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영적 인간 ?

YOROKOBI 2008. 2. 26. 11:10
 
‘사람’ 이라는 말 앞에 ‘영(靈)’ 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참으로 건방져 보인다.
 
사람 앞에는 육(育)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인간= 육’ 이라는 공식은 모든 인간에게 합당하게 보인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영적 인간’ 의 등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늘로부터 성령 세례를 받은 낯선 인간들과 그 무리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파격이다. 인류 역사상 이것처럼 과격스러운 주장은 또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라는 시간은 모든 인간들을 동일하게 묶어서 처리하고 이해한다.
 
인간이란 함께 움직이고 시간 따라 함께 사라진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은 죽는 것으로 안다.
별다른 존재로서의 특수 인간류는 역사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예수님 부활 이후에 ‘영적 인간’ 의 출현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퍼뜨린다.
 
부활했다는 예수님의 영을 받은 특별한 인간이 따로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국경, 민족, 나이, 능력, 재능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영’이 바람같이 덮쳐진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자격증 취득 과정’ 같은 것이 아니다.
 
성령 받은 사람 곁에 머문다고 같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울 곁에 함께 있었던 다메섹의 일행들 중에서 사울 빼놓고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자는 없었다.
 
이 ‘영적 인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세상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이들이야 말로 참으로 인류의 적이 될 수 있다. ‘영’ 때문에 육적인 일반인과 엄연히 차별 진다는 것이다.
 
모방한다고 해서 영적 인간으로 쳐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 직분이나 교회에 충성한 성과나 교회 다닌 연륜으로도 영적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차단을 주장한다.
완벽한 차별화를 부르짖는다.
뿌리부터 다르단다.
 
영적 인간이 되게 된 토대도 다르고 끝 지점도 당연히 다르단다. 운명이 확연히 두 계통으로 갈라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적 인간을 흉내 내려고 시도하려거든 혹독한 모욕을 당할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1000명의 육적 인간이 모여 아무리 회개 집회를 열어도 그 중에서 단 한 명의 영적 인간이 출현시켜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은 사회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따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다. 영으로 난 자만 영적 인간이고 육으로 난 자는 여전히 육의 인간이다. 본인의 기대와 소원이나 희망도 무용지물이요 시간 낭비만 할 뿐이다.
 
이 영적 인간들만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구원되고 천국 간다.
 
다른 이는 탈락이다.
 
그런데 문제는 ‘육적 인간’ 들이 ‘영적 인간’ 되기 위한 다리를 설치하고자 시도 때도 없이 실시하고 있다는데 있다. 바로 이런 발상이 참으로 육(肉)다운 발상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영적 인간이 된 자들은 영적인간이 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시도가 전혀 소용없고 도리어 성령께서는 그런 인간의 시도를 정죄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육적 인간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 리가 없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영적 인간’이 부합되도록 육적 인간들을 데리고 철저하게 위장작업에 나서게 된다.
 
육적인 요소는 어찌 할 수 없으니 그대로 두고 껍데기를 유사 영적 인간으로 변모시키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적 사람들의 집합체’로서 우상적 교회로 행세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이런 교회에 육적인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기에 신앙생활도 자력으로 조절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거래에 나선다. 즉 자기 구원에 있어 자신이 해 낼 수 있는 지분을 하나님도 인정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자기 지분의 기능을 잘 굴리면 그것에서 자기 구원에 필요한 구원의 능력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자기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면 다가간 만큼 신앙생활은 더 깊어지고, 자기 쪽에서 게을리 하면 그 게을리 한 부분만큼 신앙 생활에 후퇴했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런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과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자력 구원의 지분을 늘 인정해 줄 용의가 있으니 하나님에 대한 지분을 앞으로 계속 늘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신앙생활이나 교회 생활에 열심을 더 내달라는 것이다. 열심을 낸 만큼 더 ‘영적 사람’으로 변모되어진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영적 사람은, 애초부터 자신이 영적 사람으로 달라진 원인이 자기에게 있지 않기에 자신을 영적 사람으로 변모시킨 그 위세와 권세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을 자기에게 출발시킨 출발지점이며 그곳은 새언약이 십자가로 인하여 완료된 곳이다.
 
그 십자가에게만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 (고린도전서 1:18)
 
그렇다면 십자가의 능력이 현 영적 인간들을 매개로 하여 우주로 토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두 명의 인간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둘 다 천하 무도한 죄인들 중에서 한 사람은 이유도 없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자기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곁에 함께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의 공로가 전가된 것이다.
 
바로 이 세 분으로 구성된 세팅이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온 우주에 적용된다. 저주될 자는 자신의 육적인 죄악으로 인해 당연히 지옥가게 되지만 구원받아 천국 가는 자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공로로 영적 인간되고 구원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성 속에서 성도는 ‘영적 인간’ 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은 자신이 벌려놓은 사업체나 공직이나 하던 일과 상관없이 그가 이 땅에서 무슨 업종에 종사하든지 상관없이 그에게는 이 십자가 세팅이 성령의 능력으로 방출되는 통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적 인간’ 의 특징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 자랑한다. (갈라디아서 6: 14)
 
거기에 비해 ‘영적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는 오직 자신의 육적인 자질과 능력과 가능성과 성과를 내놓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십자가라는 토대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은 십자가 앞에서 오직 죄 밖에 나올게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한다.
 
도리어 반대로 성경 전체 구절에 도전하여 그것을 육적인 자질을 총동원하여 자신을 연출하기에 급급하다. “설마 이를 정도로 헌신적으로 말씀에 순종한 나를 지옥불에 집어넣게 하시는 하나님이겠느냐" 라는 식으로 나온다.
 
이런 몽환의 세월을 평생 보내고 나면 어느새 육적인 사람들만 모이는 지옥에 도달해 있다.
 
처음부터 가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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