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20세기의 개신교

YOROKOBI 2008. 4. 4. 11:30

개신교 내의 신학운동(신정통주의;바르트,브루너,라인홀드 니버)-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모든 신학을 반대하는 운동...........

 

[20세기의 개신교]

개신교의 흐름

1914~18년의 전쟁은 유럽이 자신의 문명에 대해 품고 있었던 이미 쇠잔해진 자기만족의 환상을 깨뜨렸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교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약화시켰다.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한 정부가 1917년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그리스도 교권 세계에는 새로운 부정적 압력이 가해졌으며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노동계급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개신교 교회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 하였다.


1933~45년 동안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은 유럽을 볼셰비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 때문에 나치는 초기에 많은 독일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멸이 그 뒤를 이었다. 1933년 가을부터 교회문제(특히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교회에서 직책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아리안 조항)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고자 한 교인들과 마르틴 니묄러의 지도 아래서 교회문제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지 않으려던 교인들 사이에 당파적 분열이 일어났다. 국가의 보조를 받는 남부(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루터교 교회들의 지원에 힘입어 니묄러 그룹은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형성할 수 있었다. 고백교회가 1934년 5~6월에 바르멘 노회(老會)를 소집하면서 교단의 분열은 분명해졌다. 한동안 고백교회는 독일 전역에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교회성 장관 한스 케를 휘하에 공리공론적인 성격이 적었던 교회 정부를 수립하자 고백교회는 이 정부에 협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교회 정부는 나치 정부가 강제로 세운 것이므로 협력할 수 없다는 니묄러파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바트 왼하우젠 노회(1936. 2)에서 고백교회는 다시 분열되었으며 다시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그후 특히 극단적 나치주의자들이 히틀러 정권의 완전한 통제를 확고히 하였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교회들은 점증하는 압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말기에 일부지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주교 테오필 부름은 나치 정권의 비인간적 행위에 저항한 지도자였다. 하인리히 그뤼버 목사는 체포될 때까지 유대인들을 피난시키고 보호하는 뷔로 그뤼버(Buro Gruber)를 운영하였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 특히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군대는 동유럽을 장악하였으며 독일은 분단되었고 이 지역의 모든 교회들은 억압을 받았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발트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에서 소개(疏開)되거나 추방당했다. 루터교 공동체들은 그곳에 남아 있었으나 스탈린 통치하에서 특히 심한 박해를 받았다.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의 루터교도들과 헝가리의 개혁파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덜 받았지만, 그 수효는 크게 줄었다. 신학자 요제프 흐로마트카의 지도를 받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개신교도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 개신교도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더 많은 대화를 지속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신교에 가장 큰 손실은 독일 분단이었다.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예전에 독일어권이었고 대부분 루터교가 성했던 넓은 지역이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독일인 약 800만 명이 추방당했다. 1945년에 구성된 동독(독일민주공화국)정부는 비텐베르크와 개신교의 고향이 되는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였다. 동독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이 대부분 개신교도들(70%)인 주민들을 통치한 유일한 국가였다. 한동안 루터 교회는 동독과 서독 사이의 주요연결고리였다. 루터 교회의 연례모임인 '교회의 날'(Kirchentag)은 잃어버린 독일 통일의 유일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으로써 동독 교회들은 고립되었다. 자금․교육․교회건축 등과 관련된 정부의 압력, 민족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형태의 청년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개신교도들은 용감하게 활동하였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1967년 10월 31일 종교개혁 450주년 기념식은 개신교 교회가 수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1917년의 혁명 이전만 해도 철저한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는 혁명 이후 40년 동안 침례교 공동체들이 성장하였다. 침례교 조직의 유연성과 단순성은 대처하기 어려운 법적 조건 아래서도 적절히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침례교 공동체들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몇 년 동안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60년 이후 다시 예전과 같은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물질적 손실과 1947년 이후 영국의 종말은 과거 영국이 지배하던 지역들의 개신교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더 이상 해외 교회들에 과거와 똑같은 규모로 자금과 인적 자원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교회 정부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에서는 영국의 지위가 변화됨으로써 그동안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던 지도력의 변화과정이 촉진되었다. 부족한 재정 및 인력자원의 일부는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보충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더 이상 유럽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과거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비롯된 조급함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지도되는 이른바 신생 교회들이 세계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점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기술발전 시대의 세속화 추세는 낡은 유럽 교회들을 공격하였으며, 젊은 교회들이 목회활동을 펼치는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개신교, 이를테면 서남아프리카나 나미비아의 루터교와 남아프리카의 성공회를 비롯해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오순절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손실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지역의 개종자와 인구 성장은 개신교 교회의 범위와 기질을 변화시켰고 그 규모도 증가하였다.


개신교의 종말이 예견되었던 세계 여러 지역들에서도 개신교는 놀랍게도 살아 남아 다시 등장하였다. 1948~49년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결정적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1951년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유럽인 선교사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중국 교회는 외부 지원 없이 홀로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 교회는 가혹한 억압에 시달렸으며,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이른바 문화혁명 시기에 더 심했다. 중국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수 없었고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기와 1980년대에 중국이 서방을 향해 부분적으로 다시 개방하고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하는 신중한 조치를 취하면서 중국 개신교도들과 서방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개신교도들과 그밖의 교파에 속한 그리스도교인들이 과거 20년 동안 가혹한 억압과 박해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계 교회들 가운데서 생동적인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형태의 개신교

20세기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운동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토대도 부분적으로 보수반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물론 이 운동들에 가담한 모든 구성원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진보적이고 왕성한 신앙표현은 보다 급진적인 외양을 띠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가운데 3가지 주요운동들은 보통 오순절운동․근본주의․복음주의라고 일컬어진다. 오순절운동은 개신교가 역사적 본거지인 유럽을 넘어서서 확산하는 데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순절운동

이 운동은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미국에서 웨슬레파 성결운동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901년 캔자스의 토피카와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 운동을 특징짓는 다양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운동의 핵심은 '방언'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억제없이 하는 말의 형태이다. 그들이 말하거나 노래하는 음절들은 남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첫 오순절 때의 예수의 제자들처럼 인식가능한 외국어로 말한다고 주장했고 거기서 이 운동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오순절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물의 세례를 넘어서는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방언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기도 하며 예언도 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다른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적적인 치유가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치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오순절운동은 '성서의 띠'인 남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농촌의 가난한 백인들이나 도시의 흑인들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하느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등 급속하게 성장한 교파들을 통하여 가장 가시적인 형태의 개신교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였으며, 점차 중간계층에게로 수용되었다. 1960년 이후 오순절운동은 성공회․루터교․장로교와 같은 그리스도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교회로 확산되었으며, 이 교회들에서 오순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운동을 '은사운동'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오순절운동은 카리브 연안, 남아메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지역에서는 수많은 예언 운동들이 분출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인들은 감성적 형태의 예배와 치유활동을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경우 오순절운동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이 지역국가들에서 민중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였다. 1세기 전 선교사들이 이룬 토대 위에 집을 지은 오순절운동가들은 일부 해방운동들과는 달리 반미적이거나 반유럽적인 경우가 거의 없었고 '피안'(彼岸)을 강조하여 정치를 회피하거나 보수적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정권들과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

2번째 주요운동인 근본주의는 19세기 후반 '전천년왕국설'(前千年王國說)과 성서무류성을 다소 합리주의적으로 변호한 사상을 서로 결합시켰다. 이 운동의 이름은 1910~15년 미국에서 발간된 〈근본주의자들〉이라는 소논문에서 따온 것이다. 근본주의는 미국에 있던 교파간의 분쟁 때 형식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919~20년에 공식인정을 받았다.


근본주의가 발흥하게 된 가장 분명한 원인은 성서의 고등 비평과 다윈의 진화론이 확산되어 보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들에 수용된 일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이 두 운동이 침례교와 장로교 북부 지회의 신학교와 사무국, 선교부, 설교단들을 전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근본주의의 대가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설을 부인하고〈창세기〉의 기사가 과학적이라고 옹호하였던 1925년 스콥스 재판은 침례교와 장로교 간의 교파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와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투쟁에서는 패배하였지만 그들의 성서학교와 라디오 프로그램, 출판사업은 살아 남았다. 1940년대 초반에 그들은 재결집하여 서로 경쟁력 있는 몇 개의 근본주의 조직체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체들은 추종자들을 얻었고, 남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사기도 드높아지면서 분명한 자기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수동적이던 정치적 태도를 버리고 개방적 참여로 특히 1980년과 1984년에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유세를 지원하여 방향을 바꾸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적 복음전도자 제리 폴웰이 창설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와 같은 집단들은 텔레비전 전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적 역량을 모아 낙태반대,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을 지원했으며, 이스라엘의 이상과 강력한 국방예산을 지지하였다.

복음주의

수십 년 동안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인물들의 목회와 〈크리스천 투데이〉 등의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이 집단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예수의 육체부활 등의 주요교리에서는 근본주의와 일치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서 무류설을 주장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은 점차 그것이 과연 성서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는 최선의 방법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근본주의가 강조하는 전천년왕국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다.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보다 온건했다. 그들은 그 본질상으로는 고전적인 형태의 근본주의자들과 같았지만 그 스타일은 달랐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에 대해 너무나도 부정적이고, 종파화되었으며 무례하고 남을 몰아세우며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942년 복음주의자들이 전국복음주의협의회를 세웠을 때, 그들은 그들이 중도파와 자유주의자들을 공격했던 것만큼 근본주의 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좋은 태도를 지닌 근본주의자들로 보기보다는 19세기 개신교의 주류를 유지하는 사람들로 보기를 더 좋아했다.


이를 위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점차 문화․사회․정치 세계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성서학교를 짓는 대신 자유로운 인문대학을 지원하였고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심지어 급진적인 정치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으며, 보수적인 개신교가 군국주의 및 자유 분방한 자본주의와 스스로를 지나치게 일치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또한 미국과 그밖의 여러 나라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경향을 띠고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톨릭 지도자들과 주류 개신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강단에 서는 것을 환영하였으며, 근본주의자들이 기피했던 여러 종파의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운동가들이 제3세계에서 동반자를 구했다면, 복음주의자들은 국제 운동들을 형성하고 많은 나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대회를 개최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들 자신의 교회에 칩거하는 데 반해, 수백만 복음주의자들은 주류를 이루는 교파들과 지속적인 연관을 맺으며 점차 완전한 주류를 이루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독특한 교리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하는 열정을 생동적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신교 내의 신학운동

개신교 신학 전통 안에는 모종의 반작용도 관찰된다. 이러한 반동은 부분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자유주의에 대해 전반적인 의문이 제기된 데서 비롯되었으며, 특히 후대의 발전과정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사회관을 정립하고자 했던 나치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인간이 스스로 경험하고 있다고 믿는 한계로 축소시키고, 객관적인 진리를 주관적인 감정으로 환원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가장 맹렬히 비판한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 운동의 최초 회원들, 전통 복음파, 성서의 무류한 말씀을 고수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근본주의자들로 지칭된 많은 사람 등을 포함한 모든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똑같은 이유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자유주의 진영 안에서도 반작용이 일어났다.

 

1918년부터 바젤의 카를 바르트와 취리히의 에밀 브루너는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모든 신학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지도하였다.

 

신정통주의라고 하는 이 신학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사유(思惟)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바르트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성서의 참된 지상권(至上權)을 재주창하고 종교개혁의 진정한 원리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에서 라인홀드 니부어는 사회와 인간에게 적용된 자유주의 그리스도교 철학만큼 이에 반대하는 것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옛 신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독일 마르부르크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미친 영향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는 〈신약성서〉의 핵심 진리를 드러내고 신앙에 대한 〈신약성서〉의 의의를 보다 완벽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를 시도하였다.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한 파울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들은 유럽의 사태 발전을 미국인들에게 해석해주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발언한 위대한 신학자들의 세대를 넘어서 지속되지 못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개신교 신학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비록 위르겐 몰트만 같은 몇몇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의 요소들을 취하여 이들을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혹은 '해방신학 ' 등 다양한 운동과 결합시키기는 하였지만, 이제 유럽은 새로운 신학운동의 주도권을 잃었고, 하느님이 억눌린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는 사실의 증언을 강조하는 제3세계 신학자들과 성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미국의 여성․흑인 신학자들은 과거의 강단신학에 내장되어 있었던 가부장주의․엘리트주의․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해방신학을 채택하고 있는 운동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운동들은 개신교 사상을 특수화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한 접근법은 문화적 상황들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는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신학, 여성신학․흑인신학을 등장시켰다.

 

 

이들 신학에서는 성서해석이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집단이 갖고 있는 '전이해'(preunderstanding)에 의해 착색된다고 생각되었다.

 

 

또 하나의 접근법은 '이야기 신학'에 초점을 맞추어 추상적인 신학에서 사람 중심의 구체적 이해로 나아가려는 노력이었다. 오순절운동과 근본주의의 발흥은 개신교 전반에 걸쳐 성령론과 종말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켰다.



에큐메니컬 운동

이 운동은(비록 동방정교회가 곧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본래 개신교의 운동이었으며, 초기에는 개신교 사고가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주로 ① 세계 전역에 걸쳐 이루어진 교통수단의 발전과 인구이동으로 여러 교파들이 전례없이 뒤섞이게 된 점, ② 전통적인 교파들의 세계적 확산, ③ 미국 내 종교의 다양성과 이와 같은 다양성에서 비롯된 문제점, ④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교회들과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사가 아닌 유럽 역사의 사건에서 비롯된 장벽들에 대한 경멸 등에서 비롯되었다. 선교활동들은 항상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의 감리교 선교지도자 존 R. 모트는 선교여행을 통해 다양하고 전반적인 노력들을 단일한 조직으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선교를 향한 열정과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한 소망을 대표한 사람이었다. 1910년 에든버러 대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효시인 세계선교대회였다. 이 대회로부터 구체적인 생활태도와 사업문제를 다루는 협의회(스웨덴 루터교의 대주교 나단 죄더블롬이 지도)와,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적 차이를 호의적인 태도로 검토하는 신앙과 직제(職制) 협의회가 발기되었다. 초창기에 로마 가톨릭은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고 동방정교회도 서방 디아스포라 유배 이후에야 참여하였다. 나치 정권은 독일인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를 계속 허용하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새로운 분위기가 나타났고 194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식 결성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대부분의 자금과 상당부분의 추진력을 미국 사람들에게 의존했으나 본부는 제네바에 두었고 초대 총무인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행정가 W.A.비세르 트 호프트의 지도 아래 이 운동이 성공하려면 분열된 유럽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함을 결코 잊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하도록 이끌었다. 1958년 요한네스 23세가 교황이 된 후 마침내 로마 가톨릭교도들도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규정들이 대부분 개신교도들에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규정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었으며, 16세기에 쌓여진 가장 높은 장벽을 낮출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던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신교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