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성경은 여자목사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YOROKOBI 2008. 4. 4. 11:26

성경은 여자목사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만약 필자가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고 단지 흘러 왔던 전통적 사조나 교회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으로만 이 문제를 판단을 하였다면 기질상 그 누구보다도 여자 목사 문제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을 것이며 내가 배워왔던 교리나 전통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유보 한 채 무조건 반대 혹은 배척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서 섣부른 판단이나 결론은 자칫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문제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자세히 성경을 검토하면서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신앙이 무너진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가 지켜오는 전통이나 교리 혹은 신학 그 자체에 있어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형평성을 반영하지 못해 자칫 성경을 잘못 이해 혹은 해석하여 충분히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각 교단의 주관적 성경해석이나 그 특질들 혹은 교리를 만든 사람들의 깨달음의 정도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점을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 책을 통해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인은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를 절대 무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맹목적 따름보다는 좀더 성경적으로 검토하고 혹 잘못된 것이 없는 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경을 먼저 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적 가르침을 먼저 접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배워왔고 알고 있는 전통이나 교리와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면 반목하게 되고 성경적 검토조차 배제 한 채 무조건적 배격을 하는 사례를 종종 보곤 한다. 성도들간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목회자, 혹은 신학자들간의 대립은 실로 두렵기까지 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대방들에 대해 마귀의 자식이나 사탄의 종노릇하고 있다느니, 멸망 받아 지옥 가게 될 것이며 아니 오히려 멸망 받아 지옥 갔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 듯한 섬짓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며 두려운 일이다.

 

성도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교리를 주장하고 전통을 고집한다. 성경을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나 전통에 갖다 붙이려 한다. 지금 본인이 다루려는 여자 목사문제도 그러한 성격을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에 전통과 교리 그리고 성경이라는 세 관계 속에서 면밀히 검토되어 진다. 본인의 판단이나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 혹 문제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잘못 알고 잘못 깨달은 부분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쳐 주길 바란다. 지옥가야 하는 사탄의 자식으로는 보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성경적으로 충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 구체적 가르침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론만을 가르치는 부분도 무척 많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수많은 의미들을 해석함에 있어 많은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설사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더라도 시대와 장소 그리고 여러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현 시대에 맞게 적용 시켜야 한다거나 혹은 구약적 가르침의 신약적 재해석의 문제에 있어 해석학적 문제의 새로운 적용들도 하나의 일관된 정답이 없다 보니 각 교단이나 교회마다 가르치는 가르침의 차이를 많이 보이고 있다.1)

 

여자 목사의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며 이러한 맥락을 따라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원 의도를 우리는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사로 잡혀 있는 전통적 가르침이나 교리적 가르침들로 말미암아 성경에서 가르치는 원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그런 잘못은 범하지 않기를 당부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자 목사가 성경적으로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 목사를 반대하는 자들의 이론적 근거에 대한 잘못을 밝히고 성경이 여자목사에 대해 인정하고 있음을 증명하면 될 것이다.

 

여자목사를 반대하는 자들의 이론적 근거들을 우리는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는데 이제 다시 한번 그 문제들을 재점검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디모데전서 2:11-14, 고린도전서 14:34-37을 통해 약 다섯가지 정도의 이유를 들어 여자 목사를 반대하고 있다고 하였다. 디모데 전서에서  말하는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창조의 질서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여자는 단지 남자를 돕는 자로만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창세기 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단지 돕는 배필 즉 도움자로 만들었지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해석의 중요 원리 가운데 문자적 해석의 원리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원리는 성경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 2:18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여자는 단지 남자를 돕는 자로만 만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를 가르칠 수 없고 남자를 주관 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여자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일체용납 할 수 없다는 것은 완벽한 문자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문자주의적 해석은 완전한 차이를 가진다. 여자목사를 반대하는 자들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보다는 문자주의적 해석2)에 더 치중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만드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남자가 여자보다 모든 면에 우선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며 모든 면에 우수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순서에 있어 먼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비록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 졌지만 그것이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이다 라는 의미로 보아서도 안된다. 하나님께서 다른 흙으로도 여자를 만들 수 있었지만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신 것은 여자와 남자는 하나라는 깊은 하나님의 의도와 여자와 남자는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며 그  차이에 있어 동등하다는 의미 또한 내포됨이 마땅하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비하 할 때 남자의 갈빗대 하나밖에 되지 않는 여자가 무슨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한단 말인가라는 말을 하곤 하는 데 이것은 성경을 곡해한 것이다. 갈빗대로 만들어지는 것하고 흙으로 만들어지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값어치가 있겠는가. 사람의 갈빗대가 귀한 것인가 아니면 그 흔한 흙이 귀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흔한 흙으로 여자를 만들지 않고 사람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를 더 귀하게 생각하셨다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필자의 주제 넘는 생각이다. 그 만큼 여자를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창1:26-30절 말씀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미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들 것을 계획 하셨으며 흙으로 만들었던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으며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께 받았던 축복은 동일한 것이다. 위 본문에서 보면 “그들”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며 “너희”라는 말이 한 번 나온다. 그들이란 남자 한 사람만을 말한 것이 아니고 여자도 해당된다는 말이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여자 목사를 반대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이라 하였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엔 오히려 여자목사를 찬성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인다. 

 

창2:18에서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을 남자를 돕는 배필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이 말씀이 맞으나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중요한 목적은 돕는 자가 우선이 아니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가 우선이다. 홀로 살아 가야하는 아담을 가엾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여자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남자를 돕는 배필”의 의미를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해선 안된다”라는 말씀과 어떻게 연결을 시켜야 할 것인가. “돕는 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돕는 자로 만드셨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를 도움이 마땅하다. 그러나 남자를 돕는 여자라는 말이 어떻게 남자를 절대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말하고 동등선상에서 해석을 해야 하는지 본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본인이 보기에 남자를 절대 가르쳐선 안된다는 말과 여기에서 말하는 돕는 자로서의 여자의 의미는 별개의 문제로 보고 싶다. 돕는 자는 말 그대로 남자 혼자 독처 하면서 살아가기 힘든 여러 부분에 대한 도움이의 역할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는 남자와 여자의 종속관계, 혹은 남녀차별 적 가르침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연결고리의 한 부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여 여자만 하나님께서 남자를 돕는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자만이 남자의 도움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절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독처의 좋지 못함에 대한 도움자의 역할이 여자 한 사람에게 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충분히 해당되는 말씀으로 봄이 마땅하다. 남자가 독처 하면서 힘든 많은 일들을 여자가 도와야 하며 역으로 여자의 독처함 있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다면 남자도 도와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봄이 마땅하지 않는가. 단지 문자주의적 해석에 치우쳐 여자만이 남자를 돕는 도움자로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그 설득력을 상실한다.

 

그리고 도움 자라는 것은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여자가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남자를 도울 수 있다고 본다. 단지 시각적 차이나 관념적 차이일 뿐 성경적 가르침은 아니다. 도움자라는 말이 절대 목사가 되어선 안된다라는 말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단지 여자가 목사가 되어선 안된다는 고정관념 즉 전통이나 교리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창 2:1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 할 수 없으며 고로 여자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배된다는 결론의 도출은 그 자체가 잘못된 성경해석이며 오히려 비 성경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 여자의 범죄에 대한 징벌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디모데전서 2:11-14 절 말씀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에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후 이와가 지음을 받았으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않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기 때문에 그 징벌로써 여자는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징벌로써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셨다. 그리고 위의 말씀에서 여자가 죄에 먼저 빠졌기 때문에 그 징벌로서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옳은 말씀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여자는 무조건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으며 남자를 주관할 수 없다라고 해석한다는 것은 무척 모순이 있는 말이며 아울러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여자는 일체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목사가 되어선 안되며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의 보편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경해석상에 있어 무서운 실수를 범한 것이 된다.

 

본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위해 해석학적 차원에서의 본문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그에 앞서 원어적 의미를 먼저 분석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본문에서 말하는 “여자”란 단어 "귀네"는 통상적으로 결혼한 부인을 지칭하는 말로써 이미 결혼하여 남편을 둔 여자를 말한다. 그러니 위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여자는 결혼 전의 여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말씀을 원어적 의미에 가깝게 해석한다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가르칠 수 있고 결혼한 여자만 가르칠 수 없다라는 이상한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추측케 하는 근거는 이브가 만들어 질 때 이미 아담이 먼저 만들어 졌으며 이브가 범죄 하였을 때 이미 그는 한 남자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가 남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범죄하여 그 남편도 범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브 즉 결혼한 여자는 남자 혹은 남편을 가르쳐선 안된다는 것이다. 아마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 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의 여자에 대한 그의 모든 사상이나 가르침을 위 본문만으로 정확히 유추해 낸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또 여자도 결혼한 여자로만 제한하기도 곤란할 것이다.    


그리고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에서 주관이란 단어는 아우덴테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권세를 부리다󰡑, 권위를 침범하다”란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먼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남자를 주관할 수 없다”의 정확한 의미는 “남자 앞에서 권세를 부려선 안된다” 혹은 “남자의 권위를 침범해선 안된다”라는 의미로 보아야한다.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여자에게만 적용시키기는 곤란하다. 남자든 여자든 함부로 권세를 부린다거나 상대방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는 삼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위의 본문에서 왜 여자를 강조하여 여자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전달하였는 가는 당시의 여러 배경을 보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우리는 위 본문에서 “여자는 일절 가르쳐선 안된다”라는 말씀에서 여자는 단지 “결혼한 여자”만으로 한정하기란 무리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결혼의 여부와 상관없이 가르칠 수 있는 모든 여자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우리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여자는 일절 가르치지 말라”라는 말씀에서 과연 무엇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인지. 어떤 내용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전혀 없다. 사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최소한 이 본문에서는 그렇게 취급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글을 전달할 당시의 모든 배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논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만 가르치지 말 것을 종용하는지 아니면 남,녀 모두 가르치지 말 것을 교훈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전혀 없다.


결국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정확하게 계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철학이나 가치관 혹은 고정관념이나 전통, 그가 배워온 교리, 신학적 지식에 의해 이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러한 논리에서 위 본문 말씀의 가르침이 “여자는 목사가 되선 안된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자를 주관해선 안된다는 의미도 남자 앞에서 권세를 부린다거나 남자의 권리를 상하게 하는 행위를 하면 안된다는 것인데 너무 지당한 말씀으로 이 말씀은 단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남,여 모두가 교훈 받아야 할 말씀으로 인정한다. 남자는 마음대로 여자 앞에서 권세를 행사해도 되고 여자는 남자의 권세 앞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그 권위에 손상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단 여러 배경적 설명은 제쳐두더라도 단지 성경 본문상에서 나타난 내용만 갖고 해석하더라도 이 말씀을 통해 “여자는 목사가 되어선 안된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며 위험이 따르는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목사라는 성직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한다. 목사는 가르치는 것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목사란 가르치는 일 보다 우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 혹은 스스로의 사명의식이 기본전제가 되어야 한다. 필자는 목사란 성직은 단지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대언자”로 보고 싶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말이 목사의 가르침에 대한 거부의 뜻이 아니라 목사가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가르침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적 성격을 고려하여 성도들에게 자신의 철학적 사상이나 가치관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인 것이다. 목회사역 중 가르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풀어 전달하는 가르침이지 다른 불순물이 첨가된 가르침은 단호히 배격한다.


목사란 성직은 군림하거나 권세를 갖고 성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이 성도들 앞에 군림하고 권세를 과시하고 남자들을 지배하며 다스린다는 개념은 목사란 성직의 근본적 개념을 잘 못 이해 한 것이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성직의 본질을 지켜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목사가 된다는 것이 단지 남자보다 우위를 선점하고 남자를 다스리며 그들을 지배하는 자리가 아닐 찐대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그것도 편협된 일방적 해석의 원리를 빌어 여자가 목사가 되어선 안된다는 것은 그 자체에 있어 충분한 모순점을 갖는다.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목사가 된다면 오히려 남자를 더 잘 섬기고 헌신할 것이 분명하다. 주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위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위 말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위 본문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리고 그 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부분을 충분히 고려하여 우선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복음전도나 개 교회 활동에 있어 여자가 참여함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교회 내에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당연히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롬16:1절에 보면 여자집사 뵈뵈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뵈뵈를 교회의 일군으로 말하고 있다. 일군이란 디아코노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종, 일군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집사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뵈뵈를 집사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집사는 오늘날의 서리 집사와는 달리 행6:3절에 근거하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오늘날의 안수 집사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일은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교회내의 대,소사간 여러 중요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었다. 뵈뵈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 집사였다.  그는 여자로써 교회내의 중요한 일에 관여하였음에 틀림없고 만약 가르치는 부분에서의 사역을 맡았다면 충분히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로서 교회내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그 사역을 감당하였다. 행18:25-26절 말씀을 보면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는 말씀이 나온다. 위 본문에서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의 부인으로 사도바울을 도와 여러 가르치는 일에 동역 하였음을 알 수 있고 바울도 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성경은 알려 주고 있다(행18:2,28)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남자인 아굴라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여자인 브리스길라를 먼저 이야기 한 것은 남자인 아굴라 보다 여자인 브리스길라의 역할이 더 컸다고 볼 수 있으며 바울 또한 브리스길라로 부터 더 많은 도움을 받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여기에서 분명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며 이르더라”라고 언급한다. 이 내용은 여자로써 하나님의 도를 풀어주고 가르치는 사역을 했다는 증명이 된다. 혹자는 위 본문에서의 “도를 더 자세히 풀며 이르더라” 것은 전도에 관련되고 복음 전파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내의 대부분 가르침들은 모두 복음전파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복음전파의 열매와 상관없는 가르침은 실제로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예수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 교회내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 즉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고 가르치는 가르침이다.

 

또 다른 분은 위 본문에서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며 가르치더라”에서 여자인 브리스길라는 가만히 있고 남자인 아굴라만 그렇게 했을 것이라 하여 억지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 그렇게 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된다.  

  

그리고 바울은 빌4:2-3절3)에서 주 안에서 함께 힘쓴 부녀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과 함께 복음에 힘쓴 부녀들을 언급함은 여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있어 남자와의 차이점을 전혀 두지 않는 다는 것이다. 복음 전파의 성공적 사역은 가르침이 필수적으로 따라 오는 것으로 여자도 이 가르침에 충분히 동참하였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결국 이 말은 바울 당시 여자도 가르치는 사역을 충분히 담당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여성의 지도권에 대해 문제가 있을 때 여성도 예배 인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며(고전11:2-16) 이럴 경우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4) 바울은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예배의 기능을 행사는 권리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았으며 남녀는 주안에서 모두 동등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고전 14:33-355)절의 말씀은 이러한 바울의 견해에 대해 스스로 모순을 들어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은 후론해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결코 이 말이 남자와 여자의 신분적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디모데 전서를 쓴 바울도 여자에 대해 그 어떤 편견이나 남자와의 차이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있음이 바울의 본질적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디모데 전서에서는 여자에 대해 이렇게 과격한 용어로 남녀의 차이나 혹은 가르치는 일들을 엄격히 규제하며 문제시하고 있을까?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그때 당시 바울이 디모데 전서를 쓰게된 여러 배경을 살펴보면 바울이 여자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 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함이 옳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디모데 전서는 바울이 개인적으로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다. 이때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어린 나이에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내 여러 많은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가 해결할 만한 충분한 영적 지도력을 갖고 있질 못했다. 이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교회 내 문제해결을 위한 해답과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목회를 해야 한다는 사실들을 글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가 목회하는 에베소 교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포섭 대상으로 어려운 남자들보다는 포섭하기 쉬운 여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에베소 교회 내 많은 여자들도 여기에 포섭이 된 것이다. 원래 이단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들의 공격 대상은 남자보다는 종교심이 강한 여자를 집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포섭이 쉽기 때문이다. 특히 영지주의에서는 여자들에 대한 지위를 무척 많이 인정하였기 때문에 더욱더 여자들에게는 매력적인 단체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영지주의 자들은 교회 내에서의 활동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 선교라는 명목을 빌려 가정이나 조그마한 모임장소에서 그들의 모임을 갖곤 하였는데 이 모임에 중심적으로 참여한 자들이 여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영지주의에서 배운 일단의 가르침들을 교회 내에서 가르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여자들을 통해 무서운 영지주의라는 이단들이 교회 내로 침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디모데 전서에서 나타나는 여자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이런 문제에 대한 목회차원에서의 대안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아무런 배경적 설명없이 문자 그대로 해석 곡해하여 여자는 무조건 가르쳐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되어선 안된다는 사상은 바울의 사상도 아니요 주님의 사상도 아니며 성경의 가르침 또한 아닌 것이다.


이미 바울은 은사문제로 말미암아 여자들로 인해 교회 내에서의 심각한 진통을 겪은 상태이기 때문에(고전12-14장)더욱더 이 문제에 있어 단호히 대처하고자 하였던 것이지 여자 자체의 차별화를 시도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딤전2장에서 나타나는 여자에 대한 교훈은 영지주의적 영향에 대한 반박이자 바울 이후 교회에 미칠 영지주의적 도전을 대비한 교회의 지표로 받아들임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본문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오늘날에 적용 시켜야 한다면 여자는 교회 내 모든 일에 있어 가르치는 일들이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여자가 교사가 되는 것도 비성경적이며 여자가 전도사가 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여자를 집사로 세우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며 여자가 성가대에 앉아 남자와 동등하게 찬양한다는 것도 불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