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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료]남을 비난하는 것은 하늘에 대고 침뱉는 격이다

YOROKOBI 2008. 3. 19. 08:53

남을 비난하는 것은 하늘에 대고 침뱉는 격이다


1931년 5월 7일 뉴욕 시에서는 살인범 검거작전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런 원한도 없이 살인을 저지른 쌍권총의 명수 크로울리의 은신처가 마침내 수사진에 의해 포착되었던 것이다. 그는 웨스트엔드 거리에 있는 애인의 아파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150여명이나 동원된 경찰들은 우선 아파트 맨 위층을 포위하고 지붕에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으로 최루가스를 흡입시켜 크로울리를 아파트 밖으로 유인해내려 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파트 주위 빌딩의 옥상에는 기관총이 장착되었고 그 총구는 크로울리를 향해 조준되어 있었다.
하지만 크로울리는 바깥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후의 발악을 하며, 소파 뒤에 몸을 숨긴 채 무서운 기세로 쌍권총을 쏘아댔다. 그러자 경찰들 역시 일제히 이에 응사를 했고 그로 말미암아 뉴욕의 고급주택가는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콩볶는 듯한 권총과 기관총 소리로 뒤흔들렸다.
그리고 그 총격전을 구경하기 위해 사건현장으로 모여든 흥분한 시민들은 뉴욕시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일대활극을 숨죽인 채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크로울리는 체포되었다.
그렇게 요란스레 진행된 검거작전을 마친 후, 그 당시 뉴욕 경찰국장이었던 멀루니는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히 쌍권총을 잘 다룰 줄 아는 크로울리는 뉴욕의 중범죄자들 중에서도 보기 드문 흉악범입니다. 그는 '아주 사소한 동기'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만큼 잔인한 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편가를 받고 있는 크로울리 자신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크로울리가 직접 기록한 글에서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그 와중에도 크로울리는 "관계자 여러분께"라고 시작되는 한 통의 편지를 남겼던 것이다. 물론 그가 그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총격전은 계속 되었기 때문에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종이 위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피로 물들은 그 편지에서 크로울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마음은 비록 삶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내면의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살아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코 그 누구도 해치려 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글을 남겨놓은 크로울리는 얼마나 쉽게 살인을 저질렀던가!
총격전이 벌어지기 전, 크로울리는 롱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길에 차를 세워놓고 애인과 함께 한창 고조된 사랑의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는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하게 되었다.
"실례합니다만, 운전면허증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크로울리는 재빠르게 권총을 꺼내들어 그대로 경찰을 향해 난사를 하고 말았다. 경찰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자 차에서 뛰어내린 크로울리는 경찰의 총을 빼앗아 숨져가는 그를 향해 다시 한 발을 쏘아 완전히 죽여 버렸다.
이렇게 잔인한 그가 "그 누구도 해치려 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일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어쨌든 크로울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사형집행을 위한 전기의자에 앉았을 때, '이렇게 죽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까…'라고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였을까?
결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정당방위를 한 것뿐인데, 이렇게 죽게 되다니!"
이것이 바로 크로울리가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결코 자기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크로울리와 같은 생각을 지닌 범죄자는 매우 많이 존재한다.

 


"나는 내 인생의 전성기를 사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런데 결국 나에게 남겨진 것은 차가운 세상의 비난과 전과자라는 낙인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해 한탄을 한 사람은 한 때 시카고를 손에 쥐고 미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암흑가의 황제 알 카포네였다. 갱단의 두목이었던 알 카포네와 같은 인간도 결코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사회를 위해 노력했던 자신의 선행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원망했다.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뉴욕의 악명 높은 조직폭력배 더치 슐츠도 마찬가지이다. 폭력집단끼리의 총격전에서 목숨을 잃기 된 슐츠는 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사회사업가라고 일컬었다. 물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터였지만, 그 자신만은 이것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나는 뉴욕의 싱싱 교도소 소장으로 있던 워든 로즈로부터 범죄자들에 관한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기 자신을 범죄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도 선량한 일반 시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믿고 있으며, '왜 금고를 털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왜 총을 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라고 하는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다고 한다.
즉, 이들은 자신의 범법행위에 대해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합리화시키고, 자신이 수감된 것은 부당하다는 확신에 차 있으며 스스로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알 카포네, 크로울리, 더치 슐츠와 같은 흉악범들조차 가지 자신 및 행동에 대해 옳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범죄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은 자신에 해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30년 전, 나는 남을 비판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대한 실업가 존 워너 메이커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에 이렇듯 소중한 교훈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나이 40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춰내어 비난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비난을 받는 대상은 곧 방어태세를 갖추고 어떻게 해서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존심을 상하게 된 상대방은 결국 반항심을 갖게 되어 오히려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킬 뿐이다.유명한 심리학자인 스키너는 잘한 행동에 대한 칭찬을 받은 동물은 나쁜 행동에 대해 벌을 받은 동물보다 훨씬 더 빨리 배우고 또한 배운 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익힌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다.

오클라호마 주 에드니의 조지 존스톤은 어떤 기술 용역회사의 안전담당자였다. 그는 주로 현장 종업원들의 안전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헬멧 착용 여부를 감독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 존스톤은 헬멧을 착용하지 않은 종업원을 만날 때마다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회사의 규칙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그는 종업원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가 자리를 뜨고 나면 종업원들은 헬멧을 팽개쳐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존스톤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방법을 바꿔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후 존스톤은 헬멧을 착용하지 않은 종업원을 발견하면, 헬멧이 거추장스럽지 않은지 혹은 머리에 제대로 맞는지 등을 묻곤 하였다. 그런 다음 부드러운 목소리로 헬멧은 작업 중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해주는 소중한 것이므로 좀 거추장스럽더라도 만약을 위해 항상 착용할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 결과, 반항을 하거나 감정적인 거부반응은 사라지고 점점 규칙을 준수하는 종업원들이 늘게 되었다.

타인의 허물을 들춰내어 비난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의 후계자 태프트 대통령과의 반목은 매우 유명하다.
그들의 마찰로 인해 두 사람이 이끌던 공화당이 분열되었고, 그 결과 민주당의 월슨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등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게 된 것이다.
1908년 임기가 끝난 루즈벨트는 공화당 대통령후보였던 태프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아프리카로 사자 사냥을 떠났다. 그런데 얼마 후 아프리카로부터 돌아온 루즈벨트는 태프트 정부의 보수적인 정책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루즈벨트는 차기 대통령 후보의 지명권을 획득하기 위해 진보적 제 3당인 '불 무스'당을 조직하였고, 결과적으로 공화당은 분당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른 공화당 후보 테프트는 버몬트 주와 유타 주에서만 지지를 받았을 뿐, 전례 없는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공화당 창당 이후 가장 커다란 정치적 패배였다.
그러자 루즈벨트는 곧바로 태프트를 질책하였다.
하지만 질책을 듣게 된 태프트가 정녕 자기 자신이 나빴다고 인정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태프트는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변명했을 뿐이다.
이들 두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나빴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솔직히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고, 또한 누가 잘못했는지를 굳이 따질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루즈벨트가 아무리 심하게 테프트를 질책했더라도 태프트로 하여금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루즈벨트의 질책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태프트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말은 되풀이될 뿐이다.
또 다른 사례로 티포트 돔 유전 스캔들을 들어보자. 이것은 미국에서도 전례 없던 커다란 독직사건으로 1920년대 초에 발생하여 수년 동안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은 하딩 대통령 재임시절 내무장관을 지낸 앨버트 펄로, 그는 당시 정부소유인 티포트 돔과 엘크 힐의 유전 대여에 관한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펄은 이것을 대여하면서 공개입찰 절차도 거치지 않고 친구인 도헤니에게 수의계약으로 대여해 줌으로써 커다란 돈벌이를 시켜주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도헤니는 이들 유전을 운영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대여금이라는 명목으로 펄 장관에게 10만 달러를 융통해 주었다. 그 뒤 펄 장관은 해병대를 동원하여 유전지대 부근의 군소석유업자들을 축출해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런 명분도 없는 것으로 단지 엘크 힐의 석유매장량이 이웃의 유전 때문에 감소할 것을 우려한 독선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강제로 내쫓긴 군소석유업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그 억울함을 법정에 호소함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국민의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하딩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은 끝을 맺게 되었으며 공화당은 위기에 빠져버렸고, 앨버트 펄은 투옥되었다.


이렇게 펄은 현직 관리로서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무거운 형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를 했을까?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어느 강연회에서 하딩 대통령의 하야를 재촉한 것은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펄 부인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팔을 내저으며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뭐라고요? 하딩이 펄에게 배신을 당했다고요? 천만에요! 내 남편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이는 이 건물 가득히 황금을 쌓아놓고 유혹하여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양반입니다. 오히려 내 남편이 배신을 당한 것이라구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고 남을 헐뜯으려고 드는 법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기도 하다. 인간은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악한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만약 남을 비난하고 싶어지면 크로울리나 알 카포네 그리고 펄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바란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하늘에 대고 침을 뱉는 것과 같이 때문에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태프트가 했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을 상대방에서 듣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1865년 4월 15일 토요일 아침, 포드 극장에서 3류 배우 부스에게 저격을 당한 에이브럼햄 링컨은 극장 맞은편의 어느 싸구려 여관집 침대로 옮겨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키에 비해 침대가 너무 작아 링컨은 대각선으로 눕혀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긴 다리가 바닥에 닿을 듯했다.그리고 방안의 벽에는 로자 본누르의 유명한 그림 '마시장' 복사본이 덩그라니 걸려 있었고, 흐릿한 주황빛의 가스등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이 비극적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탠튼 국방장관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여기 누워 있는 이 사람만큼 완벽하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링컨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인가?
나는 10년 동안이나 링컨의 생애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그후 만 3년이나 걸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링컨' 이라는 책을 썼기 때문에, 링컨의 사람 됨됨이와 가정생활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링컨의 사람 다루는 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람들처럼 링컨 역시 사람들을 비난하곤 했을까?
물론이다. 적어도 링컨이 어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그랬다. 즉, 타인에 대한 링컨의 비난은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도 덜하지 않았던 것이다.
링컨의 젊은 시절에 인디애나 주의 한적한 마을인 피존 크리크 벨리에서 살았다. 그 때 그는 곧잘 남의 허물을 들춰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람을 조롱하거나 비웃는 시 혹은 편지를 써서 눈에 잘 띄는 길에 떨어뜨려 놓기도 했다. 그러한 글이나 편지 때문에 일생동안 링컨에게 반감을 갖게 된 사람이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 후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후에도 반대파 인사들을 비난하는 편지를 신문지상에 자주 투고하곤 했는데, 그로 인하여 큰 봉변을 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1842년 가을, 링컨은 허세를 잘 부리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아일랜드 출신의 정치인 제임스 쉴즈를 조롱하는 풍자문을 지어 스프링필드의 '저널' 지에 익명으로 투고하였다. 그 글이 신문에 실리자 스프링필드 사람들은 모두들 쉴즈를 비웃었고, 자존심이 강한데다가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쉴즈는 불같이 화를 냈다.결국 쉴즈는 여러 가지 채널을 동원하여 그 글을 쓴 사람이 링컨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곧바로 링컨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평소 링컨은 '결투'라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명예가 달린 일이었기 때문에 쉴즈의 결투 신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무기의 선택권은 링컨에게 위임되었고 팔이 길었던 링컨은 기병대용 장검을 택하였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친구에게 장검의 사용법을 지도받았다.드디어 결투를 하기로 약속한 날, 두 사람은 미시시피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목숨을 건 결투를 시작하려는 순간, 쌍방의 입회인들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다행히 결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링컨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덕분에 그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매우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남을 조롱하는 글을 쓰지 않았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남북전쟁 때였다.
그 당시 대통령의 자리에 있던 링컨은 포트맥 지구의 전투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전투사령관을 몇 번이나 교체해야만 했다. 그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마다 맥래런, 포프, 번사이드, 후커, 미드 등 사령관을 차례로 바꿔보았으나 전황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자 많은 국민들이 무능한 징군들을 통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난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링컨은 '악의를 버리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자' 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남의 비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링컨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링컨은 아내나 측근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남부 사람들을 욕하면 이렇게 타일렀다."그들을 욕하지 마시요. 만약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우리도 역시 그들과 똑같이 했을 것이오."
그리고 남북전쟁 중에 이러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863년 7월 1일부터 사흘 동안 게티즈버그에서 남북 양군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흘째가 되자, 리 장군 휘하의 남군들은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틈을 타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리 장군이 패잔병을 이끌고 포토맥 강까지 퇴각해왔을 때, 강은 이미 폭우로 인해 범람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곳을 건넌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뒤에서는 사기가 충천한 북군이 밀어닥치고 앞에는 강물이 넘실거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군은 완전히 궁지에 몰려버렸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링컨은 이제 남군을 괴멸시키고 전쟁을 종결시킬 절호의 기화가 찾아왔음을 기뻐하며 벅찬 가슴으로 미드 장군에게 때를 놓치지 말고 즉각 추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우선 전보로 먼저 미드 장군에게 전달되었고 뒤이어 대통령 특사가 파견되어 당장 공격을 개시하도록 지시하였다.그러나 웬일인지 미드 장군은 링컨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전회의를 열어 공공연히 시간을 허비하였고 또한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 즉각적인 공격을 회피해버렸다. 그러는 동안 강물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의 패잔병들은 무사히 강을 건너 후퇴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링컨은 대단히 격노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의 아들 로버트에게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독 안에 든 쥐를 놓치다니… 우리가 조금만 손을 썼어도 적을 모두 궤멸시킬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즉각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어도 우리 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그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장군이라도 리 장군을 격파할 수 있었을 거야.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구!"
격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던 링컨은 미드 장군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이 무렵 링컨은 자신의 언사에 대해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1863년에 씌어진 이 편지는 링컨이 얼마나 노해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 친애하는 장군. 나는 적장 리의 탈출로 인하여 야기되는 불행한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귀관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소. 적은 확실히 우리 수중에 있었고 곧바로 추격을 했다면, 우리 군이 곳곳에서 거둔 전과와 더불어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오.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림으로써 전쟁종결의 가능성은 희박하게 되었소. 그렇게 유리한 상황에서 귀관이 적장 리를 공격할 수 없었다면, 그가 강을 건넌 지금 그를 공격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오. 이제는 당시 병력의 3분의 2밖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오.앞으로 장군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며, 사실 기대하고 있지도 않소. 귀관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오. 그 때문에 나 역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소. >

미드 장군은 이 편지를 받아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는 이 편지를 읽지 못했다. 왜냐하면 링컨이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링컨이 죽은 후에 그의 서류함속에서 발견되었다.나의 추측이었지만, 링컨은 이렇듯 격한 편지를 써놓고 혼자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이렇게 중얼거렸을 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온한 백악관에 들어앉아 공격 명령을 내리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만약 내가 게티즈버그 전선에서 일 주일 동안이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휘말려 있다면 선뜻 공격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유혈, 전상자들의 비명과 단말마의 신음소리… 얼마나 지긋지긋할 것인가!
만약 내가 미드처럼 소심한 성격이었다면 나 역시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모든 일은 끝나 버린 상태이다. 이 편지를 보내고 나면 내 마음은 다소 후련해질 지 모르지만, 미드는 어떠할까? 아마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를 비난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져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나게 될 지도 모른다."
링컨은 이미 과거의 경험을 통해 심한 비난이나 책망이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를 글로 써 놓고는 심사숙고 끝에 그 글을 부치지 않았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대통령 재임 시절 어떤 난관에 부딪치면 언제나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링컨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링컨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라고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만약 남을 비난하거나 충고하고 싶어질 때는 루즈벨트 대통령처럼 '링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라고 생각해 보도록 하라.다른 사람의 결점을 바로잡고 개선하려는 마음은 분명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결점을 고치고 개선해야 할 것이 아닌가!섣불리 다른 사람을 타이르거나 바로잡으려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개선하고 고치는 것이 보다 더 유익함을 가져오며 또한 위험도 적다.


내가 아직 젊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나는 당시 문단에서 꽤나 이름 높던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에게 어리석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어느 잡지에 '작가론'에 대해 기고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창작법을 직접 문의했던 것이다.


그리고 글을 마치면서 데이비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에 '기술은 했지만 읽어보지는 않았음'이라고 첨가하였다. 즉, 내가 너무 바쁘고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데이비스는 답장 대신 나의 편지를 되돌려보냈고, 여백에 '무례한 짓은 그만두게' 라고 적어 놓았다. 그것은 분명히 나의 실수였다. 그런 모욕을 당해도 할말이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인간이기에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로부터 10년 후, 신문에서 데이비스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머리 속에서 먼저 떠오른 것은 부끄럽지만 그 당시의 모욕이었다.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싶다면, 얼마든지 남을 비판해도 좋다. 그리고 그 비판의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또한 정확하고 타당할수록 그 효과는 높아진다.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상대방이 '논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은 '감정의 동물일 뿐이며 편견과 자존심, 허영심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위험한 불꽃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불꽃놀이는 자존심이라는 화약고의 폭발을 유발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한 번 폭발이 일어나면 사람의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영문학의 귀재 토마스 하디가 영원토록 소설을 쓰지 않게 된 이유도 매서운 비평 때문이며, 영국의 천재 시인 토마스 채터튼을 자살로 몰아넣은 것도 역시 날카로운 비평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대인관계가 나쁘기로 유명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훗날 탁월한 사교술을 익혀 사람 다루는데 익숙해지자 마침내 주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고, 그 성공비결이 '남의 단점을 들춰내지 않고 장점을 칭찬하는 것'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남을 비난하거나 비평하는 것 그리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보일수록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반면, 이해와 관용은 어디까지나 뛰어난 성품과 극기심을 갖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인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인은 소인을 다루는 솜씨로써 그 위대함을 보여준다."

유명한 시험 비행사이자 공중곡예사인 밥 후버는 샌디에이고에서 에어쇼를 하다가 3백피트 상공에서 돌연 양쪽 엔진이 멈춰버리는 황당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 위기상황에서 그는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여 비행기를 착륙시키기는 했지만, 기체는 무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상자는 아무도 없었다.비상착륙을 한 뒤, 후버가 처음으로 취한 행동은 비행기의 연료를 체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 비행기에는 휘발유가 아니라 제트 연료가 들어 있었다.


비행장으로 돌아온 밥 후버는 곧바로 비행기를 정비한 정비사를 찾았다. 그 젊은 정비사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몹시 낙심하고 있었던지,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과오로 인해 엄청나게 비싼 비행기를 잃게 되었고, 하마터면 세 사람의 목숨까지도 잃게 만들 뻔했던 것이다.


후버의 분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갈 지경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정비사의 과오에 대해 후버가 심한 욕설을 퍼부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버는 정비사에게 욕을 퍼붓지도 않았고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비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내일 내가 탈 비행기는 자네가 맡아서 정비해 주게."
남을 비난하는 대신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어떤 이유로 해서 상대방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것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고도의 전술이며 동정이나 관용, 호의가 저절로 우러나게 해준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된다.


영국의 위대한 문학가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도 인간의 심판을 죽은 뒤로 미루신다."
하나님도 그렇게 오랜시간 동안 기다려줄진대, 하물며 인간인 우리가 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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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자료]남을 비난하는 것은 하늘에 대고 침뱉는 격이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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