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이름석자 그리는데 무슨 간첩질 하겠소, 40년간 고통으로만 살았네요”
60여년을 참으로 힘들게 살아냈다. 1947년에 태어난 소년은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짓눌렸다. 국민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겨우 이름 석 자 그릴 정도이던 열네 살 때 처음으로 남의 배에 올랐다. 열아홉이 되던 67년 조기 잡이를 나갔다가 납북됐다. 남한으로 돌아와보니 청년은 '간첩'이 돼 있었다. 주홍글씨가 새겨진 그의 몸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고 가족들과는 생이별을 했다. 주위의 수군거림에 위축되어 작은 세계에 갇혀 살면서도 어렵게 가정을 꾸리고 행복을 맛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납북된 지 17년 만에 간첩의 망령은 보안대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를 다시 찾아왔다. 고문을 당했고 7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수사기관은 보안관찰법이라는 미명 아래 계속해서 그를 감시했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배타는 것밖에 없던 그는 인력시장에 나가 막노동 일거리를 얻는 것조차 힘들었다. 길거리의 고물을 줍는 것까지도 감시를 당했다.
지어내기도 힘들 것 같은 사연의 주인공은 전북 군산 개야도 출신의 납북어부 서창덕씨(63)다. 지난달 31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의 재심을 통해 서씨는 '간첩'이 아니라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렸던 그 순간에도 '무죄'라는 판사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다. 그의 귀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사가 "무죄, 무죄, 무죄"라고 세번을 외치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고통으로만 고통으로만 살았다"던 서씨는 "날개는 없지만 날아가고 싶은 기분"이라고 했다. 가족 생각이 많이 나고 '간첩 아버지를 둔 적 없다'고 아버지를 등졌던 아들을 다시 찾고 싶다고도 했다.
긴 세월을 간첩으로 낙인찍은, 고통을 가한 국가와 보안대 사람들이 밉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솔직히 (감옥에서) 나올 때는 미워하는 마음이 많았지요"라면서도 "지금 와서는 서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미워하면 뭐하겠어요"라고 말했다. 노인은 지긋지긋하고 무서워서 고향인 개야도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지만 "바다야 나무랄 수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이제 서씨의 남은 바람은 자신과 같이 간첩으로 몰린 납북 어부들이 모두 누명을 벗는 것이다. "나처럼 억울하게 당한 많은 사람들이 무죄를 받게꼬롬 해줬으면 좋겠어요. 훌훌 다 벗고."
-개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요.
"부모님도 개야도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고, 저도 거기서 태어나서 살았어요. 어머니는 배가 뒤집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우리 먹여 살리려 조업하다가 바다에서 떨어져 돌아가셨어요. 형님은 내가 어렸을 적에 군대에 갔고요. 벌어먹을 길이 없으니 그렁께 학교도 다니다 말았지. 남의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이 열네살 때부터였지요. 배를 타면 돈도 제대로 못받아요. 우리는 어리다고 남들 100원 받으면 50원도 채 못받았어요. 먹고 살려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밥 해주고 남으면 그놈들 가져다가 동생들 먹이고 그랬어요.(울음) 월급도 못받고 인자 거기서 생각해서 주면 쌀이나 보리 사서 동생들 먹여 살리고 그랬지요."
-67년 5월 연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가셨다가 납북됐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요?
"열아홉살이 되니까 그때부터 어른 품삯을 주기 시작했어요. 열아홉 되던 바로 그해가 67년이었는데 안강망 승룡호에 올랐죠. 처음으로 승룡호를 탄 날이었어요. 바로 그날 납북됐어요. 처음으로 그 배를 타자마자 납북됐어요. 5월 달이면 한창 조기철인디 몰려오는 조기떼를 잡으려고 연평도까지 갔지요. 안개가 잔뜩 끼었는데 이북 놈들이 넘어와서 우리를 강제로 끌어간 거예요. 그때는 그런 게 많았어요. 200척씩 체포해가고 그랬어요. 동해안 서해안할 것 없이."
-납북되고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124일인가? 3~4개월 있었응께. 북에 가니까 인자 집에도 못가고 죽는가보다 해서 말도 못하게 울고불고 그랬지요. 대동강이다 어디다 해서 강제로 관광시켜준거 따라다니는 것밖에 없어요. 단체행동 했으니까요."
-3개월여 만에 다시 돌아와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었습니까.
"아이고. 인천에 돌아오니까 인천경찰서에서 조사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군산으로 오니까 군산경찰서에서 또 조사를 받았지요. 싹 다 얘기했지요. 그리고 기소유예로 풀려났어요. 집에선 내 아들 살아돌아왔다고 말도 못하죠. 승룡호 선원들이 다 살아 돌아왔으니까요. 다시 남의 배 타면서 생계유지를 했어요. 연평도 가는 배는 아예 타덜 안했어요. 그런데 69년도에 갑자기 어느 날에 다시 잡아다 고문을 하더라고요. 간첩행위를 했다는 거예요. 국민학교도 못 나온 우리가 간첩행위가 뭔지나 알아야 간첩을 하지요. 한달동안 가둬놓고 고문을 했고 반공법 걸어가지고 재판 받았어요. 그래서 거기서 2~3년 집행유예 받고 나왔어요. 이때부터 조심조심 살았어요. 그런 일 또 당할까 싶어가지고. 어디 가서 말도 잘 안하고 돌아다니지도 않고 그렁께 친구가 없지요. 남들하고는 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피하고 그랬지요."
-납북됐다 풀려난 이후에 개야도에서 나와서 군산으로 오신 거군요.
"네. 나는 개야도는 쳐다 보기도 싫어서 군산 나와서 살았어요. 죽어도 다시 안 들어가요. 거기 어머님, 아버님 무덤도 있지만서도. 배타는 것도 어려워지더라고요. 이북 갔다왔다고요. 그래서 이 배 저 배 타야지 안 그러면 절대 배를 안태워줘요. 서슬이 퍼런 시절 5공때인데 까딱하면 잡아넣고, 잡아넣고 할 때인데 말도 못했지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다녀야 돈이라도 한 푼 벌어먹지. 어쩌다가 나가려고 하면 입·출항 신고해야 하지 않아요? 그렁께 경찰관이 배까지 다 와요. 그렇게 세상을 이렇게 묶어 놓고, 감금시켜놓고 산 거예요."
-그렇다면 가족들과 연락은 하셨나요.
"간첩소리 듣고는 여태까지 40여년 동안 연락이 어디가 있어요. 그래도 착실하게 사니까 누가 중신을 서줘서 처녀는 생각도 못하고 아이가 셋 딸린 여자를 소개 받았어요. 장모님도 같이 여섯 명이 살기 시작했지요. 거기서 아들 하나 낳았어요. 진석이라고. 남의 애들이고 장모까지 모시고 살았지만 참 좋았어요. 나름대로 행복했지요. 먹고 살려고 노력했고 착실하게 했지요. 나는 배타고 안식구가 철근 엮으러 다니고."
"등졌던 아들 찾아야지, 아버지소리 한번 들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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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동안 옥살이를 한 뒤 출소한 서창덕씨는 몇 번이나 세상을 등지고 싶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부인은 "살아서 억울한 누명 벗자"며 그를 다독였다. 누명을 벗은 그에게 남은 소원은 아들에게 '아버지' 소리 한번 듣는 것과 또다른 '서창덕들'의 무죄 판결이다. 군산 | 박재찬기자 |
"그렇지요. 그렇게 4년을 보냈는데 잘 살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보안대에서 나왔더라고요. 덜컥 잡아다 옴짝달싹 못하게 됐죠. 그날이 저녁 무렵이었는데 내가 배나가려고 식고미 같은 거 실어야 하니까 준비하고 있는데 덩치가 큰 사람들 서너 명이 와서 잠깐 할 말이 있다고 보자고 했어요. 작은 승용차에 태워 갑자기 끌고 가더라고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욕을 하면서 '가보면 안다'고 하더라고요. 입 다물라고 그러면서 욕하고 두들겨 패고 발길로 차고 말도 못해요. 죽으러만 가는 줄 알았지요. 그때는 보안대 사람인지도 몰랐어요. 처음엔 여관 같은 곳(진실·화해위는 서창덕씨가 여관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처음 끌려간 곳을 보안사분실로 추정했다. 당시 보안대, 안기부, 대공경찰 등 대공수사기관에서는 별도의 조사실, 이른바 '분실'을 운영했다)으로 갔어요. 잠도 안 재우고 1주일 정도를 괴롭히더라고요. 간첩질 했느냐고. 나는 '죽어도 안했다'고 했어요. 1주일 넘으니까 여기서는 안?께 가자고 하더니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도 모르고 1시간 정도 가는거 같았어요. 끌려 가서 보니까 지하실이에요. 거기서부터 한 40일인가 50일인가를 또 고문을 시작했어요. 손목, 발목을 포승 같은 것으로 묶더니만 양 기둥에 쇠막대기를 걸어놓고 매달았어요. 꼭 고깃덩어리만치로 대롱대롱 하더라니까요. 그리고 각목으로 사정없이 때렸어요. '바른대로 얘기를 하라' 이거예요. 그때 고문 당한거 말로 하기도 힘들어요. 수사관이 구둣발로 사타구니 고환 부위를 걷어차는 바람에 한 쪽 고환이 부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교도소로 들어갈 때 교도관들이 나를 떼매고 갔응께. 교도소로 넘어가기 전에 그 사람들이 소주 3~4병하고 닭튀김을 사왔어요. 먹으라고 해서 먹었고 저녁에 세수를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더니 차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어디로 가냐고 물었더니 전부 인정하고 2~3일만 고생하면 집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것만 믿고 있었죠. 난 글씨를 하나도 못?게 내 손으로 쓴 거는 없어요. 나는 범죄사실을 부인했으니까 그렇게 적었는가 했지요. 작성해온 서류 쭉 읽으면서 맞냐고 묻고 또 지장을 찍으라고 하고 그런 거였죠."
- 검찰 조사를 거쳐 그 이후엔 재판을 받으셨겠군요.
"재판소에서도 이놈들(보안대 사람들)이 저??둘러싸고 있는 거예요. 나보고 이북에 포섭되어서 간첩질 했다고 하고 초등학교 뒤에 무인 포스트를 댔다하라고 하고 서울에 있는 누구를 만났다고 하고 방송국하고 신문사 사장들 대상으로 간첩질을 했다는데 제가 뭘 압니까. 재판 전에 검사가 얘기하면 '예'라고 하라는 거예요. 그 말 안들으면 검사고, 판사고, 교도소장이고 소용없다고. 나를 토막내서 물에 빠뜨리겠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악랄해요. 재판에서 증인이고 뭐고 아무도 모르는데 아 이노무 거 난리예요. 정신이고 뭐고 몸이 제대로 설 수 조차 없응께. 2심에서는 다 아니라고 했어요. 우리집까지 수색해서 라디오가 나오니까 이북에 교신했다고 하고. 그 충격으로 노인 양반(장모)도 돌아가시고 내가 낳은 딸은 아니었지만 내 딸이나 다름없는 아이 하나도 그렇게 죽었대요. 아버지가 간첩 누명 썼으니께."
- 결국 피랍 후 간첩교육과 특수지령을 받고 귀환해 찬양고무와 국가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로 징역 10년을 받고 7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셨습니다.
"10년형 받았는데 7년 살고 나왔어요. 7년이란 세월 동안 병원생활만 한 1년 넘게 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사면받아서 석방됐거던요. 징역 살면서 가족들이 면회 오고 하는 게 부러웠어요. 편지도 오고 영치금 보내오고 하면. 이미 69년에 형제들 연락 끊겼죠. 부인은 교도소 안에서 이혼해 달라고 해서 이혼해 줬지요. 사회 나와서도 막상 오고 갈 데가 없었어요. 나와서 한 2~3년인가 뒤에 어떻게 수소문 끝에 아들을 만났더니 간첩 아버지 둔 적이 없다고 만날 필요도, 찾을 필요도 없다고 길 가에서 서서 냉정하니 뿌리치고 가버렸어요. 아버지가 아니라 간첩이랑께요 지금도. 영창 살고 나와서 죽으려고 몇번 시도하고 약을 먹어도 안 죽어지더라고요. 그런데 용케 어떻게 하다가 이분(현재 부인)을 만났어요. 한 15년 됐어요. 죽지 말고 살라고 하대요. 살아서 억울한 누명 벗고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이 사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부인도 처음에는 (내가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을) 몰랐을 것인디 경찰관들이 계속 쫓아다녀요. 그러니 무슨 일이냐고 묻죠. 그래도 그런 말은 안했어요. 밖에도 못돌아 다녔어요. 사람들이 여기서 수군, 저기서 수군 그랬어요.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봐 여태껏 집에서 숨어 살았어요. 할 수 있나요?"
- 숨은 듯 지내고 경찰들이 쫓아다닌다는 것은 보안관찰법 때문이겠군요.
"군산에 나와 살아도 만날 쳐다보고 감시하는 것 같고 그래요. 지금까지도 그래요. 형제들도 왜 (우리한테) 올 수 없었느냐면 경찰이 세상에 사돈의 팔촌까지 엿듣고 있었대요. 가족하고 아들도 피해자죠. 그랬는데도 보안관찰법은 작년에 해제됐어요. 62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좋은 데를 구경했어요. 진실·화해위 조사 때문에요. 세상에, 한옥마을 있잖아요. 거기서 점심 먹고 구경하고 남산이라고 하는데 진짜 좋긴 좋대요. 참말로. 우리나라도 그렇게 좋은 데가 있는데 세상을 언제, 어떻게 구경할 수가 있었어야지. 파출소에서 만날 와서 지키지, 무엇을 했는지 써내라고 하지, 경찰서 대공계가 부르지, 1년이면 검사가 2번씩 부르지 그렁게 나가려야 나갈 수도 없고 일 한꼬리 해보려야 인력사무소밖에 더 가겠어요. 여태까지 억울하게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요. 청춘을 누가 돌려줄 수 있겠어요. 내가 63세인데 고통으로만, 고통으로만 살았네요. 지금도 마음을 못 놓겠어요. 어느 때에 어떻게 될랑가, 내일 죽을랑가 모르니까요."
- 족쇄가 채워진 삶도 그렇지만 가족들과의 이별이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렇지요. 보고 싶고 그립고. 형제들도 그렇고 말도 못하지요."
- 억울한 간첩 누명도 벗으셨으니 아들과 형제분들에게 연락을 해보셨나요.
"이제 해야지요. 제가 간첩이 아니었다니까 얘기를 해야지요. 찾아야지요. 내가 찾아야지요. 동생이나 가족들이 나쁘다고 말 못하잖아요."
- 국가 권력에 의해 인권침해는 물론이고 말도 안되는 가혹행위를 당하고 병도 얻었어요.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셨고요. 그렇게 만든 사회나 사람들이 밉거나 화나지 않으세요.
"지금은 그런거 없어요. 솔직히 내가 혼자 고생했지요. 거기서(교도소에서) 살 적에는 나가면 어디서 만나지 않겠나 싶고 미워하는 마음이 많았지만 지금와서는 서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세상 살아야지 미워하면 뭐하겠어요. 그 사람들은 나 잡아놓고 계급이라도 올라가고 뭐라도 타 먹었겠지만 실제 어디 다리 뻗고 자겠어요? 나는 다리 뻗고 자도."
- 24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기분이 어떠셨어요.
"날개 없지만 날아가고 싶었지요. 그 소리만 들어도. 누명을 이렇게 벗고 죽어도 한이 없네요. 제일 많이 생각나는 것은 가족이었지요.(서창덕씨는 재심 판결 당시 최후진술에서 "이제 간첩이 아닝께 형제들한테 나랑 따뜻한 밥 한 끼 먹자고 하고 싶고 아들한테도 아버지 소리 한번 듣고 싶다"고 했다.)
- 그래도 이번 선생님의 경우엔 검찰(군산지청)에서 애초에 무죄를 구형하고 무죄를 판결한 판사도 신속히 재판을 처리한 것으로 압니다.
"예.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검사가 무죄를 주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처음이라고 하대요. 이런 이야기가 정말 신문 방송에 나와야 할 것인데. 판사도 내가 잘 못알아 들응께 서창덕씨 무죄, 무죄, 무죄라고 세 번을 하더라고요. 나도 어떨떨했지요.(군산지청은 서창덕씨가 제출한 재심청구서를 검토한 뒤 이례적으로 '개시결정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군산지원 역시 신속하게 재심을 진행했다. 검사는 재심 재판 논고에서 '이미 24년이 지나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로서, 한 사람의 검사로서 책임없다고 말할 수 없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주문했다. 재심 선고에서 재판부도 "본 법원의 무죄 판결로 그동안 가졌던 심적 고통에 자그마한 위로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개야도 같은데 나처럼 간첩 누명을 쓴 억울한 사람 무지하게 많아요. 그런 사람들 다 돌아가셨지만 늦게라로 제대로 해서 자식들이라도 아버지 명예훼복이라도 시켜드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나같이 억울하게 당한 동료들, 나랑 똑같이 무죄를 받게꼬롬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훌훌 다 벗고."
내 뜻과는 무관하게 세상과 가족으로부터 등을 지고 살아야 했던 40년 세월이 무죄 선고 하나로 뒤바뀌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고문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애인 및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돼 40여만원의 생활비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가끔 들어오는 막노동 일로 하루에 2만원, 3만원을 벌지만 그 일도 몸이 아파 제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젠 희망이 있어 웃을 수 있다. 아들과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도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쓴 '또다른 서창덕'들이 굴레를 벗어날 날을 기다리는 희망도 있다.
납북어부 간첩 조작사건은
군사독재시절 대표적 공안탄압…71~86년 연루된 장기수만 14명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의혹투성이 간첩 조작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대부분은 '반공'을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선거를 앞둔 시기, 민주화 운동이 불붙던 시기 등에는 이른바 간첩사건은 어김없이 언론을 대대적으로 장식했다. 간첩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밀실 형태로 운영되는 수사기관이 무자비한 대공수사를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영장 없이 불법 체포와 장기 구금, 고문 등 가혹행위가 일어났고 허위자백을 통해 간첩이 만들어졌다.
납북어부 간첩단 사건도 대표적 '간첩 조작' 유형의 하나로 꼽힌다. 먹고 살기 위해 바다로 나갔던 주민들이 북한으로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간첩 되기를 강요받은 것이다.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의 자료에 따르면 1971년에서 86년까지 납북어부 간첩사건에 연루돼 복역한 장기수는 14명에 이른다.
서창덕·정삼근씨 등이 연루된 전북 군산 개야도 사건, 강대광씨 등 6명이 포함된 역시 전북 부안군 위도 사건,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로 누명을 벗은 인천 미법도(정영씨 등) 사건 등이 있다.
정삼근씨의 경우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의해 지난해 9월 조작된 사건으로 재심권고를 받았다. 서창덕씨보다 1년 늦은 85년에 보안대에 의해 끌러갔을 뿐 사건의 전개상황은 서창덕씨와 판박이다. 아직 정씨의 사건은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강대광씨 사건'과 '미법도 사건'도 정황은 비슷하다. 60년대 후반 일단 납북됐다가 다시 풀려난 어부들은 10여년이 흘러 납북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다시 공안사건의 칼바람을 맞아야 했다. 강대광씨가 있던 위도에서는 강씨를 비롯해 동료 5명이 줄줄이 간첩사건에 엮였고, 작은 섬인 미법도에선 76년 오형근씨 사건을 시작으로 77년 안장영·안희천씨, 81년 황용운씨, 정영씨까지 차례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 이들은 각각 진실·화해위와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조작임이 밝혀졌고 강씨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서창덕은 누구인가
19살때인 67년 조기잡이 나갔다가 납북, 간첩누명
서창덕씨는 1947년 전북 군산시 개야도에서 태어났다. 찢어지는 가난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67년 5월 안강망 어선인 승룡호를 타고 연평도 부근에서 조기잡이 조업을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풀려났다. 2년 만인 69년 군산경찰서는 그를 북한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구속했지만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북한에 납치됐다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변의 기피 대상이 되고, 그 일을 계기로 개야도를 떠나 군산으로 나와 살게 된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들도 얻었다.
하지만 진짜 불행은 84년에 찾아왔다. 전주 보안대가 그를 연행해 구금하고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했다. 그는 이미 '간첩'이었다. 억울한 누명으로 7년간의 옥살이를 했고 고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힌다. 지난해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가 조작사건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지난달 31일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그를 옥죄던 간첩의 굴레는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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