영업이었다. 오사카 시내에만 30여 개의 도박장을 개설했고 이곳에서 나오는 수입이 하루 1천만 엔 이상을 올리고 있어 이미 이 업계 내부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뜨기 시작한 조직이었다.

 맛있는 사냥감을 잡아 잔치를 벌이고 있는 여우를 보고 호랑이가 그냥 지나갈리 없었다. 야마구치에서 파견한 사사키(佐佐木)조직의 행동대원들이 한창 성업중인 영업장에 난입, 흙발로 도박판 위를 돌아다니며 소란을 피워 난장판이 됐다.

 야마구치측과 마츠다측은 서로 타협에 들어갔으나 강력한 야마구치가 이에 응할 리가 없었고 황금알을 낳는 사업을 내놔야할 운명에 처한 마츠다측은 항쟁을 결의하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조직원이 4명이나 희생됐으나 야마구치측은 즉각적인 보복을 하지 않았다. 조직 간부들은 전체가 보복 공격에 나서기는 마츠다측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 우선 직접 피해를 당한 산하단체인 사사키 조직에서만 움직이기로 했다.

 이 사실을 감지한 마츠다 측에서는 오히려 고베(神戶)에 있는 야마구치의 중앙본부 사무실에 총을 난사했다. 왕궁을 습격 당한 것으로 단정, 분노한 야마구치 행동대원들은 마츠다 두목 살해조를 편성하고 그의 자택으로 돌입했다. 이들은 순찰 근무 중이던 경찰차량 위로 총탄을 퍼부으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코끼리와 모기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야마구치 조직원들에 의한 처절한 보복 살상이 계속되자 경찰 당국은 범행을 저지른 조직원들을 집중 검거하는 한편 양 조직을 화해시키려 했다. 야마구치의 집중 적인 공격을 받아 궤멸상태에 빠진 마츠다 조직도 은근히 경찰이 개입돼 화해시켜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야마구치 조직원들 사이에는 '저절로 망해버릴 상대와 타협할 필요는 없다'는 공기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야마구치의 부두목 야마모토는 마츠다 조직을 무시하고 '항쟁 종결'을 선언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보도진들을 불러모아 마츠다 조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거론치 않고 '조직항쟁으로 사회에 혼란을 끼친데 대해 사과 드린다'며 전쟁을 끝내겠다고 밝혔다. 야쿠자 부두목이 기자회견 형식으로 항쟁 종결을 선언하는 이례적인 작태를 보인 것은 자신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마츠다 조직과는 대등한 입장이 될 수 없다는 야마구치의 세력 과시였다.

 부두목 야마모토는 이 전쟁으로 그동안 두목이 저격당한 사건으로 땅에 떨어진 야마구치 조직의 위신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지난 세월 자신이 앞장서서 전국을 평정했던 이래 희박해진 야마구치의 강한 이미지를 다시 대외적으로 심어 놓았다. 지병인 간경화로 병보석 중이었던 그는 그동안의 항쟁을 지휘했다는 혐의로 보석이 취소돼 다시 수감됐다. 얼마 후 그는 어려운 수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병이 악화, 불귀의 객이 됐다.

 심장병으로 다오카 두목이 죽은 후 야마구치 조직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부두목 야마모토까지 옥중에서 숨지자 구심점을 잃고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조직원들은 대립되는 각각의 리더를 따르게 되고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은 둘로 갈리게 된다. 따라서 힘에는 힘으로 대항한다는 조직 폭력단의 속성이 나타나고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죽고 죽이는 역사상 최악의 야쿠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 같은 분열의 조짐은 마츠다 조직과의 항쟁 중 부두목급 간부들 사이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나루미 기요시라는 마츠다 조직계열의 야쿠자가 쏜 복수의 총탄은 두목 다오카의 생명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야마구치 조직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됐고 그 존재 자체를 위기로 몰고 가는 원한의 흔적을 남겼다. 나루미는 그가 충성했던 대일본 정의단의 두목이 야마구치 조직원에게 피살됐을 때 두목의 유골을 끌어안고 복수를 맹세했으며 그 후 다오카 두목을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자신도 무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러면 야마구치에게 도전했다가 많은 조직원들이 희생된 마츠다 조직은 그 후 어떻게 됐는가. 1983년 5월 오사카 경찰청장 앞으로 마츠다 조직 두목 이름의 다음과 같은 '조직해산 신고서'가 우송됐다. '우리들은 임협도(任俠道)의 실천이 지상 명제였으나 그동안 사회정세의 변화로 이를 유지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고 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들 각자는 양식있는 사회인으로써...'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본의 야쿠자 사회에서 해산된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개가 다른 야쿠자 조직으로 흡수돼 좀처럼 그 길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규슈 야쿠자 전쟁>

 일본 규슈(九州)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한․일간의 교류가 가장 빈번한 지역이다. 일제시대부터 부산과 규슈간에는 정기연락선으로 왕래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한일 교류의 거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규슈지방의 야쿠자들은 일본 전국에서 가장 잔인하고 그 기질이 난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다른 조직과 싸움을 시작하면 반드시 피로써 피를 씻는 보복전을 벌여 일본 최대 조직인 야마구치도 쉽게 그들의 구역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야마구치 조직은 그들의 방계조직을 지역 연고가 있는 현지의 군소 조직들과 제휴를 맺는 간접적인 형식을 취하며 슬금슬금 규슈지방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1986년 12월 어느 날, 야마구치 계열의 이즈(伊豆)조직과 지역 토박이 조직인 도진카이(道仁會) 사이에 처절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날 저녁, 고조키라는 도진카이의 중간간부가 자신이 경영하는 주점 앞에서 네 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고조키는 길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이날 죽은 고조키는 몇 개월 전 자신의 조직원을 빼내 갈려는 야마구치 계열의 이나바 일당들에게 총격을 가한 적이 있었다. 이때 중상을 입고 폐인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고조키를 칼로 난자해 원수를 갚은 것.

 죽은 고조키가 소속된 도진카이 간부들은 겨울 새벽, 시체 앞에서 통곡하며 분노의 칼을 갈았다. 물고 물리는 복수의 악순환이었다. 유명한 규슈 야쿠자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도진카이의 보복 작전이 시작됐다. 규슈 야쿠자들은 처음부터 범행을 숨기려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들이닥쳐 상대방을 처치해 버린다. 기질이 거칠고 단순한 이들의 이러한 전술은 타지방의 야쿠자들이 두려워하는 특징인 것이다. 도진카이의 보복 역시 전형적인 규슈방법으로 치러졌다.

 야마구치 계열 이나바 조직의 중간두목 요시이(吉井)의 집으로 도진카이의 히트맨 두 명이 식칼과 권총을 들고 나타났다. 가족들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요시이는 난도질을 당했다.    요시이가 앞으로 쓰러지자 히트맨은 그의 등뒤에 권총 두발을 쏘고 사라졌다.

 이렇게 되자 후쿠오카(福岡)시내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야마구치 조직의 직계인 이즈(伊豆)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전쟁은 확산됐다. 이즈는 전국 제패를 노리는 야마구치 조직의 규슈 선봉대였다. 도진카이가 규슈에서 가장 용맹한 조직으로 유명했으나 조직원의 수는 1천500명으로 야마구치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야마구치 본부에서는 4대두목이 피살되고 조직이 둘로 분열되는 등 혼란이 거듭되고 있어 규슈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이즈 조직이 대처하도록 조처를 한 것이었다.

 규슈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야마구치 계열과 이에 저항하는 당시 규슈 최강의 도진카이 조직과의 항쟁은 1987년 3월, 지역 각 야쿠자조직의 두목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해의 의식을 치르기 전까지 약 3개월 간 계속됐다. 그러나 이같이 짧은 기간에 사망 9명, 중상 16명이라는 많은 희생자를 내 전쟁이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이치와카이와의 싸움>

 '야마구치와 이치와카이' 양대 야쿠자 조직의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전투에 필요한 군자금도 필요했고 조직유지를 위해 정기적인 수입도 있어야 하는 등 야쿠자들의 다툼은 경제전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직원들의 계속되는 이탈로 열세에 몰린 이치와카이는 조직유지를 위해 야쿠자 한 명 당 조직에 내는 상납금의 부담도 크게 늘렸다. 이러한 상납금을 견디지 못한 조직원이 조직을 탈퇴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88년 5월14일, 야마구치 조직원들이 이치와카이 조직의 야마모토 히로시 두목 저택에 로켓탄을 발사했던 것. 이 사건으로 두목 집 주변에 파견돼 있던 경찰관 3명도 부상했다.

 사실 야쿠자들은 경찰이나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는 불필요한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돼있다. 왜냐하면 이들을 공격해서 얻는 이익보다 공격 후에 경찰이나 일반 여론에 의해 조직으로 되돌아오는 손해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경찰관을 습격한 사건에 대해 경찰이 이치와카이 조직을 도와주고 있다는 이유로 야마구치 조직원들은 반감을 갖고있었다는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강력한 야마구치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한 준비단계로 조직을 둘로 갈라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시나리오가 경찰에서 나왔다는 것. 또한 경찰은 수세에 몰린 이치와카이의 두목 저택을 지켜주며 야마구치의 공격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마구치 조직 상층부에서는 이치와카이의 두목 야마모토 생명만을 지켜주는 대신 이치와카이 조직을 해산하고 야쿠자계에서 은퇴하도록 하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직 내부의 강경파들 특히 암살된 제4대 두목 다케나가 계열의 조직원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암암리에 준비한 로켓탄을 이치와카이 조직의 두목 저택을 향해 발사, 그 폭파의 충격으로 주위를 혼란시킨 뒤 기관총을 소지한 암살 특공대를 저택 내부로 투입시켜 두목을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발사된 로켓탄이 건물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방탄막에 튕기며 밖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야마구치 조직원들은 주변을 경비 중이던 경찰관 3명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고 담벽 아래 떨어진 로켓탄을 집어 저택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그 순간 로켓탄이 터졌고 조직원 3명은 온몸에 부상을 입은 채 달아났다.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으나 야마구치의 끈질긴 공격 근성을 보여준 셈이 됐고 이치와카이 조직의 동요와 분열을 가속화했다. 이치와카이의 조직원은 두목 주변에 심복들 20여명 밖에 없다는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이즈음 도쿄 일대의 최대 야쿠자조직인 이나가와카이(稻川會) 조직의 두목이 나서서 본격적으로 중재에 들어갔다. 1989년 3월30일 이치와카이의 야마모토 두목은 야마구치 조직의 본가를 직접 방문하고 사죄했다.

 이로써 이치와카이 조직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고 조직도 해산됐다. 이때 야마구치 조직의 중재역으로 나선 사람이 와다나베 요시노리(渡邊芳則)라는 야마구치의 부두목이었다. 일본 전국의 유명 야쿠자 두목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갖고 있던 그는 그 후 야마구치 조직의 제5대 구미쵸(組長)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고 지금도 그 직책을 맡고 있다.


<다오카 카즈오란 인물에 대해서...>

 1912. 3. 28 일본 산쇼무라[三庄村]~1981. 7. 30 아마가사키[尼崎].

 일본의 주요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오야분[親分]).

 별칭은 구마[熊].

 일본 전국에 10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최고의 야쿠자 두목으로 활약했던 다오카 가쓰오(田岡一雄)는 다른 조직의 두목들과는 달리 탁월한 사업능력을 발휘했다 .

 그는 보통 야쿠자들이 돈벌이 활동으로 수입을 챙기는 보호 명목비나 도박사업 등을 탈피해 건설, 운수, 항만하역, 금융 계통으로 사업을 확대해서 재정적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그 후 흥행사업에도 영역을 넓혀 스모, 프로레슬링, 경마 등 프로덕션을 경영하며 연예계까지 휘어잡았다.

 거대 야쿠자 조직의 최고 두목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통솔력, 임기응변, 조직력, 인간관계, 자금력, 전투성, 근성(根性), 예감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 같은 조건에다 부수적으로 차별과 빈곤의 설움 속에 밑바닥 인생을 살아본 경험을 가진 두목이 야쿠자 사회에서는 더욱 강한 조직을 구축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사회적 모순의 추악함을 체험하며 쓴맛 단맛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오카 가쓰오 두목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3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7살이 됐을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친척집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조선소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불량 소년들의 무리와 어울리게 됐고 회사직원들과 패싸움을 벌인 후 직장을 뛰쳐나온다.

 17살의 다오카는 당시 군소 조직이었던 야마구치(山口)조직의 제2대 오야붕 야마구치 노보루(山口登)의 눈에 들었고 선원노동쟁의의 해결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정식으로 조직원이 된다. 7년 후 어느 겨울날 야마구치 조직 사무실을 급습한 경쟁 야쿠자 조직의 행동대원을 칼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감방에서 7년을 보낸다. 출옥 후 이 사건은 조직 내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그 영향으로 1946년 간부들의 추대로 제3대 두목의 자리에 앉게 된다.

 당시 다오카는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 두목으로써 다오카는 중간 간부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조직의 발전을 위해 몇 가지 방침을 전달했다.

 1. 종래의 야쿠자 재산증식방법을 개혁, 새로운 사업을 벌인다.

 2. 조합원 한사람의 싸움이나 문제 발생 시에 전 조직이 움직이지 말고 일인일살(一人一殺)정신으로 방위한다.

 3. 마약취급을 금한다. 적발 시는 제명 및 강경 조치를 취한다.

 4. 경찰에는 전면적으로 협조해서 늘 사랑받도록 한다.

 이상과 같은 지시가 있은 후 직계 중간간부들은 사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방계회사들을 설립하게 된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버젓이 기업의 탈을 쓰고 각종 이권사업에 나섰던 이 조직도 잠재된 폭력성 등의 속성으로 일단 경쟁 조직이 먹이를 건드리면 굶주린 이리떼처럼 털을 곤두세운다. 다오카의 잔인한 전략 전술은 조직간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발생하면 빛을 발했고 그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 졌다.

.....조직 분담 최고사령탑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