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예배에 대하여

YOROKOBI 2008. 8. 23. 21:20

제 목 : 참 예배란?

본 문 : 요4:23~24 [참조: 시69:30~31; 암5:25~26; 행7:42~43]

1. 서 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고 그들에게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복을 받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거나 평안함을 얻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여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드려지는 예배는 이미 예배의 근본정신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물론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초신자들은 그런 예배로부터 시작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체험을 주심으로서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성장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부족함이 없이 넘치도록 채워 주시고, 특히 온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 예배를 통해서 하늘의 복과 땅의 복들로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그러나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진정으로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예배는 하나님과 아담과의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아름답고 완전한 예배는 인류 역사상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야 회복되어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예배의 형태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생활과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순전한 예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산제사는 장차 있게 될 완전한 예배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예배를 받으시기 이전에도 천사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셨는데(참조: 느9:6, 욥38:4~7),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률적인 예배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드려지는 이성이 있는 자발적인 예배를 받기 원하셨고, 문화적요소와 예술적요소가 들어있는 창조적인 예배를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창조의 능력을 주셔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2. 예배의 본질

예배의 중요성은 천 번을 말해도 부족하고 만 번을 한다고 해도 부족한데, “최상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경의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실천이 그 천만마디의 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최상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을까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할까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나라의 대통령만 맞이하더라도 환영식을 위해 많은 준비들을 합니다.

그 행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고 참석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그 자리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는 대통령을 맞이하는 기대나 그 영광에 대한 기쁨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운 대통령보다도 못하다는 말 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란하고 성대하게 그리고 사치스럽게 치러지는 환영식을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서 능력에 맞게 성대히 치러진다면 하나님께서도 기쁘시게 받으시겠지요. 그러나 그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고, 그 마음 씀씀이가 어떠한지를 보시는 것이지 결코 외형에 치우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기쁨과 환희에 넘쳐서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며 기뻐하는 다윗과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얼굴에는 세상의 풍파에 시달려 찌들은 어두운 얼굴로, 또는 슬픔과 근심에 찬 모습으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어디에서 싸우고 왔는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들어와서 화풀이 하듯이 예배를 드리며, 어떤 성도는 교회에 나와서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며 너무도 안쓰럽게 울부짖는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여, 그로 인한 기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교재를 이루는 잔치이며, 축제의 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잔치에 와서 눈물로, 혹은 불평과 불만에 가득찬 모습으로, 성난 모습을 하고 온다면 이것이 어디 축제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모습은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서, 또는 하나님과의 다른 만남을 통해서 할 일이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나 어떤 집회를 통해 회개의 영이 임해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체험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참석하는 성도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런 슬픈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배를 드리거나, 자신이 경건한 성도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또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서 복도 내려 주시고 재앙을 막아 주시기도 하시며 평안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받지 못하셨을 때에 징계를 통해서 깨닫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성도들이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최상의 존재이신 창조주에 대하여 피조물로서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자로서 서게 된 성도들은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이든지 여러 지체들이 모여서 하나가 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이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올바른가를 살펴보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림으로서 예배자로서의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절대자에게 대해서 예배를 한다거나, 스스로 어떤 존재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는데, 다른 종교에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바로 가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계략과 술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며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생명이 없는 이방의 신들이라고 처음부터 말씀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타 종교를 인정하시지 않는데 구원의 길이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하는 사단의 이러한 계략에 넘어가는 성도들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일치되지 않는 예배를 드릴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지만 자신이 옳게 여기는 대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시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옳다고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예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가인, 나답과 아비후, 고라(다단과 아비랍), 사울, 웃사, 등등)

창세기 2장의 아벨과 가인이 드린 제사의 결과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합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드린 예배(창33:18~22)로 인해서 디나의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그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쳐왔듯이,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예배자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 징계가 가해지게 되는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예배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벧엘에서 드린 예배를 받으시고 복을 주셨듯이 자기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드린 예배는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릇된 태도로 예배하는 자들의 죄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말1:6~14, 3:13~15, 4:1~6, 암5:21~27,호6:4~7, 사1:11~20, 막7:6),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수많은 예배가 아무런 소용이 없고 하나님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드려지는 예배는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며, 사람들이 보기에 좋고, 성대하게 치러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방법과 목적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각 자에게 각각의 재능을 주시고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지시하신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드리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많은 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약의 성도된 우리는 이제 종의 신분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으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경솔한 언행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행동을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은 분명히 지키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킬 것들을 다 지키지 못했거나, 자신이 드리던 방식으로 예배하지 못했다고 해서 예배에 실패 했다거나 드리지 않은 것과 같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다양하듯 예배도 일률적이거나 획일적으로 똑같이 드려지는 예배를 즐거워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그 문화를 인정하시고 그들의 민족성이라든지 그들의 습성에서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이 우리의 예술적 표현이나 감성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한 그러한 예배를 드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예배가 있고 그 요구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는 예배를 받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성도들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으며 일상의 생활에서의 어떠한 규례와 같은 교리들은 잘 알고 행함으로서 원칙에 따라서 드려지는 예배는 잘 드리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 “이것이 참 예배다” 혹은 “저것이 참 예배다”라고 주장을 하니 정작 성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에 대해서 혼란에 빠져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제사가 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어떤 해답도 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님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에 초점을 두고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은혜 받은 성공한 예배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이 무조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현상적인 것들은 예배 가운데서 나타나는 체험적 요소로서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며 그것 또한 예배의 요소로서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가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며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싶어 하며 또 성도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음이 분명하지만 확신 없이 돌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을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드려지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런 예배를 통해 그들을 만나고자 하시며 그들과 교제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3. 예배의 종류

예배는 앞에서 예기 했듯이 택함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 최대의 예의를 갖춘 경배인데, 사람 편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과 평화와 안식이 있는 축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예배의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채워지지 않는 그 공백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보이는 것들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기로 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만족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욕심 때문 이었으며, 자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이룰 수가 없게 되자 막연하게만 생각되는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에서 내어 보내고 눈에 보이는 것들, 아니면 행운을 줄 것만 같은 어떠한 것들, 자연 속에서 위대하게 보이는 것들에게 의존하고 경배함으로서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천상천하에 오직 한 분뿐인 신(神),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함에 있어서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고,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예배자로서의 바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택함 받은 성도들이 삶 속에서 드리는 생활의 예배이고 두 번째는 각 지체들이 모여서 함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주일 예배가 있는데, 사실 주일 예배는 공적인 예배의 하나로 포함시킬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특별하게 요구하시는 구별된 날에 드려지는 구별된 예배이기 때문에 따로 구별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며, 주일 예배는 드려도 되고 드리지 않아도 되는 예배가 아니라 성도라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하는 성도들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예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시간의 십일조)

이전에 구약의 성도들이 드리던 예배는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희생의 제사로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죽음을 상징하는 제사였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과 함께 부활로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육신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제사로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영원히 사는 소망이 넘치는 살아있는 신령한 제사로(산제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1)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장소와 시간에 제한받지 않고 삶 속에서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됩니다.

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고 성령이 언제든지 그에게 행하시는 일에 대해 순종함으로서 말 한마디, 노래 한 소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모든 것들이 예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라는 것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 알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예배하게 될 것인데, 우리는 주변의 소리에 민감하지만, 영의 소리에 둔하여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 성도의 마음으로 그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런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의 예배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성령님)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순간순간들이 바로 생활의 예배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행동 하나 하나가 또는 말 한마디까지도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재능)대로 충실히 행하는 모든 것이 예배이고, 선행하는 모든 것과 구제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예배의 한 방법입니다.

일상에서의 예배는 나의 행동과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이 될 수 있으며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는 죄 된 생활이 되든지 양단간에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가 있겠지만 성도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실로 전환되어지고 발전되어 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반면 옛 생활에서 떠나지 못하거나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낙망하여 넘어지거나 뒷걸음질치는 것은 불신앙에 속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지 결코 완벽한 신앙을 요구 하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도는 단지 완전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과 인내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노력할 뿐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화의 길을 가다가 본향인 천국에 가서야 완전을 이루게 되는데, 완전치 못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들이 반드시 지나야 할 곳 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에 의해 천국에서의 삶의 질이 결정되어 지기 때문에 힘이 들고 어려워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고 견디며 그 고통까지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광이든 비천이든 우리의 헌신된 삶과 성화되어가는 삶은 인간으로의 본분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며 어떠한 삶을 살든지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음에 따라 상급이 결정되어집니다.

 

(1) 감사의 생활

성도는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원망과 불평을 해서는 안 될 것은 우리는 아직 결과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성도에게 항상 최선의 것이 되도록 해 주시기 때문이며, 그 삶이 지상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으로 전개 되거나 그런 상황에서 끝나는 인생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그를 위한 최선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찬양의 생활

시편은 예배에 대한 구약의 시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구약의 옛 언약 안에서이든지 신약의 새 언약 안에서도 찬양은 예배에 영감을 제공해 줍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노래하고, 춤을 추고, 소리치고, 손을 들고, 손뼉을 치고 일어서고, 고개를 숙이고, 말하라고 권고하시는데, 예배하는 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표현들을 몸을 통해서 나타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칠 수 있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찬양할 때 우리의 예배에 새로운 차원의 신령함이 추가 되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찬양을 통해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며, 이러한 체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3) 전도의 생활

예배와 전도의 생활과 아무런 연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기의 의지에 의해서 행하기도 하고, 구원받은 확신에 의해 죽어가는 영혼이 불쌍한 마음이 들게 되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픈 마음이 생겨나게 되어 하게 됩니다.

또한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역사로 인해서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붙는 심정이 되어 세상에 뛰어 들어가 죽어있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예배자로서의 부름을 받은자들이 또 다른 예배자들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며, 천국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 전령으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국 잔치에 초대 받은 예배자 자신들은 먼저 초대 받은 성도나 나중에 초대 받은 성도들 모두가 다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많은 복들을 서로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예배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는데, 그 일은 먼저 부름을 받은자들이 해야 합니다.

성도는 그 일 때문에 먼저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열심을 다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또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수할 곡식들을 위해 성도들을 협력자로 삼으시는 영광을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일을 시키시는데 이렇게 선택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바로 성도이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온 여러분들입니다.

 

(4) 기도의 생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것은 영혼의 호흡과 같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류를 이룰 수가 있기 때문에 기도가 없는 성도의 삶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그것은 마치 죽음과 삶의 양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영혼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고,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죽어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구제의 생활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특별히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구제와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 25:31~46)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여, 그의 지시에 따라서 그가 행하신 것처럼 구제에 힘을 쏟는 행함이 있는데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 자라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6) 성화의 삶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반면에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너무 친숙하여 하나님 앞에서 재롱도 피울 수가 있겠지만 그로 말미암아서 버릇없는 언행이나 너무 경망스러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존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율법주의에 빠져들자는 예기가 아니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헌신이 있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도 자발적인 성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인식하고, 천국 백성다운 생활을 하고 상대방에게는 자신이 거듭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여 용서함으로서 덕을 끼치고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빛에 속한 사람들로서 당연히 세상에 빛을 비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희생 하셨던 것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소금이 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숨쉬는 순간들 까지도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데, 이런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들이 되어 하늘에는 영광이 있고(하나님께 영광) 이 땅에는 평화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공적인 예배

우리는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를 형식을 갖춘 하나의 형태로써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있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하시고 있으며(요4:24) 온 정성과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하며, 심지어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재를 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성도는 예수님의 지체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자신의 사역지인 교회로 가서 각 지체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온전하게 하나님께 상달 되어 질 수 있도록 각 지체들이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지도하며, 창조적인 예배를 위해서 연구하고 개발하여야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외형적인 면에만 치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성도들이나 어떤 지도자에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어떤 특정한 개인의 마음대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드려져야 합니다.

 

(1) 예배자가 지녀야 할 예배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임을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응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복을 받으려는 욕구보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몸을 청결히 하고 복장을 단정히 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온 가족이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찬송, 기도, 고백, 찬양, 말씀, 봉헌의 예배 순서에 열심 있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시며, 역사의 주관자시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승리를 기뻐하는 경배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후에 세상의 구원과 화해를 위한 삶에 헌신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2) 회개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드려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므로 예배자는 자신을 성결케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보혈 피로서 정결함을 입고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회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은 이미 다 죄 씻음을 받았는데 무슨 죄가 남아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데,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고 단지 그 죄들을 누르며 절제하며 예수님과 연합되어 우리들은 그 품성에 맡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 하는 것이지 결단코 스스로 의롭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있던 성도들을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데 그 이유는 무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과를 담당해 주셨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써 우리의 죄가 가려지고 씻겨 진 까닭에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 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난 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근거로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 가운데 행해져야 하는데, 성도들이 예배 이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마땅한 일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교제인데 죄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으므로 우리의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죄 값은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써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인데, 정말로 사심 없이 변명이나 죄로부터의 도피가 없이 해야 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예배에 임하기 이전에 함으로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여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지중에 지은 죄까지도 고하고 사유의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배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며, 성도간의 건전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준비된 마음과 정성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정직한 회개 기도의 하나는 “주여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는 자의 기도일 것입니다.

실상 회개의 기도는 생활에서 실천이 따르는 행동하는 기도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거듭되어지는 죄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마는 때가 너무나도 많고, 그로인해서 포기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의 기도를 함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서 모두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회개의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태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짓 없이 자백하고 다시는 그 길로 들어서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고 용서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의 신앙의 고백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이전의 생활 방식과 태도를 버리고 거듭나 새로운 성품을 받은자로서 그 성품에 맞게 살아가게 되며, 그런 상태에서 회개한 성도는 다시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3) 예물을 준비해야 한다.

회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정성껏 예물(헌금)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과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힘을 다하고 아낌이 없이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믿음의 분량과 형편에 따라 해야 하며 매주 계획성 있는 헌물을 드리는 것 또한 좋은데,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은 우리에게서 가장 좋고 귀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풍성한 은혜와 풍성한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예배는 희생과 정성이 필요하며, 결국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준비되지 않은 예배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이름을 경망되게 부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 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 할지어다”(대상16:29)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자는 당연히 예물도 가지고 가야합니다.

이것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예물입니다(대하31:10).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으로,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받으시고 심은데로 거두는 원리에 따라서 더 풍성한 복으로 내려 주십니다.

 

(4)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찬송해야 한다.

찬송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노래로 표현하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며, 또한 찬송과 기도는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찬송의 주인은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으며(사43:21), 십계명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찬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찬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찬송은 하나님 중심으로 올바른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찬양은 목적주의, 이기주의, 감상주의, 기교주의, 장식주의, 무관심주의, 몰입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우상숭배와 같은 역기능적으로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찬송은 회중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함도 아니고, 자신이 은혜를 받기 위함도 아니며, 자신의 노래 솜씨를 자랑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찬송은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시로서, 예배자의 중심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혹은 감사의 표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사와 칭찬과 그 이름을 송축하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다른 어떠한 것도 찬송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곡조가 있는 찬미의 기도여야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행적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야기라고 한다면, 찬송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행위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사랑의 고백을 진실하게 끊임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느끼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데, 그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임재의 영광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내 마음을 타고 레마로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거의가 성경말씀을 통해서나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서 내게 주어질 때가 많으므로 우리는 항상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서 삶에 적용하여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설교 말씀을 사람의 소리로 듣게 되면 복이 없고, 어떤 말씀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곧 복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복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심이 든다거나 다른 말씀과 비교를 하게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되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로 주어져 자신에게 결코 유익이 없고, 그 길은 복이 없는 길입니다.

 

(6) 하늘의 복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은 흔히 설교 말씀이 끝나면 예배가 끝이 난 것처럼 생각하는데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날 동안에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시며 그 날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일날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날로서 예배자는 그 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축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 건성으로 아멘으로 화답하고 예배를 마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사실 축도는 목사님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선포되어지는 시간으로서 주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축도 권자도 예법을 사용하지 않고 “하노라”또는“될 지어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시간은 하나님의 복이 선포되어지는 축도의 시간이란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