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제1장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경과와 논점 1. 위안부 문제의 등장과 경과 2.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책임 3. 군위안부 문제의 본질 제2장 군위안소의 설치 이유 1. 군위안소 설치 이전의 상황 2. 군위안소 설치의 배경 제3장 군위안소 정책에 대한 일본국가의 관리통제 실태 1. 군위안소의 정책의 개요 (별도 표1·2 참조) 2. 군위안소의 설치 3. 군위안소의 모집 4. 군위안부의 이송 5. 군위안소의 운영 맺음말 ;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의 시사점
머 리 말
본 논문은 군위안소정책에 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명백히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제도에 대해 국가가 일부 관여했다는 것과 군이 위안부에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가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국가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일본사회 내에서는“군위안부 문제에 일본의 국가 책임은 전혀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심지어는 일본의 역사 전부를 미화하려는‘신자유주의 사상’이 대두되어, 현재 일본사회내에 널리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본의 신우익보수화 경향은 한일양국의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군위안부문제의 진상규명은 매우 시급한 사안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군위안부 부문제의 진상규명에 있어 본논문이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본 논문이 대상으로 하는 군위안소와 군위안부, 그리고 자료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군위안소에 대해서는 주로 중일전쟁기(37년 7월 - 41년 11월)에 중국본토에 설치된 군위안소를 대상으로 한다. 왜냐하면, 일본의 군위안소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골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조선인 위안부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이 이곳 중국 본토내의 위안소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위안부에 대해서는 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 한다. 위안부의 모집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한데,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는 군이 지정한 특정의 민간업자가 다시 청부업자를 고용해 취업사기 등의 방법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사례가 많다. 그러나 민간업자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가책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청부업자를 제외한 민간업자만을 대상으로 한다.
유감스럽게도, 조선내의 위안부 모집에 조선총독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 자료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당시 조선총독부를 관할하고 있던 일본의 탁무성과 내무성의 자료, 그리고 경찰자료 등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건내에서의 위안부 모집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당시 조선과 비슷한 상황 에 있던 대만총독부의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다행히도 대만총독부의 자료는 몇 가지가 발견 되었다. 둘째는 당시의 일본국내와 관련된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당시 일본중앙정부가 각 지 방에 보낸 행정지침 중에서 군위안부에 관한 사항은 조선총독부에도 통달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국내의 자료를 통해 당시의 조선내 상황을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본군위안소 정책의 전체상을 정확히 밝히기에는 아직도 자료부족 등 많은 계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이상에서 말한 보완적인 방법을 통해 가능한 한 군위안소 정책의 전체상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국가 책임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본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한다.
제1장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현재 가장 큰 논점이 되어 있는 국가책임문제와 관련해 일본정부와 민간 그리고 피해 당사자와 국제여론의 주장을 정리한다.
제2장에서는, 일본군위안소가 설치되게 된 이유를 밝힌다. 즉 군위안소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상황과 군이 직접 위안소를 설치하게 된 배경 등에 대해서 논한다.
제3장에서는, 일본정부와 군이 실제로 어떻게 위안소를 관리 및 통제했는가를 군위안소 설치, 군위안부 모집, 군위안부 이송, 군위안소 운영의 순서에 따라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맺는 말에서는 현안이 되어있는 피해자에 대한 보상문제, 그리고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성할 점과 교훈으로 삼아야 될 점 등에 대해 필자 나름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제 1 장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경과와 논점
1. 위안부 문제의 등장과 경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6년전의 일이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1991년 위안부였던 김학순씨가 본명을 밝히면서 자신의 위안부경험을 직접 증언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한일양국의 시민단체들은 일본국가를 상대로 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나섰고, 현재는 한일양국의 중대한 외교현안 중의 하나로 발전되어 있다.
일본식민지시대의 개인피해와 관련한 보상문제에 있어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차원에서 제기 되어 왔고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인징용 문제, 재사할린한국인의 귀국송환 문제, 조선인 BC급전범 문제 등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것이다. 그러나 군위안부 문제는 처음부터 이들 사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로서는, 위안부들이 당한 성적학대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때마침 여성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던 국제여론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점, 피해자가 용감하게 본명을 밝히면서까지 증언에 나섬으로써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극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의 언론들도 이 사건에 대해서 만큼은 대대적으로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후 지금까지 일본인들은 매우 복잡한 심정으로 사건의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김학순씨의 증언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한국의 여성단체가 1990년 5월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에 맞추어‘정신대’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정부는, 군위안소는 민간업자의 단순한 상행위라며 국가의 관여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태도에 분개한 김학순씨가 증언을 시작하고, 곧이어 일본중앙대학의 요시미 길견의명(古見義明)교수에 의해 일본방위청의 방위연구도서관에서 일본군이 군위안부 모집에 직접 관여했다는 공문서가 발견되었고, 1992년 1월 11일자 아사히 신문이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이로써 일본정부는 더 이상 기존의 태도를 견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문발표 다음날인 12일 가토 가등링일(加藤紘一)관방장관은 군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담화와, 13일에는 사죄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때가 미야자와 궁택희일(宮澤喜一)총리의 방한직전이었 고, 17일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와총리는 한일수뇌회담에서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히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의 연구자와 민간인의 노력에 의해 많은 자료가 발견되었다. 또 일본정부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한일양국 시민운동단체들의 요구에 밀려 92년 7월 6일과 93년 8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군위안부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대부분이어서 진상규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했기 때문에, 시민단체들은 보다 구체적인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으나, 일본정부는 현재까지 이런 요구에 응하고 있지 않다.
2.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 책임
그러면 여기서 일본의 국가책임과 보상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와 일본의 우익, 피해당사자와 국제여론이라는 각각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1) 일본정부의 주장
국가책임에 대한 일본정부의 주장을 다음과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초 일본정부는 “종군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군대를 따라 이동한 것”이라며, 국가의 관여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김학순씨의 증언과 관련자료의 발견으로 인해, 92년 1월, 군의 관여사실을 인정하고 사죄담화를 발표했다.
그 후, 93년 8월 4일에 제2차 정부 조사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때, 고오노 하야양평(河野洋平)관방장관 담화문도 함께 발표되었다. 이 담화문에서 일본정부는 위안부제도에 있어 “군이나 관헌의 관여와 위안부의 모집과 사역에 있어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문제의 본질이 중대한 인권침해였다는 사실을 승인한다”고 밝혔지만, 이 담화는 “위안부 모집과 위안부제도의 운영주체가 민간업자인 것처럼 풀이될 수 있는 여지”도 남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정부는 군위안부제도에 일부 관여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전반적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민간업자에 있다는 뉘앙스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같은 날, 관방내각 외정심의실에서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라는 문서가 발표되었다. 여기에는“위안부들은 전지에 있어서는 언제나 군의 관리하에 있었고 군과 함께 행동할 것을 강요당했으며, 이를 보아도 자유도 없는 고통스런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정부는 군위안부제도에 대한 책임이 군에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민간업자에게 있다는 것인지에 대해 명백하고도 통일된 견해를 밝히고 있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정부가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보상에 대해서는 어떤 조처를 취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자.
일본정부가 군 위안소에 대한 군 개입 사실을 일부나마 인정한 지 3년이 지난 94년 8월 31일, 당시 사회당위원장으로 연립내각의 수반이었던 무라야마총리는 전후 50주년을 앞두고 발표한 담화문에서, 일본정부 는‘평화우호교류계획’의 청사진과 함께 위안부피해자에 대해 개인보상을 대신하는 조처로“ 폭넓은 국민참가의 길”을 모색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이 담화에 의해 ‘여당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종군위안부 등 소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동 소위원회는 94년 12월 7일‘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우호기금’사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금의 보상안은 연립내각의 절충안으로서, 무라야마총리가 속한 사회당의 “국가가 위안부 개인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종래의 주장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또한 이 보상안은 대만과 북한을 제외한 나라와의 국가배상은 “이미 끝난 상태”이지만 일본정부가 도의적인 입장에서 보상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일간의 국가배상도 “이미 해결된 상태”이므로 국가에 의한 개인보상은 할 수 없으나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 후 95년 7월 18일에 이 보상안에 입각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 창설되어, 같은 해 8월 15일부터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을 시작하였다. 일본정부는, 일본국민으로부터 모금된‘국민기금’으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한다고 하고 있다.1)
이에 따라 96년 8월 14일부터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국민기금’인 일시금을 지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97년 3월 현재, 한국인과 필리핀인 피해자 18명이 총리명의로 된 ‘사과와 반성’의 편지와 함께 200만엔의 일시금을 수령했으나, 나머지 피해자들은 수령을 거부하고 국가배상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2)
(2) 일본 우익을 중심으로 한 주장
한편, 일본의 법적책임과 국가보상에 대한 일본우익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오쿠노 오야성량(奧野誠亮)전 법무상의 발언이 그들의 주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96년 6월 4일, “밝은 일본”국회의원 연맹 결성총회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종군위안부”는 상행위에 참가한 여성들이며, 강제로 끌고 간 것이 아니다.”라고 발언하였다.
그 후 96년 5월에는, 군위안부에 관해 서술한 97년도 중학생용 사회교과서가 일본 문부성의 검정에 통과되었다. 그 직후, 일본유족회의 고문인 아타가키 판원정(板垣正)의원은, 사회교과서의 서술 내용자체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데도 역사적 사실인 양 기술”되었다고 비난하였다.
동경대교수 후지오카 등강신승(藤岡信勝)와 치바 천엽(千葉)대교수 하타신욱언(秦郁彦)등이 참가하고 있는 ‘자유주의사관 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우익인사들은, 군위안부에 대한 교과서 서술내용은 일본의 역사를 왜곡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중학교에서 군위안부들의 매춘행위를 남성(군인)에 의한 여성(군위안부)의 성적 학대라고 가르치는 것은 어린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성관념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교육은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청일전쟁 이후의 일본역사를 침략행위라고 가르치고 있는 지금의 학교교육은 ‘자학적’인 역사교육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교육방법에서 탈피하고 역사교과서도 국익을 기초로 해서 재기술(再記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연행이 아니고 ‘상행위’에 불과한 위안부 문제는 교과서 기술에서 삭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또한 일본정부가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것까지도, 언론에 의한 여론 조작과 일본정부의 무능한 외교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3) 피해당사자의 주장과 국제여론
피해당사자의 제일의 소망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일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조금이나마 이들의 피해를 보상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대부분의 피해당사자와 한국여론, 정대협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군위안부 문제에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으므로 일본정부가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함께 개인에게 보상해야 하며,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당사자들과 의견을 함께 하는 국제시민단체와 국제여론 역시 일본정부에 국가책임이 있으며 개인보상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92년 2월 2일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국제교육개발(IED)이 일본정부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개인보상을 할 것을 요구한 것을 비롯해, 96년 4 월 10일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본의 국가책임과 개인보상을 권고하는 보고서가 정식 채택되어 일본정부에 ‘유의’사항으로 전달되었다. 일본의 국가책임과 개인보상의 근거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 주로 당시의 국제법인데, 그 중 중요한 것은 다섯 가지이다.3)
첫째로, ‘부인 및 아동의 매매를 금지하는 국제조약’의 위반이다. 이 조약에 따르면, 21세 미만 미성년 여성의 매춘은 본인의 동의여부와 상관없이 전면 금지되어야 하며(제1조), 성년인 경우에도 사기나 폭행, 협박, 권력남용, 기타 어떠한 강제수단이 수반된 경우에는 형사처벌을 묻는다(제2 조)라고 되어 있다.
다만 일본이 본 조약을 비준할 때, 식민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유보조항을 두었기 때문에 이 기준을 조선인위안부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따른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위안부의 경우, 일본국적의 선박을 이용해 이송되었다는 사실과 일본으로 일단 이송된 뒤에 또다시 중국 등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 등에 비추어 식민지유보조항은 무효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조선 내에서 행해진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식민지 유보조항이 적용되지만, 조선의 경우, 만일 그 명령을 본국 일본의 육군중앙에서 내리고, 또 식민지에서 행해지는 위법사실을 육군중앙이 숙지하고 있었다면 식민지 유보조항이 적용되니 않는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육군성부관통첩‘군위안소 종업부(從業婦) 모집에 관한 건’이 시달된 1938년 3월 4일 이후의 조선 내에서의 모집에 대해서도 식민지 유보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의 위반이다. 이 조약은 노동자에 대한 노동시간의 제한, 보수의 보장, 노동재해의 보상, 건강의 유지 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군위안부에게 강요된 성적행위가 이 조약에서 정한‘노무’에 해당하는지의 여부가 논란의 여지로 남는다. 이와 관련해 ILO 조약권고전문가위원회는 1997년도의 의견보고서에서 군위안부의 성적행위도 강제노동에 해당한다는 공식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섯째는 ‘노예제 금지 조약’의 위반이다. 이 조약은 국제관습법이기 때문에 일본이 이 조약에 정식으로 가입한 사실에 없다 하더라도 적용이 가능하다. 이 조약에서는 ‘채무노예’도 금지하고 있는데, 따라서 군위안부 중에서 전차금(前借金) 등에 의해 인신이 구속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넷째는 ‘인도에 대한 죄’의 위반이다. 인도에 대한 죄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와 극동의 국제군사재판소의 조례에서 정한 전전 또는 전쟁중에 행한 살인, 참살, 노예적 학대, 추방, 기타의 비인도적인 행위, 또는 정치적 혹은 인종적인 이유로 인한 박해행위를 말한다. 전투시나 전투지에서의 행위 이외의 모든 비인도적인 행위가 이에 속한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본 조례를 수락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위안부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진 일본군인에 의한 살인, 폭행, 노예적 학대 등의 행위는 인도에 대한 죄로서 처벌될 수 있다. 다만 이 조항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기획 및 수행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다섯째는 ‘하그조약’의 위반이다. 이 조약은 일반적으로 조약가입국이 아니면 적용불가능하나, 제46조만은 관습국제법이란 차원에서 일본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제46조의 내용은 점령지역에서의 '집안의 명예와 권리, 개인의 생명, 사유재산’ 등의 존중의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집안의 명예와 권리에는 강간에 의한 굴욕적 행위의 금지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제46조는 점령지역이라는 단서가 있기 때문에 식민지상태였던 조선의 위안부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상이 일본의 국가책임에 대한 주요 관련국제법과 그 해당여부이다.
3. 군위안부 문제의 본질
이상에서 보듯,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책임 여부를 둘러싸고 피해당사자, 시민단체와 일본정부간에는 심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군위안부의 국가책임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군위안부 모집과정에서 법에 의한 강제연행만이 그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위안부모집이 강제연행이었는가 아닌가를 밝히는 것이 군위안부 문제의 본질인 것처럼 위안부 문제를 왜소화시키는 경향도 발견되었다.
수 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재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대의 논점은 일본의 국가책임과 보상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위안부라는 등식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법률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일반인들은 “이건 내 문제가 아닌데…”라는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기 쉽고, 따라서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역사적인 교훈을 살리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군위안부문제의 본질' 이라는 제목으로 군위안부 문제가 지닌 다양한 측면을 다음 4가지로 요약, 정리하고 한다.
첫째로, 군위안부 문제는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범죄라는 사실이다. 즉 국가권력이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이다. 본 논문은 특히 이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군위안부 문제를 지금도 흔히 목격하는 군부대주변의 상업적인 매춘행위와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로, 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또는 점령지라는 특수한 상황하에서 전개된 민족차별이라는 사실이다. 즉 조선인 군위안부의 경우에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집이 될 수 있었으며, 현지 위안소에서도 끊임없이 민족차별과 멸시를 받음으로 인해 그 고통이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셋째는, 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에 대한 성적 차별이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제도는 남성인 군인들이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도 좋다는 일종의 여성차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여성단체가 군위안부 문제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위안부제도가 가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이런 점에서 군위안부 문제는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중인 사안으로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위 세 가지는 군위안부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이외에 군위안소가 설치되는 배경에서 나타난 문제가 있다.
그것이 넷째인데, 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군국주의가 갖는 특수한 체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수많은 나라가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군만이 이토록 독특한 제도를 운영해야 했는가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이는 당시 일본군국주의가 지닌 특성 및 일본사회의 전통적 의식구조나 생활양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제2장에서 자세히 후술하겠다.
제2장 군위안소의 설치 이유
1.군위안소 설치 이전의 상황
군위안소란 군이 공창제도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은 위안부제도에 공창제도가 공권력을 통해‘창기’의 성병검사를 강제적으로 실시하는 등 관리제도가 용이하다는 점을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공창제도의 역사는 이미 17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617년 에도 강호(江戶)막부가 동경(당시 명 강호(江戶))에 유곽지역의 설립을 허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창제도에 처음부터 성병검사제도가 실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에도말기 일본 큐수 구주(九州) 의 나가사키 장기(長崎)항에 기항한 러시아군함 제독의 요구에 따라 에도정부가 특정 유곽지역에 성병검사를 의무화한 것이 그 출발인데, 명치시대에는 1876년 3월에 ‘창기매독검사규칙’이라는 법이 제정되어 매월 2회의 성병검사가 의무화되었다. 그리고 1900년 10월에는 내무성령으로 ‘창기취체(取締)(단속)규칙’이라는 법이 제정되어 근대적인 형태의 공창제도가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이러한 공창제도가 어떻게 군위안부제도로 변용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일본, 식민지, 점령지의 순서로 살펴보기로 하자.4) 먼저 일본에서는 공창설치 지역을 제한함으로 인해 창기수도 한정될 수밖에 없어서, 공창의 창기보다는 예기, 작부 등으로 불리는 사창의 수가 훨씬 많았다. 또 공창은 주로 대도시주변에 설치되어서 군 주둔지와는 멀리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돈이 없는 병사들로서 휴가나 외출을 나오게 되면 싸구려 술집과 성병검사가 불철저한 사창을 출입하는 일이 잦았으며, 이로 인해 군대내 에서는 성병만연이 커다란 골치거리 중의 하나였다. 한편 이런 현상은 일반사회도 비슷했기 때문에 군인으로 징집되는 장정의 성병감염율이 높은 것도 큰 문제였다.
당시 군에서는 성병감염의 제일 큰 요인으로 사창출입을 지목했고, 또 공창 ‘창기’와의 접촉도 이에 버금가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군부는 성병대책으로서 사창을 근절하고 공창의 ‘창기’들에 대한 성병검사 회수를 늘일 것과 단속을 철저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에서는 성병으로 인한 직접적인 인명손상 뿐만 아니라, 교육훈련의 불철저로 인한 군 사기 및 전투력의 저하, 그리고 성병치료에 드는 막대한 경비 등도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5)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비단 일본국내에서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고, 식민지인 대만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정(大正)시대의 자료를 보면, 일본육군의 군의단은 이미 이 때부터 공창 설치와 철저한 성병검사와 단속, 사창의 근절을 주장하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정부는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매춘업소의 효율적인 관리통제를 위해 일본의 공창제도를 도입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본군의 기본적인 성병예방대책은, 비록 군부대의 주둔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병사들에게 사창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한편 공창을 활성화시키고 창기들에 대한 성병검사에 철저를 기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조계지가 있던 상해의 경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본국의 공창을 도입한 가시세키 대석(貸席)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9년 중국정부가 중국인 공창제도를 폐지하면서 일본인 공창도 폐지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이에 따라 일본 외무성도 체면상 공창제도를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대신해 사용한 편법이 요리점작부(料理店酌婦)제도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허가제와 영사관경찰 감독권을 이용해 실질적으로 공창제도와 동일한 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6)
그런데 문제는 전시상태하에서의 점령지였다. 점령지는 상해조계지와 달리 영사관의 감독이 충분히 미치기 못하기 때문에, 성병검사도 철저히 실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32년 3월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상해파견군은 직접 위안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곳이 지금까지의 사료로 확인되는 최초의 일본육군위안소이다. 하지만 이 위안소의 설치에 참여했던 당시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 위안소는 먼저 생긴 상해의 일본해군위안소를 모방하여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7) 따라서 기록은 발견되고 있지 않으나, 지금으로서는 1932년 3월 이전부터 군위안소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6년 말에 이르면 상해에는 육군위안소에 약 300명의 위안부가 있었으며, 해군위안소도 7개소 가 있었다. 해군위안소의 경우에는 군인전용으로써 하사관 이하의 해군 병사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위안부에 대해서는 매주 1회 전문의사가 육전대 및 영사관 경찰의 입회하에 성병검사를 실시하였다. 8)
1937년 7월, 일본은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개시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본국 으로부터 수십만의 병력이 중국대륙으로 파견되어, 1938년 이후에는 중국대륙에 약 100만에 달하 는 병력이 상주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일본군은 중국각지에 군위안소를 대량으로 설치하게 되었다. 또 이에 맞추어 군위안소를 운영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쇄도하게 되고, 군위안부 모집과 관련해 각종 범법행위가 자행되기게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따라 일본정부와 군중앙은 1938년 초부터 당시까지 중국 현지군에게 맡겨놓고 있던 위안소의 설치에서 위안부모집에 이르 기까지의 위안소정책 전반에 대해서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 군위안소 설치의 배경
그러면 일본군은 왜 이처럼 군위안소를 설치하려 했는가? 그 이유로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1)점령지역에서의 약탈, 강간 등의 범죄예방대책 2)군대내의 성병예방대책 3)군내부에서의 각종 가혹행위, 상관에 대한 폭행'등 군기문란에 대한 대책 그리고 4)방첩(스파이 방지)이다. 그런데, 이 앞의 세 가지는 상호 깊은 관련이 있다. 즉 군내의 성병만연, 점령지내에서의 군인들에 의한 각종 범죄행위, 그리고 군내부의 군기문란 등은 모두 역사적인 배경으로부터 형성된 일본군의 독특한 체질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9)
1864년 명치유신에 성공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 명치정부는 1873년 1월에 징병령을 발포하고 89년 1월 전면개정을 통해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원칙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징병제의 도입으로 인해 주로 농민출신의 빈곤한 청년들이 대량으로 군에 징집되었고, 따라서 병사들의 평균적인 교육수준이나 의식수준은 매우 낮은 상태였다. 그후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국주의사상이 점점 강화되는 가운데, 이들 병사들에게는 절대복종과 충절, 예의,무용, 검소, 신의 등을 중심으로 한 군인정신이 철저히 주입되었다.
하지만 이런 군인정신교육은 상호인격존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봉건가부장제를 군이라는 특수사회에 연장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 결과 병영내에서는 '사랑의 매'라는 명목하에 고참에 의한 폭력, 구타 등 가혹행위가 만연하게 되었다. 한편, 군상부에서는 이러한 사적 제재행위를 알면서도 별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내무반 질서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행위와 의식에 길들여진 말단 병사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인권의식이 희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병력이 대량으로 증파되어 대의명분 없는 전쟁에 투입되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으로 휴가도 없이 장기간 전장터에 묶이게 된 병사들의 심리상태는 군대내의 비인간적인 내무생활 등으로 인한 정신적인 황폐감,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절박감과 불안감 등으로 심하게는 정신질환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천황군대라는 미명하에 우월의식, 민족차별의식마저 주입된 병사들은 중국인에 대한 약탈, 방화, 강간 등을 대량으로 자행하게 됨으로써 수십만의 중국인이 살해되는 '남경대학살'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남경대학살'사건으로 인해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은 더욱 높아지고 점령지 내에서의 치안유지가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일본군수뇌부는 이러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전쟁 수행자체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책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 병사들이 안전하고 질서있게 성적욕구와 폭력욕구를 발산시킬 수 있는 위안소의 대량설치 였던 것이다.
제3장 군위안소 정책에 대한 일본국가의 관리통제 실태
1. 군위안소 정책의 개요(별도 표1ㆍ2참조)
군위안소란 군인군속만이 이용 가능한 '위안' 시설이다. 이러한 군위안소의 개설부터 운영에 관여한 공작기구는 우선 정부기구와 군부로 나뉘어지고, 또 지역을 기준으로 본국 일본과 식민지, 점령지라는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본국 일본의 정부와 군중앙, 조선 내지 대만의 식민지에 소재한 총독부와 일본군, 그리고 점령지에 소재한 영사관 등 정부관계기구와 현지군이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국가책임의 주대상인 셈이다.
이상의 국가권력이 어떤 식으로 군위안부제도에 관여했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여기서는 우선 군위안소의 개요를 위안소의 설치, 위안부의 징집, 위안부의 이송, 위안부의 운영과 통제ㆍ감독, 패전 후 처리라는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1) 위안소의 설치 : 위안소 설치는 육군성과 각 파견군의 지시로 개설되었다. 이에 따라 위안소를 설치하는 방법은 첫째로, 상급부대가 하급부대에게 설치를 명령하는 경우, 둘째로, 현지의 대대나 중대 등이 신청하고 현지의 군사령부가 이를 허가하는 경우와, 셋째로는 각 부대가 상급부대의 허가없이 독자적으로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2) 위안부의 모집 : 위안부의 모집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 민간업자를 전면에 내세워 행해졌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위안부의 모집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대략 다음 4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첫째는, 군위안소가 실제로 설치되는 점령지의 군대가 상급군 부대를 통해 본국 혹은 식민지 관계기관에 군위안부의 모집을 요청한다.
둘째는, 이와 같은 요청을 받은 기관, 즉 일본에서는 육군성과 내무성이, 조선과 대만에서는 각각의 총독부와 군사령부가 각 지역의 위안부모집을 총괄한다. 다만, 현재까지 조선총독부에 위안부모집을 요청한 공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셋째는, 일본에서는 내무성 경보국이 각 부현(府縣)에 할당인원을 정해 통첩을 내려보내고, 이들 지방의 경찰이 위안부를 모집할 민간업자를 선정한다. 한편 조선의 경우는 조선군사령부가 직접 민간업자를 선정하였다. 또는 조선총독부가 각도에 인원 등을 할당하고 지방경찰이 민간업자를 선정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넷째는, 이처럼 군 또는 경찰의 선정을 받은 민간업자는 직접 혹은 하청업자를 동원하여 위안부를 모집한다.
(3) 위안부의 이송 : 위안부를 현지까지 이송하는 책임자는 군 또는 민간업자이며, 일본정부 또는 기타 관련군은 이에 협력하고 각종 편의를 제공한다. 중국까지의 이송수단은 선박(군용선 또는 어용선)이나 철도이며, 중국내에서는 만주철도 등 일본군이 관리하는 철도나 군용트럭이 사용되었다.
(4) 위안부의 운영과 통제ㆍ감독 : 위안소의 형태에는 군이 직접 운영하는 군직영위안소와 민간업자가 운영하는 군전속위안소의 두 가지가 있다. 민간업자가 운영하는 군전속위안소의 경우에도 군이 각종 편의를 제공하면서 실제적인 관리통제권을 행사했다.
(5) 패전후의 처리 : 일본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를 계기로 갑작스런 패전을 맞았기 때문에 패전처리에 관해서는 별다른 준비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군은 패전을 맞아 군위안부를 그대로 방치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인위안부는 지금도 현지에 남아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논문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다음 절부터는 이러한 정부와 군의 관여사실을 4부분으로 나누어 상세히 밝히고자 한다.
2. 군 위안소의 설치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군위안소의 설치와 관련해 군이 일부 관여한 것은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거의 대부분은 민간업자가 영리행위를 목적으로 개설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우익들은 이러한 군의 일부 관여마저도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한 마디로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시키는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하에서는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들을 토대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군위안소의 설치가 대부분 실제로는 군의 계획과 통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일본정부가 군의 관여를 인정하는 계기가 된 자료, 즉 1938년 일본육군성이 발한 통첩 '군위안소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에 대해 보기로 하자. 10)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에서 보면, 일본의 군중앙이 위안부의 모집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때는 바로 이 통첩이 발송된 1938년 3월 4일 부터이다. 이 통첩은 당시 육군성 부관 명의로 북지나 방면군 및 중지나 파견군 참모장 앞으로 발송되었으며, 그 주된 내용은 각 파견군(북지나방면군(北支那方面軍),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이 위안소 설치와 관련해 민간업자의 선정에서부터 위안부모집에 이르기까지 관리통제를 철저히 할 것과, 위안부모집에 이르기까지 관리통제를 철저히 할 것과, 위안부모집에 있어 각 지방의 경찰 및 헌병과의 연계를 밀접히 할 것을 명한 것이었다. 이 자료가 앞에서 밝혔듯이, 1992년 1월에 발견되어 일본정부가 군의 관여를 인정하게 된 자료이다.
이 통첩은 제1차 고노에(近衛)내각의 육군대신 스기야마 삼산원(杉山元)의 위임을 받아, 육군성병무과가 입안하고 육군성차관인 우메츠 매진미치랑(梅津美治郞)가 결재했는데, 당시의 병무국장은 이마무라 금촌균(今村均)이고 병무국장은 치바 천엽웅치(千葉熊治)란 인물이었다.
그런데 육군성이 이런 통첩을 내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일까? 당시 일본에서는 민간업자들이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유괴에 버금가는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었고 이것이 사회문제로까지 등장했다. 육군성은 이런 사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위안부 모집업자들이 유괴범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 경우가 늘어나 군의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민간업자에 대한 감독통제를 엄격히 하고 또 각 지방 경찰 및 헌병과의 협조를 명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군이 위안소의 설치에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극동군사재판소기록 제 265호에 기록되어 있는 고다마 아옥구장(兒玉久藏)의 증언내용이 있다.11) 고다마는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육군성의 병무국 병무과에 일했는데, 그가 패전 후 동경전범재판에서의 심문과정에서 증언한 내용을 보면, 당시 육군성이 점령지의 각 부대에서 전쟁범죄대책의 일환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지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1) 교육총감부가 편찬한「전시복무제요(戰時服務提要)」 를 전 장교들에게 배부하고 전장에서의 복무규정으로 삼을 것 (2) 특히 육군성중앙직원으로 구성 된 군기풍기사찰단(軍紀風紀査察團)을 중국 각지에 2개월간 파견하여 군위안소에 대한 조사 및 지도를 행하고, 이를 기준으로 위안소시설의 확충 등 조처를 취할 것, (3) 전장에서의 위안시설을 확충하고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군위안소)시설에 대해서도 보완할 것 등이다.
위에서 말한 세가지 사항 중 (1)의 '전시복무제요'(38년 5월 25일 발행)에 대해서는 좀 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제8장 '인마(人馬)의 위생'에는 "성병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함과 아울러, 위안소 위생 시설을 완비하고 군에서 인정하지 않은 매소부(賣笑婦)<매춘부>, 그리고 토민(土民)<중국인>과의 접촉을 엄격히 통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본육군성은 점령지 전역에 걸쳐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이상의 고다마의 증언에서 보듯, 당시의 일본육군성은 점령지의 전쟁범죄대책이란 명목하에 위안소의 설치 또는 확충에 직접 관여했던 것이 분명하다.
다음으로는 북지나방면군(北支那方面軍)의 참모장 오카베(강부직삼랑(岡部直三郞)) 명의로 1938년 6월에 예하부대에 하달된 '군인ㆍ군대의 대주민행위와 관련한 주의사항의 건'이란 문서를 보자. 이 문서는 "주민에 대한 불법행위가 주민들의 원망을 사서 반일의식을 부추기고, 공산 항일분자들의 민중선동 구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점령지의 치안유지와 군사작전에 대한 중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가능한 한 신속히 위안소 설비를 갖출 것을 명하고 있다.13)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주민들에 대한 불법행위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당시 "각지에서 빈발하고" 있던 중국인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사건이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유교의식도 강하게 작용해 부녀간에 강간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무겁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을 부추기는 병사들의 강간사건을 방지하는 대책으로서 군위안소의 설치를 명하게 된 것이다.
또 한가지 흥미 있는 자료로는 육군성이 1939년에 2개월간의 현지조사를 통해 작성한 '지나사변 (支那事變)의 경험에서 본 군기진작대책' 이라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1940년에 작성되어 각 육군부대에 하달되었는데, 병사들의 정신교육 재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4)
여기에 보면, 중일전쟁이후 빈발하고 있는 민간에 대한 약탈, 강간, 방화, 포로학살 등의 행위가 군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나아가 그들이 부르짖는 성전(聖戰)에 대한 내외의 혐오감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이로 인해 점령지내에서의 치안공작이 방해되고, 국제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쳐서 전략에 차질을 가져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동 문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위안소 시설에 관하여 면밀주도하게 고려"하고, 특히 "위안소 등 제반시설을 강화하는 각종수단"을 강구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4가지 자료를 토대로 당시 일본군 수뇌부가 직접 위안소의 설치를 명령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 한편, 그 이유로는 당시 빈발하고 있던 병사들에 의한 강간, 약탈, 방화사건 등이 주민들의 항일의식을 부추기고 국제여론을 악화시켜 전력에 차질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었다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군의 명령에 따라 설치된 위안소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15)
1937년 12월 중지나 방면군은 예하부대에 위안소를 설치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상해 파견군에서는 참모 제2과가 위안소의 설치 및 운영안을 기안해, 쵸우(장용(長勇)) 중좌의 책임하에 남경에 군위안소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같은 시기에 제10군에서는 참모 테라다 사전아웅(寺田雅雄)의 지휘하에 헌병들이 동원되어 호주(湖州)에 군위안소를 설치하였다. 자료로는 확인되고 있지 않으나, 앞서 얘기한 오카베중장 지휘하의 각 예하부대에서도 동일한 과정을 거쳐 위안소가 설치되었을 것이란 점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군부대의 전속과 전투참가로 인해 증원된 케이스를 한 가지 보기로 하자. 독립산(獨立山)포병 제3연대본부의 경우가 바로 그것인데, 이 부대는 원래 제2군 3사단소속이었으나 남창(南昌)공략전투에 참가한 직후 16사단으로 전속되어, 이후 무한(武漢)공략 전투에 참가한 뒤 응산(應山)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 부대에는 원래 연대전속의 위안소가 이미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빈번하게 전투에 참가하게 되면서 상급부대에서는 군인들의 사기진작과 점령지에서의 강간방지 등을 위해 동부대에 위안부를 증원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16)
3.군위안부의 모집
그러면 여기서는 위안부의 모집이 당시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위안부의 모집은 그 대상지역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파견군이 점령지에서 직접 모집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일본과 조선, 대만에서 모집해서 현지로 이송하는 경우이다. 우선 점령지의 경우를 중국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1) 점령지의 경우
점령지의 경우는 식민지와는 달리 군이 직접 전면에 나선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각 파견군은 하급부대에 위안소 설치를 지시하고, 각 사단ㆍ여단ㆍ연대의 후방참모나 부관의 지휘하에 병참부, 경리부, 헌병 등이 위안부를 징집하였다. 다만 이 때에도 현지의 유력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유력자가 이러한 군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점령지라는 상황에서 보아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할 것이다. 이 밖에도 군은 성병예방을 위해 매춘부가 아닌 여성들을 본인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징집한 경우도 있었다. 한편, 소위 '토벌'이라 불리는 작전수행중에 강제적으로 부녀자를 연행해 가는 경우도 있었다. 17)
다만 현재까지는 중국의 전위안부들의 증언이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내에서의 위안부 징집에 대한 정확한 실태의 파악은 좀 더 시간을 요한다.
이번에는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를 보자. 지금까지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는 거의가 조선내에서 모집되었으며, 점령지에서 군에 의해 징집된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김학순씨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데, 그녀는 양아버지의 함께 중국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던 중에 일본군에 붙잡혀 강제로 위안소에 보내졌다. 1941년의 일이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18)
2)일본, 조선, 대만의 경우
일본 또는 조선과 대만에서의 위안부 징집에 있어서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업자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이하에서는 일본과 조선의 경우로 나누어, 일본정부와 군이 어떤 식으로 이들 민간업자를 통제, 관리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일본의 경우는 현지의 파견군이나 육군성이 내무성에 위안부의 파견을 요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요청을 받은 내무성은 부현 등 각 지방관청에서 인원을 할당 배정한다. 그러면 각 지방의 경찰이 민간업자를 선정하고, 이 민간업자가 모집에 나선다.
이상의 프로세스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자료 중의 하나가, 1938년 11월 남지나파견군의 코소(고장(古裝))부대 참모인 육군항공병 소좌 히사카도(구문유문(久門有文 ))와 육군성의 징모 과장(성명 미상) 두 사람이 내무성에 찾아와 약 400명의 위안부를 모집해 남지나(南支那) 파견군(派遣軍)(제21군)에 보내줄 것을 요청한데 따라 내무성이 각 부현의 지방관청에 발송한 통첩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내무성은 오사카(대판(大阪))에 100명, 효고(병고(兵庫))에 100명, 후쿠오카(복강(福岡))에 100명 등 5개 지방에 인원을 할당배정함과 아울러 각 지방의 경찰이 민간업자를 선정해 징집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이미 1938년 2월의 내무성통첩에 의해 군위안부는 21세 이상의 '매춘부'만을 할 것을 시달한 바 있다. 또한 업자를 선정할 때, 이들에게 경영을 맡길 것이므로 매춘업을 하고 있는 자들 중에 신원이 확실한 자로 선정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아, 제21군에 보내진 400명의 일본군위안부들은 아마도 21세 이상의 매춘부직업을 가진 여성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
다음으로는 조선 내에서의 위안부모집에 대해서 보기로 하자 . 이 경우도 현지의 파견군이 조선 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에 위안부파견을 요청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는 각 지방에 인원을 할당배정하고 지방경찰이 민간업자를 선정해 위안부를 모집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총독부의 관여 사실을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개입을 알 수 있는 유력한 증언이 있다. 전관동군 후방담당참모였던 하라(원선사랑(原善四郞))는 그의 저서에서, 관동군은 1941년 7월경에 약 2만 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징집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약 8천 명의 조선인위안부가 실제로 모집되었다고 쓰고 있다. 20) 아직까지 이 증언을 뒷받침 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조선인 위안부 모집에 조선총독부가 깊이 관여하였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또 한가지 조선총독부의 관여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있다. 21) 당시 대만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는데, 앞서 말한 내무성자료 가운데는 "이미 대만 총독부의 손을 빌려, 대만에서 약 300명의 [군위안부]가 도항준비를 완료"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이는 대만총독부가 위안부모집에 직접 관여하였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이로 미루어 조선총독부도 동일한 관여를 했으리라 보인다. 한편, 동자료를 보면 흥미있는 구절이 보인다. 즉,"비밀리에 적당 한 인솔자(포주)를 선정해서 그로 하여금 위안부를 모집케 하고 현지에 보내도록 하라" 는 구절이 다. 이처럼 일본 정부와 군은 민간업자를 전면에 내세워 실제로는 자신들이 총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력 숨기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2)
당시 조선총독부가 위안부의 모집, 이송 등 전반에 걸쳐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군은 한구(漢口)를 점령하고 나서 약 3개월이 경과한 1939년 11월 한구의 일본 총영사가 본국의 외무성 앞으로 보낸 왕복서신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당시의 한구에는 영사관에 등록된 재류일본인만 해도 2,289명에 달하고, 음식점ㆍ카페ㆍ찻집ㆍ요리점 등이 총 258개소, 잡화상이 220개소, 이 밖에 병참ㆍ헌병대ㆍ영사관이 허가한 군위안소가 20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 서신은, 이러한 업종이 이미 포화상태에 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항해 오는 자들이 많으므로 이를 제한해 줄 것을 외무성에 요청하는 것이었다. 외무성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한구에의 도항을 제한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23) 그런데 이 한구의 문서 는 탁무성을 통해 조선총독부에도 전달되었다. 24)
다시 말해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위안부의 도항을 통제, 관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 조선총독부의 개입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다음으로는 조선군사령부가 관여한 사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944년 11월, 당시 미육군보병대 대령으로서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의 감독관 스위후트는 일본인 포로를 상대로 벌인 심문내용을 기초로 상부에 '심리전ㆍ심문보고'란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군위안소를 경영하다 포로가 된 위안소경영자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1942년 경성의 조선군사령부는 일본인 요리점 경영자 수명에게 버어마에서 군위안소를 경영할 것을 요청해 왔다. 그래서 이 업자도 육군사령부로부터 위안부 모집허가를 받았고, 조선군사령부는 각지의 사령부로 이들 업자에게 식량, 의료 등에 관해 최대한 지원해 달라는 요청의 소개장을 써 주었다. 이 업자는 인신매매 등의 방법으로 조선인미혼자 22명을 모집해 1942년 7월 10일 부산항을 출발하는데, 모집당시 이들 22명 위안부의 연령은 17세에서 29세까지였다. 이들을 포함해 일행은 90명의 일본인업자와 703명의 조선인위안부 여성들이었으며, 7척의 배에 분승했는데, 모두에게는 군사령부로부터 무료로 도항권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25)
민간업자 또는 군은 조선에서 위안부를 어떻게 모집했을까? 이는 크게 1. 취업사기 2. 인신매매 3. 유괴ㆍ납치 4. 공권력에 의한 연행이라는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만 위안부 한 사람씩 놓고 보면 이들 4가지 방법이 복합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아 정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다만 개략적으로 구분하자면, 조선에서는 취업사기의 경우가 가장 많다. 26) 또 미성년자인 경우도 많았는데, 93년 현재 신원이 확인된 전위안부 175명 가운데 약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미성년자로 확인되고 있다. 27)
4. 군위안부의 이송
(1) 도항에 필요한 증명서
정부 또는 군이 선정한 업자와 위안부의 경우에도 중국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각종 증명서가 필요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신분증명서였는데, 이는 일본인(조선인과 대만인 포함)이 일본이나 조선 또는 대만에서 중국으로 도항하기 전에 신청하면, 거주지의 경찰서장이 발행했다. 이처럼 민간인의 도지(渡支)에 신분증명서가 요구된 이유는, 1937년 9월부터 중일전쟁의 수행상 민간인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위안부도 형식상으로는 신분증명서가 필요하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정부와 군이 각종 편의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업자와 위안부만은 일종의 군속에 해당하는 예외적인 처우를 받았다.
훗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멀리 남방(南方)(지금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까지 위안소설치가 확대되었는데, 이 때에도 다시금 위안부와 민간업자의 도항증명서가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이들에 대해서 만큼은 여권대신 군이 발부한 증명서만으로도 도항하도록 조처를 취했다. 28) 역으로 해석하면 업자와 위안부는 군이 발부한 증명서 없이는 적어도 남방에는 갈 수 없게 되었고, 군이 일반 민간인과 구분해서 별도로 관리했던 것이다.
외무성이 대만총독부로 보낸 이 문서에서도 군위안부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손으로 작성된 이 문서는 업자나 위안부들에게는 "여권발급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군의 증명서로 "군용선을 이용하여" 이송하라는 부분 (" " 안의 글)을 썼다가 지워 놓았다.
앞서의 얘기로 돌아가, 거주지의 경찰은 위안소관련자들에 대한 신분증명서 발급에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신분증명서의 발급에는 일반적으로 신청인의 신원조회가 필요했는데, 일본내무성(경찰)이 선정한 업자의 경우에는 당연히 이러한 신원조회가 생략되었다. 또 파견군이 선정한 업자의 경우는 군고용원과 동일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에 영사관경찰에 의한 신원조사가 생략되었고 자동적으로 영사관으로부터 도지(渡支)사유증명서(또는 신분증명서)가 발급되었다. 29) 이 도지(渡支) 사유증명서가 있으면, 일본내에서도 경찰은 더 이상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도항에 있어서 군위안소관계자들이 어떠한 우대를 받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한 사례를 소개 한다. 광동성(廣東省) 소재의 남지나파견군(南支那派遣軍) 시오다(염전(鹽田)) 부대와 하야시(임(林))부대의 전속위안소를 경영하던 한 민간업자가 1940년 6월에 군위안부를 추가로 모집하기 위해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대만에서 위안부 6명을 모집해 다시 광동성의 군부대로 가기 위해 대만 다카오주(고웅주(高雄州))에 있는 경찰에 재도항에 필요한 신분증명서를 신청했다. 그런데, 이 업자는 당시 민간이라면 당연히 소지해야 할 광동영사관 발급의 재도항 증명서는 소지하지 않고 군이 발급한 신분증명서만을 소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법대로라면 도지(渡支)사유증명서가 없는 그는 즉시 광동에 돌아갈 수 없음에도 다카오주의 경찰은 이들에게 특별히 신분증명서를 발급, 재도항을 허가했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위안소는 시급을 요하는 사안이며, 광동영사관이 군부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미리 영사관의 재도항 증명서를 받기가 어려웠다는 사실 등을 참작했다고 하는 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 30)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정부와 군은 군위안소관계자에 대해서는 보통 민간인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우대했던 것이다.
(2)도항과 관련된 일본내무성의 감독책임
민간인의 경우에는 반드시 거주지 경찰이 발행하는 신분증명서가 필요했다. 경찰서장은 신청자의 신분, 직업, 도항목적, 요건, 기간 등을 조사할 의무가 있었다. 특히 일본내무성은 1938년 2월 위안부와 관련하여 일본 각지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시달했다. (1) 국제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위안부를 모집할 시는 만 21세 이상의 성병에 걸리지 않은 매춘부에 한 할 것, (2) 본인이 직접 경찰서에 출두하여 신분증명서 발급신청을 하도록 하고, 필요한 요건을 조사 확인 할 것, (3) 인신매매나 유괴납치 등의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 할 것 등이다. 31) 이처럼 일본 정부는 일본국내에서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방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조선이나 대만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와는 달리 "조선과 대만에서의 위안부 강제징집에 대해서는 방지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32)
도항에 관해서는 어떠했는가? 전술한 남지나(南支那) 파견군(派遣軍)의 민간업자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앞서 밝혔듯이 이 업자는 민간인이 소유해야 할 거주지 영사관 발행의 증명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소경영자이자 모집업자라는 신분과 목적이 확실하다는 이유로 외무성, 대만총독부, 타가오주지사의 결재를 통해 중국으로의 도항증이 발급되었다. 기록을 보면, 이 업자가 대만에서 모집한 위안부의 연령은 겨우 14세에서 18세이다. 33) 한 편 『증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위안부들 1ㆍ2』에 의하면, 조선인위안부들의 모집당시 연령은 총 34명 중에서 91%에 해당 하는 31명이 21세 미만의 미성년인것을 알 수 있다.34) 이처럼, 당시의 일본정부는 대만이나 조선에서 미성년자가 위안부로 모집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면서 이를 묵인했음을 알 수 있다.
(3) 군위안부 이송의 책임
앞(제2장 3절)에서 이송 수단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세 개의 자료를 예로 위안부 이송의 책임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한다.
이송에 대한 지시나 군용선 승선허가를 하는 것은 군이 주체이고, 일본에서는 내무성이 관여했다.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가 관여했으리라 짐작된다. 조선군사령부에서는 객선의 승선권을 무료 지급,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위안부를 현지까지 인솔, 이송하는 것은 업자이나, 이는 일본정부가 군위안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일본국내에서 이송한 경우이다. 남지나 파견군(南支那 派遣軍)의 요청에 의해 내무성의 지시로 5개 부현에 모집된 400명의 위안부는 대만을 거쳐 현지 위안소에 이송되었다. 국내에서의 이송에 관한 연락 및 지시는 내무성과 육군성이고, 중국에서는 군사령부가 맡고 있다. 업자에게 이송에 있어서 필요한 교통수단과 경로, 주의사항까지를 자세히 지시하고 있는데, 업자가 비밀리에 대만까지 데리고 간 후, 대만에서는 어용선에 편승해서 가거나,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는 대만의 타카오에서 광동간의 연락선을 이용하라고 되어있다.35)
대만에서 보루네오로 이송한 경우인데, 대만군사령부는 남방총군에게 위안부 파견을 의뢰 받아 헌병이 업자 3명을 선정하고, 42년 3월 12일, 대만군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이들 세명의 도항허가를 구하였고, 대만군부관을 통해 16일자로 허가가 전달되었다. 업자는 대만인군위안부 50명을 데리고 도항하였다. 36)
조선의 경우 남방군의 의뢰를 받아 조선군사령부가 업자를 선정하고 업자에게 도항에 필요한 가능한 편의를 주고 있다. 이들은 4,000톤의 선박으로 이송되었다. 37)
이상에서 본 것 같이 업자에게 인솔의 책임이 있다면, 업자를 감독하는 총책임은 군 내지는 일본 정부였다.
5.군위안소의 운영
(1)군 위안소의 형태
군위안소의 형태는 군과 민간업자의 관계, 그리고 위안소에 대한 군의 경영ㆍ감독방법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군직영의 위안소로서 민간업자가 개재되지 않고 군이 직접 운영하는 형태이다. 둘째는 민간업자가 개재되어 있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군이 직접 경영하는 것과 동일한 군전속위안소이다. 이 군전속위안소의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위안소 형태로서, 지금까지 밝혀진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도 가장 많은 숫자가 이에 속한다.
셋째는 군이 민간업자가 운영하는 매춘업소를 특별히 선정해서 군이 이용토록 하는 군이용위안소이다. 이 경우에는 원래 민간인이 이용하는 곳인데, 민간업자가 군에게 특별히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시간이 지나 현지군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특히 후방지역인 경우, 군이용위안소가 군전속위안소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38) 이렇게 되면 군의 감독통제를 받는 대신에 각종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군과 업자가 상호이익을 위해 계약을 맺은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세가지 위안소의 운영방식을 살펴 보기로 하자.
2)군직영위안소
이 형태의 대표적인 사례가,1938년 1월 상해 근교의 양가댁(楊家宅)에 설치된 '육군오락소'라는 이름의 위안소이다. 이 육군오락소는 제11군 병참사령부가 관리했으며, 109명의 위안부가 있었고, 그 중 80명은 일본 큐슈(구주(九州))의 탄광촌에서 모집된 조선여성이었다. 위안소의 건물은 동군(同軍)의 영선부(營繕部)가 건설했는데, 관리소건물을 포함해 13동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주변에는 철조망이 둘러처져 있었다. 위안소에 관한 규칙은 동군 참모부에서 '군오락소규칙'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군인군속만이 이용 가능했고, 이용시는 관리실에서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 위안부에게 지불하는 형식이었다. 요금은 2엔, 이용시간은 30분으로 제한되었다. 39)
군직영위안소로써 인도네시아에 설치된 두 곳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한 곳은 제2군 바레바레경비대 소속의 해군위안소인데, 이곳의 책임자는 동부대의 육군중좌(중령)이었고, 위안소 건물도 군부대 소유였다. 11명의 인도네시아위안부들이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또 한 곳은 켄다리해군부대인데, 이곳의 책임자는 대위이고 28명의 인도네시아위안부들이 군에서 지급하는 식량, 의복, 침구 등으로 생활하였다. 40)
(3)군전속위안소
군전속위안소는 형식상으로는 민간업자가 운영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군이 관리하는 형태의 위안소이다.
우선 민간업자가 군이 어떤 식으로 관계하고 있었는가를 독립보병 제13여단의 나카야마중산(中山)) 경비대 및 토야마(원산(遠山))부대 그리고 필리핀의 군정감부(軍政監部) 비자야지부(支部) 이로이로출장소의 전속위안소 등의 예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41) 이들 위안소는 각각의 부대의사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이들을 통해 하나의 전형적인 위안소의 모습을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위안소의 경영자는 형식상으로는 물론 민간업자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대의 부관 또는 서무담당장교가 위안소업무를 총지휘했다.
민간업자는 매일 전날의 상황을 기록한 일보를, 그리고 월초에는 전월의 상황을 기록한 월보를 군의 위안소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일보에는 위안부의 이름ㆍ수입액ㆍ계급별(장교, 하사관, 병으로 구분) 이용자수 등을, 그리고 월보에는 위안부의 이름ㆍ해당월의 위안부별 수입과 업자의 수입ㆍ위안부별 근무일수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야 했다. 또 동부대의 군의관은 위안소의 위생관리 책임자로서 위안부의 성병검사는 물론 위안부의 식사메뉴에 이르기까지 관리했으며, 주계관(主計官)이 경리담당장교 위안소의 경리에 대해 감독했다. 한편, 민간업자는 위안부를 감독, 통제하는 지위에 있었으며, 위안부들의 외출에 이르기까지 행동을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군부대에 즉시 보고하고 그 지시를 받았다. 또 앞서 말한대로 일별 및 월별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했다.
이제부터는 몇 가지 위안소이용규칙을 통해 군전속위안소의 일반적인 운영 실태를 보기로 하자. 규칙은 군의 이용시간, 요금, 휴일 등에 대한 세부사항까지 결정하였다. 위안소의 이용시간은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였는데, 병사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사관 및 군속은 오후 4 시부터 7시까지, 장교와 사관생도는 오후 7시부터 밤 12시까지로 계급에 따라 이용시간을 구분했다.
위안부는 출신민족에 따라 요금이 달랐는데, 예를 들면, 제한시간 1시간에 일본인은 2엔, 조선인은 1엔 50전, 중국인은 1엔이었다. 요금지불방법은 현금, 군표 등을 관리소에 미리 지불하고 번호가 적힌 표(정리권)를 받든가, 또는 위안부에게 직접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안부들의 휴일은 월 1회 정도, 그리고 7-10일마다 군의관으로부터 성병검사를 받아야 했다. 위안부의 외출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외출의 경우는 반드시 사전허가를 받아야 하고, 자유로이 산보 할 수 있는 구역과 시간도 엄격히 한정되어 있었다. 이처럼 위안부의 행동은 철저히 군에 의해 통제 되었다.
그런데, 상주(常州)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공성중포병(獨立攻城重砲兵) 제2대대의 내무규정을 보면, 위안소의 사용규정 가운데, "요금은 반드시 지불할것", "위안소내에서 행동에 조심하고 폭행하지 말것"이라는 주의 사항이 적혀있다. 42) 이러한 규정이 생긴 것을 보아도, 당시 위안소내에서 병사들이 요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을 뿐더러 위안부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4)위안부의 실태
위안부들의 생활은 위안소 규정에 따라야 했다. 앞서 밝혔듯, 조선인위안부의 경우는 어린 나이의 처녀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김학순씨의 경우는 위안소에 연행된 날 밤 그 부대의 장교에게 강간을 당해 처녀를 잃었다. 이들 위안부에게는 대체로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이 과해졌다. 한국의 보건사회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위안부 중에서 하루에 2-30명의 병사들을 상대해야 했던 사람의 숫자가 22명 가운데 8명이나 되었다. 정대협이 조사한 결과도 32명중 11명이 이와 같은 경우로 보건사회부 조사결과와 비슷하다. 43)
한편, 위안부들의 건강상태는 어떠했을까? 여기서는 위안부들의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였던 성병문제를 중심으로 보기로 하자.
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성병예방대책이었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한 군의관의 연구 논문에 의하면, 군위안소를 설치하고 나서부터 병사들이 위안부들로부터 성병에 감염되는 확률이 높아져서 오히려 성병이 더욱 만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44) 당시 위안부는 물론이려니와 병사들까지도 많은 숫자가 성병으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런 숫자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제15사단 군의부에서 발행한 '위생업무용보'에 의하면, 1942년 12월에서 1943년 2월까지 3달간에 걸쳐 남경을 비롯한 4-6개 도시의 위안소에 있는 위안부들을 상대로 실시한 성병검사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성병감염자의 비율을 월별로 보면, 12월엔 조사대상 568명 중 71명으로 12.5%, 1월에는 동 540명 중 84명으로 15.6%, 2월에는 동 628명 중 143명으로 22.9%를 기록하고 있다. 45)
당시 일본군은 위안부에 대해 주1회 정도 성병검사를 실시하는 등 성병퇴치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왜 성병은 좀처럼 근절되지 않은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해, 우선은 당시의 군인이었던 고지마 소동융납(小島隆男)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에 의하면 천황의 군대인 일본의 군인들이 성병에 걸리는 것은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군인들은 성병에 걸린 사실을 될 수 있으면 숨기려 노력했다고 한다. 46)
또 한가지는 병사들이 성행위시에 성병예방기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보고도 있다. 47) 그 이유는 군이 지정된 곳 이외의 매춘업소를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사용되기도 하여 한 군인이 사용할 성병예방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군인들이 이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의식도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성병검사 자체도 허술했던 것 같다. 성병검사는 보통 성병 전문의가 아닌 군의관 들이 담당하였는데, 그 숫자도 부족했다. 따라서 일반 위생병, 심지어는 고참 위안부가 대신해서 위생검사를 실시한 예도 있었다. 48) 이처럼 규칙상에는 주 1회의 성병검사가 있었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친 곳이 적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덧붙여, 이러한 군대내의 성병만연에 대해 그 책임이 마치 위안부에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시각도 눈에 띈다. 그러나 이는 본말이 전도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위안부는 징집될 당시에 철저한 성병검사를 거쳤기 때문에, 이들은 소속부대로 온 후 병사들과의 접촉에 의해서 성병에 감염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안부는 성병만연의 책임자가 아니라 성병의 제일 큰 피해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맺음말 ;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의 시사점
본 논문은 군위안부 문제의 본질적인 4가지 측면(제1장) 가운데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위안소정책 전반에 걸쳐 일본정부와 군이 어떻게 관여했는가 라는 사실들을 추적해 왔다. 이하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일본의 국가책임에 대한 결론을 말하고 현안문제인 국가보상문제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덧붙여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필요에 따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국가 책임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군위안소 설치에서 운영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와 군이 어떤 식으로 관여했는가를 추적해 왔다. 위안소의 설치에 대해서는 군이 직접 기안하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보았다. 위안부의 모집에 있어서도, 점령지에서는 군이 직접 위안부를 모집하였으며, 식민지인 조선에서는 형식상으로는 민간업자가 모집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가 이들 민간업자를 선정하고 이들이 저지르는 각종 불법행위를 묵인하여 주었으며, 동시에 도항에 필요한 신분증명서의 발급 등에 있어서 특별한 편의를 제공하였다는 사실 등을 살펴보았다. 위안부의 이송에서도 군용선이나 일본국적 선박이 이용되었다. 위안소의 경영에서는 군직영이든 군전속이든 실제적으로는 군이 경영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결론적으로 전군대위안소 경영자였던 가츠키 향월구치(香月久治)의 말을 빌리자면, 군위안소는 "영업이든 뭐든 군사령부가 모든 걸 관할" 했던 것이다. 49)
군위안부들이 받은 인권침해의 실상은 '강간'과 '성노예'라는 말로 요약 될 수 있다. 군위안부에 대해서는 모집에서부터 취업사기, 유괴 등 각종 불법행위가 자행되었다.
또 본론에서 언급한 버어마(현 미얀마)로 보내진 22명의 조선인 위안부는 인신매매에 의해 모집되었는데, 미성년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국제법에 위반되었다. 취업사기로 위안부로 모집되었던 대부분의 경우도 하청업자와 선정업자 간에는 현금의 수수가 있어 이 것이 본인들의 전차금(前借金)이 되었으므로 채무노예를 금지한 국제법에 위반되었다.
위안부로 모집되었던 순간부터, 이들에게는 신체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루에 13-14시간에 이르는 성행위가 강요되고, 이를 거부하면 폭행이 가해지기 일쑤였다. 위안부들에게는 이동의 자유도 외출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월 1회 정도의 휴일이 고작이었다. 또 많은 위안부들이 성병과 풍토병으로 고통을 받고 죽어갔다. 군을 따라 전선에 이동된 경우에는 성행위의 강요뿐만 아니라 언제 전투가 일어나 죽을지 모르는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위안부의 건강관리는 성병문제에서 언급했듯이 지극히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보수 또한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받았다고 하더라도 군표 등으로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휴지조각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일본이 패전 후 자신들이 발행한 군표 등에 대한 아무런 보상을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금지, 노동시간의 제한, 보수의 보장, 건강의 유지 등의 조항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공창제도가 시행되어 왔고, 창기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문화풍토가 강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는 봉건적인 여성차별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관념들도 군위안부에 대한 차별과 학대를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덧붙여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민족차별이 부가되었다. 군이 정한 요금에서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는 일본인 위안부에 비해 70% 수준에 불과했다는 것도 그 일례이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
앞에서 보았듯, 군위안부가 겪은 수 없는 고통이 군위안소정책에서 비롯되었고, 그 실제적인 운영책임자가 일본정부와 군, 즉 일본국가인 이상, 지금의 일본정부가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이에 상응하는 사죄와 개인보상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정당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일본 정부는 현재 군이나 관헌의 관여만을 인정하고 개인보상을 대신하는 조처로, 도의적 입장에서 '국민기금'을 설치, 지급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일본정부가 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법적책임을 질 수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대만과 북한을 제외하고, 1965년, 한일정부간에 체결된 '한일협약'에 의해 국가간의 '배상' '재산청구권' 문제가 해결이 이미 끝난 상태라서 새롭게 개인보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본이 국가책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일본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한국정부가 '한일협약'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밝히지 않는 한 해결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당시의 한일협약이 일본 국가에 대한 한국인 개인들의 청구권을 모두 포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실한 해명이 필요하다.
한편, 국제법에서는 국가간 배상문제와 개인청구권을 별도로 생각하는 법해석도 존재하는데. 이러한 법해석에 대해서는 법률전문가의 몫으로 남기고자 한다.
일본측의 '국민기금'이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보상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이유로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가까운 장래에 일본국가에 의한 개인보상이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고, 또 피해자의 연령이 현재 고령인 점 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한국여론은 일본정부에 대해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함께 개인보상을 할 것과 책임자 처벌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당연하다. 그러나 또 한편, 현재 위안부 피해자 중에서 7분이 '국민기금'을 수령하고 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해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은 분담하지 않고 '국민기금' 거부 주장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도, 국민 모두가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일본정부의 국가책임을 묻고 사죄와 개인보상을 요구해야 한다면, 우리 모두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정신적으로는 물론 물질적으로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96년 10월 18일에, 피해자들의 고통을 분담하고 일본의 국가배상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강제연행당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가 발족되었다. 이 '시민연대'의 당초 기금 목표액은 생존하고 있는 피해자 160여 명에게 한 사람당 '국민기금'과 동일한 200만 엔을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을 기준으로, 즉 약 2조 2억 원을 목표액으로 하였다. 그러나 시민연대가 해산한 97년 5월 28일에 최종적으로 모아진 금액은 5억 5천만 원에 불과했다.
물론 피해자에게 거처와 생활전반을 지원해 주는 '나눔의 집'과 같은 시민운동 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민연대와 같은 운동이 더욱 확대되어 국민전체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피해당사자들에게 '국민기금'을 거부하고 개인 보상을 실현시키자고 권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국민기금'의 수령여부는 피해당사자 본인에게 그 결정이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피해당사자가 현단계에서 도의적 책임의 '국민기금'을 수령하고, 이와는 별도로 계속해서 개인보상 실현을 위해 일본정부의 법적책임을 추궁해 나가겠다고 한다면, 누구도 이런 결정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일 피해자들 중에서 국민기금을 받겠다는 사람이 속출했을 때, 피해당사자들 사이에 '국민기금'을 거부하는 측과 수령하는 측으로 분열하고, 또, 피해자를 지원하는 운동단체와의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초래될 것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